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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6] 과학기술인력 양성에 국가미래를 걸다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38

[발굴秘史 미래전략가 박정희 .6] 과학기술인력 양성에 국가미래를 걸다
 "기술 앞선 민족이 세계 이끌어"…경제 개발 앞서 인재양성에 주력
 타임지 '亞 인물 20걸' 선정
 한국 근대화 선봉에 서다
 60년대 1인당 GNP 82달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무역규모 比·태국에 못미쳐
6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공장 시찰을 했다. 사진은 수천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는 마산의 섬유공장에 들러 작업공정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6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공장 시찰을 했다. 사진은 수천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만들고 있는 마산의 섬유공장에 들러 작업공정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이는 1955년 10월8일 UN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이 한 말이다. 한국을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메논이 일주일 동안 방문한 뒤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그는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60년 당시 영국 외무부가 작성한 분석 자료에도 한국의 실정이 비슷하게 기술돼 있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분단국으로 별다른 가망이 없는 곳이다. 국민성은 게으르고 문맹률은 높으며 정치적 미숙에다 경제적 빈곤이 겹친 나라, 게다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군사적 불안 등 온갖 부정적 요인을 안고 있어서 가망이 없다.'

실제로 60년대 말 대한민국은 1인당 GNP 82달러의 세계 최빈국이었다. 외환보유고는 2천300만달러에 불과했다. 무역규모는 대만, 필리핀에도 훨씬 못 미쳤다. 64년 한국이 수출 1억달러를 달성했을 때 이미 일본은 50억달러를 넘어서고 있었고, 태국은 7억3천600만달러, 필리핀은 4억5천800만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도 한국의 다섯 배 정도의 수출을 하고 있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점이었다.

특히 북한은 남한을 훨씬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북한은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도 6·25로 피폐할 대로 피폐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초 이미 수출 2억달러를 달성한 상태였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경제개발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실시한 것은 박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인 62년부터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경제개발에 주력했다. 경제개발을 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박정희는 인재개발에 눈을 뜨게 된다. 인재가 없으면 경제개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관료보다는 기술관료들과 손을 잡고 한국 근대화에 나섰다. 기술인재가 크게 모자란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와 관련된 정책을 적극 펼쳤다.

이는 허먼 칸이 61년 허드슨 연구소설립하면서 상아탑 교육에서 과학기술인력과 기술자 양성을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허먼 칸은 미국의 국방연구원인 랜드코퍼레이션(RAND)의 동료들과 함께 허드슨연구소를 61년에 설립하면서 창립대회에서 △국가안보 △외교 △인재육성(교육개혁, 취업, 사회복지) △경제 및 재경 △글로벌식량위기 △정치이슈와 국가경쟁력강화 등 6가지 목표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인문 중심의 미국 교육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허먼 칸은 "미국의 인재양성이 너무나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인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미래사회변화는 과학기술이 이끌어 나갈 터인데, 미국은 준비가 안됐다"면서 "교육의 변화를 관철하기 위해 허드슨연구소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허먼 칸은 미래예측에서 기본이 된 시나리오기법을 만든 주인공이며 다양한 미래기술예측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미래 기술인력양성을 주장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허먼 칸은 생전에 다양한 연설 속에서 늘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게 기술인력양성이었고, 과학기술발전을 위해 교육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등과의 만남을 암시하는 아시아의 부상에 관한 미래예측, '세계경제발전 1979년 이후'라는 저서(1970년 저술 시작~1978년 간행)에서도 미국이 과학기술교육으로 선회했고, 아시아도 이제는 과학기술교육, 기술인재양성 없이는 국가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친 아시아파'로 한국·일본·싱가포르 수뇌들과 긴밀히 교우한 허먼 칸이 아시아의 수뇌들에게 기술인재양성을
경기도 부천시 송내에 위치한 한국 폴리텍II 인천 기능대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건학 이념을 새긴 비문.2
경기도 부천시 송내에 위치한 한국 폴리텍II 인천 기능대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건학 이념을 새긴 비문.
타임지가 1998년 8월16일자에 기재한 '20세기 아시아 인물 20걸'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박정희 대통령'이 포함됐다. 일본은 6명, 중국 3명, 인도 3명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3
타임지가 1998년 8월16일자에 기재한 '20세기 아시아 인물 20걸'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박정희 대통령'이 포함됐다. 일본은 6명, 중국 3명, 인도 3명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위한 교육개혁을 끊임없이 조언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확실한 것은 박 대통령은 경제개발 성공에서 인재교육 없이 공업국가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신규 노동력 즉 기술교육으로 훈련된 노동력을 확보해 60, 70년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맏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공대에 진학시켰다는 것은 그가 미래사회를 내다보고 과학·기술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시사점이다.

경기도 부천시 송내에 위치한 한국 폴리텍II 인천 기능대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건학 이념을 새긴 비문에는 임기내내 그가 과학기술인력 육성에 왜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는지 잘 드러난다.



"기술이 앞선 민족일수록 남보다 일찍이 발전과 번영을 이룩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민족이나 국가가 남보다 앞서 세계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다."

(1971.4.8 대통령 박정희)

한국을 선진국으로 끌고 가야 하는데 자원도, 넓은 땅도 없는 이 땅에서 인재 양성, 그 중에서도 기술 인력육성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문(文)을 숭상하고 기술을 천시해온 500년 조선전통이 엄존한 60년대와 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보여준 탁견(卓見)이 아닌가.

이와 관련해 하버드 대학의 대니 로드릭 교수팀은 '박정희의 토지개혁+높은 교육수준(공업기술인력 강화)+미국주도의 시장경제편입'이라는 3대 요소의 결합으로, 경제성장 잠재력이 높아졌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기술인력 양성 교육정책은 박 대통령이 추구하던 고도성장 산업화와 맞물리면서 대학을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공장'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산업화에 인력을 양성하고 기능·기술직을 중요시한 박정희의 인재교육은 결국 경제발전의 기본저력이 됐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미 랜드(RAND) 연구소 오버홀트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는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많은 국가들이 탄생했다. 이들 신생 개도국은 자유·비동맹·공산진영을 막론하고, 경제개발을 국정의 최고 목표로 내걸었으나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뿐"이라며 한국의 놀라운 고도성장을 높게 평가했던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박 대통령이 사망하기 바로 직전인 79년 10월 방한 기간 중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의 관심과 정력언론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합니다. 또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79년 10월19일, 청와대 환영만찬에서)

))과학기술교육정책 주요일지

61년 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62년 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62년 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62년 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63년 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66년 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66년 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67년 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67년 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68년 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69년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70년 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

(의무교육 9년으로 연장, 교육제신설)

77년 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특별학급설치

2010-11-01 07:43:5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