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제1부: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수메르의 발자취

지식창고지기 2010. 12. 8. 08:58

세계최초의 민족이동 탐사 다큐멘터리

 

 

한민족기원대탐사


셈족의 루트를 찾아서

 

 

 

1차 탐사 : 1997년 6월 23일- 1997년 8월 14일(53일 간)
 2차 탐사 : 1997년 9월 20일  1997년 9월 30일(11일 간)

 

 

 

 

 

 

 

 

 


리는 어디서 왔는가?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것이 대단히 획기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출발은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한 불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인류가 만들어 낸 문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서로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자가 생긴 그 동기부터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데서 시작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 문자의 약속 자체도 또 왜곡되거나 날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전제한 것이었다. 따라서 문자는 그것을 이용하여 거짓이나 비리를 오히려 정당화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에 문자가 계시니라’고 기록하지 않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기록했던 것이며(요1:1), 중국의 사서인 회남자(淮南子)도 문자가 인간 분신과 타락을 더욱 심각한 상태로 악화시킬지도 모른다고 예측한 ‘하늘’의 염려를 기록해 놓았다.
 ‘처음 창힐(蒼詰)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지어내어 약속의 표적으로 하였으매 이로 인하여 장차 사(詐)와 위(僞)가 생겨날 것이요 그렇게 되면 그 근본을 버리고 지(枝)와 말(末)에 힘쓸 것이며 경작의 업을 버리고 이(利)만을 추구하는데 힘 쓸 것이다…’
 이런 우려는 그 후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고 문자의 폭력은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매장하고 몰아 죽이고 역사의 진실을 파묻어 버렸으며 지금도 문자는 권력과 금력의 무기가 되어 수많은 탐욕의 계약서와 타락한 문화와 거짓의 역사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진실을 마묻어 버린 터전에 새로운 문자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역사학자나 연구가도 아니지만 일개 작가로서 때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려고 자주 역사의 기록들을 들어다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뜩 역사의 수많은 부분이 엄청난 왜곡과 날조의 덧칠로 훼손되거나 가려지거나 아예 말살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작가 자신이 역사적인 사실에 대하여 확신이 없으면 소설도 역시 제대로 쓸 수 없었기에 수많은 기록들을 찾아 뒤지며 다니던 끝에 결국 인류가 물려받은 문자적 유산 중에서 가장 정확한 진실을 적어 놓은 문서는 ‘성경’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필자는 소설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룰 때마다 늘 성경의 기록을 근거 문헌으로 사용하였다. 그러자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와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거리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던 학자 여러분이 필자의 소설을 읽고 공감을 표해왔을 뿐만 아니라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뜻 밖에도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반가 왔던 것은 성경의 ‘창조사관’을 바탕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믿는 학자들이 모여서 ‘창조사학회’를 발기하게 된 일이었다. 이 학회가 학자들뿐만 아니라 동호인들을 폭 넓게 받아들이므로 필자도 물론 가입했고 영광스럽게도 학회가 첫 사업으로 택한 ‘한민족 기원 대탐사’ 계획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탐사에서 우리가 해내하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관의 논리인 ‘병행발생설’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인류는 지구상의 도처에서 각각 태어났으며 그 문화도 역시 각각 따로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는 이 논리를 역사적, 고고학적, 언어학적 또는 인류학적 증거로 극복하고 성경이 기록한대로 인류는 한 조상에서 시작하여 지구 각처에 분산되었으며 그 문화도 서로 관련이 있다는 ‘문화이동설’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과연 우리는 가는 곳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접촉 과정에서 놀랐던 것은 지금까지 난공불락으로 생각했던 그러한 사관과 논리들이 고대로 올라갈수록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더구나 필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세워 놓은 학설이라는 것이 일개 작가가 쓴 픽션보다도 더 비논리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탐사과정의 여러 곳에서 인류의 역사를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등으로 나누어 놓은 고정 관념이 전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종래의 사가들이 전체를 파악하지 않고 부분만을 관찰함으로 말미암아 기형적인 역사를 만들어 내었으며 특히 그것들은 정치적 권력과 민족우월주의 또는 사상과 이념이라는 틀에 미리 맞추어 주조(鑄造)되고 가공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의대분단이 시작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한 바벨탑에서부터 민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라랏산을 거쳐 러시아 평원과 시베리아 그리고 알타이 지역과 몽골과 중국 대륙에서 극동의 만주지역에 이르기까지 그 방대한 역사적 무대를 겨우 1,2차 65일간 답사하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창조사학회’ 탐사팀이 이라크에서 시작하여 만주지역에 이르는 이 모든 경로를 한꺼번에 주파한 세계 최초의 학술조사단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세계의 어느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도 이런 일을 해본 것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 탐사 활동 중에 필자는 그 동안 짐작해 왔던 것들이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탐사대의 학술 팀은 우리가 찾아낸 몇 가지의 중요한 결과들을 학계에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탐사는 고대 근동학의 장국원 박사와 북경대학에서 고고학을 연구하고 있던 이벤허 박사와 창조사학회 김영우 국장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탐사 기간 동안 우리와 고락을 함께 하며 이 일에 참여했던 ‘한국창조과학회’의 권영헌 박사와 탐사 기록 촬영에 헌신적으로 임해주었던 사진 촬영팀의 박준채, 전용구, 이강근, 정태일 형제들과 비디오 촬영을 담당해서 수고해준 이상익, 한승호, 김우현 형제들과 뒤에서 우리를 도와준 신명균 실장, 김동삼 총무, 민혜경 간사 특히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성원해주신 회원 여러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 까지 무던히 애를 쓴 디자이너 박상규 군의 노고를 치하하며, 무엇보다도 탐사 기간 중 한 번도 비를 맞지 않도록 우리를 덮어 주시며 여정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대표집필 작가 김성일(창조사학회 부회장)

 

 

 

제 1 부 요약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아담은 930세를 살며 자녀를 낳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음으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셋이라는 아들을 주어 농사를 짓게 했고, 가인은 에덴 동쪽의 놉 땅에 살았다. 가인은 불신앙의 상징인 성을 쌓았고, 가인에게 도시 생활에 필요한 건축기술, 금속과 기계기술을 주어져서 각종 공산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2차, 3차 산업에 종사하는 가인의 자손은 필연적으로 경쟁사회를 이루었고, 경쟁사회는 전쟁과 살인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도시사회가 모든 상품의 거래와 유통을 담당하면서 상업화와 성적 타락이 유발되었고, 농경사회도 차츰 도시사회의 상업주의에 물들어 타락해 갔다. 그리고 환경 역시 인간의 타락과 함께 오명되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땅을 새롭게 할 것을 결심하시고, 홍수로 지면을 쓸어 버리기로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을 살리시기 위하여 노아에게 큰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건축기술을 셈에게, 금속과 기계기술을 함에게 , 그리고 항해 기술을 야벳에게 주셨다.
40일간 모든 깊은 샘들이 터지고 하늘이 열려, 마침내 지구는 물에 덮였다.하나님께서는 바다밑의 흙을 긁어, 산들이 솟아 나게 하셨다(시104:8). 알프스 히말라야에서 채집되는 조개와 물고기의 화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되고 있는 신화와 전설들이 당시의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몽고에서는 하나님 불칸이 오리에게 명하여 바다 밑의 흙을 건져 내어 땅을 만들었다고 한다.
노아의 방주는 터어키 동북방에 있는 해발 5,165m의 아라랏 산정에 머물렀다. 노아는 처음 까마귀를 날려 보내어, 바깥 사정을 알아 오게 하였다. 이 까마귀는 나중에 복자의 모든 나라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안내자로 나타난다.
노아가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감람나무 잎새를 물고 돌아왔다. 두 번째 보낸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방주 속에 들어갔던 모든 동물들과 노아의 가족들은 다 방주 밖으로 나왔다. 노아의 여덟 식구는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방주에서 나온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은 산과 들과 바닷가에 흩어져 살았다. 셈은 아라랏과 천단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산에 살았고, 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항해기술을 받은 야벳은 바닷가에서 살았다.
홍수는 타락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을 배반했을까?    

 

 

 

 

제 1 부 대홍수

 

 

      
제1부|대홍수  

           
                   

별을 바라보며
 
BC 2166년에 태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이라는 사람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과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다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질서를 지키며 인류의 유익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주관하시는 한 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오직 그 분에게만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태어나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와 그 기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천체 망원경으로 유명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원 허불은 1929년 토플러 효과에 의해 나타나는 별들의 색깔차이를 가지고 은하계별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다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이 결과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시간과 공간의 생성이 한 점의 대폭발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했고 사림이 빛보다 더 빨리 달려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폭발의 원점은 빛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역사에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는 이 물리학자의 가설은 성경의 창조론과 종말론에 매우 근접한 논리였기 때문에 신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성경이 설명해 놓은 우주 생성의 광경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1-2)

이렇게 해서 하늘이 창조되고 땅과 바다가 생기고 각종 식물과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속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과 벌레들이 만들어졌으며 맨 마지막에는 사람이 창조되었다.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역 추적하여 계산해 보면 아담의 탄생은 BC 4114년이 된다.
이것은 진화론자들이 직립원인을 50만 년 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로부터 3만 5천 년 전까지를 타제석기의 시대로 다시 BC 7000 년까지를 마제석기와 세석기 시대로 또 BC 4000 년까지를 농경과 토기 제작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로 그리고 BC 4000 년에서 BC 3000 년까지를 금속과 문자와 바퀴 문화가 나타난 청동기 시대로 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스티븐 호킹은 우주의 나이를 약 120억년으로 계산해 놓음으로 우주의 나이만으로 보면 신속하게 전개되는 성경의 창조과정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나, 한 점의 대폭발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질서 있는 우주로 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그 대폭발 이전에 미리 정해진 세밀한 설계도 즉 창조주의 의도가 있었을 것 같다는 발언을 하여 성경의 창조 사실을 뒷받침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성경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자손들이 살인과 타락을 계속하는 등 온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하나님께서 큰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홍수가 발생한 연대가 BC 2458 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가 일어나기 전 노아에게 방주를 건조하게 하고 짐승과 벌레와 새들과 노아의 가족들이 들어가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 아내들까지 모두 여덟 명의 가족이 오늘날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온 땅에 흩어져 살라고 지시한 것이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세기 9:7)

그러나 노아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온 땅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흙으로 벽돌을 구워 역청으로 바벨탑을 쌓았다. 이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뒤섞여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탑을 쌓지 못하고 모두 흩어졌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각기 다른 신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BC 2166년에 태어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이라는 사람도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과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다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질서를 지키며 인류의 유익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주관하시는 한 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오직 그 분에게만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신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역사의 혼돈과 창조사관

 

오늘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인류의 역사는 주로 인본주의에 입각한 진화론적 사관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진화론 그 자체가 많은 논리적 모순을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오직 진화론적 사관만 배우도록 강요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인류의 기원과 자아를 발견하는 일에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피부색과 언어, 문화와 습관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민족 간의 혼혈이 진행되고 문화와 습관도 서로 뒤섞이고 복잡해져 인간이 그 자신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많은 학자들이 그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결국 그들의 길은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서 시작되는 두 가지의 논리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그 하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에서 전개하는 창조론적 논리이고 또 하나는 찰스 다윈처럼 무신론을 전제로 하여 펼치는 진화론적인 논리이다. 이들의 견해를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관점과 논리가 서로 상반된다. 즉 진화론자들은 문명의 발전 단계를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으로 구분하지만 성경의 창세기는 이미 대홍수 이전 아담의 8대 손때부터 구리와 철이 사용되었다고 밝힌다.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가 되었다.”(창세기 4:22)

또 문화에 대해서도 그들의 의견은 상반된다. 현존하고 있는 미개인종의 생활 모습에 대해서도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인류의 문화가 발전되기 이전의 원형적 상태로 보는 반면 창조론자들은 그것이 문명과 격리된 생활 때문에 온 퇴행적 결과라고 본다.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화론자들은 원시적 무속신앙이 진화해서 오늘날과 같은 고등종교로 발전했다고 주장하지만 창조론자들은 본래의 신앙이 인류의 탐욕과 타락 때문에 변질되어 무속의 형태로 남았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인류의 역사는 주로 인본주의에 입각한 진화론적 사관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진화론 그 자체가 많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오직 진화론적 사관만을 배우도록 강요되는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인류의 기원과 자아를 발견하는 일에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류가 망각하고 있었던 창조론적 관점으로 역사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창조사관에 의한 역사 연구를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사학자, 신학자, 언어학자, 목회자와 동호인들이 1997년 4월 21일 창조사학회를 창립하였고 그 첫 번째 사업으로 ‘한민족기원대탐사’ 프로젝트를 정했던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인류가 오랑우탄이나 침팬지 또는 고릴라처럼 각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태어나 오늘날과 같은 인류로 진화된 것이라고 하지만 창조사관적 입장에서 보면 인류는 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나 각 지역으로 이동, 정착한 것이다. 성경은 오늘날의 인류가 노아의 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그들의 방주가 머물렀던 곳은 터키 동북방에 있는 해발 5165 미터의 아라랏산이며 그들은 아라랏산에서 내려와 티그리스강과 유브라테강 사이에 있는 시날평야 즉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그 아브라함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부터 탐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시날 땅에서 생긴 일

 

본래 메소포타미아에 건설되었던 모든 성읍들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신전탑들이 있었다. 학자들은 바벨탑이 '지구라트'(신전)의 원형이라고도 하고 인류의 교만을 대표하는 상징적  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대부분은 이라크의 영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라크는  91년의 걸프전쟁 이후 유엔의 경제제재 조치로 바그다드 공항이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요르단을 통해 육로로 입경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암만에서 비상식량과 필수품들을 구입하고 이라크국경으로 향했다. 요르단 사람들이 먹는 밀가루 떡, 코세바는 그 이후로 이름만 바뀌면서 모든  이슬람 지역에서 우리의 주식이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우랄과 알타이를 거쳐 몽골에까지 이어졌다.
암만에서 국경까지는 4백 킬로미터 그리고 국경에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까지는 6백 킬로미터의 사막 길이었다.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는 이라크의 입국절차는 매우 까다로운 것이어서 시간도 무척 소요되었고, 반입이 허락되지 않는 전자장비들은 모두 국경관리소에 남겨 놓은 채 우리는 바그다드로 향하는 10번 도로에 들어섰다. 도로 양쪽은 모두 사막이었으나 큰물에 씻긴 듯한 검은 돌들이 깔려 있어서 마치 대홍수의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같았다.
날이 어두워져 밤이 되었지만 우리는 쉼 없이 사막 길을 달려야 했다. 운전기사가 졸면 잠시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밤하늘과 별들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4천년 전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바라보았던 그 밤하늘처럼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밤새 사막 길을 달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도착한 것은 새벽 다섯 시였다.
걸프 전쟁 중 외국인 기자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유명해진 알 라시드 호텔에서 우리는 탐사의 순서를 의논했다. 바벨탑에서 인류가 흩어지기 시작했다면 당연히 우리의 탐사는 바벨 탑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바벨탑을 쌓았던 자리는 어디일까?"
성경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창세기 11:2-3)

그렇다면 시날 땅은 어디인가? 전승에 의하면 바벨탑 건축을 주도한 인물은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는 니므롯의 영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의 로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 레센을 건축하였으며…"

그렇다면 시날 평지란 바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가장 가까운 악갓에서 강들의 사이가 다시 넓어졌다가 도로 좁아지는 에렉까지의 평지를 말하는 것이다.
본래 메소포타미아에 건설되었던 모든 성읍 들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신전 탑들이 있었다. 학자들은 바벨 탑이 '지구랏'(신전)의 원형이라고도 하고 인류의 교만을 대표하는 상징적 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구랏을 건축한 연대도 모두 BC. 2114 년 이후의 것이어서 성경이 말하는 바벨탑 사건보다도 나중인 것이다.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던 우리는 먼저 바그다드 남쪽 8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바벨론을 답사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바벨탑의 바벨과 관계가 있었고 니므롯을 비롯하여 후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바벨론에 도읍한 것으로 보아 시날 지역에서도 바벨론이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이라크 사람들의 생활과 접촉할 수 있었다. 나그네를 반가이 맞이하는 모습과 양고기 구이 케밥을 만들고 밀가루 떡 허브스를 굽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낙천적이고 순박한 모습과 문화를 만났던 것이다.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열기 속을 뚫고 달리던 차도 견디기 어려운지 이라크인 기사는 자주 보네트를 열었다. 에어컨도 신통치 않은 찜통 같은 자동차를 타고 남쪽을 향해서 한참을 달리자 본래의 것을 본떠서 만든 이쉬타르 성문과 바벨론 성이 숯불같이 이글거리는 더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났다.
BC. 605년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점령 당했을 때 다니엘을 비롯한 왕실의 소년들이 잡혀 와 성으로 들어갔던 길이며 다시 BC 597년 에스겔을 비롯하여 수만 명의 이스라엘 포로들이 끌려 들어갔던 대로에는 역청만이 흔적으로 남아 뜨거운 태양광선을 내려 입고 있었다. 
지난 날 푸른 섹 타일로 덧 입혀졌던 흙벽돌의 거대한 성읍과 사람을 짓밟고 서 있는 사자상이 느부갓네살 시대의 영화와 권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관심은 그 건물보다도 더 밑에 깔려 있을 고대 바벨론 시대의 흔적이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후기 바벨론에서 사용한 흙 벽돌에도 바벨탑을 건축했던 때의 벽돌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창세기 11:3)  

 

바벨탑을 찾아서

 

우리가 밟고 있는 그 자리… 그 곳의 검은 흙은 바로 구운 벽돌 탑의 잔재였다. 우리는 바벨탑이 무너졌고 예상길라 신전이 무너졌고 또 느부갓네살의 신전이 무너져 내린 바로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이었다. 저주 받은 흙 무더기여서 인지 그 검은 흙에서는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고 있었다. .


바벨론성을 둘러본 우리는 다시 외곽으로 나와 독일인학자 로베르트 콜드웨이의 탐사 팀이 바벨탑 자리라 하여 발굴했었다는 장소를 살펴 보기로 했다.
바벨론과 이쉬타르 신전 사이의 길을 따라가자 검은 흙으로 덮인 언덕 이에 검은 깃발을 단 작은 모스크가 보였다. 모하메드의 사위였던 알리의 무덤 자리라고 하는 그 음산한 모습의 모스크를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 보니 움푹  패인 자리가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한 카림 무하마드 씨는 그것이 예상길라 신전이 있었던 자리라고 했다.
"예상길라? 그것은 수메르어로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든다는 뜻인데…"
수메르어를 전공한 장국원회장의 반응을 보며 카림씨는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실제로는 마르둑신의 신전이었답니다."
필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신을 안치했던 자리라면 그것이 왜 무너졌으며 왜 무너진 채로 내버려 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벤허 박사가 다시 물었다. "콜드웨어가 발굴했다는 곳은 어딥니까?"
"저깁니다."
카림 씨가 가리키는 언덕 아래쪽에는 그 콜드웨어 팀이 발굴했었다는 자리가 보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바벨탑 자리로는 너무 작은 것 같았다.
"바벨 탑 자리로는 너무 작은데"
"그러니까 발굴을 중단했겠지"
장회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순례객 여인들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 촬영을 한 다음 우리는 일단 철수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 라시드 호텔에 돌아온 우리는 아무래도 이상하여 다시 모였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았다. 우리가 서 있던 그 검은 흙의 언덕… 예상길라 신전이 있었다는 그 자리가 바로 바벨탑의 자리가 아닐까?
본래 예상길라 신전은 BC. 2100년 경 우르남무의 아들이었던 우르의 왕 슬기가 복원한 신전이며 예상길라 서판은 그 신전이 460x480x456x412 야드의 안 마당에 서 있었고 열두 문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는 신전 탑이었다고 했다. 그 탑을 '에테메안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라고도 했는데 '예상길라"라는 말은 스메르어로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든다'라는 뜻이었다. 이 신전 탑은 본래 3백 야드의 정사각형 기저에 층수는 8층이었는데 탑의 꼭대기에는 청색 에나멜 벽돌로 지은 사원이 있었다. 그 2층까지는 층계로 올라갔으며 3층부터 꼭대기까지는 경사로 또는 대리석 계단으로 올라갔고 전체 높이는 약 3백 피이트였다. 콜드웨이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그 자리를 발굴하는 동안 넓이가 33평방 센티이고 두깨가 7센티미터인 구운 벽돌 1천5백 만장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BC. 2100년 경 우르의 슬기 왕은 이 '예상길라' 신전을 복원해 놓고 거기다가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 신을 안치했다. 그러나 이 신전이 어쩐 일인지 다시 무너져 내렸는데 후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를 또 복구하여 자신의 수호신인 나부신과 그 밖의 다른 신들을 위한 50개의 부속 건물을 건축함으로서 그 곳을 모든 신들의 만신전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중 마르둑 신은 아쉬타르 여신과 함께 바벨론을 장악하고 있는 주신이었고 이쉬타르 성문의 용은 마르둑 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소는 농사의 신으로 니므롯의 아들인 담무스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상길라'는 신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그 신전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예상길라의 언덕'을 방문했다. 살인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이라크 사람들의 흰 옷 디스다샤를 사 입고 머리수건 아쉬마를 쓴 채로 그 곳을 찾았다. 역시 암란이븐 알리 사원의 검은 깃발을 지나 언덕을 올라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그 검은 흙의 언덕은 사방이 약 5백 미터 정도 될 것 같았고 그 검은 흙들 속에는 구운 벽돌 조각과 푸른 에나멜 타일 조각들을 발견했다.
"예상길라 신전은 왜 다시 파괴되었을까?"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재건하였다는 그 신전도 역시 무너졌는데…"
"지진으로 무너졌을까?"
"전쟁 때 포탄에 맞아서?"
우리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소년이 나타나더니 손짓을 해 가며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노! 노! 노!"
"왜 그래?"
"이 신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무너진 거예요!"
"왜 저주를?"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슬기 왕이 그 자리에 신전을 복원하면서 그 신전에 수메르어로 하늘을 행해 고개를 든다는 뜻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것이 인본주의적 정신으로 하나님을 향해 도전했던 반역의 탑이 서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

그렇다면 왜 슬기 왕은 바벨탑의 공사가 중단된 그 저주 받은 자리에 예상길라 신전을 건축했던 것일까? 그만큼 그 자리는 시날 평지의 영유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자리였던 것이 아닐까?
슬기 왕이 건축한 예상길라 신전도 결국 무너졌지만 그로부터 약 1천5백 년이 지나서 영웅 느부갓네살은 다시 그 신전을 재건했다. 그 자리는 시날 평지였고 바벨론과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그 자리… 그 곳의 검은 흙은 바로 구운 벽돌들의 잔해였다. 우리는 바벨탑이 무너졌고 예상길라 신전이 무너졌고 또 느부갓네살의 신전이 무너져 내린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저주 받은 흙 무더기 여서인지 그 검은 흙에서는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본 경험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자료들로 바벨탑을 그려보니 그 거대한                  규모가 실감 되었다. 바벨탑은 신전탑인  지구랏의 상징적인 모형으로 보는 학자들의 의견과 실제로 바벨탑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던 로베르트 콜드웨이의 생각이 다르기는 하나 우리는 어쨌든 민족들의 흩어짐이 바벨론과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변의 한 들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바벨탑 공사의 중단으로 사람들이 흩어지지 시작했다면… 우리 민족은 어떤 루트로 이동하기 시작했을까?"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의 이동 루트를 기록해 놓은 곳이 없다. 다만 창세기 10장에는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에 대한 제보가 적혀 있을 뿐이며 바벨탑 건설을 주도했었다는 니므롯의 영토가 기록되었을 뿐인 것이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섹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축하였으며…"(창세기 10:10-12)

이것들을 보면 니므롯은 바벨론 이남의 지역에서 시작하여 오히려 북부의 니느웨, 앗술, 갈라 등으로 진출했던 것 같다.
또 우리 민족이 바벨론에서부터 이동을 시작했다면 틀림없이 아라랏을 향하여 바벨론 북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런 결론에 다다른 우리는 이라크 북부지역을 답사하기로 했다.

 

             


북으로 가는 길

 

셈의 아들 앗수르의 거주지였던 앗술이 니므롯에게 점령 당하고 또 수메르에게 정복 당했다면 앗수르의 자손들은 상당수 그 터전을 버리고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니느웨를 지나 아라랏 쪽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북쪽에 있는 니느웨를 향해 티그리스 강을 따라 올라가다 도중에 있는 님루드(갈라)에 들렸다.


바그다드에서 1번 도로를 타고 124킬로 미터를 북상하면 티그리스 강변의 작은 도시가 사마라에 이르게 된다. 이 사마라에는 AD. 852년에 건설된 대형 이슬람 사원이 있는데 더 유명한 것은 그 사원 북쪽에 있는 나선형 첨탑이다. 첨탑의 이름도 '말위야'(나선)인데 알무타심이 바벨탑을 모방해서 나선형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그 기단이 33미터의 정방형이니 바벨탑의 10분의1 정도이고 높이도 52미터 밖에 않되 예사롭게 생각하며 꼭대기에 올라 오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대단히 높아 바벨탑의 규모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사마라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 150킬로미터를 더 북상하다 발랄리지 분기점에서 26킬로미터를 들어가면 앗술 성이 있는 쉬르캇에 도착하게 된다. 앗술 성은 성경에 나오는 셈의 둘 째 아들 앗수르가 살았던 곳이고 앗시리아의 수도였는데 니므롯이 이 곳을 점령하고 앗수르 도성을 니느웨로 옮겼던 것이다. 본래 앗수르 사람들이 섬기던 민족의 신이며 앗술 성의 수호신이었던 앗술 신은 바벨론의 마르둑 신과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그러나 앗술 성에서는 수메르의 신 엔릴을 위해 건축한 지구랏이 발견되었다.
수메르에는 약3,600 개의 신들이 있었는데 큰 신은 모두 일복이었다. 그 중에서 '우룩의 신'으로 하늘에 올라간 하늘의 신 '아누'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곱 신은 모두 도시의 신들이었는데 바람의 신 '엔릴'은 하늘의 신 '아누'와 땅의 신 '키' 사이에서 태어난 '니풀의 신'이었고 신들 중에 가장 강력한 신이었다. 앗술 성에 '엔릴'을 위한 지구랏이 건설되었다는 것은 수메르의 세력이 앗술 성까지 미쳤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유적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늘로부터 방문자를 맞기 위해 이 탑이 세워졌다."
신전 탑 위에 올라 사방을 살펴 본 다음 다시 내려와 건너 앗수르의 주거지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 노인이 우리를 보고 손짓을 했다. 우리를 한 골짜기로 데려간 노인은 땅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흙 벽돌에 새겨진 수메르 쐐기문자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앗수르에 대한 수메르의 영향을 한마디로 증명해 주고 있는 장면이었다.
셈의 아들 앗수르의 거주지였던 앗술이 니므롯에게 점령당하고 또 수메르에게 정복당했다면 앗수르의 자손들은 상당수가 그 터전을 버리고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니느웨를 지나 아라랏 쪽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북쪼게 있는 니느웨를 향해 티그리스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도중에 있는 님루드(갈라)에 들렸다.
갈라는 이미 니므롯 시대의 그 갈라가 아니었고 앗시리아 왕 살만에셀 Ⅰ세와 앗수르나시팔 Ⅱ세의 왕궁 터로 남아 있었다. 왕궁 앞에는 살만에셀 Ⅲ세가 건축한 지구랏과 신전 자리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앗수르나시팔 궁전 입구에는 사람의 머리에 말의 몸을 지닌 라마수가 지켜서 있었고 앗수르나시팔 비에는 수메르 신들의 부호들이 그려져 있었다.

앗수르나시팔 2세(Assur-nasipal Ⅱ, BC 883-859)
창세기 10장에 11절에 나오는 '갈라'(Calah), 즉 지금의 모솔 동남편 37Km 지점 티그리스 강 동편에 위치한 앗수르제국의 두 번째 수도 니므롯(님루드)을 세우고 다스린 앗수르의 군주. 이 곳에는 앗수르나시팔 2세와 그 아들 살만에셀 3세가 세운 궁궐과 지구랏이 있다. 왕궁 입구의 전승비에 의하면 앗스르나시팔 왕이 티그리스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여 두로, 시돈, 비브로스와 같은 가나안 거점 도시국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치적이 나와 있다.
한편, 그의 성과 왕궁은 1845년 A. H. 레이야드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중요한 발견물로는 앗수르와 소아시아 지방의 작은 왕국들간에 맺은 외교문서와 앗수르왕의 연대기이다. 또한 살만에셀 3세가 주전 841년 전쟁에 이긴 후 세운 검은 색 오벨리스크 비석이 유명한데, 여기에는 이스라엘왕 예후가 살만에살왕의 발에 입 맞추는 것과 이스라엘 왕이 세금을 바치는 내용(왕하 9-10장)을 담았다고 한다.

"이 것은 신(난나), 우투, 이쉬타르(이난나), 엔릴, 아다드, 시비티 신의 부호입니다."
유적 관리소장 무자힘 마흐무드 씨의 설명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궁전 벽의 부조에 대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생명나무와 천사의 조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 것은 신의 상징이며 생명이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 날개 달린 사람은 천사를 의미하지요."
그 것은 바로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한 대목과 같은 것이었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를 시켜 시키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4)

앗수르나시팔 Ⅱ세는 BC 883년에서 869년까지 앗시리아를 통치한 왕으로 BC 879년에 갈라성의 기초를 놓았는데 그의 비에 새겨 놓은 것처럼 수메르의 온갖 신들을 섬기면서도 궁전 벽의 부조에는 창세기 내용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이로 보아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신앙은 꽤 오랫동안 그들 사이에도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증거는 니므롯이 건축했다는 니느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BC 759년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니느웨 성에 가서 멸망을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이에 백성들과 왕이 함께 회개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요나서3:5-6)

이렇게 하여 니느웨 성은 멸망을 모면했으나 그 다음 세대에 다시 타락하였기 때문에 나훔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앗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아들 앗수르에틸일라니의 치세였던 BC 612년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요나의 권고를 받아들인 니느웨 사람들의 신앙은 아직도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니느웨 성이 있는 모슬 지역 인구의 25퍼센트가 시리아 정교회의 기독인이며 형재 이라크의 부통령도 기독인으로 알려져 있다.(주: 탐사 할 당시)
우리는 니느웨 즉 모슬에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우리 선조들은 니느웨 북쪽으로 계속해서 올라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쪽을 뻗어 간 1번 도로, 그러나 그 도로는 막혀 있었다. 국경을 넘어가면 바로 아라랏산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그 지역은 쿠르드 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어서 국경이 폐쇄되어 있었다.
우리는 선조들이 걸어갔을지도 모르는 그 길을 몇 번이고 돌아보며 그대로 발길을 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을 향해서 탐사의 발길을 돌렸다. 바그다드에서 모슬까지 우리는 그 동안 왕복 8백 킬로미터를 달린 셈이었다.   


 

 


수메르의 발자취

 

수메르 사람들은 본래 아누 신만을 섬기다가 점점 다양한 많은 신들을 섬기게 딘 것인지도 몰랐다. 무너진 신전을 답사하는 도중 우리는 흙더미 가운데 서 있는 다섯 개의 기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원형의 기둥들을 잘 살펴보니 그것은 풍만한 여신상들이었던 것이다. 우륵은 하늘의 신 아누를 섬겼으나 성적인 문란과 관계가 있었고 마침내 그들의 신을 사랑의 여신인 이난나로 바꾼 것이었다.


바그다드의 남부로 향하면서 우리가 주로 살펴야 하는 것은 수메르의 문화였다. 수메르 문화는 어떤 모양으로든 아직까지 우리의 문화에 그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 특히 그러한 부분이 바로 바로 언어 쪽이다.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목적어가 동사보다 먼저 나오는 교착어여서 문장의 구조가 SOV형으로 되어 있다. 또 수메르어에는 한국어처럼 대명사의 격에 따라 후치사가 붙기도 하며 어휘에서도, 아바, 아비, 움마, 아느우르, 기르 등 비슷한 어휘가 자주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 사람들의 얼굴은 지금의 우리와 많이 닮았다. 수메르 남자들의 얼굴은 넙적한 편이며 눈썹이 서로 붙은 사람을 잘 생긴 남자로 여겼는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탐사 루트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쌍꺼풀이 없는 샤바드 여왕의 모습은 한국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수메르의 역사를 BC 3200년 경부터 잡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말하는 BC 2400년 이전의 역사는 대부분 신화적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비교적 확실한 기록은 BC 2300년대에 시작되는 키쉬3왕조와 악카드왕조 그리고 우룩왕조의 루갈사게시 시대 정도이고 수메르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BC 2112년에 시작되는 우르의 우르남무왕 시대이다.
수메르 지역을 살펴보려는 우리의 일차 목표는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하는 우르 지역이었다. 우르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이었으므로 티그리스강을 따라 나있는 도로를 이용해 남쪽으로 먼저 갔다가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북상할 예정이었다. 바그다드에서 바스라까지는 6번 도로로 549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우리가 바그다드에서 366킬로미터 되는 아마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고 무장한 경찰들의 검문이 잦아졌다. 검문하는 경찰들이 우리에게 아마라 이남지역은 특히 테러와 강도가 많은 지역이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우리는 일정 때문에 아마라에서 멈출 수가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가 수 많은 검문소를 통과하여 밤 10시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쿠르나에 도착했을 때 경찰은 우리를 경찰서 안으로 불러들였다. 경찰서 벽에는 이 곳이 두 강의 합류점임을 나타내는 그림이 있었고 강변에는 생명나무로 보이는 '아담나무'도 그려져 있었다.
경찰서장은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아무래도 밤길을 가는 것이 위험하다면서 무장경찰 여섯 명을 불러 우리 차에 동승하여 호송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무장경찰과 함께 차를 타고 알 아랍강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합류된 알 아랍강은 이란과의 국경 지대로 선박의 운행문제 때문에 이라크와 이란이 전쟁을 벌렸던 바로 그 강이었다. 무장경찰과 함께 밤길을 달려 우리가 바스라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호텔의 이름은 바스라 쉐라톤인데 에어컨마져 고장나 우리는 무더운 방에서 우르의 꿈을 꾸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우리의 수메르 탐험은 시작되었다. 머리에 쓰는 야쉬마를 남쪽 사람들의 상징인 검은 줄무늬의 것을 바꿔 쓰고 다시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강변의 사막은 91년 걸프전쟁을 유명해진 '사막의 폭풍' 현장이었다.
나시리야에서 다시 현지식 식사인 케밥과 허브스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우르 지역의 안내인 우살 스바이디 씨를 태우고 우르로 향했다. 그녀는 바그다드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여성이었다. 우르에 가까워지면서 1킬로미터 마다 군인들의 초소가 있었고 지구랏 바로 옆에 사령부가 있었다. 전쟁 때 이 지역은 아무런 포격도 받지 않았다고 하니 지구랏의 덕을 본 것이었다.
우르의 지구랏은 우르남무왕이 우르의 수호신 난나를 위해 건축한 것이었다. 스메르에는 하늘의 신 안을 비롯하여 일곱 큰 신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하늘의 신 아누를 제외한 여섯 신은 모두 그들이 맡고 있는 도시가 있었다.
우르에는 우르남누가 건축한 지구랏 외에 난나신을 위한 신전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장 책임자 다이프무손은 우리를 우르남무와 그 아들 술기 왕궁터로 안내했다. 또 우리는 우르남무의 아들 술기왕의 무덤과 그 아들 아마르신의 무덤 자리도 찾아보았다. BC 2112년부터 BC 2038년까지 메소포타미아를 휩쓸었던 세 왕의 역사가 이제는 흙더미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출생이 BC 2166년이니까 그는 바로 우르남무왕 시대에 이 우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리두로 가는 길에 걸프전쟁후인 1993년에 만든 인공호수가 있었다. 수메르의 역사서인 수메르 왕이 계보에는 에리두가 가장 먼저 나타난 왕조로 등장한다. 에리두에는 지하수의 신 엔키를 위한  16기의 신전과 지구랏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을 분이다. 그 폐허에서 지금도 조개껍질과 고동껍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대 홍수와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우룩에 있는 아누 신전으로 향했다. 하늘(안)의 신을 아누라고 하는데 본래 아누신은 하늘 담당이었고 땅에는 맡은 도시가 없었다.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우룩을 담당한 신은 바로 사랑의 여신인 이난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내자는 이 것이 오래된 지구랏이며 아누신을 위하여 건축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수메르 사람들은 본래 아누신만을 섬기다가 점점 다양한 많은 신들을 섬기데 된 것인지도 몰랐다. 무너진 신전을 답사는 도중 우리는 흙더니 가운데 서 있는 다섯 개의 기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운형의 기둥들을 잘 살펴보니 그 것은 풍만한 여인상들이었던 것이다. 우룩은 하늘의 신 아누를 섬겼으나 성적인 문란과 관계가 있었고 마침내 그들의 신을 사랑의 여신인 이난나로 바꾼 것이다.
빠듯한 일정에 쫓기면서 왕복 1천킬로미터가 넘는 수메르 탐사는 끝났다. 우리가 현장에서 본 것은 모두 무너져서 흙더미로 남아 있는 지구랏과 신전터뿐이었으므로 이제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마무리하려면 우리의 마지막 코스인 바그다드의 이라크 박물관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물관에 도착한 우리는 낙담하고 말았다. 전쟁 중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유물들은 도난을 당해서 박물관이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텅 빈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제달 아민 씨에게 사정해서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엄격하게 촬영이 통제되어 유물들을 필름에 담지는 못했으나 우리는 한국과 중국에까지 이어지는 많은 공통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위 하수나 문화, 할라프 문화, 우바이드 문화로 이어지는 회색토기, 채색토기들과 혼전형토기 그리고 모슬 지역에서 발견된 새모양토기들은 우리가 이후로 탐사해 가는 모든 지역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탐사기간 중 우리가 또 각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유물들은 곡식 정제하는데 필요했던 마반석(磨盤石), 흑요석 도구, 환저형토기, 새모양토기, 발이 세 개 달린 삼족기 등 여러 품목들이었고 이 것들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전시실, 또는 유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라크 박물관에서 일단 메소포타미아 답사를 아쉽게 끝낸 우리는 이라크 정부의 요구대로 바그다드의 프레스 센터에서 그 동안 우리가 찍은 모든 필름들을 검열 받고 봉인받았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 봉쇄조치 때문에 이라크 정부도 엄격하게 외국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특히 서양의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탐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곳을 우리 한국의 학자들이 들어와 탐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바그다드를 떠났다. 이제 다시 우리는 1천 킬로미터를 달려서 암만으로 되돌아가 시리아와 터키 하란 지역을 지나 저 니느웨에서 북상하다 길이 막혔던 아라랏을 향해 가야하는 것이다. 암만에서 바그다드까지 1천 킬로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바스라 사이의 왕복이 1,100킬로 그리고 두 번의 바벨론 방문과 암만으로의 귀로를 합치면 모두 4천 킬로가 넘는 탐사를 했던 셈이었다. 우리는 시리아와 터키에서의 성공적인 탐사를 기원하며 바그다드를 떠나 밤의 사막을 달리며 국경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