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창고

吾園 張承業의 미술 세계 [2]

지식창고지기 2012. 11. 4. 08:01

 

3-2. 산수화(山水畵)

장승업의 산수화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는 수업기, 중기는 붓 쓰는 방법이나 채색 쓰는 방법에서 장승업의 특징인 활력과 운동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화풍의 형성기), 후기는 뛰어난 기량으로 다양한 양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원숙기이다. 장승업의 생애로 볼 때에는 초기는 대개 20대, 중기는 30대, 후기는 40대 이후오 볼 수 있다.

  장승업의 초기에 처음 산수화를 배울 때에는 다른 모든 화가들처럼 당시 널리 퍼져있던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으로 시작하였다. 이런 남종문인화풍은 화가들의 교과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나 기타 여러 가지 화보(畵譜), 그리고 선생님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이런 남종 산수화풍의 특징적인 모습은 장승업의 스승이었다고 전하는 조선 말기의 화원 혜산(蕙山) 유숙(劉淑)의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장승업의 산수화 작품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풍림산수도(風林山水圖)>이다. 이 작품은 단풍이 물든 가을 숲의 경치를 가로로 긴 화면에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나 숲, 산의 모습을 『개자원화전』이나 화보에 나오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무나 산, 인물의 비례가 다소 맞지 않고 묘사하는 방법도 서툰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화가였던 장승업은 금새 남종산수화풍을 완벽히 연습하여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서강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산수도(細山水圖)>라는 작은 그림이다. 이 산수도는 제목이 가리키는 데로 아주 세밀하고 정확한 선으로 산과 나무, 집 따위를 깔끔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의 자유롭고 활달한 기질은 점잖고 깔끔한 남종 산수화풍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장승업은 산은 우쭐우쭐 춤을 추고, 나무와 숲은 바람에 일렁이며 시원한 소리를 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런 장승업의 활기찬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 중기의 산수화이다. 중기의 산수화는 여러 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만 살펴보기로 한다.

 중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방황학산초추강도(倣黃鶴山樵秋江圖)>라는 작은 작품이다. '방황학산초(倣黃鶴山樵)'라는 말은 '황학산의 나무꾼을 본뜨다'라는 뜻인데, 황학산초는 중국 원(元)나라의 유명한 문인화가(文人畵家) 왕몽(王蒙)의 호(號)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왕몽이 그린 가을철 강변 풍경을 모방하여 그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방'이라는 것을 요새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옛날 동양의 화가들은 훌륭한 선배 예술가의 작품을 배우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방편으로 '모방'을 많이 했다. 그래서 모방이란 연습의 방법인 동시에 제2의 창작이기도 했으니 요새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어쨌든 서울대학교의 <추강도>는 장승업이 중국의 옛날 대가를 모방하여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한 산수도인 것이다.

▲ 방황학산초추강도

 

  서울대학교의 <추강도>를 보면 멀리 둥글둥글한 산들이 누워 있고, 가까이는 강 위에 조각배를 띄우고 한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가까운 강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는 사이에 장난감 같은 집이 몇 채 있다. 화면의 위에는 한문으로 화제(畵題)를 써 놓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 외로이 작은 배를 띄웠네

  이 글을 보면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이 작품의 주제는 가을철 혼자 배를 타고 바라보는 산수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 속에는 약간 쓸쓸한 기분도 포함되어 있지만, 가(假)없는 자연의 장관을 즐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혼자일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산들의 모습을 보자. 산들은 둥글둥글 한 모습으로 길게 연결되었고 또 중첩되어 있다. 산의 등성이들은 가늘고 다소 물기 없는 마른 붓질로 부드럽고 길게 표현하여 가을 기분을 주고 있다. 그리고 산의 전체적 모습은 마치 움찔움찔 춤을 추고 있는 듯 하다. 또 조각배 가까이 강변에 있는 바위들도 마치 두꺼비가 움츠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무언가 내적인 생명력이 숨겨져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 산수화는 조용한 가운데 내부적으로 활력이 가득 차 있으며, 차분하게 관찰하면 생동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장승업은 먹과 붓이라는 간단한 도구로써 이처럼 많은 것을 표현해 내었다. 이 <추강도>의 화제 끝에는 다음과 같이 그림을 그린 시기와 작가 등도 기록되어 있다.

기묘년 가을 본관이 대원인 장승업이 황학산초(왕몽)의 가을 경치 그림을 본떠서 그렸다.

  위에서 말하는 기묘(己卯)년은 서기 1879년으로 장승업이 37세 때에 해당한다.

  위에서 설명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방황학산초추강도>와 함께 중기의 산수화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김연준(金連俊) 소장의 <산수도>(1878년, 36세 작)와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무림촌장도(茂林村庄圖)> 등이 있다. <무림촌장도>는 조선시대 말기에 난초를 잘 그렸던 문인화가 민영익의 부친인 민태호(閔台鎬)에게 그려준 것이다.

  장승업의 산수화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은 40대 이후의 후기이다. 후기는 장승업이 화가로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시기이다. 후기의 산수화는 여러 점이 있지만 여기에서도 몇 점의 작품을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면 그 특징을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도 8폭 병풍>이 있는데, 이 병풍은 장승업의 산수화 중에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우선 여덟 폭 모두 산수도로 이루어진 병풍은 이 작품밖에 없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다음으로 여덟 폭 모두가 제각기 다른 양식으로 그려져 장승업의 놀라운 회화적 응용력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병풍 중 한 폭인 <귀거래도(歸去來圖)>에는 "경인년 가을에 장승업이 그렸다(庚寅秋月 五園 張承業)"라는 낙관이 있어서, 이 병풍은 1890년, 장승업이 48세 때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귀거래도>는 중국 동진(東晋)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도연명은 지방의 작은 고을 현감 벼슬을 지냈으나, 몇 푼의 봉급을 위해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기 싫어 시골 고향으로 돌아가고자(歸去來) 하여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록 초가집에 보리밥일 망정 자연과 벗삼아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고자 했다. 장승업이 그린 <귀거래도>에도 도연명이 배를 타고 시골집에 도착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물가에는 아이가 나와서 마중하고 있고, 멀리 수양버들 나무 사이의 오두막과 사립문 옆에는 수탉이 평화롭게 울고 있다. 더욱 멀리 원경에는 앞에서 살펴본 서울대학교 소장의 <방황학산초추강도>와 다소 유사한 둥글둥글한 산이 치솟아 있다. 이 <귀거래도>도 물결의 표현, 수양버들이나 소나무의 가지, 원산의 묘사 등에서 아주 세련된 필선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적당하게 바탕 면을 남겨 마치 하얀 안개가 감싸고 있는 듯 원근감을 표현하였다.

  간송미술관의 <산수도 8첩 병풍>의 다른 폭인 <난천백운도(亂泉白雲圖)>는 장승업의 후기 산수화의 한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보면 마치 솜사탕 같이 생긴 둥글둥글한 이상한 바위 산 사이에 흰 구름이 떠다니고, 폭포수가 힘차게 떨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 계곡에는 누각(樓閣)과 정자들이 있고, 작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계곡 사이로 나 있다. 맨 아래쪽에는 두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로 손짓하며 오솔길을 오르고, 오른쪽 위 흰 구름 위에까지 나 있는 오솔길에는 또 한 사람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위쪽에 적힌 제시(題詩)는 다음과 같다.

  이리 저리 쏟아지는 물소리 속에 흰 구름 한가히 떠다니는데, 어느 때 나막신 신고 저 곳에 갈 수 있을까?

  기억하네, 관음문 바깥 길에 나서면, 양쪽에 푸른 산에 의지하여 서 있었지.

  위 시의 내용과 그림의 소재들을 종합하여 살펴볼 때 이 작품은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자연과 조화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어느 때나 투쟁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으며, 노자(老子)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고, 중국 육조시대의 산수화가들은 이런 이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었다. 장승업의 이 작품은 그런 오래된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난천백운도>는 산의 형태는 아마도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왕몽석법(王夢石法)' 같은 것에서 힌트를 받은 것 같다. 그러나 <난천백운도>에서의 산의 모습은 형식화된 화보의 원래 모습에서 탈피하여 힘차고 역동적인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장승업의 후기 산수화는 이밖에도 걸작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모두 소개할 수는 없고,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산수도>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구장(舊藏) <산수영모 8첩 병풍> 두 점만 살펴보고자 한다. 이 산수도들은 앞에서 살펴본 간송미술관의 <산수도 8첩 병풍>과는 달리 파묵법(破墨法), 즉 묽은 먹물을 넓은 붓질로 재빨리 화면에 칠하여 번지는 효과를 낸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간송미술관의 작품은 정밀하고 자세한 묘사를 하였다면, 이 들은 비교적 생략적인 묘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의 <산수도>와 최남선 구장 <산수도 병풍>에도 모두 멀리에는 큰산이 있고, 그 아래 집들과 정자, 작은 배에 탄 사람, 아름다운 나무와 숲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필선은 모두 머뭇거린 흔적이 없이 재빠르면서도 힘차다. 산수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모두 <난천백운도>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산수도들에서는 세밀한 묘사보다 산이나 나무들을 마치 구름처럼 흐릿하게 표현하여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경치인양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장승업의 산수화는 위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작품들 이외에도 많다. 그 중에는 세밀한 선의 묘사와 화려한 채색을 갖춘 장식적인 작품도 있고, 문인화의 경지와 통하는 수묵 선염의 생략적인 산수화도 있다. 그러나 장승업의 산수화는 그 외형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모두 자연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표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속적인 인간 세계를 떠나 영원히 지속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면서, 거기에 우리도 참여하여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승업의 산수화는 그 필선이 마치 자연의 생명체처럼 생생하며 활기에 차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선경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래서 장승업의 산수화를 통해 우리들은 가장 아름다운 이상향의 세계 - 거기에는 산과 숲과 물과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조화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3-3. 인물화(人物畵)

장승업의 인물화는 산수화처럼 뚜렷한 외형적 화풍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인물화는 그 전체적 특징과 의의를 알아보고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하기로 한다.

  장승업의 회화 중 외형상 가장 중국적인 것이 인물화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승업이 즐겨 그린 인물화의 소재는 왕희지(王羲之), 도연명(陶淵明), 이태백, 예찬(倪瓚) 등 역사적 인물이거나, 신선, 포대(布袋), 삼장법사 등 불교나 도교의 인물이든 간에 대부분 중국적이기 때문이다. 또 장승업은 인물화의 기본 구성을 청말(淸末) 상해지역에서 출토된 화보(畵譜)에서 따오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장승업의 인물화는 다른 소재에 비해서도 특히 너무 중국적이며 모화적(慕華的),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부당하게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승업이 그린 작품의 소재가 중국적이라고 해서 그 그림이 반드시 비예술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다룬 중국적인 소재들은 당시 시대가 요구하던 형식이요 그림의 외형일 뿐, 장승업 인물화의 소재들은 당시 시대가 요구하던 형식이요 그림의 외형일 뿐, 장승업 인물화의 참된 가치는 예술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표현해낸 데에 있다.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이런 초월적인 면은 주인공이 머금고 있는 신비스러운 미소로 표현된다. 그의 인물들은 다양한 자태와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한결같이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화법의 면에서 장승업의 인물화는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묘법, 중국 양주 팔괴(楊洲八怪) 중 황신(黃愼)의 인물화법, 진홍수(陳洪綏)를 계승한 해상파 임이(任 )의 인물화법 등이 모두 섞여 있다. 그러나 장승업은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정미한 백묘법(白描法)에서 호방한 감필법(減筆法)과 파묵법(破墨法), 그리고 만년의 깊은 정신성을 보여주는 수묵사의(水墨寫意) 인물화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서울대박물관 소장의 <송하노승도(松下老僧圖)>는 2첩 병풍 중 한 폭인데 1890년(48세)작이다. 이 작품은『고씨화보』에 나오는 장승요(張僧繇)의 인물화의 구도를 본뜬 것으로 장승업 인물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큰 소나무 아래 한 노승이 앉아있는데, 오른 손으로 표범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노승의 뒤에는 선장을 든 사미승이 서 있고, 앞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흘러 내린다. 화면 한쪽을 갈막다시피 한 소나무 줄기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龍)처럼 힘차게 위로 뻗었고, 위에는 무성한 가지가 아래로 드리웠다. 소나무 뿌리 쪽에는 장승업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더부룩한 잡목이 우거져 있다. 화보에 나오는 ㄸ딱한 도상을 어처럼 생동하듯이 탈바꿈시킨 데에서 장승업의 놀라운 회화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소나무 아래 노승을 그리는 구도는 동양의 인물화에서 오래된 전통이며, 유사한 구도의 작품이 호암미술관에도 한 점 소장되어 있다. 호암미술관 소장 작품 <송하노승도>에는 표범 대신 불경(佛經) 책을 두 손으로 바치는 원숭이가 그려져 있는데, 양식상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장승업의 인물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백묘법(白描法)이다. 백묘법은 채색을 사용하지 않고 필선만으로 그리는 방법으로서, 중국의 당대(唐代)에 화성(畵聖)으로 불렸던 오도자(吳道子)와 북송의 이공린(李公麟)이 잘 사용했던 방법이다. 백묘법은 필선만 사용하기 때문에 먹이나 채색으로 잘못 그어진 선을 감출 수 없으므로 아주 뛰어난 기교를 필요로 한다. 또한 필선만으로 인물의 입체감이나 동작, 표정 등을 모두 표현해내야 하므로 그린 화가의 능력이 드러난다. 선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와 <무송반환도(撫松盤桓圖)>는 이런 백묘법으로 그려진 인물화의 좋은 예이다. 왕희지가 거위를 바라보는 모습은 '황정환아(黃庭換鵝)'의 고사(故事)와 연결된다. 이 고사는 거위를 좋아화는 왕희지가 산음(山陰)의 한 도사가 기르던 거위를 얻기 위해 황정경(黃庭經)에게 써주었다는 것인데, 그림 속의 왕희지는 바위에 기대어 앉아 헤엄치는 거위의 유려한 자태를 바라보고 있다. 왕희지는 만면에 흐믓한 미소를 지은 채 거위를 바라보고 있고, 거위 한 마리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왕희지를 쳐다보고 있다. 인물의 얼굴과 손에만 살짝 채색이 가해졌을 뿐 나머지는 모두 수묵으로만 처리되었다. 특히 인물의 옷자락을 표현한 선은 아주 부드럽고 섬세하여 장승업의 백묘 솜씨가 잘 드러나 있다.

  <무송반환도>는 도연명의 고사를 표현한 것이다. 도연명은 산수편에서도 설명하였듯이 관직을 버리고『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자연을 벗삼으며 유유자적하며 살았는데, 이런 전원 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일화들이 후대에 그림의 소재로 많이 애용되었다.

  이 작품은 그 중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머뭇거림(撫松而盤桓)",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산책하는 도연명의 모습을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인물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옷자락이나 소나무 등걸의 묘사는 생생한 백묘법으로 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의 <삼인문년도>는 장승업이 세밀한 필선과 화려한 채색을 한 인물화의 대표적인 명작들이다. 두 작품의 구도는 약간씩 다르나 모두 같은 소재를 표현하였다. 옛날 세 신선이 서로 나이를 자랑하였는데, 한 신선이 말하기를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될 때마다 나는 산(算)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꼭 열 개를 채웠다"고 하였다고 한다. 작품에서는 이야기에서처럼 신선이 산다는 바다 속의 봉래산 같은 산 속에 세 노인이 마주보고 있다. 그 옆에는 파도가 일렁이며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다. 인물의 모습은 장승업의 다른 인물화에서도 자주 보았던 것이다. 즉 광대뼈가 튀어 나왔고 턱이 넓고 이마가 벗겨진 모습이다. 또 주변의 바위나 산, 나무, 파도의 묘사는 세밀하기 그지없는 필선으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작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진한 채색도 하였다.

  이밖에도 장승업의 인물화 중 걸작품으로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와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가 있다. <운림세동도>는 중국 원대(元代)의 유명한 문인화가 예찬의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예찬은 한 손님이 무심코 뱉은 침이 자기가 사랑하는 오동나무에 묻자, 그 손님이 간 후에 동자로 하여금 오동나무를 깨끗하게 씻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체의 더러움을 용납하지 못했던 예찬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림으로 많이 표현되었다. 이 작품에서 예찬은 석상(石床)에 기대어 앉아 책을 보면서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고, 동자도 주인의 결벽한 성품이 우스운지 미소를 지은 채 나무 등걸을 닦고 있다. 인물이나 오동나무의 잎새 하나 하나를 깔끔한 선묘로 처리하였다.

▲ 삼인문년도

 

  이상 몇 점의 작품을 통해서 살펴 보았듯이 장승업의 인물화는 모두 확고한 기초실력을 보여주는 백묘법의 바탕 위에 자유로운 응용이 이루어졌다. 비록 일부 도상은 중국의 화보에서 빌려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빌려 입은 옷과 같은 것이다. 장승업은 그 외형을 뛰어 넘어 인물의 신비스러운 미소를 통하여 회화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초월적 자유의 경지를 표현하였다. 장승업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이런 초월적 미소는 바로 자기 자신이 깨달은 예술상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4.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장승업이 가장 즐겨 그렸고, 현재도 작품이 가장 많이 전해지는 분야가 화조영모화이다. 화조영모화란 꽃과 풀, 나무 등을 배경으로 새와 동물을 그린 것을 말한다. 이 화조영모화에 그려지는 소재는 아주 다양하다. 새 종류로는 길기와 독수리, 혹은 매, 학, 오리, 닭, 까치, 구관조, 앵무, 참새 등이 있다. 동물 종류로는 개, 고양이, 말, 사슴, 원숭이 등이 있는데, 개의 경우 보르달이 뜬 오동나무와 함께 그려진 것이 많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형태상으로 병풍에 그려진 것이 많다. 병풍에 그려진 경우 기러기 다음으로 물고기와 게가 많이 그려지는 점도 주목된다. 장승업이 그린 병풍 형식의 화조영모화는 한 가지 전형(典刑)이 되어 안중식과 조석진을 통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조영모화는 그 배경으로 사군자와 파초, 소나무, 오동나무 등 각종 화초와 수목이 곁들여지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화초나 수목은 비록 새나 동물의 배경이지만 그 자체로서도 아름다운 그림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가 이처럼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종류에서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치밀한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장승업의 전문 화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장승업은 화조영모화를 그릴 때 여러 가지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어떤 때는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아름다운 채색을 칠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수묵으로 빠르고 활기차고 단순하게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외관상 이처럼 다양해 보이는 기법 속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필치에 생동감이 있어 대상의 생명력을 잘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가 기운생동(氣韻生動)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처럼 그의 그림이 단순히 정확하고 아름다운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약동하는 생명력을 잘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상당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중 대표적인 작푸 몇 점을 통해 그 특징을 알아보기로 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산수영모 10첩병풍>은 장승업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 명품 중 하나이다. 이 병풍에는 화조영모화 이외에도 산수도가 1폭 포함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처럼 화조영모에 산수도나 기명절지도가 끼어있는 것은 아주 드물다. 서울대 소장 병풍에는 매, 닭, 오리, 앵무새 등의 새 종류오 고양이, 사슴, 원숭이의 동물들, 그리고 물고기와 게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대 소장 병풍 중 매를 보면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뻗어 내린 가지 위에 한 마리 매를 배치하였다. 이처럼 화면 한쪽에서 대각선으로 나무 가지를 배치하고 그 위에 새를 앉히는 구도는 당시 화조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방법이다. 그런데 장승업의 경우 매는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 한 반면, 나무 가지나 나머지는 아주 빠르고 생략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점은 닭이나 원숭이를 그린 다른 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장승업이 그림의 중심 소재와 부차적인 것을 잘 안배하여 그렸음을 보여준다. 서울대 소장 병풍 중 다른 폭인 사슴을 보면 파초와 함께 그려졌다. 여기에서도 사슴은 세밀한 필선으로 터럭까지 그린 반면 파초는 큰 붓질로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한쪽 앞발을 든 채 다소 겁먹은 듯한 사슴의 모습에서 장승업이 대상의 특징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수영모 10병풍

 

  서울대 병풍 중 원숭이는 장승업의 화조영모화 중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소재이다. 또한 당시까지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소재가 아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승업이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에게 그려준 병풍에는 원숭이가 들어 있어 당시 서울에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김가진은 구한말 판서까지 역임하고 후에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 병풍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점이 전해진다. 또한 개인 소장품 중에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 이런 작품들이 공개되어 회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감상되었으면 한다.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소재 및 화법상 조선 시대 전통 회화의 바탕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시에 새로 수입된 청나라 말기의 해상파(海上派) 화가들, 즉 임이, 조지겸 등의 화조화도 참조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전통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모든 요소들을 자신의 왕성한 예술적 창조력 속에 용해시켰다. 그리고 실재 대상에 대한 세밀하고 끈질긴 관찰을 통해 그 특징을 파악해내어, 뛰어난 화법으로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그래서 장승업의 화조영모화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더 많은 종류의 새나 동물, 화초를 그려냈으며, 동시에 그 생명력을 잘 표현해 내었던 것이다.

3-5.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

  장승업의 회화 중 특이한 것이 기명절지화이다. 기명절지란 말은 말 그대로 도자기나 청동기 등 각종 그릇(器皿) 종류에다가 연꽃, 국화, 매화 등 화훼 절지를 곁들인 그림이다. 기명절지화에는 이밖에도 목련, 백합, 모란, 난초, 수선화 등의 화초, 주전자, 소반, 연적, 붓, 인장, 책 등 문방도구나 생활용품, 영지, 인삼, 밤(송이), 석류, 옥수수, 참외, 복숭아, 무, 배추, 홍당무 등의 과일이나 야채, 심지어는 게 조개 생선 따위의 어물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소재가 그려져 있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병풍으로 그려지거나 화조영모화 병풍 속에 한 두 폭 포함되기도 한다. 또 단독으로 족자나 횡권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조상의 <백물도권(百物圖卷)>이다. 이 작품은 기다란 횡권(橫卷)에 청동기, 주전자, 연적, 난초, 화분, 무, 인삼, 밤, 조개, 게 등을 그린 것으로, 모든 소재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또 선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기명절지도는 비교적 얌전하고 정밀한 필치로 그려진 것이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서양의 정물화(靜物畵)와 소재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성격상으로는 다른 그림이다. 정물화는 어떤 특정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한 것으로 대개 사실적이며 정적(靜的)이다. 그런데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그릇과 화초 따위를 소재로 하면서도 형태를 임의로 변형시키고 붓질을 과감하게 함으로써 활기 찬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즉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물건들까지 상라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도록 그리는 데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장승업 기명절지화의 특징은 지그재그의 즉흥적 구도, 시점9視點)의 자유로운 이동, 자유롭고 분방한 필치의 파묵법(破墨法)과 음영법(陰影法), 경쾌한 담채(淡彩)의 효과적 구상 등에서 기인한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 시절에 유행했다는 책가도(冊架圖)와 이것이 민화(民畵)로 변한 책거리 그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책가도는 책장 소게 많은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을 서양화법으로 그린 것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있어서 독서나 공부를 중시하는 풍조와 함께 크게 유행하였다. 어쨌든 기명절지화에는 이런 책가도의 전통과 함께 당시 중국에서 새로 수입된 청나라 말기 해상파(海上派)나 영남파(嶺南派)의 세화(歲畵)나 길상화(吉祥畵)의 영향도 받아들여져 있다. 당시에 조선이나 중국에서 이러한 정물화, 혹은 부귀다복(富貴多福)을 기원하는 그림이 유행한 것은 금석학(金石學)과 서화골동취미의 유행에도 그 원인이 있다. 어쨌든 장승업의 기명절지화는 당시의 어떤 회화보다도 즉흥적 필선의 아름다움과 생동미(生動美)를 보여주는 특이한 종류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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