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Ⅰ. 서론
오래전 미국에서 구원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천당과 지옥 중에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으면 지옥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천당에는 아무도 없고 고독하지만 지옥에는 마약과 섹스 등이 있고 사람도 많고 없는 것이 없어서 지옥을 택하겠다고 하는 엉뚱한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뜻이 있다고 보는데 20세기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아무리 교회의 신학자, 목회자, 신앙자가 많아도 천당에 간 사람은 예수, 칼빈, 모짜르트 단 세 명 뿐이라고 선언했다. 학생의 대답과 신학자의 주장이 일치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구원을 얘기할 때 천당에 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리적 일리는 있으나 정확한 대답이라 할 수는 없다.
과연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을 종교적 차원에서 정의해 본다면 하나님과의 일치, 화해, 평화를 의미한다.
라틴어원으로 '구원(Salvation)'은 상처에 고약을 발라서 상처를 치유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님에게 다시 돌아오기 (Return)를 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정반대인 죄(Sin)에 대한 올바를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Ⅱ. 죄(Sin)란 무엇인가?
죄는 범죄(Crime)와는 다르다. 범죄는 종교적 차원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민사법을 어겼을 때 발생하는 문제다. 죄는 종교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이야기를 압축해서 3단계로 구분하자면 구원은 마지막 단계이다.
첫째 단계는 창조의 단계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고 인간을 모든 우주 만물 중에 가장 높여서 가치판단을 내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흠이 없고 선한존재이고 온전한 상태에 있었다.
성서의 두번째 단계는 타락의 단계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했다. 인간의 역사는 살인에서 시작된다. 즉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아담의 후손인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그것이 인류의 원죄가 된다.
타락의 단계에서 인간은 온갖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멸망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게 된다. 이것이 세번째 구원의 단계이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고 인간은 다시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선한 인간성을 다시 회복하고 거듭나는 체험을 하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Born again)
Ⅲ. 죄의 원인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성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입장이다. 죄(Sin)의 본래 의미는 라틴어로 '초점(Focus)에 어긋나다'로 하나님과 일치해야 하는 것에서 어긋난다는 뜻이다.
좋은 사레는 누가 복음의 길 잃은 양과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한 것을 들 수 있다.
목자가 양 99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발견해서 기뻐하며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양은 '선함'의 상징이고 '길(道)'을 잘 잃어버리는 인간을 비유한다. 초대 교회에서 크리스챤이란 명칭이 없었을 때 '길을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the Way)'이라고 했다. 성서에서 인간은 구원의 길(하나님 나라)을 향해가는 믿음의 나그네인 것이다. 그래서 죄란 이 길을 벗어난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서 죄의 길을 택하게 됐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Free will)를 선물했다. 인간이 자유를 상실하면 인간성을 상실해서 노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겐 자유가 소중한 유산으로서 자유가 있어야만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되게 인간은 이 자유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된다. 이것이 라인홀드 니버가 말하는 '모순의 윤리'이다.
자유를 어떻게 남용했는가? 윤리적 차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죄의 개념은 오만심과 이기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죄가 된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 속에서 잡신(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존 칼빈은 하나님이 없거나 믿지 않으면 인간은 다른 우상을 만들어내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애니미즘은 원시종교지만 포용력이 강해서 온갖 잡신을 숭배하는 특징이 있다. 일본에서 초기에는 기독교를 잡신 중에 하나로 봤는데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어서 십계명에도 있듯이 '오직 하나님만을 숭배하라'고 했기 때문에 번창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우상을 섬기는 무속종교와 혼합이 되어서 복을 비는 혼합주의 종교가 되었고 세계적인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을 만큼 기독교가 기적적으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우리의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인가 아닌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리차드 포스터는 『Money Power Sex』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은 3대 우상을 섬기는데 돈, 권력,섹스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이 세가지를 모두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셋 중에 하나라도 섬기지 않는가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죄의 원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소외된 상태에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을 숭배할 때 종교적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우상숭배의 상태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가?
Ⅳ. 구원을 얻는 길
사도 바울은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다 실패를 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아무 능력과 힘이 없다. 오로지 법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시켜주고 율법을 어기면 얼마나 고통 당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은 필요하지만 율법의 한계성을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인간이 아무리 법을 준수하고 하나님 앞에 완벽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한 수준에 아무도 도달할 수 없음을 체험하였고 마틴 루터도 수도원에서 금욕주의의 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법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법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교황이나 교황청 청소부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죄를 범하였다는 데서 죄의 평등권 사상이 나오고 여기서 민주주의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서양 민주주의 사상이 두 가지 기초로 나뉘는데 하나는 소극적 의미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다'는 점에서 평등하고 적극적 의미로는 '인간은 남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데서 평등사상이 나온다.
동전에 앙면성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했는데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맹렬히 공격했다. 하나님 앞에선 모두 평등하게 죄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의인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의인과 똑같이 대해줌으로써 인간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뉘우치게 되고 깨달음을 통해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개인의 구원을 강조했지만 사회과학의 도구로 다시 조명을 해보면 개인을 초월해서 사회구조에서 악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스 베버는 구원을 사회계급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상류계층은 권력이나 재물 등의 모든 욕망을 충족했으므로 구원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는 반면에 하층계급은 고통과 상처의 박탈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린다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기독교가 억압당한 계층을 위로할 수는 있지만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하고 진통제만 주듯이 증상을 없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실패했고 기독교는 아편과 같다고 말했다. 이에 20세기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들은 사회구조을 개혁해서 사회죄(Social sin)를 제거 할 수 있고 사회구원(Social salvation)을 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구원의 삶이란 자기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돌아가 하나님과 일치, 화해, 평화(Shalom)를 이루는 것이다. 평화의 삶은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 분열이나 갈등이 없고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화해하고, 더 나아가 이웃, 자연, 우주,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 박원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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