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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

지식창고지기 2012. 1. 18. 10:05

비유설교

 

 

밤중에 찾아온 벗 (눅11:1-13)
이 간단한 비유는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도 친구의 강청을 거절치 못하고 구한바를 주고 악한 인간도 사랑하는 자들의 구함을 준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간구를 안 들어 주시겠느냐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기전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극히 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만을 보고 부끄러워 기도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 "강청"이란 말은 파렴치란 뜻이다. 한밤중에 여간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면 떡을 빌리러 갈 수 없다. 그가 파렴치를 무릅쓰고 갈 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 때문이다. 벗이란 관계, 충분히 파렴치한 행동도 이해하고 들어줄만한 관계이기 때문에 강청한 것이다.
어떤 때는 우리 스스로 내가 구하는 것이 파렴치한 것이라 생각되어 간절히 구하지 못하는 때가 있으나 어차피 우리는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간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벗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게 된 것이지 우리 자신만 보면 하나님 앞에 파렴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좋다거나 계속 파렴치하게 하란 말은 아니다. 기도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파렴치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여 기도를 못하지 말고 파렴치할지라도 계속 기도해야 하겠다.
주님이 가르치신 비유의 교훈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끈질기게 기도하란 말씀이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간절하게 드리는 것이다. 즉 기도의 대상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분께 어떻게 구하여야하며 얼마나 간절히 구하여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잘못된 대상에게 간절히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창18장의 아브라함이나 마15:21 이하의 가나안 여인의 끈질김, 야곱의 얍복강변의 끈질긴 간구는 마침내 응답되었다.


잔치비유 (눅14:15-24)
이 비유는 15절에서 말한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이다. 눅9:57의 경우 한 청년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좆으리이다 할 때에 ...여우도 굴이 있고...라고 대답하셨는데 이 비유도 이 말에 대한 칭찬이나, 격려나, 동의를 해주는 대신 무섭도록 엄격한, 가장 강경한 말씀을 해 주셨다.
분노와 심판, 비천한 운명으로 채워져 있는 이야기이다. 24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에게나 아니면 어떤 강력범에게 혹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신랄한 반대자에게 말씀이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해서 존경의 뜻으로 말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점이다.
첫째,
이들은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잔치가 시작될 때 하인을 시켜 안으로 모시려고 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변명을 늘어 놓았다. 이들은 초청을 수락할 때 철저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하였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막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저항이나 부정이나 캐물어본 적이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둘째,
두번째 초청은 진정한 시험이 된다. 첫번 초청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두번째 초청은 제한된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가거나 가지 않거나 해야 한다.
셋째,
두번째 초청에 불응하고 변명한 것은 주인을 무시하고 모욕한 행위다. 그들은 다른 일이 없었다면 잔치에 참석했을 것이다. 다른 일이 있자 초청이 짐스러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만을 우선시켰다. 우선의 원칙은 하나님께 적용해야 한다. 편의 위주의 원칙을 적용하면 가공스러운 잘못이 된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면서 그러기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복-신령, 육신-을 받기 원하면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서, 자신들을 즐겁게 하면서, 이 세상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죄스럽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국의 일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임으로 입증해야 한다.
* 이들의 변명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밭이 갑자기 움직여 사라지기라도 하는가? 소들이 몇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가? 평생동안 아내와 같이 살지 못할 것처럼 한 것은 무례 막급한 일이다.
딛1:16. 입술로는 하나님을 선포하나 실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들을 보라. 돈, 성공, 인기, 욕망, 정욕. 주님을 믿노라 하고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그것에 우선시킨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므나 비유 (눅19:11-27)
이 비유의 동기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며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긴 기간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없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실터인데 저희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시고 능력과 권세로 로마의 세력을 꺾으시고 당장에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가르치시고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길게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기간이 의미없는 기간이 아니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여야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므나' 희랍화폐단위 -- 100데나리온이 1므나
* 행1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사도들의 질문에 너희들은 때와 기한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심.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즉 성도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예배와 봉사와 거룩한 생활이다. 집회출석, 교회봉사, 생활의 거룩함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충성, 책임감 있는 직분자들 되라.
* 주님이 재림하실 때 충성여하에 따라 상급이 비례된다. 태만과 게으름은 있는 것도 빼앗긴다. 그리스도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은 무서운 진노로 죽인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16:1-13)
비유해석에 주의할 점은 너무 세밀하게 분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자는 누구인가? 청지기는 누구인가? 소유를 허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직분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탕감하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정당한가? 등등이다.
(인간이 죄악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비트링가는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그때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잘못함으로 지도권을 잃어버린 것을 가리킨다고 함.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경우 많은 문제가 뒤 따른다. 이 비유는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박윤선-불의한 재물은 재물을 맡은 자가 주인의 뜻대로 쓰지 않고 제뜻대로 씀.
칼빈-재물자체가 불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물이란 사기, 폭력, 불법수단으로 얻는 경우가 많으며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자랑이나 사치, 타락된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재물이 우리에게 위험한 것이라는 것으로 여기게 하실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재물이라 하셨다.
이 비유는 물질에 탐심을 가지지 말고 이웃과 친구를 위하여 선하게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이 비유가운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청지기 직분을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우리 소유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가지고 흩어 구제하고 , 이웃에게 선물을 주고 선하게 사용하라. 왜냐하면 재물이 없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재물이 없어질 때라는 의미보다 사람이 죽을 때로 해석.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쌓아올리려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고 선히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오랜 인생을 계속할 것이라는 그릇된 희망으로 기만당하여 그리한다.
그리스도인은 잠시 청지기로서 맡아있는 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영원한 재물 즉 영원한 처소 내세를 준비해야 한다. 마6:19-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 동록, 도적이 해한다. 이런 것들이 해하지 못하는 하늘에 쌓아두라 없어지지 않는 재물은 남을 위하여 선하게 구제하는 것이다. 마25:31- 그렇게 함으로 천국을 얻는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인간적 방법, 마치 친구들을 사귀는 부자가 불운에 처할 때 친구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 처럼 우리의 친절한 행위는 때에 맞는 피난처가 될 것이다.
돈뿐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것은 없어질 때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수 있도록 사용하여야 한다. 시간, 건강, 재능, 물질등을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고 준비하는데 목적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다.
이 비유는 불의하고 악하게라도 재물을 많이 모아 자선을 하거나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에 대해서 지혜롭게 한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도 지혜를 배우라는 의미이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눅12:13-20)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동기는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는 도중에 그 말씀을 가로막고 가족의 유산에 관한 논쟁의 중재자가 되어서 부당한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책망하시고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가르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것을 모르고 비유에 나타난 부자와 같이 먹을 곡식만 많이 쌓아 놓으면 오랫동안 평안이 먹고 마시고 즐거웁게 살 줄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1.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도 인명은 재천이라 했다) 마6:25~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기르신다. 사람은 더 귀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귀하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참으로 다양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일은 거의 없다. 굶어 죽는 것도 그 사람의 생명이 다돼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즉 기근, 흉년 등으로 죽게하는 것이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밥 잘먹고 갑자기 죽는 예도 허다하다. 없어서만 못먹는게 아니라 많이 쌓아두고도 못 먹고 죽는 예가 허다하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는 것이지 소유가 많아서 사는 것은 아니다. 이 진리를 잘 깨달으면 탐심을 물리칠 수가 있다.
2. 인생의 행복도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행복하지 못한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심령이 기쁨이 있고 평안해야지 다른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이 부자는 물질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 줄 알았으나 생명을 불러 가시니 그가 쌓아 놓은 것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부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할 때는 부자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부자가 되면 가난할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고들 깨닫는다. 부자가 건강을 잃을 수 있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수도 많고 도덕적 타락도 많다.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허영과 사치와 향락과 죄짓는 생활을 많이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
① 많은 재산관리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가짐 17~19.
②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부에 의하여 잘 보전될 줄 알고 있는 점. 즉 자기 생 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점을 몰랐다는 것이 어리석은 점이다.
③ 재산을 믿고 안일한 생활의 확실성을 자신하는 망상. 19절.
④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점 -- 자기 재물의 부요를 믿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량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애를 쓰면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만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땅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주님의 돌보심만 의지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눅10:25-37)
성경에 기록된 많은 비유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비유가 탕자 비유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이 비유를 하게 된 동기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 이상의 것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율법을 무시하고 어떤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임을 알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들은 이웃이란 자기들에게 필요한 사람 즉 혈연, 지연, 친구, 동족으로 제한하여 다른 사람은 이웃으로 치지 않고 이방 사람은 원수로 대함. 그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의 범위 혹은 이웃은 어디까지 한계를 그어야하느냐 질문.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 비유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 한다거나 사람이 그 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편에 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뒤밀치고 내버리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도구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영생이 있는 자가 한다. 적극적으로 율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이를 행한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교훈)
이웃은 범위고 모든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불타고 있었는가? 그런 사마리아 사람을 들어서 유대인의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은 묻는다. 제사장, 레위인 포함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자라고.
* 프란시스 베이콘 -- 꿀벌, 개미, 거미.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없으나 무방한 사람, 없어야 할 사람. 이 비유를 가장 많이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상처받은 인간은 타락이후의 아담의 상태를 비유한다고. 인간성의 타락, 반죽음,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치유의 가능성 시사. 선을 행할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또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본다. 포도주에 기름을 타 부어준 것은 우리를 회개와 은혜의 약속으로 주시기 때문이라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장 회복시키시지 않고 주막집 즉 교회로 보내 점점 건강을 회복시키신다고. 예루살렘은 교회, 여리고는 세상, 강도는 마귀, 주막은 교회, 두 렙돈은 신구약 성경.
칼빈은 헛소리를 꾸며대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잔소리꾼들의 조작이라는 점을 누구든지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13:1-23)
비유 는 광의적으로는 속담, 수수께끼 같은 표현, 격언적인 교훈을 포함하여 말하나 협의로는 人生事나 自然現象 가운데서 뽑은 이야기로서 계시의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을 뜻한다.
비유는 한마디로 말하는 명유도 아니요 세부에 미치는 자세한 비교를 하는 풍유도 아니요 그것 자체로서 작은 이야기가 될만한 것으로서 각각 어떤 하나의 하나님 나라의 교훈과 경고와 위로와 정죄를 중립적으로 주는 교훈의 형식이다. 즉 비유는 하늘의 뜻을 가진 지상의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 즉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려운 진리를 직설적으로 진술하기 보다 우선 잘아는 이야기로 즐겁고 쉽게 이해하여 전할 목적이 있으며 마13:13~ 또 다른 면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비유를 해석하는데 주의할 점은 직설적으로 계시하신 다른 말씀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비유의 내용의 욧점을 파악하는 일이 긴요하다.
다음으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다른 여러 비유가운데서 차지하는 위치 막4:13"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찐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이 말은 이 비유가 다른 비유보다 쉽다는 뜻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비유란 의미이다.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비유의 이해를 위한 기초가 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해석을 해주시면서 공관복음에서 일련의 비유들의 선두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기본 성격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기본 성격은 말씀을 뿌리는 것. 복음전파는 중요한 천국의 현상이다. 그리고 천국은 씨뿌리는 단계가 있고 추수하는 단계가 있다.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추수는 하게 된다. 그런데 뿌리기는 했는데 결실을 못해서 추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즉 천국 복음이 세상에 전파될 때 이러한 반응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듣는자의 자세가 중요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경고한다.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 까지 빼앗기리라.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주님은 네가지 듣는 자들을 열거하신다. 1/4만 결실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관련되었다. "말씀을 듣고..." 교회출석 안하는 사람이 길가가 아니다. 성경을 않읽는 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설교를 않듣는 자가 아니다. 주님은 원근 각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비유를 볼 때 참결실하는 신자가 소수일 것만은 틀림없다. 눅13장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참 적은데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는 더 적고 그 적은 수 가운데서도 못 들어갈 자가 많다. 성경 읽고, 설교 듣고 하면서도 길가일 수 있다.
길가의 씨는 새들이 주어 먹으니~ 단단한 길 위에 씨앗이 노출됨. 씨앗을 마음속에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씨를 뿌리면 새들이 떼지어 줏어 먹으려고 농부의 뒤를 따른다. 씨를 간직하지 않으면 빼앗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탄이 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경우도 있고 말씀을 듣고 잘간직하지 않으므로 빼앗긴다.
공관복음 모두에 "빼앗나니" 안뺐기려면 잘간직하고 늘품고 있어야 한다.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이야기 한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관점대로 못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도 성경에서 윤리를 발견하고, 교훈을 발견하고, 자기 생리에 맞는것 많이 찾아낸다. 그러나 계시를 모른다. 죄와 구속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역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령한 것도 모른다.
* 듣는 일은 결실을 위한 첫단계 -- 진리는 같은 것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성의하게 듣는 자, 알아볼려는 관심이 없는 자, 비판하기 위하여 듣는 자, 자가중심주의, 자가 생리에 맞지 않으면 귀를 막는다. 새김질하고 재음미해보지 않고 무관심주의 깨닫지 못한다.
* 비유는 영적 진리를 보다 더 쉽게 설명, 천국 진리를 인상깊게 간직할 목적-땅에서 되는 일로 시작하여 하늘로 인도, 볼 수 있는 일로 시작하여 보지 못하는 것 설명, 아는 것 가지고 알지 못하는 것 설명.


돌밭에 떨어진 씨 (마13:1-9)
천국운동은 말씀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씀 선포와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과 그리고 들은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문제, 또 그 말씀을 깊이 뿌리를 내리는가 못 내리는가 하는 문제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이 세상의 삶과 관련하여 침체되는 문제, 그리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여 지킴으로 결실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 돌밭은 산밑의 큰 바위위에 토사로 얇게 덥혀 있는 땅. 여기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나오나 결실한 열매는 얻을 수 없다. 바위가 차단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뿌리가 없어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말라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뿌리가 없는 문제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차단하고 막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바위)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결과를 살펴보자. 무엇인가 차단하여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씨는 즉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넘어지는 자요. 누가는 배반하는 자요. 말씀(혹 천국, 하나님 나라, 신앙) 때문에 어떤 손실이 올 경우 배반하는 자이다. 그러하다면 여기서 말하는 바위 즉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자명하다. 즉 自我이다. 자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앉아 있어서 그 이상은 뻗어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도 종교를 필요로 하고 또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감격도 하고,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기엔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아무도 분간할 수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잘모른다. 말씀 때문에 큰 핍박과 환난이 일어나서 넘어지든지 배반할 때에야 돌밭임이 드러난다.
그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고 종교적 신앙을 가지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이다. 종교적 열정, 종교적 활동, 모든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어떤 가치, 어떤 위안, 어떤 만족을 주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자기 손실과 자기를 포기하고 내놓으라고 할 때 배반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들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점을 주의하자.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 만족을 줄만한 가르침을 주면 무척 기뻐한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이 생명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한 종교적 감정과 열정이 감격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황홀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자신들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을 얻을 때에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해서 길가나 가시떨기보다 나을바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 내가 중심이 되는것 아니다. 자신을 위한 모든 종교적 열정은 그것이 만족이나 위로를 주던지, 기쁨이나 감격을 주던지, 현실적으로 어떤 소득이 있던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분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때에 차단하는 요소가 제거되어야 어떤 경우라도 깊숙이 뿌리를 박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로울 때만 받아들이고 손실이 올 때는 막고 차단한다. 그것은 버린다. 어떤 결정적인 요구를 해올 때는 종교도 포기한다. 혹은 형식은 붙들고 있으나 적당히 타협한다. 신사참배~그렇게라도해야 문닫지 않는다고 논리전개.
전폭을, 전부를,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배반하거나 넘어진다. 이것은 평소부터 그속에 바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바위는 속에 들어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점이 없다.


바위에 떨어진 씨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하는 경멸자들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알 때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만 관련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중 대부분이 망한다면 구원의 설교를 공공연히 거절하는 세상에 속한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 길가는 처음부터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씨를 표면에 놔두지만 돌밭은 처음은 밭아들인다.
* 종교를 왜 필요하게 생각하는가? 종교는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려고 종교를 가지는데 행복은 고사하고 네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하면 믿겠는가? 궁극적인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일진대 나에게 손실과 손해가 있을 때 이런 것들도 궁극적인 자기 유익을 얻게 된다면 희생을 하고 손해도 봐가면서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감수하겠지만 나 자신을 내놓으라,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할 때는 넘어지고 배반하는 것이다.
* 길가나 돌밭이 표면상으론 다르지만 사실상 뿌리가 깊이 뻗어 들어가지 못하는 점에서는 동일함.
* 말씀의 씨가 속에 뿌리가 뻗어 나갈 수 없는 마음 자리가 있다. 처음에는 외부로 싹이 나서 가자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뿌리가 뻗지 못하여 환난이 올 때 넘어진다. 뿌리가 없는 것이 가장 특성적인것. 뿌리가 있어야 햇빛에서 장성하고 열매를 맺을텐데 뿌리가 없어서 큰 손실이 그를 휩쓸 때 포기하는 것이다.
* 넘어진다, 배반한다. - 교회를 떠난다거나 출석을 안한다거나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 돌밭은 외부 사람은 물론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도 모를 수가 있다. 왜냐하면 넘어지기 전까지는 그가 넘어질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전체 전부를 드려야지 부분을 드려가지고는 않된다. 신6:4, 마22: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 돌밭은 참된 자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생명의 도리로다. 종교적 요구에 만족할 수 있는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였다.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 (마13:1-23)
주님은 말씀을 듣는자들 가운데서 세번째 부류로서 말씀이 싹이 돋아 올라와서 자랄 때에 그것이 잘자라 결실을 못하게 가시떨기가 그 기운을 막았다고 하신다. 가시떨기는 영적 생활을 침식시키는 큰 세력인데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과, 또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쾌락이라는게 있어서 결실치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① 이생의 염려라는 것은 별다른 특수한 사람들이 가진 염려라든지 혹은 어떤 죄악적인 염려라는 것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아무라도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염려 -- 어떻게하면 살까?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이다. 사는 문제에 염려안할정도로 생활이 안정되면 어떻게 사람답게 살까? 출세하고 살까? 하는 마음의 요구로 나쁜 의미가 아님.
② 재물의 욕심 -- 독특한 죄악이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다 추구하고 나가는 것. 미묘한 관계가 있다. 저축이라는 것. 재물에 대한 표준 성경이 안 세워진 것 아니다. 자기가 표준을 세워. 얼마까지는 적당하고 그이상을 보고 나가면 욕심이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마음 자리가 문제이다. 재리의 욕심이 큰 문제는 말씀의 씨에게 자기가 주어야 할 중요한 것들을 못 주고 있는 것.
③ 쾌락 -- 행복추구도 ~다 변호될만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부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없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권리다. 이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람의 기본권리다. 이런 것들이 왜나쁘냐?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선덕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 가는 일을 저해하고 그것을 질식케해서 맘 기울임과 에너지와 정성을 그 선덕이라는 것 그유가치하다는 것 때문에 자기맘에 도사리고 앉아서 흡수해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자기의 정성이나 자기의 노력에는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었던지 적게 벌었던지 그것이 최종의 문제가 아니라 이생의 염려, 행복추구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못해서 열매를 못 맺는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만 이세상에서 중시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의 생활양식, 생활양태 그속에서 나타나는 까닭에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띠고 발휘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활양태와 구별됨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다. 씨를 품은 사람은 많아도 열매맺는 사람은 적다. 마음만 가지고 있어선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백성들의 그러한 생활로 표현이 되서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데 의미를 가진다.
열매 안 맺어도 하나님 나라라고 집어 넣고 적당하게 내맘대로 교인생활 잘했으니까 그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하는 것이다. 그걸 보여준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렬하고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렬해도 마음과 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한다.
하나님 나라를 강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씀의 사역이라는 것은, 즉 하나님 말씀에 정당한 장성과 그로 말미암은 결실이라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느냐하면 그 사람이 전생활과 생명을 오직 거기다가 기울이고 사는 것이다. 이세상에도 마음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마음을 주고 그렇게 해서는 열매를 못 맺는다. 아무 열매 맺어도 되는 것 아니다. 사5: 들포도. 세상 것은 조금만 저도 잘자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정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랄 수 없고 열매 맺을 수 없다.


좋은 땅에 뿌리어진 씨 (마13:1-23)

지금까지는 말 씀을 듣는 자들 중에서, 또는 듣고 어느 정도 깨닫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결실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도 말씀을 들을려고 사모하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천국말씀을 들었으나 여러 가지 저해요소가 있어서 마침내 결실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좋은 땅이다. 좋은 땅은 무엇인가? 풍성한 결실을 하는 땅이다.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으나 수량의 차이는 있다. 질은 똑같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이다. 다 100배가 아니고 30배나 60배도 있다. 30개 맺었다고 악한 열매나 못된 열매는 아니고 아름다운 열매이다.
천국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것이고 듣기는 했으나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은 좋은 땅이 못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만큼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이고 힘을 쏟아야한다. 몇가지 단계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① 토질이 비옥해야 한다. 눅8:15, 착하고 좋은 마음. 본래부터 좋은 토질도 있으나 나쁜 땅을 개간하여 퇴비를 넣고 갈고 손질을 잘해서 좋은 땅을 만들기도 한다. 타락한 인생은 본래부터 착하고 좋은 마음은 없다. 황무지와 같고 우거진 가시밭과 같다. 묵은 땅과 같다. 호10:12, 렘4:3.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속에 파종하지 말라. 물론 우리 스스로 묵은 땅을 갈아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 수는 없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결실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열매는 우리가 맺어야하며 열매를 맺는 일에 우리의 책임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열매를 못 맺는 것은 하나님이 안해 주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책임과 태만과 정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5:1- 심히 기름진 산,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 심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팠다. 4절을 보면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그런데 들포도를 맺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파종이 필요하다.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다. 즉 말씀을 뿌려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밭일진데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듣지도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길가처럼 단단한 마음, 강퍅하고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을 갈아엎어 부드럽게 만들고 뿌리를 뻗지 못하게 차단하는 마음을 깨뜨리어 뿌리를 깊이 박을 수 있게 만들고 가시떨기도 뽑고 짤라내어 말씀이 싹이 나고 뿌리를 박고 줄기가 튼튼히 자라서 결실할 수 있도록하자. 우리의 상태를 숨김없이 들어내놓고 회개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부단히, 끊임없이 결실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열매맺을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하자.
마19장의 부자 청년처럼 재물 때문에 포기하지 말자.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천국을 포기할 만큼 값지거나 귀한 것은 없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같이 이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천국의 그것과 비교하거나 견줄만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것 포기하고 잃을지라도 전심을 다하고 전부를 다드려 결실하자. 열매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어 나가는 것이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열매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당연히 그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가라지 비유 (마13:24-43)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바로 뒤따라오며 비슷한 점이 많다. 여기서도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뿌리는 자는 인자로 분명하게 표시된다. 씨는 좋은 씨이고 그좋은 씨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고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토양이 아니라 원수다.
어떤 사람들은 앞의 비유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님의 밭(교회)에는 외형적인 가짜 신자들(가라지)이 많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하신 비유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경건하고 참된 신자들이 좋은 것과 추악한 것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싫증이나 진저리를 느끼지 않도록 주로 경건한 신자들을 보호하시는데 이 비유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 비유가운데서 가라지를 뽑지말라는 이유를 생각해야한다. 가라지와 알곡을 분별하가 어려워서인가? 두가지가 서로 얽혀서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경건한 신자들을 보호하는데 역점이 주어지는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복음전파로 실현되며 추수기는 아직 아니라는 사실이 계시 됐는데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는 악인의 심판이 따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이 왔다는 선언에는 심판과 세상끝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최종적인 심판과 세상끝은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지금은 끝이 아니기 때문에 가라지가 섞여서 넘어지게 하며 불법을 행하고 있다. 천국이 왔는데도 이런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목적이다.
지금까지 계시의 내용으로서는 천국이 올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영원히 구분하시리라 하셨다. 이런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도래에는 두단계가 있고 최종으로 나타날 단계를 처음 단계에서 기대하지 말라는 경계로서 이런 계시를 주신다. 천국은 세상끝이 오지 않은 시기에서는 불완전한 상태를 포함하며 천국의 유형적 기관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교회안에서 권징을 금하는 것도 아니다. 마18장에서 권징을 명하셨다.
권징의 원칙은 선악의 절대적 분리를 꾀하라는 것도 아니고 천국의 최종상태의 순결을 이루라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신앙고백에 알맞는 거룩한 상태를 순결하게 유지하고 죄인을 고쳐 구원하려는 권징을 잘 수행하면서 이 비유에서 가르친 교훈을 가지고 교회가 완전히 순수하지 못하다고 실망하거나 교회를 떠나거나 손해보지 않아야 된다. 이 비유를 빙자하여 권징을 게을리 해도 안되고 이 비유의 경고를 무시하고 천국을 지금 당장 사람의 손으로 최종단계로 끌어 갈려고 해서도 안된다.
교회가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로 성장하도록 절대적으로 순수함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을 금하는 말씀은 아니다. 주님께서 세상끝에 최종적으로 분리하실 때까지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있게 될 것이나 지상에 있는 교회가 절대적으로 순수할 수 없으니 순수할려고 힘쓸 것도 없다는 논리는 성립이 안된다.
* 파종자는 주님 홀로 이시다 - 사역자들은 그의 손과 같고 주님만이 주장자이시다. 가라지는 애초부터 종자가 다르다. 참신자가 어떻게 잘못해서 가라지가 되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마귀가 심어놓은 것이다.

종들과 회계하는 임금님 (마18:21-36)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의 질문은 앞에서 주님이 범죄자에 대한 교훈에 이어서 나왔다. 교회가 범죄자를 취급할 때 어떻게 해야할까를 교훈 하시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여기에 이어서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리이까? 주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욧점은 용서라는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하며 용서를 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천국백성이 아닌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만이 가는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어떻게 용서하시는가를 안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와 은총을 안다면 용서에 인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용서의 차원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형제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일만달란트" 1달란트(헬라의 화폐단위)는 미화 960달러 - 한화 80억원 이상
용서는 자비에 근거하고 나온다. 천국의 왕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다. 채무자를 불쌍이 여겨서 채권까지 포기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셔서 의무 이행을 요구하신다면 용서받고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큰 희생을 치루셨다. 롬3:24(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
엡4:32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5:1-2.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은 30절에 같은 처지의 동관이 동일한 호소를 했을 때 허락하지 않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천국은 자비하신 왕께서 다스리시며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은 그 나라 백성되기에 합당치 않다. 형제를 용서할 줄 모르는 잔인한 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의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점을 부단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큰 용서를 기억하고 형제를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 한다.

포도원의 품꾼들 (마20:1-16)
* 이 비유의 동기 : 베드로의 질문 - 젊은 관원의 사건과 근심하며 돌아간 젊은이...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매우 잘못되고 거짓된 어조를 탐지해 내셨다. 그래서 그를 꾸짖고 책망하고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해석의 열쇠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먼저된 자가 누구인가? 질문자인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이며 충성스런 중진 일군들, 그렇게 봉사하고 충성한 것이 잘못이고 나중되는 것이 좋은 것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런 먼저된 자들에게도 위험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런 위험성이 없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원수요 영혼의 대적자가 있기 때문이다. 초신자에게만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위험성이 항상 따른다.
* 이 비유중에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하는 원리가 하나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원리에 맨마지막에 온 자들도 처음부터 일한 자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늙어 개종한 자들에게 종종 찾아드는 낙심, 너무 늦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생의 늦부분에 개종한 사람들은 때때로 구원이 그에게 좀늦게 임하였고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을 미끼로 삼는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열한시에 그들을 불러 일터로 보낸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의 강조점은 오히려 먼저 온 사람들에게 있다. 이 비유의 중요한 목적은 먼저된 자들에게 교훈 하시고 엄숙한 경고를 하시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포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보냄을 받은 이 사람들은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 슬픈 인물로 나타났습니까?
① 2절 "저가 품꾼들과 약속하여..." 맨처음 사람들의 경우에만 되어진 것. 그들은 ㉠ 계약을 맺을려고 노력하는 경향 ㉡ 어떤 것들을 명문화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 곧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일하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다.
② 그들이 자신의 일을 평가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가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둔다. 그들은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것 - 을 간직한다. 이 사람들은 최초의 잘못된 태도 때문에 즉 그들이 은혜의 원리를 잊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받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더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완전히 논리적이었다. 그들은 더많이 받을 자격이 있고 더많이 받아야 한다는 감정을 갖고 더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더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③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은 다사라져버렸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해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은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에서 결과되어진 것이다.
④ 결국 먼저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질투도 포함된다. "나중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탕자비유중 맏아들의 경우. 이 경향은 충실하고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간교한 방법으로 들어와 시험한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주는 것은 주는 자의 뜻인데> 내것이나 받으면 되었지 남을 간섭하고 질투하는가?
⑤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일은 그들의 마음 속에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가진 점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세어보아라. 그런데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다른 친구들을 보아라.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얻은 것을 보아라"라고 마귀가 유혹한다.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에게 한데나리온을 주다니 -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이,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라고 느낀다.
* 이에 대한 치료책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배하는 원리를 이해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항상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인식이 필요. 과거의 생활 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나의 모든 생각은 달라져야 한다. 나는 옛생각의 개념들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매매나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했다해서 나는 무엇인가 댓가로 받을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논쟁하는 것처럼 잘못된 영은 없다.
{예} 자동판매기식. 내가 무엇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다. 기도, 헌금, 봉사. 우리는 매매하는 정신에서 벗어납시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면 그러면 저것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식. 성경에는 상급에 대하여 가르친다. 상급조차도 은혜에 속한 것이다 - 주님은 그들에게 주어야할 필요는 없으시다.
* 하나님과 흥정하지 말자. 하나님과 약속을 맺으려한다면 그것밖에 더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다. 나중온 자들은 약속하지 않았다.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우리가 생각해본적도 없는 많은 것을 틀림없이 받게 된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상을 이미 받았노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그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였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으며 더이상 가질 수 없다.
* 우리는 나의 일에 대한 기록이나 계산을 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계산을 기록하도록 하자. 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자. 계산을 기록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계산방법은 우리들의 물질적인 전망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나중된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전세계가 은혜로 인하여 뒤바뀌어진다. 연약한 가운데 강단으로 나아가나 능력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바보와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낙심된다.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일만 하라 기록은 하나님이 하신다. 마25장의 양과 염소 비유

악한 농부 비유 (마21:33-46)
악한 농부 비유는 앞에 나오는 두아들 비유에 이어서 주시는 비유로서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즉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무슨 권세로 하는 것이며 누구에게 그런 권세를 받았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하여 주시는 비유이다. 즉 이들의 이 질문은 그리스도의 그런 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가르치는 권세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자신들의 허락과 인정 없이는 할 수 없는데 너는 어디서 누구에게 권세를 받아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게 되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포도원으로 비유된 것은 하나님 나라임이 틀림없다.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친히 세우시고(33절) 농부들에게 세로주고 타국에 갔다. 사5:1- 포도원. 이스라엘이 들포도를 맺은데 문제가 있으나 여기 주님의 비유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고 안 맺는데 문제를 집중하지 않고 포도원을 임대하고 임대조건을 이행해야할 이 농부들의 악한 행동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에 심고 온갖 조건을 다갖춘후에 지도자들에게 관리하도록 맡겼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게 된 것은 열매를 맺지 않은데 있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주인의 포도원에서 얻은 총수익에서 일부를 소작료로 내라는 것인데 그것을 주지 않고 거부할 뿐 아니라 악하게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와 농부들(유대의 지도자들)의 포악하고 극악한 죄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마태는 35절에서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고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막12:2. 한 종을 보내니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고 다른 종을 보내니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고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를 죽이고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렘25:3. 23년동안 부지런히 일렀으나... 4절 여호와께서 그 모든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시51:1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 요구는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요구하신다. 종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 결국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라도 기어코 받아내고야만다.
이 악한 농부들(유대 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은 아들까지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리고 상속자니 죽이고 우리가 차지하자 하였다.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에게 주리라. 시118:22,23 인용.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버린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로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그리스도께서 기초가 되신다. 교회의 일군은 사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은 멸망, 돌위에 떨어지는 자. 그리스도에게 부딪히는 자는 깨진다. 시2:12.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지라.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그 중심이 되시고 그 뜻이 실현됨 하나님께 열매를 드리지 못하면 그 나라를 빼앗긴다.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국한된게 아니고 전 세계적임 - 하나님이 기이하게 하심.
회개 (마21:28-32)
회개란 자신들이 저질러온 어떤 일들에 대한 피상적 슬픔이나 뉘우침 정도나 죄를 짓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짓고 다시 유감으로 여기는 일을 거듭 되풀이 한다.
회개가 무엇인가? 정의하면 복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어떤 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어떤 악행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뉘우침과 괴로워하는 정도가 회개가 아니다. 그런 정도는 가룟유다도 행한바이다.
본문에 나타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명령, 즉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는 말씀을 실소이다하고 거부하였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원하시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시는가? 마7:21,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는가? 요6:29,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복음을 믿으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싫소이다 거부한다. 이렇게 거부할 때는 그 요구가 부당하게 느껴지며 그 명령을 불쾌하게 느꼈기에 퉁명스럽게 싫소이다 했을 것이다. 복음을 믿으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부당하게 느껴지며 그 명령을 불쾌하게 여기며 거절하고 거부하는 자들 많다. 그런데 이 아들은 그후에 다시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
무엇이 그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는가? 다시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여보고 깊이 있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그 일을 저울질하고 살펴봤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았을 것이다.
회개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뉘우치고 복음을 믿는데까지 나가는 것이 참회개이다. 그러나 복음을 믿기까지는 자신이 잘못됨과 이제까지 지내온 것이 모두다 하나님께 잘못된 것과 현재 상태도 잘못된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만이 복음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할 수 있다. 눅15장의 탕자비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정당하다고 할 때 나는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부당하시다고 생각할 때 내가 옳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회개할 수 없다. 예레미야 -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 부당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내가 불의하고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 생활이 우리자신에게조차 잘못되었을 진대 하나님께 대해서야 어찌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러 왔다는 것을 알고 뉘우치는 일까지는 해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회개는 바로 이곳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거절했던 것을 뉘우치고 다시 가서 행함으로 자신의 잘못과 죄스러움을 증명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회개하나로 만족하신다. 저질러왔던 모든 사항들에 보상을 요구하시거나 저질러 왔던 잘못들을 모두 원상회복하도록 요구받는다면 어쩌겠는가? 한번 회개함으로 전혀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것 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왕의 아들의 혼인장치 (마22:1-14)
이 비유는 천국을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이들의 거부로 사거리 길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악한자나 선한자나 모두 데려다가 잔치에 가득하게 채운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것을 보이며, 들어온 손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손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이다.
이 비유에서도 천국이 계시되는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로 비유된다. 보통 사람들의 혼인 잔치도 풍성하고 즐거운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는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4절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눅14:15 함께 먹는 자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은 복되도다 하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며 영광스러우며 모든 음식이 풍성한가? 잔치집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기쁨과 유쾌함이 있다. 이것은 천국이 인생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보다도 더 풍성한 하나님 나라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복되고 영광스럽고 풍성한 잔치에 초청을 받고 한결같이 거부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더우기 3절에 오기를 싫어하고, 5절에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처로 갔고, 눅14:18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고,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고,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노라. 마22:6 심지어 심부름 온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깊은가를 볼 수 있다. 그토록 영광스럽고 복된 왕의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그 영광을 그렇게 거부할 수 있는가? 그들의 핑계가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돌아보지도 않는 무관심과 무례를 행할 수 있겠는가? 청함을 거절한 것만도 왕을 경멸하는 태도인데 거기다 종들을 어쩌자고 능욕하고 죽이는가?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르심을 경멸하고 거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앞장의 악한 농부 비유)을 핍박하고 죽이고 했던 것이 역사적인 현실이다. 유대인 뿐만이 아니고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역시 동일하게 천국의 부르심을 경멸히 여기던지 또는 무관심하고 어떤 자들은 모욕, 능욕하고 핍박하고 화를 내는게 사실이다.
이 비유의 결론같이 택함을 입지 않고서는 복음의 부름에 순종하지 않게 되고 혹은 잔치집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택함을 입지 않은 자는 결박당하여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하나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 은혜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참예함에 합당치 못하게 된 것이다.
인류가 끊임없이 구원의 초청을 거부하는 다양한 면이 본 비유 가운데 나타나는데
① 오기를 싫어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마음을 매혹하지 못했다.
②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관심주의. 천국과 내세에 관심이 없는 자들.
③ 자기 밭으로 갔고
④ 자기 사업처로 갔다.
⑤ 장가들은 것 핑계. 토지, 사업 즉 소유물에 더 열정. 간접적 행복 추구.
임금의 궁전으로 가지 않고 또 복음의 부르심 앞에 적의를 품고 노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임금은 또다른 종을 보내며 반복하여 청한다. 왕의 호의와 은총을 거부한 것 만으로도 그들은 왕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벌받아 마땅한데 종들을 죽이기 까지 한 것은 완전히 왕께 대한 반역이다. 여러분이 선택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렇게 대하지 않게 된다.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예복을 입지 않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도 있으니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열처녀 비유 (마25:1-13)
마25장에는 세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즉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 세비유는 구원과 멸망의 분리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마13장 천국 비유에서 천국은 뿌리는 단계와 거두는 단계, 그물로 각종 물고기를 끌어 모으는 단계와 강가에 앉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하는 단계가 있음을 보았다. 여기서는 분리하는 단계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구원과 멸망을 분리하는가를 보이고 있다.
이 세가지 비유를 해석하면서 특히 주의할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당신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행위교리가 된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이런 행위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이 비유들은 특별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물안에 들어온 사람들이지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열처녀 비유는 그 분리의 기준을 슬기있는 자와 미련한 자로 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으로 쉽게 판명된다. 슬기 있는 자는 항상 예비하였기 때문에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미련한 자들은 문이 닫힌 후에야 기름을 사러갔다. 이 비유의 욧점은 재림에 대한 준비이고 그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깨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3절, 마24:50 생각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 마24:36, 살전5:1- 준비하고 깨어 있는 신자에게는 도적같이 이르지 않는다. 예비되어 있으므로.
이 비유에서는 깨어있다는 것은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인데 기름을 준비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나? 일반적으로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기름이 무엇이든 간에 문제는 주님 재림시는 어두운 밤이라는 것과 주님을 맞이하여 들이는데 큰 장애가 어두움이니 그 장애를 제거하기 위하여 불꽃이 필요하고 불꽃이 계속 타오르기 위하여 기름이 마르지 않고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신자가 주님 재림시(어려운 때인데)에 부족함이 없이 맞이하고 영접할 수 있는 신앙의 태도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 하기 때문에 성령이라고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이런 성령의 은혜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공급받기 위한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기도와 말씀과 묵상으로 항상 각성하고 태만하고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유지해가야 한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외식하는 신자인데 자기 기만에 빠진 자들이다. 등은 준비했다. 어둠이 없고 불을 킬 필요가 없으면 똑같다. 겉으로 보기엔 같다. 그들이 기도하는 것 같고 열심 내는 것 같고 또 생활 마저도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는 것 같아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사이비 열매이다.
이런 외식자들은 외무적으로 나타내기만 좋아하니 생활 이면에는 언제나 깊은 심령의 영적 샘이 마르고있다. 이런 자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거짓으로 발견된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이다. 짧은 기간에 불타는 열성은 거기에 장기간에 걸친 불요불굴의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한 그것 자체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쉽게 신앙생활하려하지 말자. 다른 사람의 것 빌리려고 하지 말자. 깨어있어 항상 예비하자.

달란트 비유 (마25:14-30)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심판의 단계를 계시하는데 앞의 열처녀 비유에서는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서주님 오실 때 맞이하고 영접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 비유는 주님 재림에 대한 예비 즉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것은 곧 주님께서 주신 직책대로, 혹은 재능대로 충성을 다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천국의 미묘한 성격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데 순서도 주의하자. 열처녀 비유가 앞에 왔다. 여기서는 외식하는 신자들이 최종 분리하는 때에 어떻게 버림 받는가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동보다 그들의 내면적인 상태가 중요하다. 마24:40,41 두여자가 매를 갈고 두사람이 밭에 있어도 분리된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같은 일을 해도. 왜 내면적인 문제이다. 즉 기름이 있었는가?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삶의 원리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무엇으로부터 그런 열매를 맺는가가 중요하다.
육신으로 좇아오는 것은 그것이 선할지라도, 아름다운 덕목일지라도 쓸모 없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좇아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 다음 달란트 비유는 좀 외형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즉 기름을 준비한 자들의 불빛이 나타나는 결과요 열매다. 그들은 주님이 분부하시고 맡기신 사역에 충성하는 자들이다. 마땅히 할 일을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재림에 대한 준비요 기름준비한 깨어있는 생활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한달란트 받은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그래도 낭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주인께 받은 것 지킬려고 땅을 파고 묻어두어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주인의 책망은 돈을 줄 때 묻어두라고 준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은행 이자라도 최소한 얻어야 할 것이다. 이 종은 다른 종보다 적게 주어 불만 때문에 묻어둔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사실은 적은 돈을 맡겼기에 충성하기가 훨씬 쉽다. 예수님께서는 책임이 가장 가벼운 사람의 예를 드신 것 뿐이다. 많은 달란트를 짐지웠다면 변명과 구실을 댔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하므로 그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은사는 어떻게 취급(은사 취급 방법이 틀렸다) 생산성 없는 땅속에 묻어둠. 결국 이종은 하나님의 은사를 전혀 원치 않았다. 맡겨주니 맡은 것 뿐이다. 그리고 맡기니 불평스런 마음을 가졌다. "심지 않은데서...." 당신은 당신의 종들의 노동을 통해서 많은 추수를 거둘 수 있기 위해 당신의 종들에게 파종을 시키고 당신의 종들에게 도리께 질을 시킨다. 주인을 무정하며(굳은사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완전히 몰두하는 자라고 생각, 그래서 잘못하여 맡긴 것 지키지 못하면 어쩔까 두려워하여 감추어 두었다. 잃을까 염려해서...
우리가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평할 근거가 되는가?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알면 그럴 수 없다.

문둥병자를 고치심 (막1:40-45)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난치병으로 알려진 문둥병을 말씀과 손길만으로 깨끗이 씻어 보인데서 훌륭하게 들어났다. 그러나 이 이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 레13: - 15:까지에서 문둥병에 관련하여 기록된 부정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레13:45-"문둥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있는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다른 병과 다른점 ①사람과 격리됨 - 그 병이 전염될까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와 접촉하면 종교적 의식적 부정 때문이다. 이 병의 특징은 초기에는 매우 약하게 그 증상을 보이며 매우 느리게 진전되지만 후기는 무섭게 양상이 일어나 얼굴이 놀랍게 이그러지고 신체의 각 부분이 썩어서 하나씩 떨어지며, 또 이치적인 병을 일으켜 생명이 끝나게 된다. 초기에는 매우 느리게 작용하며 그 기간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얻는 즐거움도 장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병은 항상 신비로운 병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벌로 생각하였다. 미리암, 웃시야, 게하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미리암과 나아만 치료됨. 이 병은 죄와 하나님의 신성이 반대됨의 강한 상징, 그리고 사망 그자체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유대인 작가들 "산 송장"이라 묘사. '스펜서' 걸어다니는 무덤. '칼빈' 종교적 모임에서 금지된 문둥병자는 죽은 자로 여겨졌다. 다른 병은 고쳤다하나 문둥병은 깨끗하다, 씻는다. 정결예식 - 다 부정. 더러움의 상징.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심은 우리 죄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심.
산상설교를 인치는 의미에서 몇가지 이적을 행하심으로 그의 말씀이 더욱 권위 있게 함. "절하고" 경배, '막' 무릎을 꿇었다, '눅'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댐.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접근했는가? "주여"라는 명칭의 의미 - 높은 사람 공경.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한다. 문둥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점을 말한다.
신자들 중에는 주님의 권능을 믿노라고 하는 자들 많으나 주님의 거룩한 뜻에 자기를 맡기고 따르려는 자는 적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있어 참으로 신앙적이라면 먼저 주님의 뜻을 존중히 여기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①소극적 - 모든 죄악. ②성경을 묵상,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회고, 모본할만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의논. 그릇됨 - 직접계시, 꿈.
* 손을 내밀어 대심 - 율법은 금했다.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될려면 손댈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손대었다고 부정해지지 않는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악 세상에 살면서도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고 순결을 유지하셨다.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더러운 곳을 만지심은 가볍게 읽을 수 없다. 그분의 성결과 거룩함을 이해하라. 불결과 더러움을 어떻게 접촉하겠나? 주님께 나가지 못할 죄는 없다. 길이 열려졌다.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은 죄인을 위하심이다.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초월하신다. 제사장에게 보내 증거케하고 말하지 말라. 공적 사역이 방해 - 즉 소문 듣고 허다한 무리가 모여 옴.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심. 막 - 다시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다. 맹목적인 경건이나 열심이 주님의 일을 방해한다.

물위로 걸으신 예수님 (막6:45-52)
주님께서는 이 이적을 행하시려고 제자들을 제촉하사 배를 타고 가게 하시고 예수님 자 산으로 가셨다. 왜 주님은 이 기적을 행하셨는가? 그대답은 막6:52에 있다. 저희가 그 떡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앞의 기적을 통하여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시며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목자로(시23편),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자로 자기를 계시하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환난 때, 인생의 풍랑 때,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셔서 위로와 안심을 주시는 주님으로 알기를 원하셔서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훈련을 시켜주신 것이다. 더구나 마8:23- 에서는 낮에 주님 모시고 풍랑을 만났으나(그때도 주님을 의지 못함) 여기서는 밤에 주님 떠나서 물결에 괴로움을 당한 것 보면 장차 주님이 저희들 곁에서 떠나시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의 성령으로 사역하실 때도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돌보실 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이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철저히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마28:19 -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창15:1 - 아브람아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 나는 네게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 시17:8 -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시편에 면면히 흐르는 사상은 하나님은 목자같이 자기 백성을 원수에게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라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말고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시3편의 다윗) 시50:15 -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되 발전적으로 나타내시고 알리신다. 단순히 능력 있는 자만이 아니고 그 전능하신 능력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베푸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신앙의 발전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병행한다. 하나님이, 주님이 이런 분이심을 알았으면 우리 생활에 적용하자. 주님은 우리의 믿음(용량)을 알아보시기 위해 창22장의 아브라함같이 때로 시련을 주신다. 그리고 영적(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훈련하신다.
주님이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막6:48) '지나가시려고' 어려움에 버려두는 대도 있다. 그때에 우리로 부르짖고 주님만 의지하시기를 바라신다. 시50:15. 이 사실을 깨달을 때 험하고 풍랑 많은, 질병, 고통, 사고, 위험 많은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며 안심과 기쁨이 되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조금씩 더 배워 나가자.

예수님의 첫번째 이적 (요2:1-11)
1절, 사흘 되던 날 - 1:43에서 계산된 날. 장소:갈릴리 가나. 같은 지명이 많음. 두로와 시돈 사이의 사렙다쪽에 있는 가나가 아니고 갈릴리 즉 스불론 지파에 속한 땅. 나사렛에서 가까운 거리. 예수님 어머니가 거기 계시고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청함을 받은 것 보니 친척중 하나같음.
4절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과 이일에 있어서 자기 어머니의 제언에 따라서는 어떤 일도 행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어머니를 거부하며 어머니란 칭호로 존대하지 않고 보통 여자의 위치에 놓고 있는가? 카토릭에서는 이 구절의 책망이나 비난의 그림자라도 벗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이 목적만을 위하여 완전한 논문들이 쓰여졌다. 칼빈 - 마리아를 미신적으로 끌어올려 하늘의 여왕과 세상의 소망과 생명, 구원의 여왕으로 받들어질 위험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마리아의 부탁으로 이적을 행한 것 처럼 생각해서 마리아를 중보자로 추켜 세울 것에 대비해서 취하신 행동.
"내 때가 아직"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은 부주의나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동시에 때가 오면 할 일을 할 것이란 암시. 그때는 아버지게서 그를 위해 정하신 때.
6절, "돌 항아리" 하나님의 율법으로 부터 결례의식 행하매 물항아리 준비 - 그들이 받은 계율.
7,8절. 예수님의 명령은 하인들에게 어이없게 들렸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용히 순종한 것 보면 주님의 위대한 권위와 명성을 볼 수 있다.
11절, 첫번째 행한 이적 - 예수님의 유년기에 행하였다는 순전히 기괴하고 변덕스러운 이적들을 부정.
*기적의 목적 :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내시는 모든 표적은 그의 신기한 능력을 증거 한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게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이적은 다 주님의 품격을 증거하고 신앙을 깨우치며 굳게하며 신앙이 가져오는 생의 변화를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잔치집의 곤경을 구해주셨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셨고 신랑에게 훌륭한 예물을 주셨다. 혼인은 기쁨을 상징 - 기독교 신앙이 우리 생의 기쁨을 뺏아가는 줄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11절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궁극적 목적. 오늘날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우는 많은 표적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아무리 성장한 믿음이라도 어렸을 때가 있고 믿음이 완전하기 때문에 믿음의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기적은 믿음을 확증하고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데 있다.
*리챠드-트랜취는 그리스도의 미래의 사역(구원사역)에 꼭맞는 기적이라고 했다. 평범한 것을 고상하게 하고 대단치 않은 것을 변화시켜주고 땅의 물을 하늘의 포도주로 바꾸었다. 이 이적을 통하여 ①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②신앙이 발전되기를 기대하며 ③그로 인한 생의 변화들을 확증시켜 준다.

양과 염소의 비유 (마25:31-46)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심판에 대한 비유 또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 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34절에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로 이 나라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에 예비하신 나라이다.
* 이 비유들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해서 영생을 상속하라고 교훈 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님의 오랜 지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주시는 말씀이다.
35절, 카토릭 - 구원의 원인에 대한 논쟁. 영생이 선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선행을 격려하는데 있다. 이 선행은 영생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저 받는 것이다.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함께 후사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은 당연한 몫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부여된 상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믿음과 간구가 구제보다 더 가치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실례를 들어 보인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인간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구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와 선행에다 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명확히 보인다. 신실한 자들이란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입증해야 한다. 자신들이 짜낸 선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에서 이탈한 자들은 누가 네게 이것을 요구하였나 책망 받는다. 이 귀절을 핑계삼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도외시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인이기에 나타내는 선행과 구제가 귀하다.
40절 - 주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겨주신다. 그들이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니고 거저 베푼 선행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아무리 비천해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소중하게 보신다.
44절 - 스스로 기만하는 헛된 속임수 - 이자들은 외식하는 그리스도인.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심 (요5:1-18)
성경 기록의 목적 : 요5:39, 요20:30,31.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많지만 요20:30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았고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세상에라도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고 표현. 요21:25에서 저자가 선별하여 기록한 것은 이 기록의 목적과 부합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그 목적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생각하고 이 내용을 접근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이 이적이 우리에게 주는 massage는 무엇일까? 저자가 무슨 의도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선별했을까? 일차적으로 이점을 포착하고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경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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