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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園 張承業의 미술 세계 [3]

지식창고지기 2012. 11. 4. 08:03

4. 신화가 된 삶과 예술

  장승업은 생존 당시에 이미 뛰어난 기량과 신운(神韻)이 넘치는 필력(筆力)으로 독보적인 명성을 날렸다. 그래서 그는 당시 화단(畵壇)의 총아가 되었고,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했다. 장승업 당대의 화단에는 호방하고 생략적인 필묵법의 인물화, 화조영모화가 유행했는데, 이것은 시대적인 유행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화풍을 가장 잘 구사한 화가가 장승업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장승업의 영향은 그가 그린 다양한 종류의 회화 모두에 걸쳐 파급되었다. 그의 다양한 양식의 산수화는 구한말에서 일제 초기 산수화풍의 근원이 되었다. 유려한 필치로 그려진 도교의 신선이나 불교의 인물화도 현대 한국화에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화조영모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특히 기명절지화에 있어서는 장승업이 만들어낸 향식이 후에 크게 유행하였다.

  장승업이 끼친 영향으로는 위에서 살펴본 여러 종류의 회화에 보이는 것 이외에도, 화선지 사용법의 보급이 지적된다. 김용준은 그의『조선미술대요』에서 "전에 조선화가들이 잘 쓰지 않던 선지(宣紙)에 양호(羊毫)로 자유자재 휘두르는 기법을 전파시켰다"라고 지적하였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화선지는 전통 한국 종이에 비해 먹이 빨리 번지므로 사용하기가 까다로웠다고한다. 그러나 장승업처럼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에게는 오히려 파묵법, 발묵법 등의 미묘한 효과를 살릴 수 있었다.

  장승업이 끼친 영향은 주로 안중식과 조석진을 통해 후대에 전파되었다. 이 두 사람은 조선시대 전통화법을 현대화단에 이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장승업이 신화적 명성을 날릴 때 직접 그를 사숙(私淑)했으며, 종종 장승업이 그리다 만 작품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지금도 장승업의 작품에는 안중식의 낙관이나 화제가 적힌 것이 가장 많은 점도 이를 증명한다. 장승업이 죽은 후 이들은 1911년 이왕가(李王家)의 후원으로 설립된 서화미술원, 그리고 나중에는 1919년 민족미술가들이 설립한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김은호, 노수현, 박승무 등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가들도 모두 이들에 의해 교육된 인물들이다. 장승업의 화풍은 이들을 통해 한국 현대화단에까지 맥이 닿아있는 것이다.

  장승업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화가로는 앞에서 언급한 조석진과 안중식 및 그 제자들 이외에도 나수연, 이도영, 오일영, 이한복, 이용우 등이 있다. 특히 이용우는 일평생 장승업을 흠모하였으며, 장승업 처럼 술에 크게 취해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장승업의 영향력은 조선왕조의 멸망과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 때문에 크게 변질되었다. 장승업으로 대표되는 전통화법은 일제의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유입된 일본화와 새롭게 들어온 서양화의 큰 흐름 속에 점차 약화되었다. 그리고 ㅇ런 쇠퇴 속에는 장승업을 계승한 사람들의 책임도 일부 있다. 즉 그들은 장승업의 예술을 향한 순수한 정열과 치열한 작가 정신은 배우지 못하고 외형적 형식만 따른 결과,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경우가 많았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는 치열한 장인정신과 함께 세속적인 가치를 저버릴 용기를 가져야 하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었다.

5. 장승업의 업적과 현대적 의미

  이제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업적과 한국회화사상의 의의, 그리고 현재적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장승업의 업적으로는 우선 전통 화법을 창조적으로 종합, 결산한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 마지막 대화가(大畵家)로서 그는 전통 화법을 종합적으로 익히는 한편, 그 단점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극복하였다. 즉 그는 당시 조선시대 말기 하단의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 뿐만 아니라 널리 북종호풍(北宗畵風)도 받아들여 종합 절충하여 새롭게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또 당시에 청ㄴ의 새로운 화풍, 즉 신흥도시 상해를 중심으로 발달하던 조지겸, 임백년, 오창석 등 해상파(海上派)의 화풍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 뿐 아니라 장승업은 당시에 유행하던 화보(畵譜)도 이용하는 한편, 실제 동식물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 특징과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였다. 이렇게 장승업에 의해 창조적으로 종합, 결산된 전통화법은 이후에 제자인 심전(心田) 안중식과 소림(小琳) 조석진에게 전수되었다. 그리고 다시 안중식과 조석진은 현대 한ㄲ화단의 육대가(六大家)로 꼽히는 이상범, 변관식, 허뱍련, 김은호, 노수현, 박승무 등을 교육시켰던 것이다.

  둘째, 자승업은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화, 기명절지화 등 여러 분야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다. 당시 형식화 된 남종문인화의 유행 아래 장승업만큼 회화의 여러 분야에 능숙한 화가는 없었다. 장승업의 회화는 철두철미한 장인(匠人) 정신의 소산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린 다양한 회화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될 수 있었다. 장승업은 산수화에서는 수많은 전통적 양식을 절충하여 동양적 이상향(理想鄕)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인물화에서는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그려내었다.

  화조영모화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기운생동(氣運生動)하는 필묵법으로 소화해 내었고, 그가 창조한 기명절지도라는 독특한 장르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새로운 회화미를 창출해 내었다. 장승업의 신운이 넘치는 작품세계는 암울했던 19세기 후반에 있어서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예술혼의 승리였다.

  셋째, 장승업의 예술가로서의 업적 중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동양예술정신의 구현, 나아가 순수한 예술정신의 구현에 있다. 장승업은 예술ㅇㄹ 향한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예술안(藝術眼) 앞에는 왕이나 부자가 따로 없었다. 세속적인 부와 명성, 그리고 권위 따위는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예술과 예술의 영감을 북돋아주는 술(酒)만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애는 미를 위한 구도자(求道者)의 길이었으며, 세속적인 면에서는 실패한 것 같으나 진정한 예술의 면에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장승업의 큰 업적들은 바로 그가 한국 회화사상 차지하는 중요한 의의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를 조선왕조 3대 화가, 혹은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으며, 동시에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화가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회화는 자칫 빈약할 뻔했던 조선말기의 회화사를 풍성하게 살찌웠고, 우리 민족사의 암울했던 한 시기를 정신적, 예술적으로 밝힌 찬란한 빛이었다.

  장승업의 생애와 예술은 지나간 시대의 역사에 있어서만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현대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그의 생애와 예술은 시대를 초월하여 진정한 예술가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예술은 물질적 부와 세속적 권위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점, 또 일상적인 행복과 나태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구적 가치관이 판을 치는 서양 미술사조가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현대에 있어서 장승업의 구도자적 삶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즉 투철한 예술혼이 없는 외형적 양식추구가 과연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예술가의 인생 자체와 융합되지 않은 예술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제기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장승업 자신의 치열한 삶과 신운이 넘치는 작품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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