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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실크로드 기행

지식창고지기 2010. 8. 9. 18:26

신(新)실크로드 기행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4천 미터 급에 높은 산봉우리가 연결되는 천산산맥. 실크로드의 등뼈라고 불린다. 그 남쪽 산기슭에는 건조한 타클라마칸의 대지가 펼쳐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아직 불교가 초창기였을 무렵 한 명의 승려가 이 산맥의 산기슭을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굴욕으로 가득한 삶, 긴 유폐생활, 그는 삼백권의 불경을 중국에 전했다. 그것은 현장 삼장이라는 승려가 인도의 경전을 가지러가는 것보다 200년 전의 일이다. 중국에서 불교가 이제 막 소개될 무렵이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불교의 진수를 전하는 이 8글자는 그가 만들어낸 말이다. 지옥(地獄)과 같이 괴로움 가득한 반생을 거쳐 극락(極樂)이라는 말을 불경에서 처음으로 사용이도 바로 그였다. 그의 이름은 쿠마라치바. 이 이야기는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간 한 위대한 승려의 이야기다.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 펼쳐지는 거대한 분지 타클라마칸 사막. 그 북쪽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천산산맥이 이어진다. 천산남로는 천산과 타클라마칸 사이에 푸른 오아시스를 동서로 관통하는 길이다. 일찍이 이 길을 따라 많은 불교왕국이 이어져 있다. 쿠마라지바도 그중 한 왕국에서 태어났다. 사막 저편으로 펼쳐진 녹색마을. 이곳이 쿠마라지바가 태어나서 자란 쿠차(칭하이 성)다. 천산남로 최대의 오아시스로 그가 살았던 4세기에는 동서교역의 중계지로 함께 번영했다. 쿠차의 오아시스에는 천산산맥에서 발원하는 강이 몇 자락이나 흐르고 있다. 강물은 수로를 따라 사방으로 나뉘어 푸른 농지를 만든다. 보리밭, 살구 과수원. 예로부터 타클라마칸을 오가는 여행객들의 목을 축여주고 허기진 배를 채워준 풍요로운 땅이다. 오아시스 중심부에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마을풍경이 펼쳐진다.

 

 


인구는 약40만. 이전에는 불교가 번영했지만 지금은 인구의 87%가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인이다. 매주 금요일이 되면 이곳 쿠차에선 장이 서고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쿠차마을에는 예나 지금이나 파란 문이 많다. 집집마다 창이나 문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파란색은 행복을 가져온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파란 눈 하얀 피부의 코카서스 즉 인도 유럽종의 백인계 얼굴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쿠차에는 고대 쿠차국이라는 왕국이 번영했다. 백인계 쿠차국의 사람들은 일찍이 신생민족이라고 불렸다.

 

 

 


쿠차의 오아시스와 멀리 눈 덮인 천산산맥과의 사이에 밤갈색 선들이 있다. 위구르어로 차르 타그 불모의 산이라고 불리는 산들이다. 너무나 더워서 식물이 자라지 않는 불모의 산. 이곳에는 고대의 번영한 쿠차왕국의 중요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스바시 고성, 남북 2킬로미터에 걸친 불교사원 터다. 스바시 고성 중심에 서 있는 불탑. 사각단을 여러 개 벌린 간다라의 흐름을 따른 양식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의 고대 쿠차왕국은 백 개의 가람이 설 정도로 불교가 번성했다고 <대당서역기1)>에는 쓰여져 있다.


스바시 고성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길. 불모의 산 깊은 곳으로 하나의 길이 이어져 있다. 거대 실크로드다. 1000년 전 천산남로는 이 골짜기를 통과했다. 길은 이윽고 깊은 산주름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 골짜기를 지나 이어진 실크로드를 따라 가면 신비한 석굴이 숨겨져 있다. 숨겨진 타클라마칸의 보물이라 불리는 키질석굴이 바로 그곳이다. 쿠차에서 서쪽으로 약 70km. 골짜기가 크게 벌어져 있고 나무들이 무성한 조용한 공간이 펼쳐진다. 실크로드를 서쪽으로 향하는 여행객들이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작은 오아시스다. 이곳이 타클라마칸 최대의 불교유적 키질석굴이다.

 

 

 


동서 2km에 걸쳐 연결되는 절벽에 구멍이 무수하게 뚫려 석굴이 만들어져 있다. 그 숫자는 전부해서 339개. 구멍의 높이는 큰 것이 27m에 이른다. 키질석굴이 가장 융성했던 4세기 쿠차왕국에는 약 만 명의 승려가 있었다. 승려들은 모두 3개월의 한 번씩 가람이나 승방을 바꾸는 것이 규칙이었다. 키질석굴에 기거한 승려들의 계율은 생활 구석구석을 규정짓는 엄격한 것이었다. 339개의 석굴 중 약 반수가 승려들이 생활한 승방 그리고 나머지 반수의 굴은 벽화가 그려진 예배의 장이었다.

 

 

 

 


제17굴. 불법을 듣는 천인들의 모습이다. 검게 그려진 인물은 빨간 안료가 변색된 것이다. 키질석굴은 중국의 남아 있는 석굴사원 중에서 가장 오래됐고 최근 연구에 따르면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벽화는 그리스 로마의 흐름을 이어받은 자연스럽고 세련된 붓놀림을 특징으로 하며 돈황이나 온강 등 중국의 불교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벽화 속 인물은 쿠차왕국에 실존했던 석굴을 기부한 사람이다. 넓은 옷깃, 길이가 긴 코트를 입고 있다. 허리에 검을 차고 가는 허리 띠를 두르고 있다. 페르시아계 수그드 민족의 영향을 받은 복장이다. 벽화 속에는 페르시아나 인도 그리고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교역을 했던 부유한 상인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쿠차왕국은 동서교역을 중계하는 것으로 번영했다.

 

 

 


4세기 이 작지만 풍요로운 실크로드의 왕국의 한 명의 왕자가 태어났다. 그는 키질 석굴에서 공부한 것으로 최근연구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는 훗날 승려가 되어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방대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동쪽 땅으로 전파한다. 그의 이름은 쿠마라지바. 어머니는 백인계 쿠차왕국왕녀. 아버지는 인도에서 온 망명 귀족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사원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들 9살 때 실크로드 서쪽 간다라와 카슈가르로 유학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그는 각국의 왕자들과 함께 최첨단의 대승불교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한국인이 지금도 자주 쓰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유명한 8글자도 쿠마라지바가 만들어낸 것이다. 반야경, 법화경, 아미타경, 유마경. 쿠마라지바가 중국어로 번역한 경전의 수는 모두 약 300권. 이러한 경전은 천태종이나 정토종, 정토진종, 일연종, 선종 등 중국이나 일본, 한국 불교의 기본 경전이 됐다.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실제로 읽히고 있는 중요한 경전의 대부분은 쿠마라지바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쿠마라지바의 사람 됨됨이를 전하는 책으로는 <고승전>이 있다. 그 한 구절에 쿠마라지바가 스스로 이야기 한 말이 남겨져 있다. “나는 우매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경에 번역을 했다. 그러나 예언한다. 내가 번역한 것 중 틀린 것은 없다. 그 증거로 나의 사후 화장된 후에도 분명히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

 

 

 

 

 

 


그가 자란 키질석굴. 이곳은 푸른 석굴이라고도 불린다. 벽에는 파란 안료를 넉넉히 사용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파란색을 사용한 석굴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깊은 빛을 감추고 있는 키질의 파랑. 푸른 안료의 원료는 라피스라즐리. 고대에는 아프가니스탄 밖에 나지 않았던 귀중한 보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천 년 전 이집트에 전해져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에도 박히는 등 역대 파라오에게 사랑받았던 보석이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에는 실크로드는 통해서 운반돼 청금석이라고 불렸다.


예로부터 회화에서 푸른색을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9세기 프랑스인인 기메가 인공울트라 마린을 만들기까지 변색되지 않는 파란천연 안료는 라피스라즐리 밖에 없었다. 라피스라즐리로 만든 안료는 금은과 마찬가지로 고가로 취급됐다. 파랑, 불교에서는 부처의 세계에 평안을 나타내는 색으로서 중요시 여겨졌다. 이들은 위험천만한 여행으로부터의 무사귀환, 상업의 성공 그리고 매일 매일의 행복을 빌며 귀중한 파란 라피스라즐리를 사원의 벽면에 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풍요로운 왕국은 언제나 전쟁의 위협 속에 있었다.

 

 


쿠차왕국이 기원전 2세기 처음으로 한서에 등장했을 때 이미 북방의 기마민족 흉노의 세력 하에 있었다. 4세기에 접어들자 중국 한의 무제가 서역으로 군대를 보내오면서 이곳은 전쟁터가 된다. 실크로드 천산남로 중간에 위치한 쿠차의 오아시스는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수수, 보리, 벼, 포도, 복숭아, 살구 등에 각종 곡식과 과일의 재배가 이루어졌다. 쿠차왕국은 사막을 건너는 상인들에게 통행허가를 해주고 교역을 보호하는 대신 관세를 받아 번창했다. 기원전 1세기 한(漢)나라 시대에 이미 인구 8만 명이 넘는 왕국으로 번창한 쿠차국. 그러나 항상 북방 기마민족과 중국 한으로부터 침략을 받아왔다. 쿠차왕국 사람들의 생활은 끊임없이 위험에 둘러싸여 있었다.

 

 


서력 383년. 35세가 되었던 쿠마라지바는 이미 서역 제일의 명승으로서 실크로드의 그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윽고 국가를 뒤흔드는 사태가 발발한다. 동쪽 중국으로부터 7만 명의 대군대가 쿠차왕국을 침략한 것이다. 쿠마라지바가 살았던 4세기는 기마민족과 중국 모두 분열해 서로 전란을 펼치는 5호 16국 시대였다. 정치가 안정되지 않은 가운데 전진이라는 왕조가 실크로드의 교역권리를 얻고자 서쪽으로 군을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쿠차왕국으로 공격해 왔다. 1년 후 결국 쿠차왕국의 도읍은 불탔고 쿠마라지바의 숙부인 국왕은 포위되어 죽임을 당했다. 왕자였던 쿠마라지바도 적의 장군 여광에게 잡혔다.2)

 

 

 

 


그를 잡은 적의 장군 여광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줬다. 난폭하게 구는 소나 말에 그를 태워 떨어뜨리고는 즐거워하기도 했고 잡혀간 쿠차왕의 딸을 강제로 부인으로 삼게 하려고도 했다. 결국 여광은 그와 한 여자를 함께 밀실로 집어넣어 유혹하게 했다. 승려에게 있어서 이성과 관계를 갖는 것은 당시 중죄였다. 키질 천불동 석굴에는 그 상황과 유사한 불교벽화가 한 점 그려져 있다. 강마성도도. 마왕과 그 딸의 유혹을 받은 석가가 그것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마왕은 딸을 도발적인 모습으로 춤추게 하고 석가를 폭력으로 위협하면서 부인으로 삼도록 다그친다. 그러나 석가는 마왕이 시키는 대로 해서 살아남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저항하며 유혹을 물리쳤다. 마왕에게 협박당했을 때 석가는 35세. 그리고 당시 쿠마라지바의 나이도 35세였다. 그러나 쿠마라지바에게는 죽어서 계율을 지킨다는 선택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여광은 아내로 삼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고 하며 협박했다. 그는 계속해서 협박을 거부했지만 결국 계율을 어기고 말았다. 당시 계율을 지키지 않은 자는 파계승의 오명이 씌워진다. 승려이되 승려가 아닌 것이다. 그것이 훗날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크로드를 제패하는 자는 중국을 제패한다. 이미 이름 높은 중이었던 쿠마라지바를 잡은 장군 여광은 그를 뜻대로 함으로써 서역의 국가에 대한 그 위세를 과시했다. 승리를 한 전진의 군대는 쿠차에서 빼앗은 막대한 금은 재화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짐을 쌓은 낙타는 2만 마리. 천산남로를 가득 채웠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쿠차 농민들에게는 먼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음악이 있다. 묵함. 이른바 위대한 곡이라고 불리는 민족음악이다. 약 300곡이라고 일컬어지는 묵함. 이민족에게 지배당했던 시대를 생각나게 하는 슬픈 곡조가 많이 남아 있다.

 

 

 

 


이후 쿠차왕국은 점령군에 의해 지배되어 막대한 곡물을 계속해서 요구당하는 비극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쿠마라지바는 포로가 되어 동쪽으로 연행됐다. 이후 고향 쿠차는 끊임없이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된 것이다. 전쟁으로 유린되는 고통 속에서도 쿠차왕국 사람들은 석굴을 계속해서 만들었다. 이 당시 쿠차왕국에는 새로운 석굴양식이 탄생한다. 석굴 가장 깊은 곳 어두운 방에 석가의 열반상을 두는 양식이다. 인도에서 열반은 윤회를 탈피한 이상의 경지로써 여겨져 밝게 표현돼 있다. 그러나 쿠차왕국에서는 석가가 없는 구원이 없는 시대의 상징이 됐다. 누워있는 석가 위에서 그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사천왕이다.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동아시아에서 사천왕들이 국가를 수호하고 사찰을 지킨다는 사상은 이 키질석굴에서 시작됐다고 여겨지고 있다.

 


쿠차왕국에서는 또한 지옥을 그린 벽화가 빈번하게 그려진다. 지옥가마도의 모습. 도깨비가 가마를 지키고 있다. 당시 쿠차왕국에는 지금은 석가도 죽고 불법도 사라진 시대라는 말법사상이 퍼졌고 실크로드를 따라 이 사상은 동아시아의 널리 영향을 미쳤다. 여광에게 잡혀서 파계승이 된 쿠마라지바에게는 전리품으로써의 막대한 금은재화와 함께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연행됐다. 그는 목적지였던 장안에서 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도중에 있는 한 마을에 머물러 긴 연금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쿠차-양주-장안). 그곳에서는 그는 장군의 말 상대를 하거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점을 봐주거나 하는 무이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17년이나 되는 세월. 그러나 그동안 그는 중국어를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401년. 다시 정변이 일어나 50세를 넘었던 쿠마라지바는 장안의 도읍으로 끌려갔다. 문헌에 따라 51세 혹은 57세라고도 한다. 그는 새로운 왕조 후진의 황제에 의해 불경번역을 명령받는다. 황제는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문화로 국가통치의 이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17년간의 유폐생활에서 깊어진 사상 그리고 높아진 어학 재능. 쿠마라지바는 산스크리트의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예전까지 이미 중국어로 번역돼 있는 경전에는 틀린 것이 많았다.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그 리듬이나 문체가 손실된다는 점에 특히 어려움이 있다. 번역은 일단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비슷하다. 단지 맛을 잃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구역질까지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기도 한다라고 그는 그 어려움을 표현했다.


쿠마라지바는 그전까지 중국인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불교의 핵심을 겨우 8글자로 응축시켜 표현했다. 색이란 형태에 있는 것. 공이란 실체가 없고 반드시 변해가는 것.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곧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 고통이나 혼란에 빠지지 말라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전란에 쫓기거나 현실 생활의 모순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불안감을 해방시켜주는 마음의 자유선언이었다. 최근 산스크리트어 경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경전에는 원전에 없는 표현이 많이 덧붙여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쿠마라지바는 아미타경에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상향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 즉 극락(極樂)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쿠마라지바는 극락이라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상상의 동물을 추가해 설명하고 있다.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아미타경에 묘사된 모든 생명의 새. 즉 공명조다. 공명조란 실크로드에 전해지는 전설의 새 이름이다. 공명조는 머리가 두 개, 몸이 하나인 새. 한편은 낮에 일어나고 다른 한편은 밤에 일어나 언제나 서로 시기하고 으르렁대는 동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공명조(共命鳥)는 결국 한편이 독을 먹여 같이 죽고 만다. 이 전설은 선과 악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인간 마음의 모순과 갈등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새라도 극락정토에서는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극락이란 선도 악도 용서되는 영원한 도시인 것이다. 파계승 쿠마라지바는 공명조 전설에서 승려이되 승려가 아닌 자신의 모습을 엿보았는지도 모른다. 쿠마라지바는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을 냄새나는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으로 묘사했다. 냄새나고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다.


쿠마라지바는 만년에 생각해낸 하나의 사상을 경전에 숨겨두었다. 번뇌시도장(煩惱是道場). 번뇌 안에야 말로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다. 인도의 불교에서는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이 이상의 경지라고 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는 번뇌 그 자체를 긍정하고 악인조차 구원받을 것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쿠마라지바가 장안에서 죽은 것은 69세. 413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의 상당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행사하고 있다. 쿠마라지바가 자신에 가혹한 인생 체험으로부터 만들어낸 사상을 덧붙이면서 번역해낸 경전은 모두 300여 권. 그의 사상은 사찰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세속의 생활 속에서 구원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였다.

 

 


키질 석굴의 가장 깊은 곳. 불몰산 골짜기에 물이 솟아나오는 절벽이 있다. 천산산맥에서 발원하는 지하수가 이곳으로 솟아나서 흐르고 있다. 이곳은 고대 쿠차왕국 말로 ‘유르파스케’ 즉 신성한 샘이라고 불렸다. 쿠마라지바도 젊었을 때 이곳에서 명상이나 수행에 힘썼다고 한다. 쿠차왕국 시절에는 이곳에서 솟아난 샘물들이 산기슭기의 오아시스를 윤택하게 하고 멀리 황하로 흘러갔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 강을 흐르듯이 실크로드에서 탄생된 불교사상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쿠차왕국이 있었던 천산남로의 도읍 쿠차는 14세기 이후 이슬람 왕조가 정복한다. 주민은 모두 이슬람교로 개종해 지금은 아무도 불교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쿠차 사람들은 지금도 문이나 창문색이 바랄 때마다 파란색을 다시 바른다. 파랑은 이 토지의 말로 ‘큐크’라고 한다. 큐크라는 말은 또 다른 의미로 하늘을 뜻하기도 한다. 쿠마라지바 고향 쿠차에는 오래도록 전해져 오는 격언들이 있다. 푸른 하늘 그 자체가 신이다. 푸르름이 있으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하늘을 나는 푸른 새는 평화와 풍작을 가져온다. 실크로드 천산남로. 불모의 산 골짜기 안쪽 깊이 숨어 있는 키질 석굴. 옛사람들이 전란 속에서 새로운 사상과 미술을 탄생시키면서 구축해 나간 사원의 흔적이다. 석굴 안에 라피스라즐리로 그려진 푸른 하늘 세계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다. 고대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이 땅에 전해져 라피스라즐리 보석처럼 그 빛을 바랬다. 실크로드. 그것은 사상의 길. 사람들의 바람이나 생각을 담아서 풍요로움을 더해간 불교가 이 길을 통해서 멀리 동방으로 전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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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당나라 때 승려인 현장(玄奘)이 서역(西域)으로 가서 법경을 구한 행적을 기록한 기행문.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으며 현장이 기술하고 그의 제자인 변기(辯機)가 편찬했다. 138개 국가, 지구(地區), 도시국가의 지리, 산천, 성읍, 교통, 풍습, 산물, 정치문화 및 특히 당시의 불교 상황, 불교 고적, 역사 전설, 인물 전기 등에 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인도·네팔·파키스탄·방글라데시·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대역사·지리·종교·문화 및 중국과 서역의 교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책에 근거하여 궁터와 옛 성터, 녹야원(鹿野苑:석가가 최초로 설법한 장소), 고찰, 아잔타 석굴, 날란다 유적에 대한 탐사와 발굴을 하여 충분한 증거자료를 얻었다. 프랑스어와 영어의 2가지 번역본이 있고 청대(淸代) 정겸(丁謙)은 〈대당서역기고증 大唐西域記考證〉을 지었다.

 

2) <고승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