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신 예수( 요2:1-11)
혁명 전에 러시아에서 전도 활동을 하고 있었던 바데카 박사는, 어느 산악지대에서 전도집회를 마치고 통역관 겸 안내인이었던 알매니아인과 더불어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그 해 12월은 무척 추웠으며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하여 여행은 몹시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기 위해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 앉으며 사방이 어두워지자 안내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더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바데카 박사는 놀라 물었습니다. "우리가 있는데는 어디쯤 됩니까? 무슨 표시가 없습니까?" 그러자 안내인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어둠 속에서 떨고 있다가 내일 아침까지는 얼어죽고야 말것입니다"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때 바데카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우리는 길을 잃었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가야할 길을 알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박사는 울먹이는 안내인과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 안에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길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갈길을 잃었지만 주님은 우리의 갈 길을 아십니다. 우리는 방향을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를 도우사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기도를 계속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개 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박사는 얼굴을 들고 이렇게 말 했습니다. "저것보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거야." 두 사람은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 갔습니다. 개는 그들을 보자 피하여 도망을 쳤습니다. 개의 뒤를 쫒아간 그들은 얼마 후에 달단족이 사는 조그만 마을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놀란 달단인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들을 아주 따뜻하게 맞아줌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생은 이처럼 어느 누구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이 위기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모친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참 잔치가 무르익고 있을 때 포도주가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는 포도주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위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영원 전부터 계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모든 인류에게 빛이 되셨다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2장에서는 이 빛되신 예수,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가나 혼인잔치의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 인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진리를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포도주의 부족에서 오는 위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보통 밤에 거행을 하는데, 신랑은 친구를 데리고 신부집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식이 끝나면 신부와 그의 여종들과 같이 큰 행렬을 지어서 신랑집으로 갑니다. 이때 따라오는 사람은 등불을 들고 가며 또 음악대가 행렬 앞에서 가게 됩니다. 잔치는 보통 한 주간이나 두 주간 계속 하는데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는 바로 이 포도주가 바닥이 난데서 발생된 것이었습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음으로서 생긴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정권을 잡은 사람과 국민들 사이에 신뢰성이 없을 때 국가에 위기가 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꼭 있어야 할 이해와 협력이 없을 때 국가, 경제에 위험이 옵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 사이에 꼭 있어야 할 사랑과 신뢰가 없을 때 가정의 위기가 옵니다. 개인적으로 꼭 있어야 할 건강과 물질이 없을 때 개인적인 삶의 위기가 찾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에 무엇보다도 꼭 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 위기는 좀더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영원한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 인류는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을 이기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하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신뢰성이 없는 국가, 이해와 협력이 없는 노사문제, 사랑이 없는 가정, 건강과 물질이 결여됨으로써 분명히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기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을 때 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8: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2:19)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는 왜 왔습니까?
아마 신랑집에서는 손님의 수를 예상하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잘 준비한다고 하지만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한계성에서 오는 부족함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로 나면서 부터 무덤에 들어갈 때 까지 준비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고, 출생을 준비하고, 돌을 준비하고, 입학, 졸업, 진학, 직장을 준비하며 장래와 심지어는 무덤까지 준비합니다. 준비하지 못할 때 당황하게 되고 또 아무리 잘 준비했어도 부족함이 옵니다. 특별히 자신의 영혼에 대해 준비하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눅16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육신과 세상 일을 준비하는 것에는 완벽을 기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준비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장막집을 떠났을 때 그의 영혼은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영원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는 왜 왔을까요? 준비의 부족에서 오는 위기였습니다. 인간의 한계성에서 오는 부족이었습니다. 특별히 꼭 계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는 위기였습니다.
어머니의 모태에 있는 아이가 열달을 태중에서 지내는 동안에 그 열달은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야 할 몇 십년의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인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몇 십년의 세월은 다가올 영원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기회를 부여받은 시간들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안에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다면 결정적인 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는 인간의 한계성에서 오는 위기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예수님이 없는 필연적인 위기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위기 또한 부족함에서 오는 위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한계성에서 오는 위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없는데서 오는 위기인 것을 근본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암4:12)
셋째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함으로 그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포도주가 바닥이 났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삶을 살아나갈 때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위기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바닥이 난 포도주를 보충받을 수 있었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였고 바리새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지도자였지만 영적으로, 종교적으로 파탄에 빠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있는 사람이 물질적인 파탄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파탄 지경에 빠져있는 사람을 대변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동등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류의 빛이셨습니다. 그 인류의 빛이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빛되신 예수인 것을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영적으로 종교적으로 파탄 지경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빛되신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그에게 생명이 되신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편을 다섯번이나 갈았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도덕적으로 혹은 양심적으로 파탄에 빠져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너에게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파탄에 빠져있던 이 여인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육체적으로 파탄 지경에 빠져서 인생의 모든 기쁨과 행복을 상실해 버리고 의미와 가치와 목적마져도 빼앗겨 버린 38년된 병자가 나옵니다. 그는 파탄 지경에 빠진 오래된 병자였지만 빛되신 예수를 만남으로해서 사망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아직 오시기도 전인 주전 75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와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4-6)
고린도후서에는 이런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9)
물질적인 가난과 저주로부터 주님은 우리에게 부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 빛되신 예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는 갈릴리 가나에 가셔서 사망을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니고데모에게 찾아가셔서 사망을 생명으로 옮겨 놓으셨으며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5장에서는 육체적인 파탄에 빠져있는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형의 죄와 죽음과 가난과 질고와 모든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형! 예수님은 영적,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모든 삶의 고통과 위기를 담당하시고 삼일만에 부활을 하셔서 우리들에게 생명과 치료와 축복과 구원이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두 팔을 벌리고 어두움 속에 있는 인류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떻게 니고데모와 38년된 병자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되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포도주가 바닥이 났는데 예수님은 물을 떠서 갔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성에 는 맞지 않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위배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감각이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내 이성이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순종함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위기가 어떻게 해야 극복 되는지를 잘 알려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존재가 합리적인 존재가 된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존재가 감각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이 있습니다. 영을 사로잡아서 영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를 하고 마음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서 그 영이 죽어버렸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혼과 육의 기능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가 왕 노릇하고 감각적인 사람은 육신이 자기를 이끌어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하지만 영이 주도권을 잡아야 되는데 20년, 30년 자기 방식으로, 자기 뜻대로 자기 지식과 경험만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에 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혼이 반발을 합니다. 순종이란 인간의 이성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든지, 내 감정이 무엇이라고 하든지간에 영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고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했듯이 예수님은 창조자인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나무를 주셔서 열매를 거두어 포도즙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기도 하지만 물을 직접 포도주로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주실 수 있고, 저렇게도 주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2장에서는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포도즙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높게도 하고 낮게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때 삶의 위기가 극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넘치는 순종을 했습니다.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있을 때 물을 채우라고 하시매 하인들이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땐 부족함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물은 100℃에서 끓습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성령의 임재가 형의 가슴 속에 오셔서 말씀을 해 주시고 인도하며 잘못할 때 책망해 주고 슬픔을 당할 때 위로를 해주시길 원하십니까?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가깝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가슴 속에 계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십니다. 귀를 열어서 듣게 해 주십니다. 그 주님을 영접하셔야 합니다.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음성에 순종하며 나아가게 될 때, 꼬였던 내 인생의 삶은 헝클어졌던 실타래가 풀려가듯 질서 정연하게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시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아마 아무리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도 나아만의 위치와 바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살던 나아만은 어느날 이스라엘의 엘리사에게 병을 고치기 위해서 찾아 갔습니다. 엘리사는 문전에도 나오지 않고 게하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 주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당신의 몸을 일곱번 씻으시오" 그러자 나아만은 화를 내며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 처럼,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 처럼 돌아섰습니다. 화가나서 돌아가던 나아만에게 현명한 부하가 충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보다 더한 일을 하라 하여도 하였을 것을 요단강에 가서 당신의 몸을 일곱번 씻는 일이니이까" 나아만은 그제서야 깨닫고 화려한 자기의 계급장이 달린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요단강 물로 들어갔습니다. 일곱번째 그 몸을 요단강 물에 담갔다가 일어나는 순간에 그 문둥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그 부분을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여전하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주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여섯번까지 순종해도 일곱번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여야 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사람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신앙은 악세서리가 아닙니다. 형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형의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넘치는 순종을 할 때 거기에 넘치는 축복의 역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물을 갔다 주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은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자기 아내에게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삼일 길을 걸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건데 너를 복주고 복주고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조건적인 약속이 절대적인 약속,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각적인 순종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권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순종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수치가 변하여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내었도다." 수치가 변하고 위기가 변하여 축복이 되었습니다. 또 항아리에 포도주가 넘치게 되었으니 축복이 넘쳤다는 말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항아리 하나가 120갈론 내지 180갈론이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여섯개나 가득 가득 넘쳤으니 얼마나 축복이 넘칩니까? 그런데 이 6이라는 숫자는 7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한 것이고 이 6이라고 하는 숫자는 인간의 숫자입니다. 그 항아리에 물이 찼다고 하는 것은 자연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거기에 갈 때 인생은 비로소 포도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연의 하나님 숫자 6에 하나님을 빼어 버리면 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여진 물은 심판과 사망과 죽음을 나타냅니다. 자연 그대로의 사람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빛되신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저와 형의 위기, 삶의 고통,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삼일만에 부활 승천하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시고, 어두움에서 우리를 건져내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물과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맛이 없는 인생이, 포도주와 같이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거기에 그리스도가 없을 때 필연적인 위기가 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결정적으로 어려움을 만날 때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병든자가 있느냐? 가난한 자가 있느냐? 연약한 자가 있느냐? 실패한 자가 있느냐? 고통 당하는 자가 있느냐? 삶의 위기를 만난자가 있느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예수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고 합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우리의 생명은 의미를 찾게 되고, 가치와 목적을 갖게 되며, 맛이 있는 인생이 되고, 우리의 텅 빈 인생은 가득찬 인생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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