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전설 야담

벌거벗은 스님

지식창고지기 2010. 12. 6. 13:33

벌거벗은 스님

<경주·천엄사>

『내가 오길 잘했지. 만약 그 나이 어린 사미승이 왔더라면 이 눈 속에 었떻게 했을까?』

한껏 허리를 굽히고 바삐 걷던 노스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거센 눈보라가 스님의 얼굴을 때렸다.

쩔렁거리던 주장자소리도 멈추고 사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다만 어둠 속에 눈발이 희끗희끗 날릴 뿐. 더욱이 황룡사로 가는 길은 아직 초저녁인데도 인적이 끊어졌다. 군데군데 인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것은 신라 애장왕이 열세 살 어린 나이에즉위하자 숙부 언승이 섭정의 난을 일으킨 뒤 인심이 흉흉하고 밤이면 도적떼들이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노스님은 「삼랑사 주지 스님이 자고 떠나라고 잡을 때 그곳에서 그냥 묵을 걸 잘못했다」고 후회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님의 발길에 뭔가 뭉클한 느낌으로 채이는 게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스님이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양이는 「야옹 야옹」음산한 소리로 울어댔다. 스님이 일어서자 고양이가 스님 뒤를 따라왔다. 스님은 주장자로 고양이를 쫓았으나 고양이는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님은 고양이가 따라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거센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며 길이 험해지자 스님은 입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발목을 넘는 눈길을 걸었다. 고양이를 품속에 안은 채.

천엄사에 가까이 왔을 때였다. 바람결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품에 안은 고양이 소린가 싶어 귀를 기울였으나 아기 울음소리임에 틀림없었다.

『괴이한 일이로구나. 이 눈 속에 아기 울음소리라니?』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인가라곤 보이질 않았따. 노스님은 주장자에 에 몸을 의지하고 서서 다시 귀를 기울였으나 찬바람이 귓전을 때를 뿐이었다.

눈발 속에 천엄사 모습이 보였다. 스님이 막 천엄사 담을 끼고 돌아 대문 앞으로 지나려는데 절 처마 밑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탈진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노스님은 고양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다가갔다.

금방 해산을 했는지 흰눈을 붉게 물들인 채 실신한 여인이 아기의 탯줄을 쥐고 있었다. 노스님은 황급하게 아기의 탯줄을 끊고는 대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거센 바람소리와 눈보라 때문인지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당황한 스님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며 꽝꽝 난폭스럽게 대문을 두들겼다 .그러던 스님은 갑자기 돌아서 아기를 안았다. 여인의 엷은 치마에 감긴 아이의 살은 얼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스님은 아기의 언 몸을 문지르며 염불을 외우고 때때로 대문을 두들겼다. 스님은 다시 여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보시오. 정신을 차려요.』

스님은 허리를 굽혀 여인을 흔들었으나 말은커녕 신음소리도 없었다. 발가벗은 여인에게선 피비린내가 물씬 났다.

스님은 얼어붙은 여인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출가 사문이란 것도 잊은 채 오직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염불을 하면서 여인의 전신을 주물렀다.

노승은 또 여인의 코와 이마, 그리고 뺨을 문지르며 자신의 입김을 계속 불어 넣었다.

아기는 품속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스님은 두루마기를 벗어 아기를 감싸 여인의 옆에 눕혔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절에서 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은 스님은 피로를 느꼈다. 여인의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스님은 더 빨리 염불을 외웠다. 염불이 빨라지자 손놀림도 빨라졌다. 팔목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스님은 손을 눈 속에 묻었다 꺼냈다. 한결 시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하품을 했다. 나른하게 졸음이 왔다. 순간 노승은 자기 본 위치로 돌아왔다. 여인의 풍만한 가슴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거지 여인이었다. 악취가 노승의 코를 찔렀다. 노승은 여인을 슬그머니 눈 위에 눕혀 놓고 일어서려 했다.

순간 스님의 머리에 한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스님은 거침없이 바지와 저고리를 벗어 여인에게 입혔다.

노스님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벌거벗은 스님은 주장자를 짚고 일어서려다 다시 한번 여인을 내려다 봤다. 체내에 온기가 도는지 여인은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며 신음소리를 냈다. 스님은 다시 여인의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여인의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스님은 여인의 뺨을 세게 때렸다. 비명과 함께 여인이 깨어났다. 그녀는 환히 웃고 있는 스님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보살, 이제 정신이 드나?』

『스님께서 저를… 스님 아기는 어떻게….』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아기는 잘 자고 있네. 헌데 어인 일로 이 산골까지….』

『아기 낳을 곳이 없어 천엄사를 찾아오다 그만 스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하옵니다.』

『죄송할 것 없네. 살아났으니 다행이야. 자 그럼 난 가 봐야겠네. 아이 추워.』

『스님, 옷을 입고 가셔야지요. 눈 속에 어찌하시려고 그냥 가세요?』

『아냐, 난 살 만큼 살았네. 아기나 잘 보살피게. 관세음보살….』

노스님은 벌거벗은 채 염불을 외우며 황룡사로 향했다. 살을 에는 눈보라 속을 걸어 황룔사에 이르렀을 때 스님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스님은 절 문을 두들기려고 팔을 들었으나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노스님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안간힘을 쓰며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천근이었다.

고양이가 쓰러진 스님 품속을 파고들었다. 스님은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놓더니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일주문을 돌아 헛간으로 찾아든 스님은 거적을 몸에 감고 고양이와 함께 누웠다. 고양이 체온이 노승의 몸을 녹였다.

어느덧 노승은 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스님의 이야기는 서라벌 장안에 퍼졌다. 애장왕이 스님을 궁내로 맞아 국사로 봉하니 이 스님이 바로 정수국사. 훗날 사람들은 스님을 관음보살의 화현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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