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1부 중국적 사회주의: 그 승리와 좌절의 역사
Ⅰ. 사회주의는 실패했는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현존 `사회주의체제가 심각한 체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존 사회주의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맑스-레닌주의와 공산당의 일원적 지배체제, 그리고 공유제에 입각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에서 비롯되는 이념적 정치적 획일성과 비민주성, 장기적인 경제침체 등으로 대부분의 현존 사회주의국가들은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이 모두 전례없이 대담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게 된 것도 바로 이와같은 체제적 위기의 심각성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1978년이후 등소평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개혁과 개방정책, 그리고 1985년이후 소련에서 전개되었던 고르바초프의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운동,’ 그리고 1980년대에 폴란드, 헝거리 등에서 시도되었던 개혁운동들은 모두 변화의 절박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된 것이었으며, 개혁운동이 추구하는 변화의 폭과 범위 등에 있어서 과거의 개혁운동과 구별된다. 예를들면, 흐루시초프의 개혁운동은 사회주의의 궁극적 우월성과 승리에 대한 강한 자신감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고르바초프나 등소평의 개혁, 개방운동은 심각한 사회주의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개혁 사회주의와 1980년대의 개혁 사회주의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현존 사회주의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공통적인 체제위기에 봉착하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개혁과 개방이란 ‘역사적 노선전환’을 나름대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이 동일한 정도의, 동일한 성격의 체제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모든 현존 사회주의국가들의 생존전략도 동일한 것은 물론 아니다. 소련과 중국,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들은 혁명전통도 다르고, 경제발전의 정도도 다르며, 정치문화적 배경도 다르기 때문에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체제위기의 심각도와 성격도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들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정치적 행위자들의 정치적 환경과 그들의 ‘전략적 선택’도 다르기 때문에 체제위기에 대한 대응양식은 개별 국가 수준에서 상이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중국의 개혁, 개방의 사례연구도 사회과학자들이 흔히 직면하게 되는 문제, 즉 일반성과 특수성의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중국적 사회주의의 특수성과 일반성이 무엇이며, 중국의 개혁, 개방운동이 소련이나 동구의 그것과 어떤 점에서 공통성과 차별성이 있는가를 규명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첫째,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의 역사적 배경으로서 모택동 시대와 등소평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사회주의체제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현실적 경험과 조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모택동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가 초래한 체제위기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특히, 중국사회에 대재난을 초래했다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분석함으로써, 중국에서 대담한 개혁, 개방정책이 등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둘째,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 몰락이후 등소평을 중심으로 반좌파 개혁연합세력이 등장하게 되는 정치적 과정을 분석하고, ‘1개의 중심(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과 2개의 기본점(개혁, 개방과 4항 기본원칙의 견지)’으로 표현되는 등소평의 개혁 사회주의의 특징과 성격을 분석하려고 하였다. 셋째, 1980년대에 전개된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을 분석하여 중국사회의 변화와 개혁 사회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사회주의의 위기에 대한 중국적 생존전략를 살펴 보았다. 끝으로 앞에서의 분석을 종합하면서 중국의 개혁사회주의의 장래를 검토하였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저자가 주장하려는 것은 첫째, 중국에서 개혁사회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현존 사회주의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모택동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과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며, 둘째, 모택동의 사망을 계기로 등소평은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반좌파 연합세력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발전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대담한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하였고, 셋째, 경제발전과 경제개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개혁사회주의는 소련이나 동구의 그것과는 달리, 상당한 성과를 산출했지만, 기본적으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불균등 발전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중국적 개혁사회주의의 장래는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Ⅱ.중국 개혁정치의 역사적 배경: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
중국이나 소련에서 개혁정치는 모두 과거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의 경우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주의에 의한 사회주의의 왜곡을 비판하면서 레닌주의에로의 복귀를 강조함으로써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의 정당성을 강변하였다. 중국의 개혁세력들도 모택동 시대에 대한 비판적 반성으로부터 개혁과 개방정책에로의 ‘역사적 노선전환’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에서 스탈린시대는 전면적인 부정과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었지만, 중국에서 모택동 시대(1949-1976)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단히 복잡하고도 미묘한 정치적 잇슈였다.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세력은 대체로 ‘사회주의적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한 7년’ (1949-1956)과 이른바 신경제정책의 시기 (1961-1965)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대약진운동(1958-1960)과 문화대혁명시기 (1966-1976)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개혁파들에 의하면,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에 모택동은 중대한 과오를 범하였고, 사회주의의 이념과 제도는 왜곡되었으며, 당과 국가에 대재난을 초래함으로써 중국적 사회주의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이처럼 개혁파들에 의하여 상이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택동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특징은 무엇이며, 모택동 시대의 유산은 과연 어떤 것인가.
1. 중국혁명의 두 가지 유산: 신민주주의와 연안공산주의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에 코민테른과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소수의 급진적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함으로써 부강하고 자주적인 신중국을 건설하려는 혁명운동으로 출발하였다. 따라서 초창기의 중국공산당은 소련과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국공합작에 합의하고, 도시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을 기초로 하는 정치적 변혁운동을 주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27년 국공합작의 붕괴와 더불어 도시지역에서 축출된 중국공산당은 산간벽지와 방대한 농촌지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홍군을 조직하고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이른바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도시 노동자중심의 볼세비키혁명과는 다른 중국적 혁명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5년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이른바 볼세비키 28인으로 알려진 소련유학파들이 퇴진하고, 홍군과 농촌소비에트운동의 지도자였던 모택동이 당과 군의 지도권을 장악하고, 마침 코민테른 제 7차 대회에서 개별 국가의 공산주의운동의 독자성과 자주성, 그리고 민족주의와의 결합이 강조되면서, 중국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주장하면서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합한 혁명전략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중국민중들간에 항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자 국민당정권과 제2차 국공합작에 합의하고, 이른바 신민주주의 혁명노선을 추진하였다.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으로 정식화된 신민주주의 혁명노선이란
첫째, 아편전쟁 이후 중국사회는 반(半)봉건 반(半)식민지사회로 전환되었으며, 따라서 중국혁명의 제 1차적인 과제는 반봉건(反封建), 반제투쟁(反帝鬪爭)을 전개하여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둘째, 그러나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혁명은 구민주주의 혁명단계와 신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구별될 수 있으며, 신민주주의 단계는 서구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혁명과는 달리, 부르주아계급에 의하여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5·4운동 이후 급속하게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노동자와 농민계급이 주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신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계급은 부르주아계급이 실현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인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쟁취를 실천하고 사회주의에로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기본전략은 노동자와 농민, 소자산계급을 기본세력으로 하면서도 민족자산계급과 개명된 향신계급 및 양심적인 지주계급을 포섭하여 광범위한 계급연합을 구축하고 극소수의 대지주와 대자본가계급만을 배제하는 신민주주의 정치질서, 신민주주의 경제, 신민주주의 문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택동에 의하면, 신민주주의 정치질서란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이 다같이 참여하는 계급연합정권을 의미하는 것이며, 신민주주의 경제란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공존, 협력하는 혼합경제를, 그리고 신민주주의 문화란 대중적, 민족적, 과학적 문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신민주주의론에 입각하여 중국공산당은 1940년부터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延安지역과 해방구에서 이른바 3·3제에 입각한 ‘민주적 대선거’를 실시하여 노동자와 빈농을 대표하는 공산당과 소자산계급을 대표하는 진보파, 그리고 민족자산계급을 대표하는 중간파가 각각 3분의 1씩 정권기구에 참여하는 연합정권의 형태를 갖추려고 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농촌지역에서 지주계급을 타도하고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현하려는 토지혁명과 계급혁명노선을 중단하고 지주와 부농들의 토지와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주요 재정수입을 형성하고 있는 소작료와 고율의 이자율을 적정선으로 하향 조정하는 이른바 감조감식운동(減租減息運動)과 누진세제(累進稅制)를 실시함으로써 농촌사회의 착취구조를 개선하려는 점진적이고 온건한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노동과 민족자본의 대립보다는 양자의 상호협력을 강조하고,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의 공존과 협력을 모색하는 신민주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회경제적 안정과 발전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연안시대에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보다는 계급연합을 강조하면서 대중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형평성의 제고, 그리고 경제발전을 실현함으로써 신중국을 건설하려는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지역에서도 국민당 권을 대치할 수 있는 전국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연안경험’(延安經驗)은 계급적 단결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점진적인 발전전략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1940년에서 1943년 사이에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와 국민당 부의 3차례에 걸친 봉쇄정책으로 연안정권은 심각한 경제적, 군사적 위기국면에 봉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위기국면을 돌파하기 위하여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대중들의 혁명적 열의를 동원하려는 대대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예를들면, 연안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 1942-1944), 정병간정운동(精兵簡政運動, 1941-1943), 하향운동(下鄕運動, 1941-1942), 합작사운동(合作社運動, 1942-1944), 생산운동(生産運動, 1943-1944) 등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은 기존의 체제와 사상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동원, 조직화함으로써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였다. 특히,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은 자력갱생과 근고분투의 기치를 내걸고 모든 간부, 관료, 지식인, 당원들을 생산투쟁에 총력 동원하였고, 대중들의 혁명적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대중의 혁명적 적극성을 바탕으로 한 총력동원체제에 힘입어 연안정권은 1943년 이후 점차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급속도로 확장, 발전하여 마침내 1945년 중일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국민당정권과 정면 대결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은 대중의 혁명적 에너지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대중운동이란 독특한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고, 인민대중의 혁명적 적극성만 개발할 수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혁명적 이상주의와 평등주의로 특징되는 연안공산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혁명경험은, 특히, 연안시대의 혁명경험은 신민주주의론으로 대표되는 계급적 화해와 협력에 기초한 개혁주의노선과 대중의 사상혁명과 정치주의에 입각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대중동원노선이란 두 가지 상이한 전통을 남겼다. 이 두가지 중국혁명의 전통이 1949년 이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스탈주의적 고전적 사회주의체제와 결합하여 모택동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를 산출했다.
2.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중국공산당의 전국적인 승리가 임박한 1949년 6월 30일 창당 28주년을 기념하여 모택동은 「인민민주전정론」(人民民主專政論)을 발표하여 공산당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권의 성격과 과제를 밝혔다. 모택동에 의하면, 신정권은 기본적으로 신민주주의론의 연장선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하면서도 도시의 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포함한 광범위한 계급적 연합에 기초하는 인민민주주의 정권이며,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과제는 소수의 착취계급과 정치적 반동계급에 대한 독재을 강화하고, 교육과 민주적 설득의 방식으로 농민과 민족자산계급들의 개조를 추진하면서 빠른 시간안에 경제회복과 경제발전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특히, 모택동은 중국의 낙후된 경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민족자산계급과 중국의 자본주의적 경제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민민주주의 정권은 자본주의의 소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발전에 유용한 모든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활용하고, 민족자산계급과의 단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론은 신정권의 임시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강령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공동강령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신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 국가로서 노동자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여 “민주적 제 계급과 국내의 각 민족을 결집한 인민민주전정을 실행하고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중국의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을 쟁취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공동강령은 신중국에서 각종 경제 형태, 예를들면 국영경제와 합작사 경제, 농민 및 수공업자들의 개인경제, 그리고 도시 상공업자들의 사적 자본주의 경제등이 국영경제의 지도아래 분업, 협력하며 국민경제 전체의 발전을 촉진시켜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공동강령은 신중국에서 관료자본의 몰수와 점진적인 봉건적 및 半봉건적 토지소유제의 농민적 토지소유제로의 전환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신정권은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및 민족자산계급의 경제적 이익과 그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신민주주의경제를 발전시켜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건국 초기에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기본적으로 신민주주의 혁명론의 연장선에서 계급적 연합과 단결에 기초한 공산당 중심의 연합 정권기구의 구축과 새로운 정치질서의 건설, 그리고 국가경제의 회복과 사회질서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1949년에서 1952년사이에 공산당의 지도하에 다양한 민주정당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를 기초로 각급 수준에서 각계의 대표로 이루어진 인민대표회의를 조직하고, 각급 인민정권을 수립하였다. 물론 중앙과 지방의 인민정권의 구심점은 중국공산당이 차지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정권기구의 장악에만 만족하지 않고, 중국사회 각 분야에까지 급속도로 당조직을 침투, 확장하였다. 노동조합이나 농민협회와 같은 각종 대중조직을 매개로 중국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국가부문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전반을 통일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신정권은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국가부문과 사회영역에 대한 조직적인 침투와 재편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토지개혁과 반혁명 진압운동, 3반(反) 5반(反)운동, 그리고 사상개조운동 등 대중운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신정권은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運動)을 전개하면서 애국주의를 고취하고 대대적인 토지개혁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 구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1950년부터 1952년 사이에 중국공산당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토지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매년 30만명 이상의 당원, 간부, 지식인들로 구성된 공작대를 편성, 농촌에 파견하여 빈농과 고용농(雇用農)을 중심으로 농민협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주계급에 대한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 토지에 대한 재분배를 실행하였다.
이와같은 토지개혁으로 신중국에서 지주계급은 소멸되었으며, 약 3억명에 달하는 농민들에게 약 7억무(畝)(약 4천 6백만 헥타르)의 토지와 생산수단이 분배되었다. 이러한 토지개혁으로 농촌지역에서 봉건적 착취구조가 파괴되었고, 지주와 부농 중심의 농촌경제를 자작농 중심의 신민주주의 경제로 개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은 토지분배에 참여한 광대한 빈농과 고용농들의 정치적 충성심을 확보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농촌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조직과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지배력을 급속도로 확장,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부정과 부패, 그리고 관료주의의 병폐를 척결하고 국민경제의 질서와 사회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도시의 상공업자와 관료들을 상대로 하는 3반 5반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전쟁의 특수로 번창하던 사적 자본주의 영역에 대한 당과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이용, 제한, 개조’의 방침을 확립하였으며, 지식인들의 사상개조운동을 통하여 이른바 구지식인들의 부르주아 반동사상의 영향을 제거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에 대한 당의 이념적 헤게모니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와같이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건국 초기에 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론의 관점에서 중국공산당의 영도권이 관철되는 전제에서 계급적 연합의 성격을 반영하는 정권기구의 수립, 자본주의적 요소와의 공존을 용인하는 신민주주의 경제의 발전, 그리고 소수의 반동계급을 제외한 대다수 인민들의 단결과 협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과 국민경제의 회복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목표는 비교적 빠른 시일안에 성취되었다. 건국 3년만에 중국공산당은 국가기구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의 모든 분야에 침투, 통제할 수 있는 조직적 메카니즘을 건설함으로써 당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전후 경제질서의 혼란을 극복하고 경제회복과 경제발전을 실현하였다. 1952년의 중국경제는 모든 면에서 해방전의 최고수준을 회복함으로써 1949년이후 3년간을 ‘중국경제의 부흥기’라고 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건국 초기의 이와같은 성공의 밑바탕에는 오랜 전쟁과 혼란에 시달린 중국 국민들의 안정 기대심리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지만, 동시에 신민주주의론=인민민주주의론의 관점에서 건국사업을 추진한 중국공산당의 유연한 정책노선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같은 건국초기의 국민적 지지와 성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953년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소련의 발전모델을 바탕으로 중국의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한 야심적인 제 1차 5개년계획(1953-1957)을 추진하면서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을 선언한 「과도기 총노선」을 채택하였다. 1953년 8월에 모택동에 의하여 정식화된 「과도기 총노선」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서부터 사회주의적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기”이며, “이 과도기에서 당의 총노선과 총체적 임무는 장기간에 걸쳐 국가의 공업화를 점진적으로 실현하고,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 상공업에 대하여 사회주의적 개조를 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과도기 총노선’에서 제시한 공업화와 사회주의 개조에 대한 구상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건국 초기에 이미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들은 중국공산당의 목표가 공업화와 사회주의 개조를 추진함으로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에로 이행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모택동은 「인민민주전정론」에서 중국경제의 낙후성과 공업화의 필요성, 그리고 점진적인 사회주의 개조를 통한 사회주의에로의 이행 준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모택동을 비롯하여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은 ‘먼 장래의 일’이며, 중국의 형편을 고려할 때, 신민주주의 단계는 상당기간 지속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중국에서 사회주의에로 이행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당한 정도의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사회주의적 개조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즉, 선(先) 공업화, 후(後) 사회주의적 개조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혁명의 전화를 선언한 과도기 총노선, 즉 신민주주의 혁명단계의 종결과 사회주의에로의 이행, 그리고 ‘사회주의 공업화와 사회주의 개조의 동시적 추진’을 선언한 1953년의 과도기 총노선은 과거의 신민주주의론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급진적인 노선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년 당시의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사회주의 이행론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과도기 총노선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은 ‘장기간에 걸쳐’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여전히 공업화의 착실한 성과를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하려고 했다. 1953년 당시 중국 지도부는 최소한 3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계획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서 경제적으로 낙후된 농촌사회에서도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결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고 인식했었다. 따라서 1차 5개년계획과 과도기 총노선를 선언한 직후에도 여전히 중국사회에서 사회주의적 개조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혁명’의 방식에 입각하여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 관리함으로써 짧은 시간내에 현대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스탈린적 발전정책의 집약적인 표현인 제1차 5개년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중국의 정치와 경제제도는 급속도로 전형적인 당국가체제와 계획경제체제로 변모되었다. 즉, 1953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공산당의 일원적 영도를 제도화하는 전형적인 당국가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체제정비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1953년에 중앙과 지방에서 인민대표대회의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고, 마침내 1954년 9월에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과도기 총노선에 입각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명시한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고,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기초한 당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와 동시에 소련의 코스프란에 해당되는 국가계획위원회를 중심으로 경제관리체제의 집중과 통일적 관리체제가 확립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체제가 완비되었다.
이와같이 전형적인 당국가체제와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하고 1차 5개년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지도부 내부에서 공업화와 사회주의 개조의 속도와 범위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농촌사회에서 사회주의 개조의 속도와 방식에 대한 모택동(毛澤東)과 등자회(鄧子恢)의 논쟁은 스탈린과 부하린의 논쟁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하겠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며 동시에 당의 농촌공작 부장으로서 농촌정책의 실무 책임자였던 등자회는 중국의 농촌사회에서 소농경제의 역할을 인정하고 상당기간 개체경제와 부농경제를 이용하여 농촌사회의 경제발전과 안정을 구축하여야 하며, 농업집단화는 공업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어 대량의 기계와 비료공급이 가능한 수준에서 비로서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등자회는 현대공업 중심의 급진적인 산업화정책은 농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강요함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파괴할 위험성마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현대공업의 비약적 발전을 강조하는 급진적인 산업화정책은 사회주의 신중국의 건설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추진해야 할 정책이며, 농촌경제의 발전은 국가의 지원이 없어도 농민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을 동원하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농업과 공업의 동시적 발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농업집단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농민들의 생산력을 개체경제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비약적인 농촌경제의 발전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공업화와 농촌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동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모택동은 공업화와 집단화의 상호 관련성을 간과하고 점진적인 농촌경제의 발전을 강조하는 등자회와 같은 일부 당간부들의 점진주의적이고 단계적인 사회주의적 개조론을 보수적인 견해라고 비판하였다.
이와같은 모택동의 논리, 즉 급진적인 공업화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농촌으로부터 안정적인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이 필요하고, 동시에 모든 국가의 자원을 현대공업부문에 집중하면서도 농촌경제의 발전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는 길은 집단화를 통한 농촌자원의 효율적인 동원과 관리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모택동의 논리는 등자회의 점진적이고 단계론적 관점보다는 당시의 중국공산당 지도부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다. 따라서 건국 초기의 성공에서 자신감을 얻어 조속한 시일내에 부강한 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을 열망하던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1955년 봄부터 1956년사이에 농촌사회에서 대대적인 사회주의적 개조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거에 거의 모든 농가들이 초급합작사에서 고급합작사로 전환되었으며, 동시에 도시지역에서도 사영 상공업과 수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단행되었다.
급진적인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개조의 동시적 추진으로 중국사회는 대단히 변화하였다. 사회주의적 개조가 진행되면서 모든 영역에서 ‘이데올로기와 조직’에 의한 개편이 단행되었고 중국사회에 대한 당국가의 침투와 통제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중국공산당은 계획적인 사회주의적 공업화에 모든 국력을 집중함으로써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에로 도약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사실, 1차 5개년계획은 1956년 8차 당대회에서 유소기(劉少奇)가 선언한 것 처럼 “우리들의 적들 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거대한 성과”를 올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공업부문은 5년동안 연평균 18%의 높은 성장율을 기록하였으며, 과거 중국에서 전혀 발전되지 않았던 분야, 예를들면, 비행기와 자동차산업, 대형기계와 정밀기계공업, 발전설비 제조업등이 건설되었으며, 조강과 석탄등 주요 공업부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공업노동자도 640만명에서 1천 300만명으로 증가되었다.
1차 5개년계획은 현대공업, 특히 중공업부문의 비약적인 발전이란 성과를 산출했지만, 동시에 농업과 공업의 불균형 발전, 그리고 과도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와 당국가체제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갈등을 증폭시킴으로써 스탈린식 발전모델의 적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1956년 정치국 확대회의와 최고국무회의에서 「10대 관계론」을 제창하면서, 중공업, 경공업 및 농업의 관계, 연해공업과 내륙공업의 관계,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관계, 중앙과 지방의 관계, 공산당과 민주당파간의 관계, 중화민족과 소수민족의 관계, 중국과 외국과의 관계 등을 거론하면서 이들 10대 관계, 또는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소련모델에서 파생되는 결점과 오류를 경계하였다. 또한 모택동은 ‘인민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지식인들의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명한 ‘쌍백정책’(雙百政策: 百花齊放과 百家爭鳴)을 천명하였고, 정치적으로 민주당파들과의 ‘장기공존과 상호감독’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1956년 당시 모택동은 급진적인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개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스탈린식 사회주의사회의 건설방식보다는 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론의 정신에 기초한 균형발전을 다시 모색하려고 했다.
이와같은 점진주의와 온건주의 노선에로의 전환은 1956년 9월에 개최된 8차 당대회의 결의에도 반영되었다. 1945년에 개최된 7차 당대회이후 11여년만에 열린 8차 당대회는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승리와 전진을 위한 당대회이었다. 지난 10년동안 내전에서 승리하고 인민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사회주의적 개조를 단기간에 성취했다는 점에서 8차 당대회는 승리의 당대회었으며, 동시에 급진적인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개조로 파생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진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당대회였다. 더구나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후르시초프가 스탈린 격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평화공존과 평화적 이행을 강조함에 따라, 동구 사회주의국가에서 개혁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8차 당대회는 새로운 국내외 상황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도 당의 지도이념과 지도체제, 그리고 발전전략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없는 중요한 전환기적 당대회이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역사적 의미는 8차 당대회의 결의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8차 당대회는
첫째, 사회주의적 개조의 결정적 승리로 말미암아 중국사회에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은 이미 기본적으로 해결되었으며, 수천년을 지속해 온 계급착취체제의 역사가 기본적으로 종식되었고, 사회주의 제도가 이미 기본적으로 건설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둘째, 이와같은 성과로 말미암아 중국이 당면한 주요 모순도 당연히 변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민들의 물질적 요구와 문화적 욕구는 날로 증대되고 있는데 비하여 중국의 정치와 경제는 여전히 낙후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유래하는 모순이 바로 중국이 당면하고 있는 주요 모순이며,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과제도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민들의 물질적 문화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셋째, 8차 당대회에서 주은래(周恩來)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1차 경제계획의 ‘경험과 교훈’을 총괄하면서 지나친 모진(冒進)을 경계하였고, 각 부문의 균형 있는 발전을 강조하였다. 넷째, 당과 국가의 활동과 관련하여 8차 당대회는 주관주의와 관료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당과 국가제도의 민주화와 법제화의 필요성과 대중노선의 견지를 강조하였다. 끝으로 8차 당대회에서는 개인숭배를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하였고, 모택동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에서 삭제하였다.
중국공산당은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개조를 이미 기존사실로 수용하면서도 인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한 생산력의 발전을 당면과제로 설정하고,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인 당국가체제의 건설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8차 당대회 노선은 신민주주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제2차 5개년계획(1958-1962)의 내용을 분석하면, 그 핵심은 여전히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건설, 집단소유제와 전민소유제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고, 주요 공업분야에서 생산목표를 계획기간내에 2배 이상 증가한다는 야심적인 지표를 제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1차 5개년계획의 기본구상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1956년 8차 당대회에서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는 스탈린주의적 발전정책과 당국가체제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단기간에 부강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란 목표를 수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3. 대약진운동과 중국적 사회주의의 좌절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56년을 전후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스탈린주의적 발전모델에 따라 급진적인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개조를 동시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점을 인식하고, 중국적 실정에 알맞는 발전전략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것은 신민주주의 혁명시대의 경험에 입각하여 인민대중들과 다양한 계급들간의 단결과 협력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모택동은 사회주의적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결된 단계에서 중국인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원칙적으로 ‘비적대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방식보다는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하며, 지식인과 민족자산계급들도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게 하고, 인민민주주의 정권에 참여하는 길을 개방한다면, 헝거리 사태와 같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의 적극성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른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란 자유화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산당에 대한 지식인들과 민주당파들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물론 이와같은 지식인들에 대한 정치적, 사상적 자유화정책에 대한 당내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공산당의 당풍쇄신운동 과정에 지식인들이나 민주당파와 같은 당외 인사들 동원, 참여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당관료들의 불만과 저항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모택동은 당의 관료주의적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지식인들과 민족자산계급들의 적극적인 비판을 오히려 장려하였다.
그러나 ‘인민내부의 모순’에 대한 모택동의 기대는 너무나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의 방침에 따라 지식인들에게 비판의 자유가 허용되자 이들은 모택동이 기대했던 건설적인 비판의 차원을 넘어서 공산당의 당천하(黨天下)에 대한 혹독한 비난과 더불어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였고, 심지어 공산당의 타도를 요구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와같이 지식인들의 적대감이 예상외로 큰 것에 놀란 모택동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맑스주의자는 어떤 사람의 비판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종래의 유연한 태도를 포기하고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1957년에 대대적인 반우파(反右派)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신민주주의 혁명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지식인과 민족자산계급들의 협력을 얻어 경제발전과 정치적 안정을 실현하려던 시도는 좌절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은 또 다른 중국혁명의 경험, 즉 연안공산주의의 전통에 입각하여 인민대중, 특히 농민들의 혁명적 열의와 잠재력을 동원하여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려는 새로운 대규모적인 실험인 대약진운동을 추진하였다.
제2차 5개년계획의 첫해인 1958년에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중대한 딜렘마에 봉착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 중국은 1차 5개년 계획 당시와 같은 소련으로부터의 원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정책과 스탈린 격화운동으로 중국과 소련사이에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도 백화제방정책의 좌절로 나타난 바와 같이 지식인들이나 민족자본가들의 적극적인 협력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급속도의 공업화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즉, 제 2차 5개년계획의 실천목표를 대폭적으로 하향조정하고 중공업 중심의 산업화노선을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가와 도시부문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서도 농촌경제의 ‘대약진’을 실현함으로써 공업과 농업의 동시적 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어떤 획기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같은 딜렘마에 대한 모택동의 응답이 바로 3면홍기운동(三面紅旗運動), 즉 사회주의 총노선과 대약진, 그리고 인민공사운동이었다. 이미 모택동은 1955년의 합작사운동 과정에서 당간부들이 농민대중들의 잠재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같은 ‘보수적 사상’을 극복하고 농민들의 혁명사상을 적극적으로 동원, 조직하면 농촌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따라서 1958년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은 1955년의 소약진운동(小躍進運動)의 확대판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약진운동은 농민대중의 무한한 혁명적 잠재역량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연안공산주의의 전통을 원용하여 중국이 당면한 경제적 딜렘마, 즉 자력갱생에 의한 공업과 농업의 동시적 발전을 추진하려는 모택동의 대실험이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나 인민공사운동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구상되었던 것은 아니다. 모택동이나 일부 지도자들은 1957년 후반기부터 모든 경제부문에서의 ‘대약진’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변화를 염두에 두고 조직적으로 추진했다기 보다는 농업을 비롯한 모든 경제분야에서 생산증대를 위하여 열의를 다하자는 일종의 생산배가운동의 형태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58년초에 2차 5개년계획에 착수하면서 중국의 지도부는 ?인민일보?를 통하여 ‘열의를 다하여 앞장 서서 전진하자’는 내용의 사설을 발표하고 모든 경제부문에서 ‘대약진’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강조하면서 통상적인 생산배가운동보다 강도높은 증산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농촌지역에서 지방당 조직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수리사업과 기본건설사업이 추진되었고, 농업과 공업의 동시적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농촌사회의 공업화운동과 더불어 토착적인 방식의 강철 제련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연안공산주의의 정신, 즉, 자력갱생과 집단주의 정신, 그리고 대중들의 자기 희생과 근고분투의 혁명정신이 새삼 강조되었다. 특히 모택동은 대중들이 비록 빈곤하고 문화적인 수준도 낮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혁명적인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일궁이백(一窮, 二白)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적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인민대중들의 무한한 잠재적 생산력을 동원, 조직할 수만 있다면, “15년내에 영국을 따라 잡을 수도 있다”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인민들의 사상을 해방’시키고 인민대중들의 혁명적 열의를 고취하기 위한 대담한 제도개혁과 정책들이 실험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예를들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불평등,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下放정책, 소규모적이고 토착적인 지방공업의 건설, 대중교육과 문화시설의 확산, 그리고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의 확대 실시등은 모두 농민대중들의 혁명적 적극성을 고취하려는 것이었다. 인민공사도 바로 이와같은 혁명적 발상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1958년 8월에 발표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농촌에서 인민공사를 설립하는 문제에 관한 결의문」에 의하면, 농촌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협력, 조직의 군사화, 행동의 전투화, 생활의 집단화가 대중의 행동지침이 되고, 5억 농민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이와같은 과업은 기존의 농업생산합작사로는 달성될 수 없으므로 공(工), 농(農), 상(商), 학(學), 병(兵)이 상호 결합되어 있는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인민공사를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농촌사회에서는 불과 수개월 안에 종래의 고급합작사를 통합하여 대규모적이고 포괄적인 기능을 가지는 인민공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모택동은 이와같이 규모가 크고, 공유화의 정도가 높은 일대이공(一大, 二公) 인민공사와 같은 조직체의 잇점은 우선 농촌의 노동력과 자원을 최대한도로 동원할 수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군사 활동을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농촌의 종합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고, 자급자족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농촌사회에서는 인민공사를 바탕으로 농민들의 혁명역량을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으로 동원, 활용함으로써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으며, 단기간내에 공산주의 사회에로 이행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기대감이 팽배하면서 평등주의적인 분배와 집단주의적 생활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중의 혁명역량을 동원하여 일거에 공업과 농업의 동시적 발전을 이룩하고 공산주의사회에로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의 유토피아적 기대감은 곧 심각한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1959년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숙청당한 당시 국방부장 팽덕회(彭德懷)가 지적한 바와 같이 급격한 농촌조직의 개편과 과도한 공유화의 확대, 그리고 지방간부들의 ‘좌익 모험주의와 쁘띠 브르조아적 열광성’에서 파생되는 평등주의와 이른바 공산풍(共産風)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생산의욕은 급격히 위축되고, 농촌사회가 일대 혼란에 휩싸인 데다가 1959년과 1960년에 연이은 자연재해는 농촌경제에 괴멸적인 타격을 안겨 줌으로써, 대약진운동은 그야말로 대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처럼 자력갱생과 혁명정신, 그리고 인민공사와 같은 대규모 조직을 통한 대대적인 대중동원으로 농업과 공업의 동시적 대약진을 달성하고, 공산주의단계로 이행할 수 있다는 모택동의 발전전략의 실패가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대중에게 준 손실과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농촌경제의 와해로 말미암아 심각한 식량난이 초래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영양실조와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또한 경제적인 효율성과 전문성을 무시한 경제정책의 추진과 운영은 중국경제 전반에 일대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기인된 경제적 위기는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중국공산당의 리더쉽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농촌 실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군부까지 동요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 최대의 정권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모택동의 권위와 지도력을 심각하게 훼손함으로써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노선투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문화대혁명과 중국적 사회주의의 위기
1959년과 1960년의 경제적 위기로 말미암아 모택동도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1961년에 대약진운동으로 초래된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이른바 ‘8자 방침’, 즉 ‘조정, 공고, 충실, 향상’을 채택하고, 유소기, 등소평, 진운(陳雲)등이 전면에 나서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수습하고 경제회복과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신경제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2년 1월에 중국공산당은 ‘7,000인 대회’로 알려진 대규모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솔찍이 인정하고, 그에 대한 지도부의 자아비판을 실시하였다. 모택동도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당중앙이 범한 과오를 인정하는 자아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기본노선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지방당 간부들의 착오와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소련의 돌연한 지원중단과 같은 요인들이 대약진운동의 좌절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소기를 비롯한 실무관료들은 대약진운동의 기본노선과 그 방법에 대하여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즉, 정치사상 우선주의, 대중운동을 통한 경제발전전략, 과도한 목표 설정과 객관적인 조건과 경제법칙을 간과한 경제정책, 그리고 인민공사와 같은 대규모 조직의 비현실성과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의 문제점 등이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와같이 대약진운동의 실패 원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중국 지도부내의 견해차이가 분명하게 들어나기 시작하였지만, 유소기, 등소평, 진운과 같은 실무 지도자들이 모택동의 권위와 모택동사상의 좌경적 오류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모택동사상과 구별되는 뚜렷한 이념이나 정책방향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중국이 당면한 최대의 현안이었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조정 정책과 경제회복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노선과 구별되는 실용주의노선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실용주의노선이라는 것도 어떤 이념적인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편의적이고도 현실적인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1960년대 중국이 당면했던 심각한 경제위기는 실무책임자인 유소기, 등소평, 진운 등으로 하여금 경제회복과 사회질서의 안정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정책이든 시도하려는 편의적이고도 실용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게 했다. 이러한 태도와 입장은 등소평의 이른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론(黑猫, 白猫論)」으로 표출되었다.
이와같이 실용주의적인 입장에서 이들은 ‘경제법칙’과 ‘객관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약진운동의 유토피아적 경향성을 비판하고, 경제활동에 있어서 정치와 사상혁명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홍(紅)에 대한 전(專)의 역할을 강조하고, 전문기술자와 관료, 경영계층에게 더 많은 자율성과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경제적 효율성과 수익성이 모든 경제활동의 평가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제적으로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기업과 사업을 정리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은 대약진운동 당시에 추진되었던 대규모 수리사업과 건설사업 등을 취소하고, 방만한 지방공업을 폐쇄하였으며, 대규모 인민공사를 축소, 조정하여 이른바 생산대와 생산대대, 그리고 인민공사의 3급 소유제로 정비하면서 그중에서 최하위 단위인 생산대를 기본으로 삼았고, 분배정책에 있어서 평등주의적 경향을 억제하였다. 또한 이들은 농촌경제의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자본주의적인 성향’을 억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용한다는 차원에서 농민들의 자유지(自留地), 농가부업, 그리고 자유시장을 확대, 허용하였다. 따라서 농촌사회에서 집단화와 사회주의적 경제의 통제력과 기능은 약화되고, 일부 농촌사회에서는 개별농가에게 경제활동의 자율권을 보장해 주는 단간풍(單幹風)이나 호별생산책임제가 실시됨으로써 인민공사가 해체되기도 하였다.
또한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은 경제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문예와 학술 영역에 대해서도 과거와 달리 상당한 자율권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일부 지식인들은 계급투쟁보다는 계급적 조화와 협력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여러가지 문예형식을 빌어 간접적으로 모택동의 과오를 풍자하기도 하였다. 특히, 북경시 부시장이며 저명한 역사학자인 오함(吳唅)은 대약진운동 당시 이를 비판하다가 숙청당한 전 국방부장이었던 팽덕회사건을 풍자한 「해서파관」(海瑞罷官)이란 역사극을 발표하여 모택동과 좌파를 자극함으로써 마침내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하였다.
중국사회 각 분야에서 모택동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던 대약진운동의 당노선에 대한 비판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실무 일선(一線)에서 물러난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었던 신경제정책의 ‘수정주의적 경향성’에 대하여 일찍부터 경고하였다. 1962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8기 10중전회에서 모택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은 존재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통하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는 역사적 시기’에 당의 기본노선은 계급투쟁과 계속혁명이며, 자본주의의 부활과 수정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늦춰서는 않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모택동은 중소분쟁과 관련하여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면서 당과 국가의 지도부까지 자본주의세력이 침투하여 이른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走資派)가 등장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계급투쟁과 계속혁명론을 강조하면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중운동 방식의 경제발전정책을 계속적으로 후원하였다. 예를들면, ‘농업은 대채(大寨)에서 배우자’ 그리고 ‘공업은 대경(大慶)에서 배우자’라는 대중운동을 전개하면서 집단주의와 대중적 자발성을 기초로 공동부유(共同富裕)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동시에 모택동은 팽덕회의 후임으로 국방부 부장으로 임명된 임표(林彪)를 중심으로 군부에서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을 전개하게 하였으며, ‘인민해방군으로부터 배우자’는 운동을 통하여 인민해방군의 혁명사상을 사회 각 부문에 전파하려고 하였다.
이와같이 1960년대에 중국은 계급투쟁과 계속혁명론을 강조하는 모택동과 일부 급진적인 지식인들, 그리고 임표의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하여 유소기와 등소평이 대표하는 실무관료세력들로 구성된 실용주의파 혹은 우파가 형성되면서, 이들 두 세력간의 ‘숨은 노선투쟁’은 경제정책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문예정책과 지식인 정책, 그리고 군사안보 정책분야까지 확대, 심화되었다. 이처럼 대약진운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축적된 지도부 내부의 분열과 정책적, 노선적 차이와 갈등이 공개적이고도 폭력적으로 폭발한 것이 문화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급진적 문예비평가인 요문원(姚文元)은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이란 글을 상해에서 발간되는 ?문회보?(文匯報)에 발표하고, 모택동의 대약진운동노선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오함(吳晗)과 오함의 지원세력을 격렬하게 비난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첫 포문을 열였다. 이와같이 지식인 사회와 당 일부에서 확산되고 있는 ‘수정주의적 사상’을 비판한 요문원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유소기와 등소평, 그리고 팽진(彭眞)의 영향하에 있었던 중앙당 선전부와 북경시당위원회, 그리고 팽진을 조장으로 한 문화혁명 5인소조는 요문원의 글이 ?인민일보? 등 중앙지에 게제되는 것을 억제하면서 가급적 학술적 논쟁의 차원에서 축소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모택동은 팽진과 북경시당위원회, 당선전부의 오류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이들의 해임과 개편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1966년 5월에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화혁명의 강령적 문건인 「5·16통지」를 통과시키고, 진백달(陳伯達),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 등 좌파인물을 중심으로 문화혁명 5인 소조를 개편함으로써,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의 타파와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관습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문화대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내외에서 모택동과 좌파의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유소기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당내 실권파들은 각지에 공작조를 파견, 문화대혁명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당내 실권파의 소극적 방해에 직면하자 모택동은 조반유리(造反有理)의 기치를 내걸고 청년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로 구성된 홍위병을 동원하여 당관료들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하였다. 특히, 1966년 8월에는 「사령부를 포격한다-나의 대자보」를 공표하고 홍위병들로 하여금 당내 실권파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택동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일부 지도자는 반동 브르조아 계급의 입장에 서서 부르조아 독재를 실행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질풍노도와 같은 문화대혁명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들에 대한 혁명적 대비판을 전개하고,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당을 접수하는 탈권운동(脫權運動)을 감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모택동과 좌파들의 주도하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8기 11중전회에서는 문화혁명의 목표와 성격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를 타도하고, 브르조아 계급과 일체의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교육을 개혁하고, 문예를 개혁하고,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에 맞지 않는 모든 상부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문혁의 목표는 실권파의 타도와 상부구조의 개혁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각양 각색의 홍위병들이 조직 동원되어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구관습에 대한 파괴운동이 전개되었고, 각급 수준에서 실권파과 브르조아 대표자들에 대한 조반(造反)과 탈권운동이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과 국가기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유소기와 등소평과 같은 대표적인 실권파들은 홍위병들에 의하여 굴욕적인 학대를 받고 숙청당했다. 상해와 같은 곳에서는 장춘교의 지휘하에 기존의 당과 국가기구를 타도하고 파리콤뮨의 이상에 따라서 새로운 국가기구를 건설하려는 시도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의 공격과 탈권운동에 대한 반발과 저항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각급 수준에서 구관료와 구간부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홍위병을 조직하거나 지방군의 지원을 받아 좌파의 공격에 대항하였으며, 이해관계와 이념적 성향이 대립하는 각종 홍위병과 대중단체들간의 갈등과 충돌이 확산, 심화됨으로써 중국은 순식간에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상태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문화혁명으로 중국사회의 균열과 갈등이 증폭되고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자 모택동은 1967년 군부개입을 지시하였고, 군부 주도하에 이른바 3결합의 원칙, 즉 혁명적 간부와 대중단체 대표, 그리고 군 대표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기초하여 당과 국가기구를 재건할 것을 지시하였다.
군부 주도하의 당과 국가기구의 재건이 강조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각급 수준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급성장하였다. 특히, 임표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영향력은 모택동의 지도력에까지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1971년 주은래의 지원을 받아, 임표세력을 숙청하고 당과 국가의 재건과 정상화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1973년에 등소평을 비롯한 일부 구간부들의 복권을 허용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문화대혁명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의 기본노선과 정책을 옹호하였으며,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등 문화혁명 4인방을 등용함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주은래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파와 문혁 4인방의 좌파노선간의 권력투쟁과 정책논쟁, 그리고 노선투쟁이 계속되었다. 중앙 지도부의 분열은 각급 지방수준에까지 확산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당과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중국사회에 대한 당국가의 영향력을 저하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와같이 중국을 일대 혼란으로 몰고 간 문화혁명 10년(1966-1976)의 영향은 심각한 것이었다. 문화혁명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지도부내의 노선투쟁이 중국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모든 분야와 지역에서 대립과 갈등이 확대, 심화됨으로써 중국사회의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문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피해는 지역과 분야, 그리고 계층별로 조금씩 차별성이 있었다.
대체로 농촌지역 보다 도시지역에서, 그리고 당정기구와 사회문화, 교육 분야에서 문화혁명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1980년 당시 당조직부장을 역임하던 호요방(胡耀邦)에 의하면, 1957년 반우파운동과 문화혁명 10년간 부당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약 1억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약간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중국의 도시인구 중 약 절반이, 또는 거의 모든 노동인구들이 문화혁명으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와 교육분야에 종사하는 고급지식인들과 기존의 당정간부들은 대부분 홍위병들에 의하여 수정주의자, 또는 주자파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받았으며, 그중에서 상당수는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당했고, 숙청되었다. 지방당 고위간부 중에서 약 70- 80%, 중앙당 간부중에서 약 60-70%가 문화혁명중에 숙청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약 300만명의 당정간부들이 문화혁명과정에서 숙청되었다가 1970년대말에 복권되었다. 이것은 전체 당정간부의 약 20%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문화대혁명은 도시지역과 지식인 사회, 그리고 당정간부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줌으로써, 장기적인 차원에서 중국사회의 발전에 엄청난 좌절과 후퇴를 초래했다. 그러나 단기적이고 표면적으로 문화혁명은 중국경제에 생각보다 덜 피해를 주었다고 하겠다. 대약진운동과는 달리 모택동과 좌파 지도자들은 문화혁명이 생산분야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가급적 방지하려고 하였고, 당권파들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대약진운동 당시와는 달리, 이상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구조개혁이나 분배정책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혁명 기간동안 중국경제는 그 이전시기에 비교하여 발전이 둔화되기는 하였지만, 예상보다 타격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차원에서 문화혁명이 중국경제의 구조적 발전을 저해한 것은 사실이다. 자력갱생과 대중들의 희생정신을 강조하면서 소비보다는 축적을, 개인의 창의성과 물질적 동기보다는 집단의 공동이익과 혁명사상을, 전문적 기술개혁보다는 대중운동방식을 중시하는 모택동의 경제발전전략은 중국경제의 폐쇄성, 비효율성, 그리고 낙후성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모택동과 좌파들은 대중들의 장기적인 이익을 강조하면서 대중들의 생활개선 요구를 계속 유예하고, 여전히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과 농업의 동시적 발전정책을 추진하면서 고축적(高蓄積), 저소비(低消費)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불만이 심화되었다.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위와같이 측면에서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중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모택동 개인숭배와 당의 일원적 영도를 강조함으로써, 그리고 조반유리(造反有理)와 같은 비판적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에 대한 교조주의적 경직성과 획일성을 강요함으로써, 전형적인 당국가제도와 전제주의가 결합된 봉건적 사회주의체제의 성격을 띠게 하였다. 또한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자력갱생과 개인과 집단의 자발성을 강조하면서도 엄격한 계획경제체제를 고수함으로써 대중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이와같이 연안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체제가 결합된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이중성은 사회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켰고, 사회주의에 대한 심각한 신심(信心)의 위기(危機)를 자초함으로써 모택동의 사망과 더불어 등소평의 대담한 개혁정치가 등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Ⅲ. 등소평의 개혁정권 등장과 역사적 노선전환
오늘날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은 중국 맑시즘 60년 역사중에서 두 차례에 걸친 비약을 성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번째의 역사적 비약은 신민주주의론의 창출과 신민주주의 혁명의 성공이고, 두 번째의 비약은 1978년 증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 이후 추진된 등소평 정권의 '제2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건국 이래 거의 30년 가까이 지속된 모택동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등소평 정권이 등장한 이후 추진된 개혁·개방노선의 성과와 역사적 의미를 과대평가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등소평 정권의 개혁 , 개방정책이 신민주주 의 혁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포다도 모택동 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중국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제2의 혁명' 또는 '중국 맑시즘의 제2차 비약'이라 고 평가할 수 있다.
등소평 정권이 등장한 이후 모택동 시대의 이데올로기, 정책, 제도 등에 대하여 대담한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등소평 시대의 중국은 모택동 시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대담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할 수 있는 있는 개혁정권이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의 개혁파들은 중국 인민들에게 일대 재난을 가져다 준 문화대혁명 10년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대담한 개혁정치가 등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대혁명이 중국사회 전반에 엄청난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다. 특히 대부분의 당정간부와 지식인계충들은 문화대혁명과 좌파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모택동과 좌파노선에 대하여 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모택동의 사망을 계기로 모든 반좌파세력들이 등소평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좌파에 대한 일대 반격을 시도하게 되었다. 등소평은 바로 이와같은 반좌파 연합세력을 규합하여, 모택동 시대의 계승을 강조하는 화국봉 체제를 밀어내고 ‘역사적 노선전환'을 선언하게 되었다.
1. 화국봉 정권에 의한 등소평의 복권
1970년 초 임표의 군부세력이 숙청된 이후 중국정치는 문화대혁명의 이념과 정책을 대변하는 문화대혁명 4인방과 그들의 추종세력이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문화대혁명 과정에서도 국무원 총리로서 국정을 운영해 온 주은래와, 임표 사건 이후 복권된 등소평이 대표하는 실무관료계급들이 대립축을 형성하여, 이 두 세력간의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이 지속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 모택동과 주온래 등은 모두 노쇠하고 병약한 상태였기때문에 이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은 더욱 치열한 양상으로 발전 되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등 문혁 4인방은 대체로 이념과 선전부문을 장악하고 계급투쟁과 계속혁명론을 강조하면서 각종 대중운동을 통하여 주은래와 등소평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며, 주은래와 등소핑 등은 기존의 관료와 간부세력들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과 단결, 그리고 경제발전을 강조함으로써 4인방의 공세를 억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두 세력간의 갈등과 대결이 심화되는 가운데 화국봉과 엽검영 등은 좌우파 모두와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1976년 1월 8일 주은래 총리의 사망은 문혁좌파와 실무관료파간의 권력투쟁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주은래의 뒤를 이어 어떤 새력이 국무원을 장악하느냐는 문제는 양대 세력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4인방은 주은래의 후원을 받아 이미 제1부수상의 자격으로 국무원의 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등소평을 제거하기 위하여 총력을 경주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실무관료파들은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던 주은래 추모 대중운동을 이용하여 좌파들을 비판하였다. 이처럼 좌파와 실무관료파간의 갈등이 심화, 확대되자 모택동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국봉을 국무원 총리대행으로 임명하였다. 모택동의 의도는 문화대혁명의 이념과 모택동사상을 견지하면서도 문화대혁명 4인방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화국봉을 중심으로 중도세력을 규합하여 문혁 4인방세력과 실무관료파를 모두 견제하려고 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국봉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이른바 4·5 천안문 사건이 폭발하였다. 1976년 4월 4일 청명절을 전후로 수십만명의 군중들이 천안문에 모여 주은래를 추모하면서 모택동과 좌파를 비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4월 5일 북경시 당국은 민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군중들을 강제 해산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중폭동적인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좌파는 군중폭동의 배후인물로 등소평을 지목하고, 등소평의 숙청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따라서 4월 7일에 개최된 당중앙 정치국은 등소평을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하였고, 동시에 화국봉을 제1부주석 겸 국무원총리로 공식 선임하였다. 이와 같이 좌파는 등소평을 제기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들의 승리는 곧 반전되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하였고, 채 한달도 되지 않은 10월 6일 화국봉과 엽검영 등이 전격적으로 문화대혁명 4인방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화국봉에 의한 4인방 체포는 당시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화국봉이 문화대혁명의 수혜자이었고, 문화대혁명 옹호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실, 화국봉은 건국 이후 모택동의 출신지인 호남성 소산(韶山)을 관리하는 지방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모택동의 추천온 받아 1969년에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에 정치국원으로 발탁되고, 1974년에 국무원 공안부장을 역임하는 등 문화대혁명 기간에 급속도로 성장한 대표적인 문화대혁명 수혜파였고, 문화대혁명의 이념과 정책을 지지하는 범좌파세력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주은래의 후계자로서 화국봉이 임명되면서 문화대혁명 4인방과 화국봉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으며, 모택동의 사망을 계기로 당과 국가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4인방의 ‘음모’에 대하여 화국봉은 엽검영, 왕동흥 등 군부와 공안세력의 협력을 받아 4인방을 선제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등소평과 문혁 4인방이 모두 숙청되거나 제거된 상황에서 화국봉은 첫째,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공식 선언하고, 4인방의 정치적, 사상적 영향력을 제거하는 이른바 청사공작(淸四工作)에 착수하였고, 둘째, 정치적 안정과 단결, 그리고 경제발전을 강조하면서 농업과 공업부문에서의 ‘대약진'을 제안하였고, 셋째, 무엇보다도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화국봉은 4인방을 숙청한 직후, ‘당과 군부, 그리고 인민 내부에 대흔란을 조성한’ 4인방의 범죄를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안정과 단결, 그리고 무산계급독재의 바탕에서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이룩하는 것이 신정권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4인방세력의 청산을 주장하면서도 화국봉은 문화대혁명의 기본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론'을 옹호하였고, 또한 4인방에 대한 비판운동도 제한하려고 하였다. 즉 4인방에 대한 비판운동은 ’철학과 정치경제학, 그리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4인방을 부정하는 것‘이어야 하며, 정치적으로는 ’공격의 목표를 4인방과 소수의 추종자들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범좌파에 기초한 화국봉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모택동사상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화국봉의 입장에서 문화대혁명과 4인방에 대한 과도한 공격과 비판은 곧 자신의 권력기반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대혁명과 4인방에 대한 비판보다는 ‘국민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더욱 강조하였다. 따라서 화국봉은 혁명과 생산을 대립적으로 파악한 좌경노선의 과오를 지적하면서, “혁명은 생산력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적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되어야만 사회주의경제체제와 정치체제도 튼튼한 물질적 기초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무산계급전정의 기본과제는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전면적인 현대화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실용주의자들이 과거에 주장하던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의 관점을 수용하여 경제발전과 현대화의 목표를 강조하면처도 실질적으로는 모택동 시대의 발전전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다시 말해서 화국봉은 대중의 혁명적 능동성을 고취하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강화하고 집체경제의 우수성을 발휘함으로써 경제발전과 현대화의 대약진을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화국봉 정권의 정통성이 모택동의 유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모택동 시대의 정책과 제도를 그대로 계승, 발전하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화국봉은 집권 초기에 ?모택동선집 제5권?을 편찬, 출판함으로써 모택동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입장을 과시하였고, 동시에 유명한 2개의 범시론(凡是論)을 제창하였다. 즉 1977년 2월 7일자 ?인민일보?, ?홍기?, ?해방군보? 등 3대 신문의 공동사설을 통하여 “무룻 모주석이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가 굳건히 유지해야 하고, 무룻 모주석이 내린 모든 지시는 우리 모두 줄곧 어기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문화대혁명 4인방에 대한 청산작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모택동 시대의 계승을 강조하는 화국봉 정권에 대하여 문화대혁명 4인방과 모택동의 좌경노선으로 핍박을 받았던 수많은 구관료와 간부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화국봉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이들 문화대혁명 수혜파들은 한편으로 4인방의 죄과에 대한 보다 철저한 비판과 청산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4인방에 의하여 숙청당한 등소평을 비롯한 구관료들의 복권을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화국봉 정권의 최대 난제 중의 하나는 등소평의 복권문제였다. 화국봉은 정권초기에 4인방에 대한 비판운동과 더불어 등소평에 대한 비판운동도 전개함으로써, 등소평의 복권을 가급적 저지하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등소평의 지지세력은 당과 군부 내외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으며, 1976년의 천안문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중적인 수준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 었기 때문에 권력기반이 취약한 화국봉으로서는 등소평의 복권 요구를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 곧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화국봉 정권은 1977년 4월 경에 등소평의 복권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고, 동년 7월에 열린 제10기 3중전회에서 공식적으로 등소평의 전면적인 복권을 결정, 공표하였다.
2. ‘역사적 노선전화’
등소평의 복권을 결정한 1977년 7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는 외형적으로 화국봉과 등소평 지지세력간의 타협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등소평을 과거의 모든 직책, 즉 당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그리고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복권시키는 공식 결정을 내렸으며, 또 한편으로 화국봉이 국무원 총리 겸 당중앙 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는 것을 추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등소평의 복권에도 불구하고 화국봉은 외형적으로는 당과 군, 그리고 정부를 모두 장악한 막강한 위치를 점유하였다. 그러나 등소평의 복권을 계기로 화국봉의 정치적 입지는 실질적으로 급속도로 약화, 와해되었다.
등소평이 복권되면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모택동 시대에 박해를 받았던 광범위한 구관료와 당간부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반좌파연합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등소평은 이들의 정서와 요구를 반영하여, 무엇보다도 당과 국가기관 내부에 남아 있는 좌파세력에 보다 철저한 비판과 정풍을 요구하였고, 구관료와 간부들의 복권과 명예회복을 추진하였으며, 동시에 모택동 사상과 모택동 시대의 정책을 계숭하려는 화국봉의 범시론을 공격하였다. 등소평은 이미 1977년 4월 당중앙에 보내는 서한에서 모택동 사상에 대한 ‘완전하고도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함으로써, 모택동 사상에 대한 단편적이고 교조적인 해석을 비난하였다.
따라서 좌파와 화국봉의 범시론에 대한 비판운동은 등소평이 복권한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예를들면, 모택동 사망 1주년을 기념하는 1977년 9월 10일자 ?인민일보?, ?홍기?, ?해방군보? 3대 신문 합동사설을 통하여 등소평 지지세력은 모택동 사상의 교조화를 비판하고, 모택동의 지시를 시간과 장소와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좌파와 화국봉의 범시론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특히 등소평은 모택동 사상의 핵심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택동의 정책과 사상도 현실적 실천의 검증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검증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등소평과 반좌파연합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는 1978년 5월 ?광명일보?에 발표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라는 논문 발표를 계기로 공개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등소평의 후원을 받아 중앙당교 교장으로 복권된 호요방(胡耀邦)의 지휘하에 작성된 이 논문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진리의 기준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컸다. 이 논쟁 과정에서 반좌파 개혁연합세력은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회적 실천뿐이며, 그런 점에서 맑시즘과 모택동 사상도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모택동 사상의 교조화, 신비화를 추진한 좌파사상과, 모택동 사상의 맹목적인 수용을 강조한 화국봉의 범시론을 모두 비과학적이고 반맑시즘적이라고 흑평하였다.
이와 같이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를 강화하면서 반좌파연합세력은 모택동 시대외 잘못된 정책과 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당내의 좌파 세력을 숙청하면서 좌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화국붕 지지세력을 무력화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숙청당한 주요 간부들의 복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1978년에는 당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반좌파 연합세력이 당중앙 위원회의 다수파를 장악한 가운데 1978년 12월에 중국공산당은 제11기 3차중앙위원회 전체회의(11期3中全會)를 개최하고, ‘역사적 노선전환’을 선언하였다.
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 지지세력은 “대규모적인 대중적 계급투쟁”의 종결을 선언함으로써, 계급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모택동 시대의 좌경적 노선과의 결별을 명확히 하였고, 4개 현대화(농업, 공업, 과학기술, 그리고 국방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시기의 총체적 과업’이라고 규정하고,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장정’을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개혁연합세력들은 1978년의 11기 3중전회에서 지난 1956년 8차 당대회의 결의문 정신, 즉 중국사회가 당면한 주요 모순은 더 이상 계급간의 모순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향상을 바라는 대중들의 요구와, 이에 부응할 수 없는 중국의 경제적 낙후성에서 파생되는 것이란 점을 재확인하고, 계급투쟁보다는 계급간의 단결과 협력을 바탕으로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추진하는 것이 당과 국가의 최우선적 과제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의 과제로 설정한 개혁파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대담한 개혁과 개방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3중전회는 첫째, 인민들의 ‘사상해방'을 제창하였고, 둘째, “생산력의 발전에 적응되지 않는 모든 관리방식, 활동방식, 사상방식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셋째, “지난 한 세기 동안 민주주의를 떠나서 중앙집권을 강조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너무 적었다”고 지적하면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실천을 강화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끝으로 11기 3중전회는 중국의 문호개방을 선언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여 중국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3. 개혁연합세력의 내부적 갈등과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
등소평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혁연합세력이 11기 3중전회에서 당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역사적 노선전환'을 선언한 이후, 븐격적인 개혁·개방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즉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들은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11기 3중전회의 ’사상해방' 정신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문화대혁명 좌파들의 교조주의적 사상을 비판할 것을 권장하였고, 그동안 신성시되었던 모택동 사상에 대해서도 실사구시의 정신에 기초하여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택동 시대에 실시되었던 좌경적 경제제도와 경제정책도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폐지하거나 수정하였다. 특히 농촌지역에서는 과거 20여년 동안 ‘자본주의적 요소'라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농민들의 개인부업과 자유시장을 허용하고, 개별 농가에게 일정한 생산량에 대한 책임만을 부과하는 농업생산책임제를 실시함으로써, 1958년의 대약진운동 이후 중국의 농촌사회를 지배하던 인민공사제도를 사실상 와해시키는 혁명적인 정책전환을 실시하였다. 또한 문호개방정책을 표방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의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고,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자금과 기술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개혁파들은 문화대혁명으로 폐지되었던 당과 국가기구를 재정비하고, 좌파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들과 당간부들에 대한 정리, 정돈에 착수하였다. 예를들면, 문화대혁명 과정에 폐지되었던 중앙서기처를 부활하고 총서기제를 부활하여 개혁파의 호요방을 신임 총서기로 선정했는가 하면, 역시 문화대혁명 당시 좌파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던 진운(陳雲)을 중심으로 중앙기율검사위원회(中央紀律檢査委員會)를 개편, 강화하여 당풍쇄신을 추진하면서, 과거 문화대혁명 4인방이 조장한 ‘당내의 극히 비정상적인 상태’를 극복하려 하였고, 과거 좌파노선으로 핍박을 받았던 구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권과 명예회복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1982년 중국공산당 12차 전당대회 이전에 이미 화국봉의 지지세력은 당과 국가의 고위직에서 거의 숙청되었으며, 화국봉 자신도 당중앙위 주석, 국무원 총리, 당군사위원회 주석직에서 자연스럽게 해임되고,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개혁연합세력이 당과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개혁연합세력이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순조롭게 당과 국가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정력적으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다채로운 당경력과 권력자원을 소유한 등소평이란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등소평을 중심으로 다양한 반좌파세력이 단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과 좌파들의 교조주의적인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지식인들, 그리고 경제생활의 개선을 바라는 대중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 었다. 이에 비하여 화국봉은 비록 모택동 말년에 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당과 국가부문에서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만한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등소평의 정치적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더욱이 화국봉의 권력기반이 범좌파세력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문혁 4인방을 숙청함으로써 좌파세력 내부의 분열을 자초하였고,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화국봉은 문화대혁명의 이념과 모택동 시대의 정책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한 반좌파연합세력의 이념적, 정치적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반좌파연합세력은 모택동의 사망과 문혁 4인방의 숙청, 그리고 등소평의 복권을 계기로 좌파의 영향력을 비교적 용이하게 제거하였고, 과거의 실용주의적 노선의 연장선에서 3중전회의 결의에 쉽게 합의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의 신시대를 개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좌파연합세력이 모두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좌파노선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념적 성향이 다른 다양한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좌파가 제거되고 개혁과 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대하여 개혁 연합세력 내부의 견해 차이가 대두하게 되었다.
특히 3중전회에서 제기된 사상해방과 모택동 사상의 평가문제에 대하여, 그리고 체제개혁의 방향에 대하여 날카로운 의견대립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반좌파 연합세력 내부에서 기존의 사회주의체제와 이념의 결함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대담하고도 근본적인 개혁과 변화를 모색하는 진보적 개혁파와 기존의 체제와 이념을 고수하는 범위 안에서 체제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개혁을 주장하는 보수적 개혁파간의 이견은 개혁정치 초기 단계부터 노출되었다.
개혁 연합세력 내부의 이견과 갈등을 촉발시킨 첫번째 사건은 1979년부터 1980년 사이에 있었던 ‘북경의 봄’이라고 알려진 반체제적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이었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제도와 당국가체제에 대한 비판운동의 역사는 짧은 것은 아니다. 1956년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의 시기에 이미 당천하(黨天下)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1973년에는 관료특권계급의 지배와 사회주의 파시즘을 통렬히 비난하는 이른바 ‘이일철 대자보’(李一哲 大字報)‘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반체제 지식인들은 1978년 3중전회의 개혁·개방노선에 의하여 고무되고, 또한 대담한 사상해방을 표방하는 당내 진보적 개혁파의 정책에 자극을 받아 ?4·5논단(4·5論壇)?, ?북경지춘(北京之春)?, ?탐색(探索)? 등 비판적 잡지를 출판하고, 각종 매체를 동원하여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활발한 비판운동을 전개하였다. 사회주의 이념과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반체제운동 내부에서도 분열되어 있었지만, 광범위한 인민의 권리와 복지가 보장되는 대담한 체제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었다.
따라서 위경생(魏京生)과 같은 반체제인사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기초 위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사회구성원의 평등과 인권을 보장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건설이야말로 4개현대화보다 더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던 왕희철(王希哲)은 중국의 봉건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관료특권계급의 독재와 사회주의 파시즘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분석하면서, 맑스의 파리콤뮨 정신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반체제 민주파들은 사회주의체제, 특히 당국제도와 계획경제체제에 대하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민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정치적, 경제적 체제개혁을 요구하였다. 물론 이와같은 급진적인 민주화와 체제개혁의 요구는 아직 중국사회의 광범위한 계층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경험한 중국의 젊은 세대들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냉소주의와 무관심이 팽배하였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대중들의 생활개선에 실패한 기존의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급진적인 개혁과 개방정책이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信心)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반체제 민주파에 대한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11기 3중전회의 개혁과 개방정책을 실천함에 있어서 일정한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에서는 반체제 민주파들의 급진적인 체제개혁운동이 확산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연합세력 내부의 보수파의 반발이 고조되자, 등소평은 ‘극단적 민주화’와 ‘무정부적 사상’을 경고하면서 위경생과 같은 반체제인사를 체포하고, ‘민주의 벽’을 규제하는 동시에, 1978년 헌법에서 보장된 4대 자유, 즉 ‘대명(大鳴), 대방(大放), 대변론(大辯論), 대자보(大字報)’의 규정을 철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동시에 등소평은 이른바 「4개 기본원칙을 견지하자」는 연설을 통하여 개혁 개방과 사회주의의 견치라는 원칙을 동시에 표방하였다. 즉 등소평은 1979년 3월에 개최된 당의 이론사업원칙연구회에서 ‘4개 현대화를 실현하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첫째, 반드시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무산계급 독재를 견지해야 한다, 셋째, 반드시 공산당의 영도를 견지해야 한다, 넷째, 반드시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를 견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4개 기본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중국의 개혁정치가 사회주의의 포기이거나, 또는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사상해방과 체제개혁, 그리고 문호개방으로 상징되었던 11기 3중전회의 정책노선과 등소평이 1979년에 제시한 4개 기본원칙의 견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이때부터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를 ‘1개의 중심(현대화와경제발전)과 2개의 기본점(개혁·개방과 4개 원칙의 견지)’으로 정의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현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중심적인 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대담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도 그것은 4개 기본원칙 견지라는 범주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가지 정책노선, 개혁과 개방노선과 4개 기본원칙의 견지가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3중전회의 정신이 자유화·개방화·다원화에 있었다면, 4개 기본원칙은 기존의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란 점에서 상호 갈등적인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개혁정치는 등소평의 리더십이 관철되는 가운데 3중전회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대담한 개혁을 요구하는 진보적 개혁파와, 기존의 사회주의체제의 틀을 보존하려는 보수적 개혁파간의 갈등과 경쟁, 그리고 타협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Ⅳ. 중국의 개혁정치와 중국적 사회주의의 발전과 시련
‘1개의 중심과 2개의 기본점’을 표방하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경제발전 제일주의의 관점에서 대담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구하면서도 현존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는 일견 모순적인 정책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런 모순적인 정책노선은 반좌파 연합세력 내부의 진보적 개혁파와 보수적 개혁파간의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면서 단계적, 점진적으로 개혁과 개방을 실천하려는 등소평의 ‘전략적 선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혁정치에 대한 등소평과 고르바쵸프의 전략적 접근법의 차이점이 있으며, 경제개혁 중심의 중국의 개혁정치와 정치개혁 중심의 소련의 개혁정치의 차별성도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의 경제개혁 중심의 단계적인 개혁정치는 소련과는 달리,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대한 지도부 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정치적 타협과 안정을 유지하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사회적 변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었던 등소평의 리더쉽의 힘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개혁 연합세력들 내에 경제발전 제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제개혁이 확대되고 기존의 체제와 이념의 문제가 대두하면서 개혁연합세력 내부의 진보적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갈등도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불 균형에서 비롯되는 모순과 밑으로부터의 체제변혁 압력의 증대, 그리고 사치주의권의 대변혁이 중첩적으로 작용하면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도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1989년의 천안문 유혈사태는 이와같은 중국적 사회주의의 위기를 표출한 것이었다.
1. 타협과 조정의 개혁정치(1979--1984)
1978년의 3중전회에서 중국의 개혁 연합세력들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장기적인 침체상태에 빠져 있는 농촌경제를 활성화하여 인민대중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경제의 전반적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는데 이론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농촌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좌파의 농촌경제정책를 폐지하거나 수정하고, 농촌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물론 이 당시 등소평을 포함하여 개혁 지도부는 인민공사제도를 전면적으로 철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민공사와 같은 대규모의 사회주의적 경제단위보다는 개별 농가나 소규모 생산집단에게 보다 많은 경제적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써 농촌경제를 활성화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의 사적 경제영역을 대폭적으로 확대 허용하였으며, 평등주의적인 분배정책을 비판하고 ‘일부 지역, 일부 농민들이 먼저 부유해 지는’ 차등적 발전을 장려하였다. 특히 개혁 지도부는 일정한 경작지와 생산력을 개별 농가에게 할당하고, 책임량을 초과한 부분에 대해서는 개별 농가가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농업생산책임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농업생산책임제는 토지와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집체 소유권을 변경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용권을 개별 농민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었기 때문에 농업생산책임제가 확대 실시되면서 농촌사회의 경제 활동을 통제해 왔던 인민공사제도의 기능이 사실상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초기에 중앙정부는 특별히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한하여 농업생산책임제를 실시하려고 하였고, 집체경제의 골격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농업생산책임제와 개체경제는 농 민들의 자발적이고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의하여 급속도로 중국의 농촌사회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와 동시에 인민공사제도가 해체됨으로써 모택동 시대와 같은 집체경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와 같이 농촌경제정책의 개혁은 지도부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모택동 시대의 사회주의적 농촌경제구조를 해체시킴으로써, 중국의 농촌사회는 실질적으로 1950년대 초, 농촌합작사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부 보수과 지도자들과 농촌지역 간부들은 개혁파의 농촌경제정책이 건국 이후 천신만고 끝에 건설한 사회주의적 집체경제 구조를 하루 아침에 파괴하였고, 그것은 여러 가지 반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산출했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농민들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등소평 정권의 농촌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농촌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었고, 금전만능주의가 팽배하면서 공동체의식이 파괴되고 계층간, 지역간 불평등이 심화되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소평 체제의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농촌경제개혁은 일반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과거 20여년 동안 정체되었던 중국의 농촌사회를 활성화시키고, 농츤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진했기 때문에 보수파들도 적극적으로 이에 반대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1978년 이전 26년간 농업 총생산량의 평균성장율은 2.6%에 불과했는데, 1978년 이후 1988년까지 10년간의 평균 증가율은 6.5%이었고, 특히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괄목할 성장율을 기록하였으며, 농가소득도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평균 2배 이상 증가했다.
이와 같은 실적으로 말미암아 등소평 체제의 농촌경제 개혁정책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대는 별로 설득력을 획득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농촌경제 개혁정책에 대한 지도부 내부의 이견과 갈등도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이념과 체제문제에 대한 개혁연합세력 내부의 이견은 일찍부터 표출되었다. 특히,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의 평가문제, 그리고 정치개혁의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 개혁과와 보수파간의 견해 차이는 심각하였다.
진보적 개혁파들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핍박을 받은 많은 계층들의 정서를 대변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모택동과 좌파노선의 영향력을 철저하게 청산하기 위해서도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의 오류에 대한 보다 철저 비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국혁명과정에서, 그리고 중국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과정에서, 모택동이 담당했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운동을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을 추진하듯이 할 수 없다는 데에 개혁파들의 고민이 있었다. 더구나 보수적 개혁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모두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모택동사상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을 용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보수파의 견해는 1979년 9월에 엽검영(葉劍英)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30돌 경축대회에서 한 연설」에 반영되었다. 이 연설에서 엽검영온 중국혁명과정과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모택동의 공로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지난 30년 동안 모택동의 지도하에서 이룩한 업적은 ‘위대한 것’이며, 만일 “이 위대한 성과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엽검영은 “우리가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었고, 인민들이 기울인 간고의 노력에 비하여 볼 때, … 우리가 거둔 성과는 매우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 모택동을 비롯하여 과거의 당 지도부의 과오가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그는 모택동사상 이란 모택동 개인의 창조물이라기 보다는 “당과 인민의 집체적 지혜의 결정체”라고 주장함으로써, 모택동 개인의 과오와 당의 지도 이념인 모택동 사상과의 분리를 시도하였다.
엽검영의 이와 같은 논리는 그후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1981년 6월에 개최된 제11기 6중전회는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를 통하여, 1949년 이후 당의 정책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고,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견해를 발표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국의 개혁파 지도자들은 30여년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모택동의 공과를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인민들에게 ‘대재난’을 가져다 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은 과오를 비판하는 타협안을 채택하였다.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문제와 함께, 중국 개혁정치의 중요한 논쟁점 중의 하나는 정치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일부 진보적인 개혁파들은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당과 국가제도를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체제개혁을 요구하였다. 예를들면 중국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었던 요개륭(寥蓋隆)은 서구의 3권분립 원칙을 도입하여 당과 국가기구의 대담한 제도개혁을 실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등소평도 「목전의 형세와 임무」, 「당과 국가 영도제도의 개혁」이란 연설을 통하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실현과 법제의 강화를 강조하였고, 당정분리(黨政分離)와 집단지도체제의 확립, 그리고 노간부의 은퇴를 제도화하는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상당히 의욕적이고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보적 개혁파들의 의욕적인 정치개혁 방안은 당 내부의 보수파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축소·조정되었다. 보수파들은 중국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는 기존의 당국가체제의 제도적인 결함에서 유래한다기 보다는 민주집중제와 같은 레닌주의적인 당의 전통이 문화대혁명으로 와해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1956년의 제8차 당대회에서 확립된 당국가체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권력집중과 관료주의와 같은 문제는 당의 정치공작과 조직공작을 강화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보수파의 반대로 말미암아 진보적 개혁파들의 대담한 제도개혁 구상은 상당히 후퇴,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82년에 개최된 12차 당대회에서 통과된 「중국공산당 장정(中國共産黨 章程)」과 1982년의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 통과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中華人民共和國 憲法)」은 기존의 당과 국가제도의 근본적인 변혁의지를 반영했다기 보다는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었던 당과 국가기구의 재정비와 조직의 합리화, 제도화를 강조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1982년의 신당헌과 신헌법이 진보적 개혁파들의 정치개혁 의지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당의 역할을 규정하면서 헌법과 법률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당내 민주주의와 집단지도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또는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조항을 대폭 확충한 점,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국무원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한 점, 그리고 고문위원회를 신설하여 노간부의 점진적인 퇴진을 제도화한 것 등은 진보적 개혁파들의 정치개혁의 의지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정치개혁의 내용은 진보적 개혁파들이 구상했던 대담한 제도개혁, 즉 기존의 당국체제를 과감하게 개혁하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확립하려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
2. 개혁·개방의 심화(1984-1989)
중국의 개혁정치는 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층 내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이견이 노출되면서 3중전회의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타협적이고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이데올로기와 정치개혁 분야에서는 기존의 맑스·레닌주의, 그리고 모택동사상이 여전히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강조되었고, 당국가제도의 기본틀이 유지되는 범위에서 부분적인 제도개혁만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82년 12차 전당대회 이후 당과 국가의 영도간부에 대한 세대교체 작업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다. 간부의 노화현상을 극복하고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젊고,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실무간부의 등장이 요구된다는 명분을 내걸고 개혁파는 당과 국가의 각급 수준에서 세대교체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신진 기술관료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1985의 임시당대회에서 이와같은 세대교체 작업이 당과 국가의 고위급에까지 확대, 적용되면서, 엽검영을 비롯한 많은 노간부들이 제2선으로 물러나고 호요방, 조자양, 이붕과 같은 이른바 제2제대의 인물과, 40-50대의 제3제대에 속하는 신진세대들이 당과 국가의 영도적인 지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세대교체로 일견 개혁파들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가운데, 개혁파들은 정치개혁보다 경제개혁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지도층은 예민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지만, 경제개혁에 대해서는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보수적인 지도층까지도 생산력의 발전을 중국이 당면한 최고, 최대의 과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력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적인 요소’의 수용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따라서 개혁파 지도자들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농업생산책임제의 성공에 힘입어 도시부문의 국영기업에까지 생산책임제를 확대 적용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4년 10월에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는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고 전면적인 도시부문의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여기서 개혁파들은 ‘계획적 상품경제론’을 제창하면서, 상품경제의 발전과, 시장과 계획의 결합을 퉁하여 중국경제의 활성화를 목표로 설정하고, 국영기업을 비롯한 도시부문의 경제관리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는 야심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경제체제에 관한 결정」에서 개혁파 이론가들은 그동안 중국에서 사회적 생산력의 증가속도가 늦고, 고도의 노동생산성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당과 행정기구가 지나치게 기업활동을 통제했기 때문이며,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품경제의 역활, 가치법칙과 시장의 기능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당과 기업의 분리와 기업의 자율권 확대를 강조하였고, 획일적인 계획을 지양하고 시장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상품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결의’에 따라, 개혁파들은 1984년 이후 경제계획, 경제관리, 가격 및 임금구조의 개편에 착수하였다. 즉 계획경제의 영역을 축소 조정하고, 시장경제의 영역을 점차로 확대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국가의 가격정책에 묶여있던 상품을 대폭적으로 감축하였고, 민간기업부문을 활성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는가 하면, 국영기업에서도 '계약책임제' 등을 실시하여 소유와 경영을 분리합으로써 경영의 합리화와 자율화를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와같은 경제개혁으로 말미암아 중국경제와 중국사회는 대단히 변화하게 되었다. 예를들면 1987년 여름의 통계에 의하면 12,398개의 대형 국영기업 중에서 약 75%가 청약책임제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이들 기업들은 국가에 의하여 할당된 책임생산량을 초과한 부분에 대하여 자유로운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기업의 비중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78년 당시 사기업은 모두 30만개 정도이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력도 약 33만명에 불과하였는데, 1988년에는 사기업의 수가 1,413만개로 중가하였고, 이에 종사하는 노동력도 2,624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대담한 경제체제의 개혁안에 반영된 개혁정신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과거의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구조적인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에 ‘자본주의적인 요소’라고 비판을 받았던 상품경제와 시장경제적 요소를 전국적으로 도입, 실시하려는 개혁파의 시도는 당연히 중국의 지도층 내부에서, 그리고 중국사회의 각 분야에서 심각한 갈등과 논쟁을 촉발하였다. 농촌경제개혁에 이어 도시부문의 국영기업의 대혁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같은 개혁은 중국사회의 모든 계충들의 직접적 이해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시경제의 체제개혁은 농촌경제개혁 보다 그 파급 효과도 크고 심각하였다,
따라서 경제체제의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통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개혁의 초기 단계에서 개혁정치의 성과로 나타났던 농업경제의 성장율이 1985년을 계기로 둔화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추진된 도시경제의 구조개혁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결합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과도기적인 혼란을 더욱 악화시켰고, 그동안 개혁의 성과에 가려져 있던 경제개혁의 부작용을 한꺼번에 표출하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지도부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 각 분야에서 개혁정치의 범위와 속도, 그리고 방향과 관련하여 심각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중국경제는 앞에서 말한 도시부문의 경제체제 개혁이 확대 심화되면서, 경기과열과 통화팽창,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경제적 불평등이 확산되면서 지역적, 계층적 분화와 갈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대두하였으며, 관료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황금만능의 사조가 팽배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심각한 신심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더구나 1978년 이후 꾸준히 확대해 온 문호개방정책의 결과, 서방세계와의 접촉과 교류가 증가되면서 ‘정신오염’과 ‘자산계급 자유화’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보수적 지도자들은 경제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조정하고 ‘자산계급 자유화 사조' 에 대한 사상운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보수파의 견해는 1986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2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사회주의적 정신문명 건설의 지도방침에 대한 결의」에 반영되었다.
사회주의 정신문명에 대한 강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82년 12차 전당대회의 정치보고에서 호요방은 사회주의 물질문명과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을 중국적 사회주의의 두 가지 과제라고 지적한 바가 있고, 등소평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자들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1986년에 채택된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에 대한 당의 결의가 반드시 보수파의 견해만을 반영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이 표면화되고 중국의 지도층 내부에서 개혁정치의 속도와 방향과 관련하여 심각한 정치적, 이념적인 논쟁이 재연되는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교육운동을 강조하는 보수파의 견해를 반영한 당의 결의가 채택되었다는 것은 개혁정치의 장래와 관련하여 암영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 당시 당외 지도층 내부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개혁의 심화냐 또는 개혁의 축소조정이냐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진보적인 개혁파의 입장은 1984년 12월 7일자 ?인민일보?에 발표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이론과 실제」라는 논문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이 논문에서 진보적인 개혁파들은 맑스·레닌주의가 언제나 타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4항 기본원칙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개혁과정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 예를들면 관료의 부패라든가 물가불안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혼란은 신구체제의 과도기에 불가피하게 산출될 수 밖에 없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또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정치개혁을 포함하여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심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보수파들은 1985년 6월에 당시 전국인민대표 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팽진의 연설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젊은 세대가 부패해 가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또한 맑스·레닌주의를 떠나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강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4항 기본원칙을 고 수하면서, 개혁으로 파생된 문제를 정리, 정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중국의 지도층 내부에서 개혁정치의 장래와 관련하여 심각한 정치적, 이념적 논쟁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1986년 12월에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사태는 당내 보수파로 하여금 급진적 개혁파를 정치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합비에서 약 5000명의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자, 중국의 보수파 지도자들은 강경한 반자산계급 자유화운동을 전개할 것들 요구하였다. 동시에 보수파들은 학생시위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는 이유로 당시 진보적 개혁파의 구심점 역할틀 하던 호요방 총서기를 ‘정치원칙상의 중요한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하면서 그의 퇴진을 강요하였다. 이와같은 보수파의 정치적 공세로 말미암아 호요방은 1987년 1월에 자아비판을 함과 더불어 총서기의 직책에서 사임하였고,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했던 당내 진보적 지식인들 중에서 방려지(方勵之), 왕약망(王若望), 유빈안(劉賓雁) 등이 제명되었다.
3. 천안문 민주화운동과 중국적 사회주의의 위기
1986년의 반자산계급 자유화운동과, 1987년의 호요방의 퇴진 등으로 표출된 것처럼 개혁정치에 대한 보수파의 반발이 당내에서 고조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개혁파의 완전한 정치적 패배나 개혁정책에 대한 후퇴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개혁파들은 호요방의 후임으로 임명된 조자양 총서기를 중심으로 개혁의 심화를 계속 주장하였다.
1987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3차 전당대회에서 조자양은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 전진하자」는 연설을 통하여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의 근본임무는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중국의 빈곤과 낙후상태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생산력 발전을 모든 공작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전면적인 개혁과 개방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조자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체제 개혁의 전개와 심화에 따라 정치체제의 개혁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혁파의 정책노선에 따라서 13차 전당대회 이후에도 경제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주식제도의 도입과 금응제도의 개혁, 가격 및 임금구조의 개선 등이 실현되었고, 개혁파들은 이른바 국제대순환론을 제기하면서 연해안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과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심화과정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흔란이 극심한 양상으로 나타남으로써 개혁정치는 일대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개혁정책의 부산물로 나타난 경기과열과 통화팽창, 인플레이션의 문제는 1988년에 심각한 정도로까지 확대되었다. 공식적인 통계를 보더라도 1988년 증국의 인플레이션은 17.7%에 달했고, 주요 도시의 경우, 30%를 넘게 되었다. 물가앙등의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사재기와 투기현상마저 촉발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었다. 따라서 1988년 9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3기 3중전회는 개혁의 심화와 함께, 보수파의 견해를 반영한 치리정돈(治理整頓)의 정책, 즉 경제환경의 정비와 경제질서의 정돈을 강조하는 정책을 채택하였고, 이붕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실무관료 경제팀이 등장하여 개혁파가 주도했던 가격개혁을 연기하고,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보적인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 이로써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개혁의 심화를 주장하는 진보적 개혁파와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강조하는 보수파 사이의 정책논쟁과 권력투쟁은 더욱 격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1988년에 경제환경의 정비와 경제질서의 정돈을 강조하는 이붕의 경제팀과 여전히 개혁의 심화를 강조하는 조자양의 개혁파들 사이의 논쟁은 당의 각급 회의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안정 속의 개혁과 발전의 논리를 강조하는 보수적 견해와 정치적 민주화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견해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특히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점차로 보수화로 기울고 있는 당의 개혁정책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소련에서 전개되고 있는 고르바쵸프의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동구에서의 변혁운동이 알려지면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경제개혁의 심와와 더불어 보다 과감한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요구함으로써 보수적인 지도자들을 자극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천안문사건이 폭발하게 되었다.
1989년 4월 15일 호요방 전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천안문광장에서의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초기 단계에는, 그것이 1919년의 5·4운동에 비견할 만한 대규모 군중운동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호요방 전총서기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일부 지식인들의 천안문광장에서의 시위에 대한 당의 대처가 보수파와 진보파의 견해차이로 지연되면서 일반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이에 가담하면서 급속도로 대규모 민중운동으로 발전됨으로써 등소평 정권 최대의 정치적 위기국면을 초래하였다.
물론 천안문시위에 참가한 대중들이 모두 민주화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시민들은 이른바 관도(官倒)라고 알려진 관료의 부정과 부패, 경제개혁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엄청난 물가고와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 등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과 결합하여 천안문사건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들의 불만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역시 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이었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부정과 부패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민주주의의 실천만이 관료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특히 당내의 노선투쟁에서 조자양을 지지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보수파에 의한 조자양의 정치적 패배가 분명해지자, ‘노인정치의 종언’, ‘독재와 전제정치의 매장’을 주장하면서, 등소평과 보수적인 원로들을 직접 공격하였으며, 일부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공산당 타도를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천안문의 민주화운동이 급진적인 정권타도와 체제변혁운동으로 발전해가자 등소평을 비룻한 당내의 보수파들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반혁명세력에 의한 ‘동란'으로 규정하고 무력진압을 결심, 단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결국 천안문 유혈사태는 그동안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림과 갈등을 중재, 조정하던 등소평이 민주화시위를 체제위기로 인식하면서, 자신이 후계자로 지원해왔던 조자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보적 개혁파의 유화적 해결책을 배척하고, 보수파의 강경노선을 수용, 무력에 의한 진압방침을 결정함으로써 발생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등소평은 ‘밑으로부터의 혁명'에 대하여는 분명하고도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보수파의 정책노선을 일방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 었다. 천안문사건 직후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선언한 1978년의 3중전회의 노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조자양의 후임 총서기 선출과정에서도 보수파를 대변하는 이붕이나 양상곤의 등장을 저지하였다, 등소평은 비교적 개혁적이라고 알려진 상해시장 강택민(江澤民)을 새로운 총서기로 추천하면서, 강택민을 중심으로 중국의 지도충들이 단결하여, 1987년 당대회에서 결정된 방침, 즉 치리정돈과 ’개혁심화(改革深化)‘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등소평의 의도가 무엇이었던지간에 천안문사건 직후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그리고 소련의 정치적 혼란과 붕괴 등은 중국의 지도층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천안문사건 이후 한동안 개혁의 심화보다는 정치사회와 경제적 안정을 더욱 강조하였다. 즉 중국의 새로운 지도층은 안정과 단결이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고 역설하면서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지도체제를 강화, 안정화시키려고 하였고, ‘반자산계급 자유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상교육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치리정돈’의 정책노선에 따라서 경제환경의 안정과 경제질서의 정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경제 성장보다 경제안정에 역점을 두면서 경기과열에서 빛어진 통화팽창과 인플레이션의 억제, 개혁과 개방과정에서 이완된 중앙의 거시적 경제 통제력의 재강화, 그리고 자원 분배상의 혼란 극복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대외무역에서도 수출의 장려와 수입의 억제 등을 통하여 무역수지를 개선하려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경제안정과 긴축재정정책을 실시하고,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면서도 중국의 지도부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경제개혁과 개방의 심화를 계속 실천하였다. 즉 일부 상품에 대하여 가격 조정과 가격 자유화를 단행하여 가격메카니즘의 적용범위를 점차로 확대하는 가격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고,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시장경제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는가 하면, 조자양이 제기했던 연해지역의 경제발전전략을 다시 강조하면서 외국자본의 투자환경 개선을 위한 제도개선도 실천하였다. 예를들면 「외자기업에 의한 토지 종합 개발 경영에 관한 잠정규정」 등을 제정하였고,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상해와 심천에 개설하였으며, 상해의 포동지구(浦東地區)와 해남성의 양포(洋浦) 개발구 등을 건설하여 외향형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의욕을 과시하였다.
이와같은 안정적 발전전략으로 중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천안문사태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나름대로 정치적,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도시 민중들의 불만을 촉발시켰던 인플레를 억제하는데 성공하였고, 한때 정체국면으로 접어 들었던 중국경제가 회복국면으로 반전되면서 다시 놀랄 만한 고도성장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반체제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을 봉쇄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천안문사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경제제재나 ‘평화적 이행’ 압력도 중국의 대외정책과 국내정치의 안정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등소평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금 개혁과 개방의 심화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2년 초 등소평이 심천과 광동성을 순회하면서 ‘경제발전 우선, 개혁과 개방의 가속화, 그리고 개혁 개방에 반대하는 좌파에 대한 경고’를 강조했다는 「남순강화(南巡講話)」가 발표되면서 보수파에 대한 개혁파의 정치공세가 강화되었고, 마침내 1992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4차 전당대회에서 강택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등소평의 후계정권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 본격적인 시장경제에로의 전환과 전면적인 개혁, 개방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동구와 소련의 몰락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천안문사태의 위기를 극복하고 개혁정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중국적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딜레마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적 사회주의가 존립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는 점점 더 지속적인 경제발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며,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과감한 경제개혁과 개방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와 같은 경제 개혁과 개방의 심화와 확대는 결국 중국의 당국가체제를 위협하는 요인을 산출함으로써, 중국적 사회주의의 위기를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Ⅴ. 기로에선 중국사회주의
1949년 증국공산당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자리에서 모택동은 중국민족의 오랜 숙원이었던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통일된 부강한 신중국’의 건설을 위하여 모두다 궐기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모택동의 호소는 대단히 설득적인 것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 세력의 끊임없는 침략과 군벌통치의 암혹시대, 그리고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시달려 온 중국인민들의 입장에서 나라의 자주독립과 정치적 안정,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는 모택동의 신중국 건설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사업은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짧은 시일 내에 정치안정과 경제복구를 달성하였고, 1953년부터 본격적인 경제발전과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경험, 특히 스탈린의 발전모델에 입각한 급진적인 산업화와 사회주의 개조사업을 추진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사회의 구조적 변혁과 더불어 전형적인 당국가제도와 계획경제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적 체제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공업화정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지만, 동시에 ‘인민 내부의 모순’을 심화시키 는 부작용도 산출하였다. 특히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적 체제와 중공업 중심의 발전전략은 엄격한 관료적 지배에서 파생되는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도시와 농촌, 그리고 공업과 농업의 불균등 발전을 초래함으로써 농촌중심의 평등주의적 혁명전통을 가진 중국공산당의 정서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모택동은 일찍부터 소련 경험의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의 실정과 특징, 그리고 혁명경험에 부합되는 중국적 사회주의를 모색하였다.
특히 모택동은 1958년에 소련의 지원이나 국내 민족자산계급과 지식인들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안공산주의의 경험을 원용하여 대중들의 혁명적 적극성을 개발, 조직, 동원함으로써 급속도의 경제발전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달성하려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6년에는 모택동사상과 모택동의 리더쉽에 비판적인 당과 국가의 관료계급들과, 이들을 중심으로 확산되 고 있는 중국사회의 ‘자본주의의 부활 위험성’을 공격하는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였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을 통하여 표출된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대중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의 일정한 단계에서 생산관계의 변화는 생산력의 해방을 촉진시킨다’는 가설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맑스·레닌주의,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접근방식과 구별될 수 있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 제도적 차원에서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여전히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도 맑스·레닌주의라는 공식적 이데올로기의 독점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산당의 일원적 영도권을 보장하는 당국가제도를 견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유제의 원칙에 입각한 계획경제체제를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모택동의 발전전략도 여전히 중공업 중심의 급진적인 산업화를 추진하는 것이란 점에서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의 발전전략과 별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모택동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도 다른 사회주의체제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동원체제’의 특징과 문제점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적 동원체제’는 국가건설의 초기단계에 구질서가 붕괴된 상태에서 강력한 ‘위로부터의 혁명’의 방식으로 대중적 에너지를 집중적,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급진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데는 상당히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신질서가 안정되고 어느 정도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적 다원성이 증대되면 점차로 ‘전체주의적 동원체제'의 효율성과 정당성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전체주의적 동원체제’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체제나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국가건설단계에서 급진적인 산업화와 기존 사회질서의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효율성과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후기단계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전체주의적 동원체제’가 공유하고 있는 획일성, 경직성의 부작용과 비효 율성이 증가하면서 체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들면 공식적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에서 파생되는 안팎의 위기, 일원적인 당국가체제가 낳은 관료주의적 경직성과 비민주성에서 파생되는 정통성의 위기,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중공업 중심의 불균등 발전전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기적 경제침체와 소비 생활의 개선을 위한 대중들의 욕구 증대 등에서 비롯되는 경제적 위기들은 후기단계의 모든 ‘현존 사화주의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체제위기의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택동 시대의 중국적 사회주의가 당면한 체제위기 중에는 다른 사회주의체제와 달리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하는 것도 있다. 즉 일반적 사회주의체제가 안고 있는 위기 요인 이외에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국적 사회주의의 ‘대실패’에서 파생된 위기는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에서 발생한 체제위기의 성격과 특징을 구성하는 것이며, 동시에 중국의 개혁정치가 등장할 수 있게 한 ‘중국적’ 배경 요인이 되고 있다.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대중들에게 ‘대재난’을 초래했다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무엇보다도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괴리를 노출시킴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심각한 신념의 위기를 자초했다고 하겠다. 즉 사회주의 사회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객관적, 물질적 토대가 성숙하기도 전에 지나치게 사회주의적 이념과 제도를 확대, 실시하 려고 한 ‘궁과도’(窮過渡)는 오히려 인민대중들의 생산의욕을 저하시키고, 경제발전을 위축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이념과 제도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과 불만을 증폭시켰다. 다시말하면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대약진운동 과정에서 공동부유의 이상을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경제생활의 개선을 가시적으로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를 ‘빈곤 속의 평등’과 등치시키는 결과를 산출했다. 또한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대중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군부와 일부 혁명 간부들의 독단적인 통치를 초래했으며, 모택동사상과 모택동 개인의 절대적 영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힉명적, 봉건적 전체주의’라는 기묘한 정치질서를 산출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의 위기’와 냉소주의를 확산 시켰다.
이와 같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중국적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키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의 위기를 조성하 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택동 이후 개혁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과 동력을 산출했다고 하겠다. 즉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심화된 지도부의 분열과 노선투쟁은 모택동의 사망을 계기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반좌파 연합세력이 형성, 등장할 수 있게 하였고, 이들 반좌파연합세력들로 하여금 개혁·개방을 표방하면서 모택동 시대와의 결별을 추진할 수 있는 직접적인 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중국의 파워 엘리트들과 지식인사회에서 모택동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실무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적인 정책노선이 형성됨으로써 문화대혁명 이전에 이미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미묘한 노선투쟁의 양상이 노출되었다. 이와같은 지도부 내부의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은 마침내 문화대혁명으로 폭발하였고,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분열과 갈등은 중국사회 전체에 확산됨으로써 ‘천하대란’의 상태가 조성되었다. 이와 같은 격렬한 정치적 흔란과 갈등, 사회적 균열 속에서 모택동과 좌자들에 의하여 숙청당하거나 피해를 받은 당과 국가기관의 간부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일반 대중들의 반좌파적 성향이 등소평의 역사적 노선전환의 배경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등소평의 개혁 사회주의는 역설적으로 모택동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역사적 노선전환을 선언하고 사상해방과 체제개혁, 그리고 문호개방을 표방한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모택동 시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중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정치도 그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혁과 개방의 속도와 범위에 대한 개혁 연합세력 내부의 정책논쟁,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급진적 변화 요구 등이 등소평의 개혁정치를 끊임없이 동요시켰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른바 ‘1개의 중심과 2개의 기본점’을 표방하면서 진보적 개혁파와 보수적 개혁파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면서 경제발전 제일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꾸준히 개혁정치를 추진함으로써 중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변모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등소평의 경제발전 제일주의에 입각한 대담한 경제개혁은 대단한 성과를 산출하였다. 중국경제는 지난 10여년간(1980-1990)연평균 8.9%이상의 GNP성장율을 기록하였으며, 1992년도에는 12.8%의 실질 GNP성장을 달성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경제로 부상하였고, 국민들의 경제생활도 과거에 비교하면 대단히 개선 되었다.
물론 이와같은 경제발전 제일주의정책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황금만능주의의 팽배와 부패와 부정의 만연, 그리고 지역간, 계층간의 불평등구조의 심화 등 경제개혁의 부작용은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불균등 발전에서 파생되는 위기라고 하겠다.
등소평의 대담한 경제개혁과 개방정책은 중국경제의 고도성장이란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경제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중국경제의 구조개혁으로 말미암아 소유형식의 다원화와 더불어 사적 경제영역이 빠른 속도로 확대, 발전하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경제의 '시장화'도 동시에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국가의 통제영역은 점차로 축소되고 경제주체의 자율영역이 증가하였다. 이처럼 개혁정치는 경제영역에서 다원화, 자율화, 시장화를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의 근대화와 다원화도 촉진하였다. 예를들면 도시인구의 비율은 1978년에 11.9%이었지만, 1991년 현재 29.9%로 증가하였고, 커뮤니케이션과 대중매체에 대한 접근도 놀랄 만한 속도로 증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등소평의 경제개혁은 경재발전과 더불어 경제사회의 다원화, 자율화, 개방화를 촉진함으로써, 공산당의 일원적 지배를 합리화하고 있는 기존의 당국가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적 요구’를 증폭시킴으로써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천안문사태는 바로 이와같은 위기의 극적인 표출이었다.
등소평은 경제개혁과 더불어 대담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압력을 무력으로 분쇄하고, 여전히 ‘1개의 중심, 2개의 기본점’이란 방향을 고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불균등발전에서 파생되는 위기를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혁과 개방이 진행될수록 정치사회의 다원화, 자유화, 민주화의 요구는 증대될 것이기 때문에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위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화된다고 하겠다. 특히 지난 10여년간의 개혁정치 과정에서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불균등 발전전략에 내포된 모순과 갈등을 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등소평의 리더쉽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등소평의 ‘1개의 중심, 2개의 기본점’이란 중국적 사회주의가 얼마나 더 지속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등소평 사후 강택민의 중국적 사회주의는 본격적인 시련기에 들어 갈 것임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개혁정치의 장래는 중국의 파워 엘리트 내부의 단합과 갈등의 정도와 ‘밑으로부터 분출되는 시민사회적 요구’ 간의 역동적인 힘의 관계에 따라서 ‘신권위주의 정권’으로 이행하든지, 또는 현존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더불어 ‘천하대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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