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소위 덮어 두고 믿는 그러한 신앙심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가지 않고, 타당성이 없어도 믿어야 하는 그러한 신앙 체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란 우리 인간의 행위(노력, 이해력) 혹은 의지력으로 말미암아서 획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기독교 신앙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란 인간 편에서의 이해와 타당성을 근거로 한 신앙 체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즉 기독교 신앙이란 충분히 타당성과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지적인 충분성을 가지고 우리 인간들에게 찾아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신앙 체계가 진리임을 세상 속에 드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타당성과 충분성을 세상 속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와 같은 가장 큰 이유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역 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해서 대부분의 성도가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별로 들어 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기독교의 신앙 체계를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 역시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기독교 변증에서 허당(?)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왜 기독교만이 진리인가에 대한 충분한 타당성과 분명한 지적 통찰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들에게는 '자기 확신', 곧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믿는다'는 식의 자기 확신만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확신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것이 진리이며, 나아가 나는 왜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지를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히 타당성 있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위 전도입니다. 나아가 변증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왜 기독교가 진리인지에 대해서 타당성 있게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필자가 언급했듯이 배우지 못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이를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니 더 큰 문제는 목회자들 역시도 기독교 변증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성경적 세계관의 이해 부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유는 결국 기독교 변증(학)과 성경적 세계관의 이해는 동일 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보기에 성경적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사실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역?천� 세계관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관을 알아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세계관을 논하지 않고서는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즉 기독교는 성경적(혹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서만이 바로 볼 수가 또는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기독교를 소개(전도, 선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기독교를 세상에 알려 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필자가 볼 때에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무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현 한국교회는 크고 작은 문제투성이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목회자들은 기독교 변증(학)에 대해서 무기력해져 있는 것입니까? 필자가 보기에 이는 기독교 변증(학)이 '기독교의 본질'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소위 기독교 변증(학)이란 '기독교의 본질'과도 같다고 필자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즉 기독교의 본질(진리)을 드러내는 것이 기독교 변증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필자가 볼 때에 기독교의 본질은 현시대 문화 혹은 정신 나아가 현시대의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이와 상충하여집니다. 소위 오늘날 이 시대는 그 무엇보다도 '실용주의'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들 역시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진리)을 다루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저 교회라고 부르는 건물(사실 건물을 교회가 아님에도)에 수많은 사람을 앉힐 수가 있을까만을 고민하는 형국입니다. 그 때문에 실용주의와 극과 극인 기독교의 본질을 논하는 기독교 변증(학) 체계는 이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관심사가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이들에게 기독교 변증학은 자신들의 교회 건물을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방해꾼일 뿐입니다. 왜입니까? 기독교 변증에서 가르치는 기독교는 건물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참고로 말하자면 필자가 말하는 기독교 변증(학)이란 단어는 단순히 신학교에서 말하는 학문적 차원의 '기독교 변증학'만을 말하는 협소한 차원을 넘어서서 성경 자체에서 말하는 순전한 기독교를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먼저 목회자들 자신이 기독교 변증의 회복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변증은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믿지 않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타당성과 설득력 있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지적인 타당성과 설득력이 하나님의 은총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변증은 기독교 신앙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할 때에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변증의 달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되어야만 합니다.
일상속의 교회 / 베리타스 공동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