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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은 다이나마이트와 같다

지식창고지기 2012. 1. 18. 10:07

물질은 다이나마이트와 같다
케네스 S. 캔춰

대부분의 서구 문명사회는 자기방종적인 물질주의에 아주 철저히 붙잡혀 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최근 몇년동안 내가 관찰한 바로는 물질주의가 우리 사회를 붙잡고 있음으로 해서 어떠한 교훈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극단이 반대 극단을 낳아서, 서구의 여기저기에서는 이제 금욕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정상적인 교회 안에 금욕주의보다는 쾌락주의가 깊게 스며들어가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나 신구약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주님의 생활양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쾌락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위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추구한다. 그들 인생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다. 이것은 우상숭배이다. 반면에 금욕주의자들은 헛된 쾌락을 피하고 자신의 내면문제나 영혼을 위하는 길만을 찾는다. 그런 사람도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역시 우상숭배이다.
이상적인 기독교인의 태도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도, 또는 무조건 쾌락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찾는 일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것은 빈부의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성경적 윤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즉,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해 본다면, 성경의 모든 구절이 이 주제로 귀결 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인 보상만이 최선은 아니다
크리스챤에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빈부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 속에서 이러한 성경의 원리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복합적일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들을 우리의 평안이나 이기적 즐거움을 위한 시각으로만 보려고 한다. 또한 우리의 욕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성경의 가르침 만을 취하고, 나머지 부분은 무시해 버리거나 아주 틀리게 해석해 버린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가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할 때는 그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한 예로 부(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순종에 대한 보상이라고 잠언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람들을 위해 선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 또한 은혜롭게도, 아무리 세상이 타락했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며, 그분의 창조 세계 속에 세우신 원리들을 따라 살면 그 보상도 주신다.
예를 들어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결실이 많아질 것이고, 그것으로 돈을 많이 벌게된다. 이 말은 현실의 어느 한면에서는 분명히 맞는 진리이다. 그것은 창조질서에서 보면 타당한 것이며, 믿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모든 농부들은 부지런해야 하며, 그렇게 했을 때 그들에게 마땅한 보상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의 농작물을 모든 재해로부터 막아 주신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한 금언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약속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부란 선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워두신 원리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겐 보상으로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혹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께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계신다. 타락한 이 시대 속에서는 물질로 써 보상을 받는 것이 반드시 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때로는 그 물질들을 보류하시기도 한다. 우리가 식물을 심는다해도 가뭄, 우박, 병충해 등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한 최상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각기 독특한 역할을 맡기시기 위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셨다.
또한 이 역할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지만, 방해가 되는 것들은 안 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와 함께 주신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포기하는 것들을 이 세상에서든지 저 세상에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때로 약간의 희생, 심지어 생명을 버리게 되는 희생을 요구하실 때 그 요구에 순종하는 것은 결국 손실이 아니다(주님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다. 빌2:5~11을 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줄 보상을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야만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성경 어디에도 회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국에 가면 어여쁜 후리(Houris:회교에서 말하는 극락의 처녀)가 호화로운 잔치에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준다고 쓰여진 곳은 없다.
성경에 약속된 하늘나라의 상급이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물론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좋을 것이다). 또한 그 상급은 우리가 형성한 도덕적, 영적 특성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기쁘시게 했을 때 체험한 기쁨안에서 맺어진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는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가 우리의 우상이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그렇게 철저히 강조하셨는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철저히 그 점을 무시해 버리거나 틀리게 해석해 버린다. 그럼에도 우리가 모든 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다. 소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들이다. 이 말의 뜻은 단지 무의미하게 물질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포기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물질적 부요를 위해 어떠한 것도 요구해서는 안된 다. 그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근본적으로 우리는 부를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반면, 그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다. 그 옛날 성 프란시스가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부란 남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자신에게 축복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과 제 약에 따라 잘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것이 아닌 그것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물론 없어야겠다.
오히려 우리는 그 부유함을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위해서 선하게 분배할 수 있어야겠다.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모여 살도록 묶어 주셨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동등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물질적 부는 선한 것이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마치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성격이 있다. 다이나마이트는 다리를 놓는 일에 사용될 수도 있고, 생명을 앗아가는 일에도 사용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부는 하나님께서 이 우주 안에 세워 놓으신 도덕

적 절제 아래서 선한 목적을 위해 쓰여져야만 한다고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원하는 것, 필요한 것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사치스런 생활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질문도 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사치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사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생활의 기본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보는 것과 사치스럽고 낭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 이 두 가지 차이를 분명하게 금을 긋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을 즐기도록 우리를 초 대하셨고, 또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만드셨다. 우리는 그 창조물을 사용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즐길 권리를 똑같이 갖고 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 우리에게 적당한 양의 몫이 있는데 항상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역할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며, 우리의 신성한 소명을 감당할 때 필요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내가 필요한 것은 얼마만큼일까 이 세상의 좋은 것들 중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 무엇일까 음악, 미술, 여가생활, 집, 차, 여행 이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둘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두 사람이 인생에서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거나, 같은 종류의 일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크리스챤이 필요로하는 것, 특별히 나에게는 아주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것을 그들은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때 그것을 판단하게 되는 데 그런 경우 우리는 위의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또 모든 사람이 공평히 나누어 갖기를 원하시는 뜻에 따

라서, 이 세상의 것들을 나누는 일이다. 또한 이 원리는 우리 자신들은 얼마만큼 가져야 하는가에도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청지기로서 맡은 하나님의 부(富)에 대해 현명하게 판단해야 함과 함께 정직해야 하며, 공평해야 하며, 이기적인 태도를 버려야 하는 책임을 또한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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