역사의 숨결/역사(중국)

92. 못 다 피고 시든 꽃 - 백화제방, 백가쟁명(1956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7. 09:34

92. 못 다 피고 시든 꽃 - 백화제방, 백가쟁명(1956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0년 / 6, 25 동란 발발
  1951년 /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2년 / 발췌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선
  1953년 /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조인

 

  1957년 1차 5개년계획이 끝났을 무렵 중국의 경제조건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임금은 높아졌으며 실업자는 줄었다. 이 상황에서 모택동은 57년 2월 (인민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중국에 건설된 사회주의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의견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사회주의 사회에는 적과의 모순이 있으며 인민 내부의 자체모순이 있다는 것이고, 두 종류의 모순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민 내부의 모순을 잘못 처리하게 되면 모순이 격화되어 적대적인 모순으로 발전하여 이러한 생각은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소련, 폴란드, 헝가리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산당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가 안고있는 모순점들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민 내부에서는 단결과 비판을 통한 새로운 단결을, 과학과 문화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가이익, 집단이익, 개인이익을 아울러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7년 4월 모택동은 상해에서 (당과 지식인의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 당과 비당원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민주적인 여러 당파 없이는 안된다 ... 민주적인 여러 당파없이는 안된다 ... 민주적인 사람들을 타도하려 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에 반대하기 위해 궐기하게 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하다. 백화제방과 공산당의 기반이 잡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은 견뎌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남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식인들에게는 당에 대한 비판을 권유했다. 지식인들은 그동안 반대의견을 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권유가 있게 되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당원들이 전분기관에가 실권을 쥐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당에 가해졌으며, 대학에서는 당 위원회가 대학을 장악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민주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인 당파들이 10여만 명 규모의 정치적 조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당원 가운데서 이들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공산당의 지베권을 비판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민주 제당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교통부장 장백균 등은 공산당의 지도권 자체를 부인하고 신문의 자유 및 양당제 아래의 정당정치적인 체제로의 변화가지도 주장하고 자섰다. 많은 수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이러한 견해에 동조했다.
  공산당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비판이 제기되자 57년 6월부터 바대세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른바 '반우파 투쟁'이라는 것이다. 공산다의 지도권을 부정하거나 비판을 가한 사람들은 부르주아로 지목되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는 당의 지도권에 도전하는 부르주아우파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자는 주장의 글을 실었다. 그후 1년여에 걸쳐 우파에 대한 총공격이 행해졌다. 58년 7월까지 전당원과 공산주의 청년단을 동원하여 우파에 대한 철저한 공격이 진행되었다. 국무원 고위관직에 있던 장백균과 자융기는 그들의 대표적인 표적이었다. 여류시인 정령 등 많은 믄예인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중앙당의 고위간부, 당원작가, 예술가 등 7천여 명이 우파로 지목되어 당에서 ?겨나 노동개조에 보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당의 말만 곧이 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비판에 나섰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직성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심지어는 모택동이 우파는 전인구의 5% 정도일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 각 직장에서 무턱대고 5% 정도의 인원을 찍어 추방한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등소평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970년대 다시 복권되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 반우파투쟁 이후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아지면 중앙당이 행하는 정책을 무조건 따르게 되어 중국의 발전을 늦추는 걸림돌이 되었다. 반우파투쟁은 공산당의 경직성이 강화되는 것을 잘보여주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