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중국 정치론]제2부 제1장 모택동 사상의 형성과 특징

지식창고지기 2009. 6. 30. 01:00

[현대중국 정치론]

제2부 제1장 모택동 사상의 형성과 특징

 

 

Ⅰ. 서언

 

1976년 9월에 모택동은 82세의 나이로 마침내 그의 생애를 끝마쳤다. 서구문명의 도전과 청조(淸朝)의 몰락이 임박하던 1893년에 호남성(湖南省)의 소산(韶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모택동의 일생은 격동하는 중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정강산(井崗山)에서, 연안(延安)에서, 그리고 마침내는 천안문에서 중공정권의 성립을 선언하고 세계에서 최대의 인구를 가진 사회주의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기까지의 모택동의 생애는 드라마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변신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중공 지도자들이 혁명의 종언과 일상화(日常化)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 모택동은 다시 인민 내부의 모순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의 존재와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부단혁명(不斷革命)과 계속혁명을 주장함으로써 또 한 번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상식에 도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택동은 어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극적인 변신을 거듭하면서 수천의 얼굴을 지닌 복잡하고 다변적인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는 민족적 공산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철저한 스탈린주의자, 진시황(秦始皇)과 같은 폭군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때로는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 또는 호전적인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키아벨리와 같은 음모와 술수에 능한 정치가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이 상반되는 모택동관(觀)은 모두 일면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와 같이 서로 상충되는 여러 요소들이 모택동사상 속에서 혼합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기서는 ‘중국의 공산주의’라는 모택동사상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구명하기 위해서 우선 서방세계 학자들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해석과 쟁점이 무엇인가를 소개한 다음, 모택동사상의 주요특징이 중국의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간략히 살펴보려고 하였다.

 

Ⅱ. 모택동사상의 연구동향

 

1936년 미국인 저널리스트였던 에드거 스노우(Edgar Snow)가 국민당 정부의 봉쇄망을 뚫고 연안(延安)지역에 잠입하여 모택동과 인터뷰하는 데 성공하기 전까지 외부에서는, 특히 서방세계에서는 모택동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기껏해야 급진적인 농촌개혁운동가로 알려져 있었으며 모택동에 대한 관심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고 공산당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고조되었으나, 모택동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자료는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1935년 준의(遵義) 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의 영도권을 장악한 모택동은 이미 진백달(陳伯達) 등의 당내 이론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추구하였으며, 1942년부터는 대대적인 정풍운동을 통하여 모택동사상을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외부세계의 지식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9년에 공산당이 집권하게 되고 모택동사상이 공산당의 지도이념인 동시에 중국의 통치이데올로기로 등장하면서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중국공산당은 중앙위원회 산하에 모택동선집출판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1951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사이에 모두 4권의 「모택동선집」을 출판하였고, 동시에 「인민일보」(人民日報) 등을 통하여 모택동의 중요논문에 대한 해설을 게재하였다. 서방세계에서도 모택동사상과 중국 공산주의에 대하여 슈바르츠(Benjamin Schwartz), 브란트(Conard Brandt), 페어뱅크(John K. Fairbank), 콤프턴(Boyd Compton) 등의 연구결과가 1950년대 초에 발표되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50년대에는 중공의 공식적인 「모택동선집」과는 별도로 모택동의 주요연설과 논문 등을 수집․출판하여 모택동사상에 대한 연구를 자극․발전시켰다.

 

그러나 1950년대에 중공이나 외부세계에서 출판된 「모택동선집」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첫째로 모택동의 중요한 저작 중에서 누락된 것도 있었고,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둘째로는, 중공당이 출판한 「모택동선집」에 수록된 저작물은 거의 다 1950년대에 자신이 부분적으로 개작한 것이기 때문에 원본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926년에서 1949년까지의 것만을 수록하고 있다는 제약이 있었다. 1977년에 화국봉(華國鋒)이 「모택동선집」 제5권을 출판하였지만, 거기에도 1957년까지의 저작물만이 수록되어 있어서 1960년대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연구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슈람(Stuart Schram), 첸(Jerome Ch'en), 그리고 일본의 다께구지(竹內實) 등과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모택동사상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정리되었다. 그 외에도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紅衛兵)에 의하여 출판되었다는 「모택동사상만세」(毛澤東思想萬歲)라든가 미국의 조인트 출판사(Joint Publication Research Service)에서 수집․출판한 「모택동사상문집」(Miscellany of Mao tse-tung Thought, 1948-1968)등은 모택동사상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에 대한 기초자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1960년대의 모택동학(Mao-ology)은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계의 논쟁도 다양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 코헨(Cohen), 비트포겔(Wittfogel), 슈람(Schram) 등은 모택동사상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모순론」(矛盾論)과 「실천론」(實踐論)의 저작연대에 관하여, 그리고 마르크시즘 이론가로서의 모택동의 독창성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즉 코헨과 같은 학자들은 「모순론」과 「실천론」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1937년에 쓰인 것이 아니라 마르크시즘 이론가로서의 모택동의 위치를 부각시키기 위하여서 1950년대에 저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비트포겔은 저작시기에 대하여는 중공당국의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변증법과 유물론에 대한 모택동의 ‘독창적 이론’이란 것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택동은 레닌과 소련의 학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슈람과 같은 학자들은 「모순론」과 「실천론」은 1937년에 모택동이 집필․발표한 것이며, 이것은 1957년에 발표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데”에 대한 연설과 함께 모택동사상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쟁은 문화혁명과 같은 극적인 변화를 거치는 동안에 모택동사상의 보다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즉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나 문화혁명과 같은 사태를 산출한 모택동사상의 특징은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모택동사상은 ‘중국적’이고, 어떤 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모택동사상은 마르크시즘의 전통에서 발전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는 일탈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논쟁이 전개되었다.

 

모택동사상에서 중국적인 요소, 그리고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요소로는 대체로 도시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농민도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주장, 객관적인 조건과 제약도 개인의 의지에 의하여 극복할 수 있다는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적극성에 대한 믿음(populism), 그리고 안정과 조화보다는 모순과 투쟁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 등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모택동에게서는 ‘천부적인 레닌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발견될 수 있지만, 인민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성향은 모택동의 초기 저작물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1919년의 “인민대중의 대동단결”에 관한 논문이나, 1927년의 “호남농민운동 시찰보고”(湖南農民運動視察報告) 등에서 모택동은 대중동원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주의주의적이고 전투적이면서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이야말로 대중의 자발성을 경계하고 당(黨)과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레닌이나 유소기(劉少奇)와 같은 지도자와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택동사상의 특성을 형성시킨 지적인 배경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마이스너(Mauric Meisner)와 같은 학자에 의하며, 전통사회의 몰락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중국인민의 잠재력에서 찾으려고 했던 신문화운동세대의 지적 분위기에서 특히 중국인민 모두가 정신적인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대교(李大교)의 사상에서 모택동의 인민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성향의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지와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강조하는 모택동사상에서 인심(人心)의 중요성과 인간의 도덕적인 수양을 강조하는 유교적 전통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통사상의 영향은 부분적이며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모택동사상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날카롭게 대조를 모이고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평등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모택동의 부단혁명(不斷革命), 계속혁명사상(繼續革命思想)은 위계적인 질서를 존중하고 계층간의 조화와 안정을 합리화하는 유교적 전통문화와 정면으로 충돌될 뿐만 아니라 단계적인 발전을 강조하는 정통적 마르크시즘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대약진운동이나 문화혁명과 같은 대이변을 낳은 모택동사상의 유토피아적인 요소와 평등주의적인 요소는 마르크시즘의 기본정신에서 일탈한 것이며, 심지어는 중국과 같은 후진적인 농촌사회에서 발견될 수 있는 프티부르조아적인 사상의 일종이라고 비난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모택동의 주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부합될 뿐만 아니라, 마르크시즘의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사상은 ‘중국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중국의 전통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모택동이라는 개인의 퍼스널리티 속에서 융합․산출되었다는 점에서는 별다른 이론(異論)이 없다.

 

Ⅲ. 모택동사상의 발전

 

슈르만(Franz Schurman)교수에 의하면 모택동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처럼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순수 이데올로기’(pure ideology)라기보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보편적인 이론을 중국혁명의 실천과정에 적용하면서 생성된 ‘실천적 이데올로기’(practical ideology)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즉 모택동사상은 영구불변의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사상’이며, 따라서 중국혁명과 중국의 정치현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사상의 발전과정을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 신문화운동과 모택동사상

 

1839년의 아편전쟁과 1860년의 태평천국의 난(亂)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한 전통질서의 붕괴는 청조(淸朝)의 몰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문화와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재평가를 강요하는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를 중심으로 추진된 무술유신운동(戊戌維新運動)의 실패와 손문(孫文)의 신해혁명의 좌절은 전통문화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비판운동을 초래하였다. 즉 진독수(陳獨秀), 이대교(李大교), 호적(胡適)등은 신중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가치와 제도를 타파하고 중국 인민의 정신적인 각성이 필요하고 주장하였다. 특히 청년들은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새로운 가치를 습득하여 신중국 건설의 전위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신문화운동은 당시 장사사범(長沙師範)의 학생이던 모택동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모택동은 진독수가 주간하는 「신청년」(新靑年)이라는 잡지에 “체육문화의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문약(文弱)에 흐르는 유교의 가치관을 배격하였다. 1918년에는 장사(長沙)에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고 청년들의 육체적인 단련, 애국심,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모택동은 이미 전통문화의 핵심적인 가치인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서구제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항거하여 최초로 대규모의 대중운동이 발생하자 모택동은 ‘인민대중의 대동단결’에 의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민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인민대중의 역사적 사명과 잠재력을 강조한 이 논문은 모택동의 인민주의적인 성향을 예고한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의 전통가치를 타파하고 청년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각성을 통하여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 당시의 모택동의 사상은 1949년 이후 문화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개조운동으로 발전하였지만, 1919년 당시의 모택동사상은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했다.

 

모택동 자신도 이 당시에는 진독수(陳獨秀), 이대교(李大교)와 같은 신문화운동의 기수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자유주의, 민주적 개혁주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등과 같은 사상적인 혼돈상태에 있었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사실 모택동은 1918년에 이대교, 진독수의 주도하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마르크시즘 연구회에 가담하였지만 그 자신이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여름부터였다고 한다. 이 당시의 마르크시즘에 대한 모택동의 이해는 극히 피상적이고 단편적이었다고 하겠다.

 

2. 모택동의 호남농촌운동 시찰보고

 

1921년에 극소수의 지식인들이 레닌의 동방우회작전을 표방하는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무산계급을 조직하고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노농(勞農) 독재정치를 수립하고 사유재산제를 철폐하여 점차로 공산사회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을 창설하였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창당대회에 참가한 후 호남성(湖南省)의 책임자로서 장사(長沙)에 돌아와 노동운동과 당세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3년에 중공당이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을 결정하자, 모택동은 국민당에 가입하여 주로 농촌 공작(工作)에 종사하였다. 1921년에서 1926년까지 모택동은 진독수가 이끄는 중공당 지도부에 별다른 이론(異論)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마르크시즘에 대한 특이한 해석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국공합작의 상징이던 손문이 1925년에 사망하고 공산당의 노동자․농민운동에 대하여 불망을 표시하던 국민당의 우파(右派)가 장개석의 쿠데타를 계기로 반공정책을 강화하던 1926년에 모택동은 유명한 “호남농민운동 시찰보고”를 발표하였다.

 

모택동은 중국의 농촌지역에서 “단기간 내에 수억의 농민들이 마치 태풍처럼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일어날 것이며…이들의 혁명적인 세력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모든 혁명정당은 이와 같이 혁명적인 농민의 힘을 조직하고 농촌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국공합작이 와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농민운동의 과격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혁명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폭력적인 행위”라고 하면서 “봉건 지주계급과 모든 전통적인 속박에서 해방하려는”농민들의 폭력혁명을 옹호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운동과 농촌혁명을 강조하는 모택동의 주장은 노농연맹에 대한 레닌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모택동 자신도 도시노동자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중국적인 현실에서 농촌혁명이 중요하며, 농민계급은 도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혁명적이고 진보적이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모택동의 “호남보고”의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택동의 농촌혁명론은 당 지도부에 의하여 채택되지 않았다. 1927년에 국공합작이 와해되자 구추백(瞿秋白)과 이립삼(李立三) 등의 ‘모험주의 노선’에 의하여 주로 대도시에서 대중봉기가 시도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27년의 남창폭동을 위시하여 추수기에는 강서(江西), 광동(廣東), 강소(江蘇), 호남(湖南) 등지에서 무장봉기가 있었으며 모택동은 호남폭동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는 장개석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탄압을 받게되었고, 대도시에서 공산당의 세력은 거의 와해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산주의운동은 모택동이 “호남보고”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어쩔 수 없이 농촌혁명의 성격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정강산에서 연안까지

 

1927년의 호남폭동에서 실패한 모택동이 1천 명의 패잔군을 이끌고 호남성과 강서성의 접경지역에 있는 정강산(井崗山)으로 퇴각하여 소의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면서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즉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홍군(紅軍)을 조직하고 ‘혁명 근거지’를 구축한 다음, 유격전술에 입각하여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마침내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농촌혁명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1928년에 모택동은 ‘정강산투쟁’에 관한 보고에서 이미 ‘적색 근거지’와 홍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백색정권(白色政權)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한개 또는 수개의 작은 적색 근거지가 발생하는 것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모택동은 이와 같은 적색 근거지가 존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을 가진 홍군의 건설과 확충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모택동은 “적색 근거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 홍군의 역할을 강조하고 군사적인 투쟁에 많은 주의력을 경주하면서도 통치에 ‘군사만능주의’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다. 즉 모택동은 “군사와 정치를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하며… 군사는 정치임무를 완성하는 수단에 지나지 못한다는 점을 정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사상’이라고 지적하였다.

 

모택동은, “홍군은 전투를 해서 적의 군사력을 소멸시키는 것 이외에 대중에게 선전을 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을 무장하며, 대중을 도와 혁명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사적 문제는 정치공작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유격전략은 단순히 군사적인 작전기술이 아니라 농민대중과의 접촉을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확충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정치공작의 뒷받침이 없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택동은 농민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혁명과정에 동원하는 정치공작의 지도이념이며 조직기술인 ‘대중노선’(大衆路線)을 강서시대에 처음으로 개발하였던 것이다.

 

정강산과 강서 소비에트시대에 생존을 위하여 모택동이 제안한 농촌혁명전략에 대하여 당내의 반대와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당중앙을 지배하던 이립삼과 같은 소련 유학파 지도자들은 ‘적색근거지의 건설’과 홍군의 조직, 그리고 농민의 동원을 골자로 하는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에 대하여서 ‘군사주의,’ ‘산상(山上) 마르크시즘’ 또는 ‘농민적인 정신상태’의 소산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이립삼에 의하면, 모택동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와 당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대도시에서의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지엽적인 농촌지역에서의 군사적인 투쟁만을 강조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광대한 농촌지역과 농촌인구를 가진 중국사회에서, 그리고 국민당의 탄압으로 대도시에서 공산당의 세력에 지리멸렬된 상태에서 모택동의 농촌투쟁전략은 공산주의운동의 명맥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모택동, 주덕(朱德) 등은 1931년 11월에 서금을 수도로 하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건립하는 데 성공을 하였으며, 모택동의 농촌혁명전략에 따라서 강서소비에트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강서소비에트의 세력이 확대되자 장개석은 다섯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소공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1934년 9월에는 모택동과 주덕으로 하여금 ‘만리장정’(萬里長征)을 결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들은 장개석군과 지방군벌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면서 대륙을 종횡단하는 대 도피행진 끝에 1935년 가을에 협서성(陜西省)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의 유명한 연안시대(延安時代)가 시작되어다.

 

4. 모택동의 완숙기, 연안시대

 

연안시대가 중국공산당운동의 역사에서 획기적이 전환기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외필선안내(攁外必先安內)’를 고집하는 장개석의 끈질긴 소공전(掃共戰)으로 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여 있던 공산당은 일본군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거국일치, 항일투쟁’을 요구하는 중국국민들의 민족주의에 편승하면서 기사회생의 계기를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의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중국혁명의 주도세력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공산당이 산간벽지에 웅거하던 농촌 게릴라운동으로부터 중국민족의 대규모 혁명운동으로 성장하던 연안시대는 모택동사상의 완숙기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연안시대에 모택동은 가장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모택동사상의 체계화와 중국화에 몰두하였다.

 

특히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모택동은 「항일게릴라전의 전략문제」(1938), 「지구전론」(持久戰論, 1938),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1939), 「신민주주의론」(1940) 등의 저술을 통하여 중공혁명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파악하려고 하였으며, 동시에 「모순론」(1937), 「실천론」(1937), 「변증법적 유물론」(1939) 등과 같은 철학적인 저작을 통하여 중국적 마르크시즘의 이론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로우(Donarld Lowe)에 의하면 1938년과 1938년은 모택동사상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1938년 10월에 중공당 중앙위원회에의 보고형식으로 발표된 「신단계론」에서 모택동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마르크시즘의 중국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택동은 “마르크시즘과 레닌주의를 글자 그대로 학습해서는 안되며 마르크스와 레닌이 문제를 관찰하고 해결하는 관점과 방법을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이란 구체적인 조건에서 구체적인 투쟁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마르크시즘”을 학습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택동은 반(半) 식민지, 반(半) 봉건적인 중국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가장 높은 자각과 가장 높은 조직성을 가진 계급이지만 자기들만의 계급세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고… 여러가지 상이한 상황에 있는 모든 혁명적 계급이나 계층과 통일전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0년의 「신민주주의론」에서 모택동은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적 상태에 관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중국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중심으로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자본가들까지도 망라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신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통일전선과 신민주주의론은 모택동의 독창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레닌은 이미 러시아와 같은 후진지역에서의 혁명운동은 ‘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부르조아 민주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모택동은 레닌의 이와 같은 견해를 중국의 역사적인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하여 광범위한 계층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고, 마르크시즘의 중국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모택동은 중국적인 현실과 구체적인 정책에 대하여 논의하면서도 항상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주장하였다. 즉 보편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을 중국적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모택동의 관심을 이론적인 차원에서 체계화하려고 했던 것이 「모순론」과 「실천론」이라고 하겠다.

 

모택동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본법칙’ 또는 ‘모든 사회와 자연계의 기본법칙’이라는 모순의 운동법칙이라면 「모순론」은 모택동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택동은 모순의 보편성을 우선 강조하였다. 즉 자연계와 인간계를 막론하고 모든 사물에는 모순이 내재해 있으며, 모순은 자연계와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모순은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모든 모순은 질적으로 다른 특수성이 있으며, 그에 따라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조아 계급사이의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에 의하여 해결되고, 인민대중과 봉건제도 사이의 모순은 민주혁명의 방법에 의하여 해결되며… 낡은 과정과 낡은 모순이 없어지고 새로운 과정과 새로운 모순이 생기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순의 특수성과 상이한 해결방법을 주장하면서 모택동은 ‘주요한 모순’ ‘주요하지 않은 모순’을 구별해야 하며, 무엇이 주요한 모순이냐에 따라서 혁명전략이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모택동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조아 계급간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을 이루며, 그외의 잡다한 다른 모순은 부차적인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요한 모순과 주요하지 않은 모순이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에는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중국민족과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이 되고, 중국사회의 여러 계급사이의 모순은 부차적인 모순이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모택동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합리화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의 「모순론」은 어떤 논리적인 기준에 의하여 주요한 모순과 그렇지 않은 모순을 구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의 변동에 따라서 그때그때 정치적, 정략적 차원에서 주요한 모순을 규정하고 그에 따라 정책과 노선의 변화를 합리화하려고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모순론」의 중요성은 모순의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시즘의 중국화를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또한 「모순론」에서 모택동은 모순이 사회발전과 변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면서 모순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고, 어떤 사회에도 모순은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모순이 발생하며 “인민 내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1957년의 그의 유명한 연설의 기본적인 관점을 이미 1937년에 제기하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모순론」과 함께 모택동이 1937년에 저술한 주요한 논문으로 「실천론」을 들 수 있다. 스노우 (Edgar Snow)에 의하면, 모택동 자신은 「모순론」보다는 「실천론」을 더욱 중요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실천론」에서 모택동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현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어

떻게 형성되면 어떻게 발전하는 것인가를 다루면서 지식과 실천의 불가분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모택동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과정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계의 현상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객관적인 외계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은 제2단계의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외계의 현상을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는 작업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1단계에서 실천을 통하여 인식된 단편적인 지식이 논리적인 차원에서 체계화되면서 이론으로 발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형성된 이론은 제3의 단계, 즉 검증의 단계에서 사회적인 실천을 통하여 그것을 적용해 보고,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시험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모택동은 주장하였다. 즉 이론은 실천에 의거하여 형성되는 것이며 또한 이론에 의하여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모택동은 이론이 없는 실천은 경험주의의 오류를 범하기 쉽고, 반대로 실천이 없는 이론은 교조주의의 과오를 산출한다고 경계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중국적인 현실과 혁명적인 실천과정을 통하여 검증되지 않은 ‘추상적인 마르크시즘,’ ‘공허한 마르크시즘’을 배격하였고, 동시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인 이론을 무시하고 중국적인 현실만을 강조하는 경향에 대하여도 비판을 제기하였다. 모택동에 의하면, “중국이라는 구체적 투쟁에 적용할 수 있는 마르크시즘” 즉 중국적 마르크시즘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론」과 「실천론」 그리고 「신민주주의론」 등과 같은 저작에 반영되어 있는 모택동사상은 모두 중국의 역사적 및 시대적 상황에서 공산혁명을 어떻게 전개해 갈 것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집중되었으며,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은 1942년의 정풍운동을 통하여 공산당의 공식적인 지도이념으로서 확립되었다.

 

5. 인민민주전정시대의 모택동사상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던 1949년 7월, 모택동은 신중국의 통치형태는 ‘인민민주전정’(人民民主專政)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시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계급에 대하여는 무자비한 전정이 사행된다. ‘인민민주전정’하에서의 공산당의 과제는 “인민의 국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지도하에 중국을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착실하게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따라서 중공정권은 1950년대 초에는 “토지개혁, 항미원조운동(抗美援助運動), 반혁명분자의 숙청 국민경제의 부흥 등과 같은 대규모 투쟁을 수행하여 계획적인 경제건설을 추진하고 사회주의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중공정권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는 정도 안정기틀을 마련하였던 1953년에 중공정권은 스탈린의 경제발전모델에 입각하여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동시에 농업, 수공업, 상업 등 경제구조의 사회주의 개조운동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급진적인 산업화와 집단화정책에 대하여 일부 지도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모택동은 그와 같은 ‘보수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집단화한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 개조는 “개체경제의 속박으로부터 대중의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1955년과 1956년에 중공정권은 농촌사회에서 합작화운동(合作化運動)을 강화하였으며, 주요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강행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주의개조를 완결하였다.

 

그러나 현대공업, 특히 중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하여 급속도의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제 1차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그리고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들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산당의 강압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모택동은 그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1956년에는 “논십대관계”(論十大關係)를 그리고 1957년에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서 경제적인 불균형과 정치적인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및 민주적 인사와 공산당간의 장기공존과 상호감독의 방침을 제시하게 되었다.

 

모택동이 무자비한 계급투쟁이나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하여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이유는 후르시초프의 자유화정책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사회주의에 대하여 기본적인 반대가 없으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농업과 수공업의 집단화와 상공업의 국유로 “사회주의경제의 우위가 확립되었고, 노동자계급이 수억의 농민과 동맹관계를 가지고 전국적인 지배권력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체제는 어는 때보다도 안정되어 있으며, 인민 내부의 모순은 기본적으로 비적대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독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단결―비판―단결의 원칙에 의한 민주적인 방법이 더욱 바람직하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의 이와 같은 낙관론은 인민 내부의 모순의 심각성이 노정되고,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판이 가열되자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은 결국 반우파운동(反右派運動)으로 대치되고, 비판적인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 정풍운동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다.

 

6. 대약진운동과 모택동사상

 

모택동은 이미 1956년의 “논십대관계”(論十大關係)에서 스탈린식 경제발전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현대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부자로 말미암아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발전으로 파생되는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하기 위해서 모택동은 중국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경제발전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소련의 경제적 원조와 전문적인 지식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모택동은 연안시대의 경험에 입각하여 농업과 공업의 병진(竝進), 경공업과 중공업의 동시발전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집체경제(集體經濟)의 우수성과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과 자력갱신(自力更新)의 정신을 동원하면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하며, 농촌과 도시,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모택동은 믿었던 것이다.

 

1958년 2월 3일자 「인민일보」는 “고기간경, 역쟁상유”(鼓起幹勁, 力爭上游)라는 사설을 통하여 모든 분야에서 ‘대승리’를 획득하라고 촉구하였다. “3년의 고전(苦戰)으로 각 지구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며, “15년내에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고속도적 대규모적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경(右傾) 보수사상’을 극복하고 ‘인민의 사상을 해방’시키며 집체경제의 우수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약진운동과정에서 모택동은 중국인민은 ‘일궁 이백’(一窮 二白), 즉 빈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혁명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중의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집체주의(集體主義) 사상을 강화하는 정치교육과 사상혁명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정치․사상혁명을 통하여 구 관습과 구 제도를 과감하게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가치와 제도를 수립함으로써 대중의 무한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고 비약적인 경제발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전’(專)보다는 ‘홍’(紅)의 역할을 강조하는 정치지도와 사상지도를 기본지침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인민의 적극성을 고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동시에 추진되었다. 특히 분배상의 불평등을 대폭 감소하기 위한 ‘평등주의적’인 분배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인민의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성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 “대규모적이고 공농상학병(工農商學兵)이 상호결합되어 있으며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인민공사”가 수립되었다.

 

인민공사제도와 대약진운동으로 중국은 곧 공산주의 단계에까지 돌입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기대감이 한 때 팽배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을 무시한 평등주의정책과 인민공사와 같은 과격한 제도적인 개혁은 대종들의 생산의욕을 오히려 감퇴시키고 경제활동이 혼란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천재(天災)와 같은 자연적인 재해와 소련의 원조중단 등으로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7. 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모택동의 지도력과 모택동사상의 권위에 대하여 불신과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마침내 지도층 내의 노선투쟁으로 발전하여 문화혁명을 야기하게 되었다.

 

1959년 9월에 노산에서 개최된 당중앙정치국(黨中央政治局) 확대회의에서 당시 국방상이던 팽덕회(彭德懷)가 대약진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좌익모험주의’와 ‘소시민계급적 열광’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팽덕회를 숙청하고 대약진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1959년에서 1961년에 이르는 사이에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고, 중공은 최대의 경제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모택동의 정치우선주의, 계속혁명사상, 대중운동방식의 경제발전정책, 그리고 평등주의적인 경향 등에 대한 비판이 제가되었다. 특히 모택동이 제일선에서 물러나고 유소기(劉少奇), 등소평(鄧小平), 진운(陳雲) 등과 같은 당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이 ‘인민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경제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사상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비등하였다.

 

이들은 ‘경제법칙’과 ‘객관적인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약진운동의 유토피아적 경향을 비판하였고, 경제활동에 대한 정치와 사상공작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홍’(紅)에 대한 ‘전’(專)의 역항을 강조하고, 경제적 효율과 수익성에 입각하여 대약진운동 당시에 추진되었던 정책을 조정하기 시작하였다.

 

실용주의노선은 대약진운동의 정책적인 과오를 시정하고 경제위기를 수습한다는 한계를 넘어서 사회주의의 건설과 경제발전에 대한 모택동사상을 비판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960년 초에 북경시당부(北京市黨部)의 오함(吳唅), 등척(鄧拓) 등은 모택동의 급진적인 혁명사상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고, 중공당 고급당학교(高級黨學校)의 교장이던 양헌진(楊獻珍)은 모택동의 모순론과 유물변증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즉 양헌진은 모순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모택동의 ‘일분위이론’(一分爲二論)에 대하여 모순의 통일과 계급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합이이일론’(合二而一論)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노선으로 당내외에서 ‘수정주의적 경향’과 ‘자본주의적 성향’이 풍미하게 되자 모택동과 임표(林彪)와 같은 급진파들은 다시금 계급투쟁과 정치우선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다.

 

1962년 9월에 개최된 중공당 제 8기 10중전회(中全會)에서 모택동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은 존재하며 계급투쟁이 계속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부르조아 세력이 존재하고 국내적으로도 부르조아의 존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소시민계급이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부르조아를 산출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계급이 장기간 존재할 것이며… 계급과 계급사이의 투쟁이 계속되고 반동계급의 부활 가능성”이 상존해 있다고 역설하였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자본주의의 부활 위험성에 대한 모택동의 경고는 중․소이데올로기 분쟁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표명되었다. 즉 모택동은 후르시초프의 수정주의적 정책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사회주의국가에서 자본주의 세력의 부활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1964년 7월 14일에 발표한 “후르시초프의 사이비 공산주의와 세계에 준 그 역사적 교훈”이라는 장문의 논문에서, 모택동은 후르시초프의 수정주의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련사회에서 신 자산계급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당과 국가기관에까지 침투하여 ‘주자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주자파’의 등장으로 소련은 ‘무산계급전정’(無産階級專政)을 포기하게 되었고, ‘계급투쟁의 종언’을 선언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주자파’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강화하고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 급진파의 주장이었다. 다라서 임표는 1963년 2월에 중국인민해방군 정치공작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의 군사․혁명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4년에는 전국적으로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은 급진파의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은 마침내 1966년에는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관습을 청산하고 신사상․신문화․신풍속․신관습으로 중국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문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타도하고 “자본주의계급과 일체의 착취계급의 의식형태를 비판”하는 문화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은 대중의 혁명정신을 강조하고 중국사회에 존재한다는 모든 ‘봉건적,’ ‘수정주의적’ 사상에 대하여 ‘혁명적 대비판’을 전개하라고 촉구하였다.

 

1966년에 모택동은 “올바른 사상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인간의 사상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발전”에 매우 능동적이고, 심지어는 결정적인 역할까지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진사상이 대중에 의하여 장악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회발전을 추진하는 강력한 물질적인 힘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낡은 사상을 크게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을 크게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에 입각하여 임표와 문화혁명 4인조들은 ‘중국의 후르시초프’인 유소기, 등소평과 같은 ‘주자파’ 타도하라고 요구하였고, 이들에 의하여 실시되었던 ‘신경제정책’에 대대적인 비판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급진파 지도자들은 “무한한 힘을 가진 정신적인 원자폭탄”인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강화하여 공동부유(共同富裕)의 신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67년에 이들 좌파 지도자들은 ‘투사비수’(鬪私批修) 운동을 전개하고 “혁명과 사회주의를 위하여 노동하는 정신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낡은 사상은 ‘사심’(私心)에 있으며, ‘사심’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천연의 토양이며, 수정주의를 낳는 중요한 요소이고, 집체경제를 와해시키는 독균“이라고 주장하면서 ‘파사입공’(破私立公), 대공무사(大公無私)의 사상운동을 통하여 사회주의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모택동을 비롯한 좌파 지도자들의 사상개조운동으로 문화혁명과정에서 대약진운동 상시와 같은 평등주의적인 분배정책과 ‘공산풍’(共産風)이 부분적으로 부활하였으며 ‘상층구조’를 혁명적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택동사상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동안에 평등주의적, 인민주의적,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성향이 현저하게 강조되었다. 특히 사회주의에로의 이전단계에서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모택동사상은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도 상치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사회주의사회에서 집단소유제와 전인민소유제의 실현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계급과 계급간의 대립과 모순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정통적인 마르크시즘 이론에 대하여 모택동은 의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모택동에 의하면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만으로 계급과 계급투쟁이 종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의식과 태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8급 공자제(工資制), 안노분배(按勞分配)와 화폐경제”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자산계급이 탄생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의 부활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의 종식을 선언하고 모순과 대립보다 안정과 조화를 강조한 스탈린의 정치경제학은 유물변증법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계급은 소유제의 정도에 따라서 결정될 뿐만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주관적인 의식과 태도도 중요한 결정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사상개조운동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주요하며, 더구나 대중의 사상혁명은 거대한 물질적 힘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혁명과 같은 사상개조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모택동은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모택동의 주장은 정통적인 마르크시즘의 계급이론과, 당과 엘리트 계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하여 물질적인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주요하다는 레닌과 스탈린의 주장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Ⅳ.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1976년의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에 대한 숙청이 중공 정치사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등소평을 비롯하여 문화혁명 기간동안에 박해를 받았던 실용주의 지도자들이 대거 복권되면서 모택동사상과 모택동의 공적에 대하여 광범위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주장과 함께 모택동사상을 신비화하고 교조화하였던 좌파의 오류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대중들의 ‘사상해방’을 촉구하였다. 특히 이들은 계급투쟁과 사상혁명을 강조한 모택동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의 종식을 선언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실용주의 지도자들의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운동은 1981년 6월에 개최된 중공당 제 11기 6중전회(中全會)에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에 반영되었다. 이 ‘역사결의’에 의하면 중국공산혁명과정(1921-1949)과 사회주의 개조가 완결된 1956년의 제 8차 전당대회 때까지의 모택동의 고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모택동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즉 1957년의 반(反)우파 운동, 1958년의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의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손실을 초래했으며, 모택동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모택동의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 계속혁명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활에 관한 경고 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모택동사상의 오류로 말미암아 문화혁명과 같은 ‘대재난’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중국사회에서 계급간의 모순은 사실상 주요한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인민의 나날이 증대하는 물질적, 문화적 욕구와 사회생산과의 모순”이야말로 주요한 모순이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생산력의 발전과 4대 현대화의 달성이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의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이와같이 모택동사상의 급진적인 측면은 오늘날 혹독한 대상이 되고 있으며, 더 이상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서 모택동 개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