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면부지의 사람까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지지한다. 실권을 쥔 뒤, 더 많은 이가 찾아와 연신 굽실댄다. 웬만한 자기 의지 아니고서는 권력욕에 취할 수밖에 없다. 정치인 이야기다(낙선자가 받은 충격이 '가족 사망'에 버금간다는 오래전 인도 정신병치료연구소의 분석도 이와 연관된다). 그러나 영예를 위해 감수할 것이 있다. '욕먹기'다. 정치인이 욕먹기를 싫어한다면 스포츠 선수가 냄새난다며 땀 흘리기를 주저하는 것과 같다.
권한을 맡기고 세비를 지원하기까지 하는 시민의 아래에 정치인이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비판한 유권자를 고소·고발하는 위정자가 종종 출몰한다. 허위 사실을 적시하거나 모욕에 가까운 비판인데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게 원통하다면 그 직을 내놓고 시민 대 시민으로서 기본권 침해 여부를 다퉈야 마땅하다. 기실 권력자와 일개 무명의 시민과의 쟁송, 같은 '체급'의 게임인가. 시민의 공복을 자처하며 비판을 압제하는 것은 모순이다. 강용석 의원, 보고 있나.
권력자가 욕먹는 것은 저축과 비견된다. 비판을 받으면, 퇴임 이후의 '까임 방지권'이 그만큼 축적되는 것이다. 힘 있을 때 내내 욕먹은 노무현 전 대통령, 끝까지 감내하더니 힘 잃은 퇴임 이후 봉하마을 내방객의 환호와 서거 이후 500만의 추모를 받지 않았나. 반대로 재임 중 '욕 기피'는 야인 된 이후에 엄청난 채무로 작용할 것이다. 전두환 씨를 보라. '전 재산 29만 원밖에 없는 영세민' 취급받으며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비판 압제는 말뚝이 아니다. 박는다고 눌리는 게 아니다. 도리어 용수철과 같다. 누르고 박을수록 반동만 늘어난다. '각하'도 보고 있나.
이 이야기를 '내곡동 가까이'라는 <나는 꼼수다> 찬송가 패러디를 종교 모독으로 오도하는 한국교회언론회(이하 언론회)한테도 보여 주고 싶다(언론회는 2000년 문화방송 '피디수첩'이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대형 교회를 비판하자 시쳇말로 교회 '쉴드' 치기 위해 출범한 기관이다). 그러나 정신 차리고 이 노래의 희화화 대상을 살핀다면 '각하' 한 사람임이 쉽게 확인된다. 각하를 하나님과 등치시키지 않는 한, 이 노래의 신성모독 운운은 가당치 않다.
언론회의 어이없는 트집,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 3월에는 1/4분기 기독교 보도 행태를 분석한 자료를 내놓았다. 그런데 분류 기준이 '긍정 묘사', '부정 묘사' 등이었다. 무엇에 대한 것이었느냐. 조용기 목사의 대지진 관련 '일본인의 불신앙 탓' 발언, 길자연 목사의 '대통령 무릎 기도' 유도 등이다. 상식적으로 어느 한구석 '긍정'의 관점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100% '부정 묘사'한 것으로 간주된 <한겨레>, 앞으로 언론회에 점수 따고 싶다면 '일본 대지진, 그거 예수 안 믿어서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언론회는 한국 개신교계의 이른바 주류 교단의 지지 기반 위에 서 있다. 얼마 전 신임 교단장 초청 간담회에 참석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길자연 대표회장은 "인터넷에 횡행한 악플이 한국교회에 피해를 주고 있는데 언론회가 잘하고 있다"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후보 시절 금품 살포한 문제가 폭로돼 전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길 회장. 개신교 위기의 근원을 본인이 아닌 악플에서 찾은 것이다.
교회 세습, 헌금 유용, 도덕성 추락, 강단에서의 선거 개입 등으로 교회의 부패상 및 시민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를 다스릴 정서적 해법은 '욕먹는 것'뿐이다. 흠 없는 예수도 무고한 형벌을 감내하지 않았나. 돌을 던지든 침을 뱉든 시민이 용서하는 날까지 개신교의 몸 낮추기는 계속돼야 한다. 맞을 만한 매이고, 당할 만한 수모다. 고로 언론회 존재의 의미는 되짚어 봐야 한다.
김용민 / 시사평론가
* <한겨레>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