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세종대왕 유적 - 사람들

지식창고지기 2009. 6. 2. 22:23

 

영릉의 천장지 결정에 관여한 사람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과 그의 비 소헌왕후가 함께 잠들어있는 능 영릉은 1446년(세종 28)에 조영되었다가 예종대에 그 입지가 불길한 곳이라는 주장에 따라 여주로 옮겨왔다. 『예종실록』1468년(예종 즉위) 9월 13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등이 영릉에 가서 장지를 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릉 근방에는 쓸 만한 땅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수고하였으나, 다시 가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는데, 다만 높은 곳은 필요하지 않다.” 하였다.
『예종실록』1468년(예종 즉위) 12월 1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당군 한명회(韓明澮), 예조판서 임원준(任元濬), 한성부 윤 서거정(徐居正)을 불러서 지리서를 참고하여, 영릉 산세의 길흉을 의논하게 하니, 한명회가 아뢰기를,
“옛 임강현의 터가 능침을 쓸 만한 땅입니다. 청컨대 거주하는 백성들을 옮기고 초목(草木)을 기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정원으로 하여금 그 편부(便否)를 원상(院相)에게 물어 보게 하였다.

위와 같이 영릉을 정하는 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인지, 한명회, 서거정 등이 참여하였다.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조선 초기의 문신 겸 학자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와 좌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세종 ~ 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단종? ~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