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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천목사는 모함을 받았고, 배신을 당했으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지식창고지기 2011. 12. 7. 06:59

장기천목사는 모함을 받았고, 배신을 당했으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2주기 앞두고서 故 장기천 목사 기억하기] 어느 설교에 나타난 일화 & 성직의 세습을 반대하며 쓴 글

 

* 故 장기천 목사의 2주기를 앞두고 그를 기억하는 몇몇 글들을 3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지인, 유족들은 기일인 5월 7일 감신에서 2주기 추모식을 준비합니다. 감리교 사태의 와중에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분이 매우 근엄하였다지만... 2번째인 이 기사에는 장기천 목사 일화 하나와 기독교사상에 실렸던 장기천 목사의 글 "한국 교회 성직 세습의 문제" 그리고 장기천 목사 장례식장에서의 이은선교수의 추모사 "우리 곁을 떠나가신 장기천 감독님을 추모하며"를 실었습니다. 

어느 목사의 설교 중에서 드러난 장기천 목사 일화

   
▲ 그는 근엄하나 인자한 사람이었다
저는 용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 장기천 감독님이 생각납니다. 한국감리교회의 존경받는 훌륭한 어른이셨는데 그분이 현직 감독이셨을 때 제가 신학생이었는데 감신대 채플시간에 오셔서 설교를 하시면서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당신이 목회를 하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지만 당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한번은 머리에 혹이 생겨서 큰 수술을 받게 되셨습니다. 뇌수술을 앞두고 수술날짜 받아놓고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그러더래요. 뇌수술은 너무 아파서 전신마취가 풀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비몽사몽간에 사람들이 별 이야기를 다 한데요. 특히 미운 사람을 그렇게 욕을 한다는 거예요. 여자들 애기 낳다가 시어머니 욕하듯이, 제 아내가 출산할 때 우리 옆에 있던 하늘이라는 애기 엄마는 진통하면서 시어머니 팔뚝을 물어뜯더라구요. 그래서 자기 담당 의사가유명한 뇌수술 권위자 닥터 김이라는 사람인데 그러더래요. 마취 깰 때 보면 다 욕을 하는데 사람들이 다 똑같더라고... 예수 안 믿는 의사였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걱정이 되시더랍니다.

   
▲ 인도네시아에서
그 당시에 당신 교회에 무슨 일이 있어서 교회 임원들과 의견이 안 맞아서 목사님이 장로님 한 분을 그렇게 미워하셨답니다. 밤낮으로 그분만 생각하면 그렇게 밉고 화가 나서 속이 상하던 터에, 하여간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뇌종양까지 생겼다고 생각하실 정도로 미워하고 있었는데, 걱정이 되시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가 마취 깨면서 그 장로님을 욕할 것 같더래요.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목사라는 걸 다 아는데 얼마나 병원사람들이 관심이 많겠어요. 저 양반은 뭐라고 욕하나 보자... 만일 자기가 그렇게 욕을 하고 저주하면 하나님 망신에 전도문도 다 막히는 거잖아요, 고민이 돼서 그날부터 수술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나도 어쩌지 못합니다. 내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 그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여간 당신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데요.

그리고 수술 당일에도 간절히 기도하며 마취에 들어갔는데... 수술이 잘 끝나고 회복실에서 마취가 풀리고 잠깐 눈을 떴는데 목사님이 뭐라고 그러셨을까요. 담당의사를 보고 “닥터 최,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는 다시 정신을 잃으셨답니다. 그 다음에 이 병원에서 목사님이 유명한 사람이 됐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러더래요. “역시 목사가 다르더라...” 나중에 그 의사가 목사님께 와서 존경한다고, 결국 그 일 때문에 교회도 나오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 단란했던 장기천 목사 부부의 일상 스케치

다음의 글은 <기독교 사상> 1997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국 교회 성직 세습의 문제

                                                    장기천(동대문교회 담임목사)

종교개혁의 달을 맞아「기독교사상」에서 "종교개혁에서 본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기로 한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오늘 한국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의 성직세습에 관한 문제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시도키로 한 모양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그 현황을 파악하고 있거나, 조사 연구한 바도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그 부당성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I. 너무나 참담한 일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급속한 부흥을 이루었다. 특히 서구 열강들의 교회가 아시아지역에서 복음선교를 시작한 지역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가 바로 한국교회라는 것은 공인된 평가다.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서 여섯 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를 뒷받침해 주고도 남는다. 성급한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선교의 사이클이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돌아오고 있다면서, 한국이야말로 21세기 세계선교의 축이 아닐까 점치고 있다.

그런데, 그 한국교회의 상황이 어떠하기에 교회 안에서 성직세습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가? 한마디로 참담하고, 자괴감을 금치 못할 일이다. 지난 선교 1세기 동안에는 극히 드문 현상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1990년대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감쪽같이, 때로는 공공연하게 성직세습을 자랑하는 예식이 벌어지고 있다. 세속에 대한 어떤 이익이나 명예를 포기하고, 다만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데 온 삶을 헌신키로 한 성직자에게 이런 일들은 어떤 이유로도 설득력을 잃게 마련이다.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추구하는 교회로서는, 모양새가 구겨졌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마저 정실(情實)이 판을 친다면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에게나 있을 법한 못된 일인 줄 알았는데, 거룩하고 은혜로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부끄럽고 두렵기조차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성서에서 제사장 제도는 간간이 세습제를 시행했던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별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무엘이 등장하던 때의 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이야기, 예수 당시의 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의 이야기 등은 성직의 세습 제도가 바람직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초대교회는 인물이 절대 빈곤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성직의 세습제도를 인정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중세기에나 있던 이런 악습이 지금과 같은 광명천지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기 곤혹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세속정치에서도 세습은 용인되지 않고 있다. 이익을 목적으로 조직된 기업에서도, 세습 제도는 자랑스런 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기여라는 차원에서, 소유주는 대국적 입장에서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맡기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자행된다는 것은 현대판 사두개주의의 재판이 될 위험이 너무 크다.

한국교회가 전폭적으로 추앙하던 빌리 그래함 전도관, 적극적 사고 방식의 로버트 슐러 목사, 그들도 결국 자식들에게 세습시켰다 하여, 미국의 지각 있는 신앙인들을 실망시켰다.
교회는 결단코 이익집단이 될 수 없다. "살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몸을 바치는 교회가 혈통에 얽매인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다. 설사 적합한 인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업적)만이 찬양 받을 뿐, 어떤 성직자의 업적도 찬양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성 모독적 행위가 될 뿐이다. 어떤 성직자의 업적도 결단코 기득권이 될 수 없다. 다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조직된 그리스도의 몸일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것이 성직자의 삶이다. 이토록 거룩한 동기에서 시작된 성직자들이 은퇴할 즈음에는 그토록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혈육에 의지한다면 너무나 낭패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II. 역사의 교훈
교회 안에서 성직세습이 문제된 것은 11세기 초엽 프랑스 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족 가문에서 감독직을 독점하다 보니, 어린 소년을 감독으로 세운 일도 있었고, 심지어 평신도가 어느 날 갑자기 성직 중의 성직인 '감독'으로 옹립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세기 교회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위 성직의 세습 제도였다.

14세기 동방 정교회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터어키에서 몽골의 침입과 그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징기스칸의 후예인 티무르는 터어키를 비롯한 페르시아, 러시아, 심지어 인도에까지 침투하였다. 특히 터어키는 1360-1402년 사이에 이르기까지 격전지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치명적 타격을 입어 인재의 결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교부의 세습제(Hereditary)를 채택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의 경우 15세기의 교황 이노센트 8세가 자기 형의 사생아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렌치아의 세도가인 메디치의 압력을 받아 열세 살 된 메디치의 아들에게 수도원장직을 맡겼다 칼릭스투스 3세는 조카인 보르기아의 사생아에게 주교직을 맡겼다. 이 아이는 후일 아버지 보르기아가 알렉산더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을 때엔 추기경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이 중세기 교회의 큰 흉터요, 교회 쇠퇴의 원인이라고 보아 이 일을 '보르기아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중세기의 사례들은 성직의 세습화는 성직매매와 상관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직매매의 경우는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해 관계가 그 원인이 되어 있고, 성직 세습의 경우는 성직자들의 기득권이 그 원인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교권의 도덕성이 훼손된 처지에서 그 위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이미 교황의 위신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흔히 종교 개혁의 원인을 속죄권 매매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죄권 매매보다 훨씬 앞서, 구조적으로 썩기 시작한 것이 성직의 세습제와 매매 행위에 있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세습 문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머지않아서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논의될 명분이 충분해질 것이다. 성직 매매와 성직의 세습화가 극심해지자, 12세기의 로마교회는 제2차 라테란(Lateran)회의(1139년)에서 성직자의 독신 제도를 채택, 선포했다. 이 제도는 4세기 이후에 줄곧 논란이 되어 왔지만, 명실상부하게 변경할 수 없는 공제도로 채택된 것은 12세기 제2차 라테란 회의 이후의 일이다.

이와 같은 법이 제정되기까지 성직매매로 엄청난 부를 취득하고, 성직 세습으로 교회의 권위를 독점하는 일들이 교회 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있음을 안 교황 펠라기우스(Pelagius I세, 556~561년)는, 성직자는 결흔하였을지라도 자기 자손들에게 교회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베네딕트 8세(1018년)는 재삼 성직자는 자손들에게 교회 재산을 상속시킬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교회에서 성직의 세습은 교회재산의 상속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제도다.

III. 올바른 성직자 상
메이(W. May남감리교대학) 교수는 목사의 직무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사제와 예언자, 그리고 종(從)과 지도자다. 이것은 오랜 세월 이상적인 성직자 상으로 알려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성직이 지닌 특수한 기능에 알맞는 신앙과 윤리 의식을 지녀야 한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목사가 그리스도의 몸 이외의 다른 몸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에 대한 모욕이 될 위험성이 많다. 주님의 종이라는 사람에게 무슨 기득권이 부여되어 있겠는가? "우리는 쓸모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눅16:7-10). 이것이 종으로서의 성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닐까? 입으로만 쓸모 없는 종이라 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기득권을 주장한다면, 그 행위야말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망동이 아닐까?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딤 2:15)“ 예언자로서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성직자여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다. 말 잘하는 코메디언이나 대중 선동가여서는 안 된다.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 못한다(사56:10)” 예언자가 바른 말을 하지 못하면 당나귀가 대신한다(민22:21-35). 나단은 바른말을 함으로써 임금이자 친구인 다윗을 구원하였다(삼하12:1-15)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흠잡을 데가 없으며,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으며, 쉽게 성내지 않으며, 술 취하지 않으며, 폭행을 하지 않으며,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는 의로우며, 경건하며, 자제력이 있으며,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딛1: 7-9).

성직 중의 성직인 감독(Bishop)은 술 취하거나 폭행을 일삼지 말아야함은 물론, 그것보다 더 높은 윤리적 차원에서 흠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에 정직해야 한다. 청지기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뿐, 그 밖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부정한 이득을 탐하거나 자제력을 잃은 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악신에 사로잡힌 징조일 뿐이다.

경건한 것만큼 정의감이 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성직매매나 성직 세습 같은 봉건 시대의 작태가 용인된다는 것은 성직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현대판 사두개파'의 재현이다.

길키(L. Gilkey;-시카고대학) 교수는 성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를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였다. 성례전적인 교회, 말씀의 교회, 그리고 성령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 어느 부분도 교회는 인간적인 관습에 좌우되지 않게 되어 있다. 성례전적인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의 만남을 뜻하고, 말씀의 교회란, 진리의 교육인과 선포를 뜻하고, 성령의 교회란 어떤 인간적인 조건도 용납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신의 자리로 여긴다면 너무나 위험하고 당돌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이 돌이십니다(엡2:l8-20). 교회는 여전히 사도적(Apostalic)이다. 그만큼 성직의 위치는 신성하고 중요하다. 그래서 아울렌 감독(스웨덴의 신학자)은 "교회는 그 목사만큼의 교회가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 故 장기천 목사
그런데 이 교회가 정실(情實)에 좌우되어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외형적으로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 성령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미지(Image)는 구겨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의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다스리시고, 은혜로 지키시도록 맡겨야 한다. 혼란의 극소화라는 명분으로 성직의 세습이 정당화된다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난 교회임을 드러낸 것이다. 영원히 사는 분은 그리스도이실 뿐,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난 교회 치고 영원히 흥한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교회만이 다시 부활하고, 부흥하는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 그러나 그것들에게 하나님의 기운이 들어가자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한 민족을 형성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운과 바람이 일기를 기원해야지, 성직의 세습으로 명맥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

 


 

 

 
▲ 백두산에서

<우리 곁을 떠나가신 장기천 감독님을 추모하며>

                               이은선(세종대 교수,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I. 오늘 우리 모두는 우리 시대 한 뛰어난 ‘공적 인간’의 삶을 살다가신 분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 단호함으로 추모사를 하는 이은선교수
 

그렇습니다. 장기천 감독님은 이제 어쩌면 우리 시대에는 이미 한 고전이 되어버린지도 모르는 그런 공적 인간의 큰 삶을 살다 가신 분입니다.
20세기 한 사상가는 우리가 공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을 가져서는 안되고, 그 생명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사랑은 자유에는 방해가 되며, 일종의 노예성의 확실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지적과 다르지 않게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는 심지어는 스스로가 성직자와 전문적인 공공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까지도 자신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공공의 직분을 사적 욕망의 채움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러한 시대에 감독님은 자신의 삶을 철저히 희생하며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사셨습니다. 그의 가정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의 가정이 되었고, 그때그때 순간순간마다 그의 너그러움과 배려로 많은 배고픈 학생들과 목회자들, 교인들, 북한의 동포들, 인도네시아의 교회들, 연변의 어린 학생들이 뜻밖의 배려를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런 그와의 특별한 만남을 기리는 많은 글들 속에서 우리는 그 생생한 고백들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와 피를 나눈 가족들의 아픔과 희생은 컸고, 그래서 그의 한 자녀는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경험을 “다른 집에서는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리 집에서는 물이 피보다 진하냐고”라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II. 그런 감독님이 지난 2000년 그의 오랜 목회활동에서의 은퇴와 더불어 출간되었던 은퇴기념문집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바로 그 문집을 집필했고 출간했던 교회로부터 모함을 받았고, 배신을 당했으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 동대문교회
 

청천병력과도 같은 사적 욕구의 오설로 인해서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일?맘爭邨年� 공적 영역은 무참히 무너졌으며, 그곳은 더 이상 인간의 말과 위대한 행위가 드러나는 곳이 아니라 거짓과 폭력, 필연성과 욕구만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비참함과 나락 앞에서 감독님은 말을 잊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사야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53:7)라고 한 것처럼 그는 침묵하셨고 그렇게 묵묵히 곤욕과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III. 오늘 우리 시대에 공적 영역과 함께함의 삶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고, 모두가 자신의 사적 영역으로 숨어서 개인적 욕망과 이익의 충족에만 몰두하게 된 증거를 앞의 사상가는 우리 때에 사라져버린 “영원성”(permanancy)과 “불멸성”(immortality)에 대한 관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종교와 교회는 번창하지만 영원성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래서 모두는 실제의 삶에서는 “실질적인 무신론자”가 되어서 여기 이곳에서의 안락과 안정, 쾌락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말은 영원성에 대한 관심의 부재로 쉽게 거짓말로 화해 버리고 참다운 인간다운 행위가 사라져 버렸지만 감독님은 자신의 말에 끝까지 책임을 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한 기회에 밝히시기를, 자신이 설교를 꼭 글로 남겨놓고자 하는 이유는 후세 사람들에게까지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라고 했습니다.

   
 
 

영원성과 역사성에 대한 그의 배려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고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적인 염려를 접고서 공공의 일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냈던 여러 가지 전설적인 이야기들, 자신의 뇌수술로 생명이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다른 교인의 장례를 먼저 집전했고, 자기 자식의 미래를 걸고서라도 그 자식과 친구들 간의 신의를 위해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욕심을 접었으며,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서 성직의 세습이 일반화된 상황에서도 인사의 문제는 언제나 공개적으로 토론을 거쳐서 공평무사하게 행한 것들입니다.

마치 알버트 슈바이처가 자신 삶의 평생의 화두로 삼고서 살아내고자 했던 말씀, “무릇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라고 한 것처럼 그는 그렇게 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의 진리대로 그는 많은 것을 다시 얻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자녀들로부터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자신만의 가정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가족을 얻어서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아버지로 모시고 싶다는 고백을 들었으며,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IV. 영원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염려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숨기고 감추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숨기는 것은 없다. 내가 행하는 것으로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나이다.”(논어 술이편 24장)라고 하셨던 성인 공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감독님은 숨기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 알고 행한 만큼 모든 것을 터놓고 대화 하셨고, 어떤 특이한 지적 능력이나 남이 모르는 신령한 것을 뽐내지 않으셨으며, 그런 만큼 다른 사람들의 말도 마치 어린아이같이 순진?構� 그대로 믿으셨습니다.

그에게는 따로 자신만의 은행통장도 없었고,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하는 재산도 없었으며, 공공의 영역으로 내놓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한 제자는 감독님을 산, 그렇지만 안이 모두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산”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 투병 당시인 생전의 모습. 2006년12월30일 박효식목사 가족, 이정훈목사, 이필완목사 부부등이 마련한 작은 음악회에서 열변을 토하시던 어른의 모습! 모두들 어려워하는 강력한 카리스마속에 담겨진 얼굴너머에 숨겨진, 다정하고 따뜻한 인자함으로 가득찬 그의 진면모를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런 삶을 사셨기에 인간의 거짓된 말과 비밀스런 행동으로 그가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공공의 장이 깨어지는 것을 보고는 무척 아프셨을 것입니다. 이제 저 자신에게도 마지막이 되어버린 재작년의 새해인사에서 감독님은 정성어린 기도와 함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약간은 당황스런 새해인사셨지만 저는 그것이 무슨 뜻일까를 종종 생각해 보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험에 든다는 것은 바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적인 영역의 일이어서 모두의 시선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늘의 자녀로서, 공적인 인간으로서, 아니 그보다 먼저 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이고 어쩌면 하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벗어날 수 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분의 마지막 부탁대로 그렇게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V. 그러나 감독님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오랜 병중에서 약간 회복되셔서 힘들게 써 내려가신 한 설교문에서,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을 보려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감독님은 끔찍한 일을 겪으시면서도 우리 인간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 서로 용서하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 눈의 대들보를 보라고 요구하셨고, 또한 당신 자신은 이제 기운을 회복하면 한동안 너무 힘들어서 숨고 싶었던 사적 삶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마지막까지 교회와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힘쓰시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감독님이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누가 있어 그렇게 혼신을 다해 부모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공동의 삶을 위해 힘을 쏟으실 것입니까? 이제 누가 있어 우리 민족의 통일을 염려하며 거짓과 악행이 넘치는 교회를 바로 잡고자 할 것이며, 누가 있어 다시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애쓸 것입니까?

그는 우리가 삶에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참된 용기를 지니셨던 분이었습니다. 또한 참으로 정직하고 정의롭게 사셔서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어린아이들과 미약한 청소년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시고 그들의 성장을 큰 기쁨으로 여기셨던 참으로 인자한 분이셨습니다.

오늘 그분의 자녀로서, 가족으로서, 친구와 시대의 동반자로서 모인 우리 모두에게 그분은 바로 그 일을 부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분의 사자후 같았던 목소리를 다시 기억하면서, 그분이 편안히 가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잡습니다. 평안히 가시옵소서.

                                                        2007년 5월10일 이은선 올림

   
 
 

 

장기천 목사(감독) 약력

1930년 3월 20일 생


학력

1955년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1970년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하원 졸업

1972년 센테나리대학(미국 뉴저지주) 명예문학 박사


경력

1955-60년 육군 군목

1961-62년 서울 은제감리교회 담임목사

1962-66년 감리교본부 간사

1967-71년 인천 성산감리교회 담임목사

1971-81년 서울 평동감리교회 담임목사

1981-2000년 서울 동대문감리교회 담임목사

1980-81년 감리교신학대학 강사

1986-88년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1987-91년 학교법인 감리교 신학원 재단이사 및 이사장

1987-96년 학교법인 연세학원 재단이사

1987-93년 한국 N. C. C. 실행위원 및 통일문제위원장, 선교위원장, 환경위원장


가족사항

아내 김영혜

맏아들 대일 (의학박사, 경희의료원 신경내과)

맏며느리 김영주 (전문의, 김영주 이비인후과 원장)

손자 이제


둘째아들 위현 (미국감리교 뉴잉글랜드 목사)

둘째며느리 조유연 (미국감리교 뉴잉글랜드 목사)

손녀 희

맏딸 진아

막내딸 에스더

사위 정석현

외손녀 다원

외손주 준원


저서 및 단행본


<성서연구 및 기타>

[복음과 해방] 현대사상사, 1985

[오늘의 예수] 전망사, 1990

[오늘의 웨슬레] 전망사, 1991

[그 분의 시작 우리의 참여] 도서출판 미래교회, 1977

[오늘 읽은 로마서] 한들, 1991

[잠언과 명심보감] 한들출판사, 1999


<설교집>

[버릴 때와 지킬 때] 전망사, 1987

[복음과 민주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1988

[예수와 함께 세상속으로] 신앙과 지성사, 1992

[좁은 길 넓은 길] 도서출판, 1993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한울, 1995


<수상집 및 칼럼집>

[황혼에 쓰는 낙서] 문왕사, 1969

[말할 때와 침묵할 때] 형성사, 1982

[새 날이 오면] 기독교방송, 1984

[민중시대 복음] 신앙과 지성사, 1989

[살며 생각하며] 한울, 1996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전망사, 1990

[종교와 인생] 한들, 1999


<번역서>

[웨슬리 설교집] 1962

[강자와 약자] (P. Tournier), 1979

[영성의 길] (J. Macquerrie), 1986


<본인에 대한 저서>

[한국사회와 예수] (장기천 감독 설교 연구서), 1995

[깊은 만남 은혜의 세월] 은퇴기념 문집, 2000

   
▲ 삼오제에서 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