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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실크로드]

지식창고지기 2010. 8. 9. 18:27

[신(新) 실크로드]


초원의 길, 바람의 민족

 


산길을 그저 달리기만 한지 3시간 반. 이곳은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동쪽 외곽 알타이 산맥의 산속이다. 산 한가운데 초원이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포고 2700m의 위치한 싼다오하이지다. 7월 초원은 한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싼다오하이지는 1년의 대부분이 눈으로 덮어 있다. 여름인 3개월 동안만 유목민은 말과 소, 양등의 가축을 끌고 나온다. 투명한 빛이 가득 넘치고 빽빽하게 들어선 풀의 녹음이 가득한 여름 동안만의 짧은 낙원이다.

 

 


싼다오하이지에는 신기한 산이 있다. 푸른 초원에 홀연히 솟은 거대한 돌산. 직경 60m 높이 15m 마치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돌 하나하나는 30cm부터 50cm의 크기. 어느 시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돌이 옮겨져 초원 한가운데 이렇게 쌓아 올려진 것이다.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풀로 덮이는 일로 없이 이 거대한 돌산은 초원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이나 되는 시간을 새겨왔다.


“이 돌산은 무엇입니까?”

“칭기즈칸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조사하러 온 사람들에게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우리들은 칭기즈칸의 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묘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들은 이야기라서 잘 모름니다만...”

 


언제,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거대한 유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큰 권력을 가진 유목민이 이 초원에 존재했던 다는 것이다. 노래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소박한 유목민족. 그들이 이 실크로드의 광대한 대지를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다. 초원을 달리며 유라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기마유목민.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여전히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다. 유목민족은 어떻게 해서 큰 세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들이 남긴 얼마 되지 않는 흔적을 찾아 실크로드 초원의 길을 간다.

 

 

 

 


중국의 서부 대개발 도중 사라진 초원의 왕국에 대한 새로운 발굴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7년 도로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황금가면이다. 수염을 기른 독특한 풍모, 기원 4C에서부터 6C에 걸쳐 실크로드의 군림한 유목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유목민은 눈부신 황금빛을 각별히 좋아했다고 한다. 가면과 함께 출토된 황동으로 된 물건들에는 어떠한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황금에 석류석이나 만호 등에 빨간 돌이 박혀 있는 것이다. 빨간돌 주위에 금으로 된 작은 알맹이가 가공되어 있는 것도 있다. 세립세공이라 불리는 세련된 가공기술이다. 빨간 돌과 금세립세공은 이 시기 고대유목민의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다.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황금 장식품은 실크로드를 따라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범위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카자흐스탄에 중앙보. 카나토타스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관이다. 빨간 돌이 박혀 있고 그 주변에 금색세립세공기법으로 꾸며져 있다. 중국 신장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황금으로 된 물건들이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으로부터 출토되는 것은 고대유목민이 광범위하게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흑해연안에서 천산 북로를 거쳐 몽골 고원에 이르는 띠 형태의 초원지대. 이것이 실크로드 초원의 길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 어디까지나 초원이 이어진다. 이곳은 알타이와 천산산맥 사이에 있는 중갈분지다. 이 초원은 야생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머리에 쭉 뻗은 갈기. 보통 말보다 조금 작은 이 야생마는 기마유목민이 타고 초원의 길을 가로질렀던 말이다. 야생마는 남획으로 40년 전에 멸종됐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19C말에 러시아의 탐험가가 데리고 돌아온 야생마의 자손을 양도받아 번식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100마리의 야생마가 다시 태어나 초원으로 돌아왔다. 초원의 길은 아주 먼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말을 키우는 어머니 대지다.

 

 


고대부터 계속되는 말과 유목민의 깊은 연관성. 그것을 지금도 전해주는 흔적이 있다. 기원전부터 유목민이 바위에 새긴 그림이다. 양, 사슴 등의 동물.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사람들. 초원의 길에는 이러한 그림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야생에 생식하고 있던 말이 가축이 되고 그 등에 인간이 타기 시작하자 유목민의 행동범위는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기마유목민의 탄생이다. 말을 자유롭게 다루고 무리를 지어 초원을 내달리는 전투 집단. 이들은 그 시대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기마유목민족은 몽골족이다.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언덕위에는 기묘한 형태를 한 둔덕이 있다. 작은 돌을 쌓아 올려 천을 감은 형태. 티벳 불교신자들이 신정한 장소로 여기는 오보라고 불리는 돌탑이다.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몽골족. 그들이 1년 동안 기다리는 오보축제가 시작됐다. 찾아온 사람들은 오보에 음식이나 돈을 바친다. 오보에 감긴 천에는 티벳 불교의 경문이 쓰여져 있다. 악운을 쫓고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 축제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말도 참배하러 온다. 천산북로는 천마의 고향. 말과 함께 살아가는 유목민의 전통은 지금도 이 땅에 숨 쉬고 있었다. 하루에 세계를 한 바퀴 돈다고 하는 전설의 준마가 그려진 깃발이 입장한다. 축제의 메인이벤트는 소년들의 말 경주. 대회장은 아연 열기에 휩싸인다. 말과 함께 살아온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말을 빨리 모는 기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은 말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인정받는다.

 

 


초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찬 초원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구름이 끊기고 밝은 햇살이 푸른 초원을 비춘다. 바인부르크 초원이다. 포고 2500m. 산맥 가운데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초원이다. 천산에서 녹은 물이 모여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바인부르크 초원은 율두수 초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율두수란 터키어로 별을 의미한다. 강과 연못이 태양에 반사돼 하늘이 무수한 별처럼 반짝인다는 것이다. 물이 풍부하고 녹음이 우거진 이 초원은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최고의 방목지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이 초원의 도읍을 둔 기마유목국가가 있었다. 그 민족은 이윽고 유라시아를 제패하고 세계제국으로 발전해간다.


태양이 질 무렵 중국의 전통 악기 가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초원의 거대한 천막이 세워진다. 각지에서 모여든 주민에게 옛날이야기나 역사이야기를 상연하는 그림자 연극이다. 얇게 무두질한 소가죽에 섬세하게 채색한 인형으로 서유기, 삼국지 등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그림자 연극 가운데는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이 초원에 도읍을 두고 있었던 유목민의 왕 이야기다.

 

 

“너희들은 누구냐? 뭐하려 왔느냐?”

“우리들은 동로마의 사절입니다. 당신들의 왕을 뵙고 싶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가 쓴 역사서에 이와 흡사한 장면이 묘사돼 있다. 6C 동로마에 사절이 멀리 이 바인부르크 초원을 찾았다. 그때 그들이 만난 사람은 터키의 군주 즉 터키계 기마유목국가 돌궐의 왕이었다. 동로마의 사절이 본 돌궐왕의 천막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천막은 다양한 색깔로 정교하게 짠 실크로 뒤덮여있다. 돌궐의 왕은 순금의자에 앉아 있고 천막 중앙에는 금으로 된 잔과 항아리가 놓여 있다. 은으로 만들어진 동물상도 많이 있다. 잔치는 아름다운 실크로 장식된 천막 안에서 하루 종일 계속됐다고 한다. 황금으로 둘러싸인 유목민 왕의 호화로운 생활이 바인부르크 초원에 되살아난다.

 

 

 

 

 


2001년 몽골의 초원에서 발견된 돌궐의 황금관이다. 발게가한의 황금관(몽고 알한가이유적 출토품). 발게가한은 8C에 돌궐을 하나로 묶은 왕이다. 당시 출토된 것은 모두 호화로운 금은으로 장식된 것들이다. 그 숫자는 2300점에 이른다. 서양의 한 고대 역사서에 기록돼 있던 이야기를 증명하는 유물들도 발굴됐다. 은으로 만들어진 사슴상. 금은으로 된 물건이 말해주는 돌궐왕의 사치스러운 생활. 그것은 돌궐이 당시 동서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돌궐은 동쪽으로 중국의 왕조와 비단과 말을 중심으로 교역을 왕성하게 했고 서쪽으로 동로마 제국과도 교역루트를 구축했다. 초원의 길은 실크로드의 메인루트였다. 그 중심에 위치하고 교역로 최대의 요충지가 바인부르크 초원이었다.

 


바인부르크 초원의 서쪽. 돌궐의 후예라고 불리는 카자흐 족의 고향 나라티다. 나라티는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카자흐 족이 살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여름 3개월을 유목생활을 하면서 보낸다. 이날 이들은 부족장 모흐타르한 씨를 선두로 여름 목장을 향했다. 길이라고 해도 경사가 급해 말이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이곳은 지금도 유목민만이 다닐 수 있다. 산 위는 구릉으로 만들어진 초원이었다. 말이 지나간 길이 몇 개나 있다. 천산은 산 그 자체가 유목민이 지나가는 길 초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7C 불경을 찾아 인도로 향한 현장 삼장은 돌궐의 비호를 받아 초원의 길을 이동했다. 대군단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한 유목전사도 모두 이 길을 지나갔다.

 

 


말을 타고 4시간. 모흐타르한 씨의 여름 목장은 경치가 좋은 언덕 위에 있다. 이곳은 선조 대대로 이어저온 유목지다. 유목민의 주거지는 이동식 천막. 손님 대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마유주다. 말에게서 짠 젖을 소가죽 자루에 넣어 저절로 발효시키면 약간 알코올이 섞인 마유주가 완성된다. 마유주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 또한 돌궐시대부터 변하지 않는 관습이라고 한다. 동로마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들의 술은 우리들의 술과 같이 파두를 짠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포도즙과 비슷한 이국풍 술이 넘쳐났다. 이 이국풍 술이라고 하는 것이 마유주였다고 한다.


초원의 아침. 여름 목장의 하루는 가축 순찰에서부터 시작된다. 모흐타르한 씨는 150마리나 되는 양의 건강상태를 슬쩍만 보고도 파악할 수가 있다. 평생을 가축과 함께 살아온 유목민족에게 예로부터 빼놓을 수 없는 능력 중 하나다. 구릉에 흩어져 있는 가축들은 말을 타고 살펴본다. 일찍이 유목민족은 말 등에 올라타 싸우고 말과 생사를 함께 해왔다. 멀리 돌궐시대부터 계속되는 人馬一體(인마일체) 전통은 지금도 살아있다. 모흐타르한 씨는 5살 무렵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다. 83세가 된 지금 이 말이 마지막 반려자라고 한다.


모흐타르한 카자흐 유목민

“내 말은 나 이외에 아무도 타지 못한다. 아들이나 딸조차도 안된다. 내가 죽으면 저 세상에서도 내 말을 타고 싶다. 그래서 이 말도 나와 함께 묻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지금도 옛날 전통방식대로 살고 있는 유목민들. 그러나 자신들의 역사를 문자로 쓰는 문화는 없었다. 카자흐 족은 노래에 담아 선조의 기억을 구전해왔다.


“모두 사이좋게 살아가는 우리들 카자흐족

 넓은 초원 우거진 맑은 물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당신

 선조들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여러 세대에 걸쳐 노래로 전해져 오는 카자흐 유목민의 노래. 유목민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초원 속에서 태어나 초원 속에서 죽어간 유목민. 그들 안에 분명히 이어온 멀고 먼 날들의 기억이다. 유라시아의 중앙에 가로놓인 있는 천산산맥. 5천 미터를 넘는 봉들이 연결돼 있다. 산 정상은 언제나 영구 빙하와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천산에 눈 녹은 물이 1년 내내 산맥 일대에 풍성한 수계를 채워준다. 물은 천산 산골짜기에 푸른 빛 가득한 산림지대와 풍요로운 초원지대로 형성한다. 흘러내리는 물을 따라 산을 내려가면 여러 개의 시냇물이 점차 모여 이윽고 큰 강으로 모습을 바꿔간다.

 

 

 

 


이리강. 천산에서 발원하고 산맥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큰 강이다. 이리강을 따라서 난 유역에는 비옥한 곡창지대가 형성돼 있다.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풍요롭기 때문에 이리강 유역은 실크로드의 곡창지대로 불려왔다. 돌궐은 이러한 풍요로운 농지를 세력권에 두고 안정된 경제력을 얻었다. 이리강을 내려가자 신기한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유목민의 형체를 본 뜬 석상이다. 수염을 기른 유목전사를 생각나게 하는 얼굴. 오른 손에 검을 지고 왼손에는 잔을 들고 있다.

 

 


이 석상에는 신기하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실크로드의 교역민족으로서 알려진 수그드인이 사용했던 글자다. 6C 말의 돌궐왕. 니리가한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니리가한은 대량의 한인을 포로로 끌고 돌아온 돌궐왕이다. 그의 왕비도 포로였던 한인 여성이었다. 그는 포로들 대부분을 돌궐의 영내에서 농사짓게 했고 이리강 유역의 토지를 넓게 개척해 나갔다.

 

 


이리강 부근 마을에는 아직도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대장간이 있다. 돌궐은 훌륭한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마을에는 72세 되는 노인이 한명 남아 있을 뿐이다. 대장장이 마마한씨가 만드는 마구에는 카자흐족의 전통적인 장식이 달려 있다. 그 장식에는 반드시 빨간 돌이 박혀 있다. 빨간 돌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고대기마유목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마마한 카자흐 유목민

“예로부터 카자흐족은 이러한 마구장식을 애용하고 있다. 아들이나 딸, 신부에게도 아름다운 마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 관습이다.”

 

 


이러한 마구 중에서도 돌궐과 관계가 깊었던 것이 등자다. 등자는 돌궐이 초원의 길을 지배한 시대의 유적에서 널리 발견되게 된다. 등자의 발을 걸고 허리를 띠움으로서 활을 쏘고 창을 던지는 것이 쉬워졌다. 돌궐은 말을 고성능 전투병기로 완성시킨 것이다. 돌궐의 판도는 천산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중국동북지방부터 서쪽으로 카스피해 이르기까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전체로 펼쳐졌다. 다른 부족 다른 민족을 삼키고 유라시아의 처음으로 군림한 세계제국이었다. 그러나 8C 돌궐은 멸망한다. 그 후에도 여러 개 유목국가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져 갔다.


이리강의 서쪽. 카자흐스탄과 경계의 위치한 찹찰. 시보족(錫伯族)의 축제 서천절이 한창이다. 시보족은 유목민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민족이다. 지금으로부터 240년 전 시보족은 청황제의 명을 받아 유목민을 막기 위해 중국동북지방에서 이 땅으로 옮겨왔다. 서천절은 동북지방의 고향 신양을 출발한 날에 모여 선조를 기리는 제전이다. 이날은 같은 시보족 사람들이 멀리 신양에서 온다. 서천절은 240년 전에 떨어진 사람들이 1년 한 번 다시 만나는 축제다. 고향에서 강제로 이주당해 변경에서 살아야만 했던 그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노래가 있다.


“명령을 받은 시보족은 친족과 헤어지는 슬픔 때문에

 철과 같은 마음조차도 부서지는 것 같았다

 가지 않는다고 해서 국가가 용서할까?

 고향이 그립다고 울어도 가지 않고는 어쩔 수 없다”

 


천황제의 명령으로 시보족 병사 천명과 그 가족은 친척 친구와 헤어져 고향 신양을 출발해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해갔다. 1년 9개월.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여행이었다. 시보족이 체험한 고난의 이동을 기록한 그림이다. 아내와 어린아이를 안고 가축을 끌며 극한의 동굴에서 겨울을 지내고 충분한 식량도 없이 사막을 넘어 갔던 길고 힘든 여정. 시보족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계절은 한 겨울이었다. 식량이 바닥나 굶주림에 직면한 시보족을 구원해 준 것은 이리강이었다. 사람들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서 목숨을 부지했다. 지금도 시보족 사람들은 이리강의 혜택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한 시보족에게 전해지는 이리강 노래.


“이리강 도도히 너울거리며 흘러간다

 이리강 도도히 너울거리며 흘러간다

 이리강 내 마음의 고향”

 


천산에서 발원하고 유목민에게 풍요로운 식량을 베풀어 온 이리강을 놓고 여러 기마유목국가가 패권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그 유목민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시보족 또한 이리강을 기반으로 살았다.

 


석양이 질 무렵 이리강의 다리 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결혼식 기념촬영회에 온 위구르족 신부. 카자흐족, 몽골족 그리고 시보족. 그들은 모두 기마유목민의 먼 후예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이리강에 석양을 보러 오고 있다. 천산북로는 이리강을 건너 로마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 석양이 지는 저편에는 옆 나라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이 가로 놓여 있다. 초원의 길을 자유롭게 오갔던 유목민족의 먼 기억. 그것이 사람들을 석양에 빠져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국경에도 민족에도 구속받지 않고 초원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대지를 달렸던 기마유목민. 유라시아의 패권을 지고 수세기에 걸쳐 빛나는 한 시대를 구축하면서 스스로는 그 흔적을 역사에 남기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 아직까지 신비에 싸인 바람의 민족이다. 바람의 민족의 희미한 발자취는 지금도 초원의 길을 따라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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