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금강전도〉의 시화첩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했다고 한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성격이 부드러운 가운데 소탈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 불렀다. 《하산외사》란 책에 전하는 김홍도의 사람됨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단원은 살림이 늘 가난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때가 많았지만,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이것을 사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때마침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에게 그림 값으로 3천금을 받게 되었다. 그중 2천금으로 매화를 사고 8백금으로 술을 받아서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마시고 남은 돈 2백금으로 양식을 샀다고 한다"
김홍도가 어느 해인가, 정조의 분부를 받아 궁궐 안에 있는 큰 벽에 <해상 군선도>를 그린 일이 있었다. 그는 시중에 드는 내시에게 먹물 몇 되를 만들어서 큰 그릇에 받들게 하고, 자신은 웃옷을 벗어서 몸을 홀가분히 한 뒤 몇시간 안에 그 큰 벽화를 완성시켰다. 그림 속에는 출렁대는 파도가 집을 무너뜨릴 것 같았고, 신선들은 살아 움직여 구름 위에 오르는 듯해서 그 그림을 본 모든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丘)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畵士) ·첩취옹(輒醉翁)이다.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김홍도는 김응환의 제자로서, 신라 때의 솔거 이후 우리 나라 그림의 전통을 확립한 천재 화가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호조참판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畵格)을 높이는 동시에, 그의 훈도 아래 詩文書畵를 익혔기 때문에 성리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몸에 지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성리학을 사상을기반으로 하고 있던 진경시대 문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듯 하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따라 ‘단원(檀園) ’이라 자호하였다.
1781년 정조의 초상화가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이듬해 역시 왕의 명령으로 김응환과 함께 일본으로 가던 도중, 김응환이 죽자, 혼자서 쓰시마 섬에 가서 섬 지도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한때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왕의 명령으로 용주사의 벽화와 판화를, 1795년에는 5륜 행실도의 삽화와 판화를 그렸고, 그밖에도 여러 선비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의 정교하고 호탕한 작품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그가 20세 안팎에 그린 그림들이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김홍도가 활동한 영조, 정조 시대에는 베이징으로부터 크리스트교가 전래되어 서양 과학이 들어와 실학과 한글 문학이 찬란하게 꽃필 때로서, 도화서의 화원만도 6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문화에 일찍 눈을 뜬 김홍도는 중국북화를 모방하고 있던 다른 화가들로부터 대담하게 벗어나 중국 남화를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켰다. 자연을 즐기는 선비가 산책을 나갔다가 꾀꼬리 한 마리의 울음소리에 문득 얼굴을 드는 순간을 그린 <마상청앵도>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서적인 한 면을 볼 수 있음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명기(李命基)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엄치욱(嚴致郁)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 仙人騎驢圖〉·단원도 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신윤복의 그림처럼 우아한 매력이나 사랑스러운 감정같은 것은 느껴볼 수 없다. 그의 풍속화의 주인공들은 예쁜 기생이나 멋있는 한량이 아니라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평범한 서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윤복의 그림보다 더 한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풍취가 깊이 드러나고 서민적인 체취와 독창적인 신선한 조형미가 담겨 있다. 김홍도는 투박하고 경직된 선묘를 사용하여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의 일상 생활을 담담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렸던 화가이다. 그가 남겨 놓은 풍속화를 그냥 지나쳐 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심성 밑바닥에 흐르고있는 해학과 중용의 정신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단원은 그림 재주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기에 모든 화과(畵科)의 그림에 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인물,화조,사군자,누각 등을 다 잘하는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었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였다 한다. 그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어느 화과의 그림이거나 간에 모든 그림에 조선 고유의 색을 짙게 드러난다는 공통성이 있다. 산수화는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동해안 명승지를 그렸다는 해산첩<海山帖>에서 볼 수 있듯이 겸재의 사생기법으로부터 연유한 서릿발 준법으로 바위산을 표현하되,현재나 표암 강세황이 명대 남종화 기법을 수용해 들이면서 그 영향으로 변형시킨 부드러운 붓만을 가미하여 굳세고 씩씩하던 겸재의 붓질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런 온건한 필법은 아마 말기 문화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세련미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진경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단원이 지목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 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주듯이, 주로 화보(畵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北宗院體畵的傾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찾아볼 수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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