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1843~97). 중세적 전통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의 변환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던 1870~90년대의 개화기 서울 화단의 최고 명수로 손꼽혔다. 장승업은 주로 무반을 배출했던 희소한 본관인 대원(大元) 장씨였다.
대원은 황해도 안악에 있는 지명으로 그의 출신지가 황해도 모처였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무반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조실부모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먹을 것을 찾는 신세로 서울로 흘러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승업이 정통화의 전문 화가로 비약하고 이름이 날리게 된 계기로 변원규와의 만남으로 이루어 진다. 변원규의 집에서 명화들을 통해 자신의 창작력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그로 인해 김은호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을 당시의 유숙과 같은 명화원과 사제의 인연을 맺으며 더욱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인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장승업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도화서가 폐지된 후 그 업무를 물려 받은 규장각의 대령 화원으로 차출되어 <남극노인도>와 같은 왕실용의 세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장승업은 중세적 교양과 문학성을 점차 배제하기 시작한 이러한 신화풍의 수용 이외에도 입체적인 음영법과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적인 사용을 통해 근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정물화 계통의 기명절지도 양식을 도입해 완성시켰다. 선지의 보급과 이에 적합한 부드럽고 긴 양털 붓 기법의 개발과 함께 갈대와 기러기를 소재로 그린 노안도를 새롭게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장승업은 비세습 화원이었으나, 역관층 중인들의 후원을 받아 개화기의 천재적인 명화가로 명성을 날리면서 새로운 화풍을 화목,재료의 도입과 개발을 통해 근대 화단을 이끌어 갈 후배 화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규범에 얽매이기 싫어 하는 탈속성과 천재성 등이 현실도피적 기제로 우상화되고 또 관념적으로 강조됨으로써 신화적인 작가상으로 남아있다. 그의 작가상을 바로 잡고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 장승업 |
3-2. 산수화(山水畵) |
장승업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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