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봉원사의 삼천불전
찬즙대사와 동자
조선 영조대와 24년(1748) 초봄 어느날 아침.
지금의 연세대학 자리에 위치한 봉원사에 어명이 내렸다.
『귀사의 도량을 국가에서 긴히 쓰고자하니 새로운 도량을 정하도록 하라.』
『도량을 옮기라고? 어허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
궁으로 돌아가는 사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연해하던 주지 贊汁스님은 법당으로 들어가 분향을 발원했다.
『제불 보살님께서는 어리석은 소승에게 길을 열어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스님은 이튿날 새벽 목욕재계하고는 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초파일이 되어 신도들이 법을 청해도 찬즙스님은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일쨰 되던날 새벽, 용맹정진에 들어간 찬즙은 비몽사몽간에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의 도량은 내가 머물기에 적합지 아니하니 대사께서 부디 좋은 가람터를 잡아 중생교화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시오.』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기암괴석 옆에 물병을 든 한 여인이 동자와 함께 서 있었다.
『아! 저분은 관세음보살님.』
찬즙대사는 황망히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청했다.
『소승 식견과 덕이 부족하오니 부디 길을 이녿하여 주옵소서.』
『대사의 신심이 능히 내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도량을 찾을 것이오.』
관음보살의 음성이 아직 허공에 맴도는듯 한데 여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동자만이 산 아래로 날듯이 내려갔다.
찬즙은 동자를 쫓으려 급히 발을 옮기려다 그만 바위 아래로 구르게 됐다.
무엇인가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옆에서 누가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법당.
몸에선 땀이 비오 듯 했고 손에 들려있는 목탁채는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손자국이 나 있었다.
대사는 급히 상좌 도원에게 일렀다.
『도원아, 어서 길 떠날 차비를 해라.』
『스님! 오늘은 기도 회향일입니다.』
『인석아, 기도는 왜 했느냐?.』
찬즙대사는 대중 몰래 도원만을 데리고 꿈에 본 곳을 찾아 나섰다.
절 떠난지 벌써 여러 날.
짚신이 동이 나고 장삼모양도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상의 떡장수를 본 도원이 발길을 떼지 않고 곁눈질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도원아, 떡좀 먹으련?.』
대답대신 방긋 웃으며 도원은 볼이 메어라고 떡을 먹었다.
떡을 손에 든 채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사에게 떡장수 할멈이 말을 건넸다.
『신심이 장해야 부처님을 뵙는다는 말이 있듯 시장이 지극하면 내 떡맛도 괜찮을 텐데 스님은 아직 덜 시장하신가 보구려..』
맹랑한 떡장수 말에 기분이 언짢아 떡 두어 개를 집어 먹고 일어서려는데 어딜 다녀왔는지 노파는 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다시 말을 던진다.
『살다보니 별꼴 다 보겠어요 스님. 저쪽 장터에 가 보니 개눈을 가려 놓고는 먹을 것을 끈에 달아 희롱하고 있지 않겠어요. 헌데 우스운 것은 그 개 주인이 개를 향해 「눈가린 것 풀 생각은 않고 먹이생각만 하는것이 꼭 봉원사 주지 찬즙 같구먼」 하지 않겠수..』
대사는 한방망이 맞은 듯 급히 장터로 가봤으나 개는커녕 인기척도 없었다.
다시 돌아와 보니 떡장수도 간곳이 없었다.
개에 비유된 자신의 무지함을 생각하며 걷는 찬즙에게 도원이 불쑥 말을 꺼냈다.
『스님, 더운데 등멱이나 하시지요..』
눈앞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대사는 말없이 개울로 발길을 옮겨 물속에 몸을 담구었다.
그때였다.
등을 밀겠다고 다가온 도원이 대사의 등줄기를 후려치더니 태연히 한마디 하는 것이 아닌가.
『법당은 호법당인데 불무영험이로다.』
『너 지금 뭐라 했느냐?』
대사가 놀라 물었다.
『제 등좀 밀어 주시라고요.』
대사가 의아해 하며 도원의 등을 미는데
『등짝은 제대로 보는데 부처는 왜 못보나?』
찬즙은 급히 도원에게 절을했다.
『아이구 날이 더우니 우리 스님 실성하셨네.』
찬즙이 머리를 조아리니 도원은 대경실색하여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일어서던 대사는 먹은 떡이 얹혔는지 그만 배를 움켜쥐었다.
놀란 상좌 울음을 멈추고 인근 의원을 불렀다.
약을 먹고 이튿날 정오에야 정신을 차린 찬즙은 봉원사로 향했다.
여러 날 걸려 바로 절 밑까지 왔으나 도저히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람터를 찾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목이 몹시 마르다. 물을 좀…』
대사는 상좌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을 차던 도원은 물을 철철흘리며 물병을 들고오는 동자에게 물 있는 곳을 물어 정성스레 쪽박에 물을 길어왔다.
빈사상태의 대사 입에 물을 흘려 넣으니 신기하게도 혈색이 돌았다.
대사는 차츰 정신을 차리더니 쪽박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언제 아팠느냐는 듯 기운을 차린 대사는 상좌와 함께 샘터로 갔다.
돌 틈에 두개의 샘이 아래위로 있었다.
아랫쪽 물에 손발을 씻고 윗물로 공양을 지어 불공을 올렸다.
『부처님 가피로 목숨 부지했사오나, 가람터를 발견하고 목숨 버림만 못하옵니다. 부디 소승의 발원 이뤄주옵소서.』
이때였다.
돌연 도원이 게송을 읊었다.
『말을 한들 알까, 보여준들 알까, 물이 덥고 시원함은 마셔 봐야 알 것을.』
멍청히 듣던 대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바라보니 중암선사가 주석하는 반야암이었다.
암자로 오르는데 동자들이 바위 위에서 뛰노는 듯 오락가락 한다.
바로 꿈에 본 광경이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바위전체가 자애로운 관음보살의 모습이었다.
찬즙은 눈물을 흘리며 무수히 절하면서 관음보살을 불렀다.
어느새 동자는 간곳이 없었다.
『아, 눈밝지 못하여 지척에 두고 먼 곳을 찾았구나.』
반야암에 이르니 증암선사가 경내를 서성이다 반색을 한다.
『대사였구려.』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늘 아침예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웬 동자 둘이 와서 도량을 크게 일으킬 사람이 올테니 도와주라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기다리던 중이오.』
새 가람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새로 옮겨 지은 절이라 해서 봉원사를 「새절」이라 불렀다.
지금도 절 동북쪽 능선에 서울의 안녕을 지키는 듯한 거대한 자연석 관음바위가 있고 새벽이면 약수터 찾는 이가 줄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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