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중국 정치론]제2부 제2장 중국적 사회주의: 모택동과 등소평의 마르크

지식창고지기 2009. 6. 30. 01:02

[현대중국 정치론] 

제2부 제2장 중국적 사회주의: 모택동과 등소평의 마르크스주의 비교

 

 

1992년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4차 당대회는 이른바 개혁과 개방의 총설계사인 등소평이 창립했다는 ‘중국특유의 사회주의 이론’을 당의 기본노선으로 재확인하였고, 앞으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사상을 더 한층 해방시키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확립함으로써 경제를 비롯한 각 분야의 신속한 발전을 성취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와같이 등소평의 중국특유의 사회주의 이론을 모택동사상과 같은 수준에서 당의 지도이념으로 규정한 14전대회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면서 그 당시 㰡”인민일보㰡•는 사설에서 “중국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이란 위대한 사업은 그전에는 실행해 본 일도 없고 어떤 책에서 제시된 일도 없으며, 이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의 실상을 결합시킨 최신 성과이며, 모택동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고 이 시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라고 평가하였다.

 

중일전쟁에서의 승리를 목전에 둔 1945년 6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7차 당대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중국혁명의 실제를 창조적으로 결합한” 모택동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규정하는 당장을 통과시켰다. 이 당대회에서 유소기(劉少奇)는 모택동을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 이론가라고 찬양하면서, “그는 이론의 영역에서 대담하게 창조를 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 가운데 일부 시대착오적이고, 중국환경에 구체적으로 맞지 않는 원리와 개개의 결론을 버리고, 새로운 중국의 역사적 환경에 접합한 새로운 원리와 새로운 결론으로서 대신했고, 따라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곤란하고도 위대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모택동과 등소평은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의 구체적인 현실조건에 창조적 적용함으로써 중국특유의 사회주의 또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인가. 모택동과 등소평의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어떤 것이며, 이와같이 상이한 중국적 마르크스주의를 산출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는 것이 이 글의 주제라고 하겠다.

 

1.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징: 도구주의

 

모택동과 등소평이 주장하고 있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마르크주의에 대한 도구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택동과 등소평은 모두 마르크스주의 이론 그 자체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기 보다는 실천을 위한 도구로서 이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중국사회의 변혁과 발전이란 실천적 과제에 적합한 이론만이 참다운 이론이며, 그렇지 않은 이론은 도그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 이론가들의 이론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고 할지라고, 현재의 실천적 과제에 적합하지 않는 경우에는 과감하게 중국의 실제에 이론을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에서 중국특유의 마르크스주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도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 성격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미 잘 알져진 바와 같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강조한 모택동은 연안(延安) 정풍운동 당시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실용적 태도를 표명하였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은 그것이 보기 좋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어떤 신비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이 (중국에서)프롤레타리아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과학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저작물 중 어떤 말이나 구절을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의 약처럼 여기고 있다...이것이야 말로 유아적인 무지의 발로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이론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도그마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택동은 도그마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런 도그마는 사람의 똥보다도 가치가 없다고 극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택동에게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이며,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모택동의 논리는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연안시대에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와 관련하여 모택동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중국적 특수성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이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고 하겠다. 모택동이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적용’에 대하여 비판을 제기하는 근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가운데에 유럽과 러시아혁명의 특수성을 반영한 부분이 있고, 보편적 이론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모택동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있는 보편적 이론을 학습하고, 그것을 중국적 특수성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모택동이 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이론이란 무엇인가? 모택동에 의하면, 그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현실적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입장, 관점, 방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 관점, 방법을 학습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중국역사와 중국혁명의 실제를 연구”하여 중국혁명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모택동은 중국의 구체적 현실에 뿌리를 둔 마르크스주의, 중국혁명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런 점은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론에서도 발견된다고 하겠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등소평과 개혁파들은 모택동사상의 신비화, 교조화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택동시대의 좌경적 정책과 당노선을 부정하기 위하여, 그리고 현대화와 경제발전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적 현실의 창조적 결합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흔히 등소평의 지지세력들을 ‘실용주의파’ 또는 ‘실천파’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중국의 현실, 특히 중국의 경제적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등소평이 대약진(大躍進)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초래된 경제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장했다는 이른바 ‘흑묘(黑猫) 백묘(白猫)론,’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진짜 고양이라는 등소평의 논리에는 이미 중국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에 얶매이지 않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과감하게 원용하겠다는 실용주의적 태도가 노골적으로 들어나 있다고 하겠다.

 

이런 실용주의적 관점은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들이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당과 국가의 최고, 최대의 과제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하면서 더욱 명확하게 들어나게 되었다. 등소평과 개혁파들은 개혁정치에 대하여 반대하는 문화혁명 좌파들이나 모택동사상의 추종자들의 ‘사상적 속박’에서의 ‘해방’을 강조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란 표어를 내걸고 모택동시대의 ‘좌경적’ 정책, 노선, 방침을 비판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78년 「전군(全軍)정치공작회의에서의 강화」에서 등소평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이 만약 실제의 상황에 맞지 않을 때에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론, 정책, 계획, 방법이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실천속에 던져져서 검증을 거칠 때 비로소 증명되는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와같은 등소평의 입장에 고무되어 1978년 6월 6일자 㰡”인민일보㰡•는 형분사(刑賁思)의 논문, 「진리의 기준문제에 관하여」를 발표하고 개혁파의 실사구시적 관점을 비교적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밝히려고 하였다.

 

형분사는 이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진리이다’라는 것과 ‘마르크스주의는 진리의 기준이다’라는 것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어떠한 진리도 스스로 증명할 수 없고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증명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도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서 그것이 진리임을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형분사는 현대 자연과학의 많은 진리가 진리인가 어떤가 하는 것은 스스로의 과학적 실험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는 것이지,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원리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는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관점은 잘못된 관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고정된 자명의 자기 폐쇄적 인식체계로 보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과학적 진리가 될 수 없고 어떤 선현의 신비스러운 정신적 유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실천에 의하여 진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개혁파들의 논리는 당과 국가의 최고, 최대의 과제인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이란 실천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스스로 진리임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이론, 노선, 정책만이 진리이며,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된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중국의 개혁파들은 모택동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이론을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영원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그것들은 변화하는 환경과 조건, 과제의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어야 하며,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1981년의 㰡”역사결의㰡•에서 개혁파 지도자들은 “모택동사상의 과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혁명과 건설에 대한 모택동사상의 지도적 사상을 부정하려는 태도는 잘못이지만...(동시에) 모택동동지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 하여 그대로 따르거나, 심지어 모택동 동지가 만년에 범한 오류를 실사구시에 입각하여 인정하려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모택동사상에서 배워야 할 것은 모택동의 어떤 구체적인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중국의 실제에 창조적으로 결합한 모택동의 입장, 관점,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1984년 12월 9일자 㰡”인민일보㰡•에 발표되어 당시 중국 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이론과 실제」라는 평론원의 논문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났다.

 

“마르크스가 서거한지 101년이 지났다. 그의 저작은 100여년전에 쓰여진 것이며 어떤 이론은 당시의 가설에 입각한 것이다. 그후 상황은 대단히 변화하였고, 따라서 당시의 가설이 지금도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험하지 못했던 사정도 많고 레닌이 접하지도 경험하지 못하던 사정도 많이 발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이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서거한 후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화했기 때문에 당시에 타탕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이 현재에도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며,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 현재에 마르크스와 레닌이 제시한 명제에 얶매어 현실을 논단하려는 것은 역사의 진보를 저해한다는 이 논평은 모택동사상은 물론이거니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서도 실용주의적이고 실사구시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같은 논문이 발표되자 중국 내외에서 중국이 사실상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았고, 등소평정권 내부에서도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같은 반향에 당황한 㰡”인민일보㰡•은 이례적으로 이 논평이 발표된지 3일 후에 「이론과 실제」라는 논평의 일부 문장에 표현상의 과오가 있었다고 인정하고, 앞에서 인용한 문장의 끝부분을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이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정정함으로써,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이 오늘날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오해를 불식하려고 하였다.

 

2. 두 개의 중국적 마르크스주의: 그 역사적 기원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모택동과 등소평의 마르크스주의는 대단히 도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중국혁명과 중국의 현대화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천의 이론으로, 변혁과 발전의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모택동과 등소평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방법, 태도, 입장이 기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해서 그 내용도 유사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와 등소평의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안에 내재해 있던 대단히 대비적인 두개의 상반된 노선과 정책정향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에는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와 등소평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두개의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굴드너(A. Gouldner)는 마르크스주의 안에는 이른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Scientific Marxism)’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Critical Marxism)’이라는 서로 대립하고 공존하는 「두 개의 마르크스주의 (The Two Marxisms)」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굴드너의 ‘두개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을 띠고 있다면, 4대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강조하는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이론은 굴드너가 말하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안에 존재하는 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두가지 경향성은 중국의 초기 공산주의운동에서 이미 맹아적인 형태로 잠복해 있었다고 하겠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상세히 설명했지만, 초기 중국 마르크스주의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대교(李大釗)와 진독수(陳獨秀)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미 이같은 두개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제도를 재검함이 없이 인간정신을 개조한다는 것은 허사”이지만, 또한 “인간의 정신을 개조함이 없이 경제제도를 개조하려고 한다면 이 역시 실패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지적하면서 역사와 사회의 변화와 발전과정에서 인간의지와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거대한 인민들의 힘’을 통하여 역사의 도약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이대교의 마르크스주의는 굴드너가 말한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의 정신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배척하고 서양의 합리주의 문명과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진독수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대교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성,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통하여 중국사회의 근대화를 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과학적 마르크시주의의 경향성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에는 초기에 이미 두개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이 혼재,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각 중국혁명의 상이한 전략과 경험에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즉,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경향성은 개개인의 주관적 능동성을 강조하는 농촌혁명과 게릴라전의 전략과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모택동사상으로 응축, 발전되었는가 하면,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은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중시하는 도시지역의 공산당운동의 전통에 의하여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두개의 마르크스주의가 중국혁명과정에서 서로 충돌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념과 정치적 목적이 판이하게 다른 국민당과의 첨예한 대결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중국혁명의 성격과 과제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공동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중국혁명의 당면 목표가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반제 반봉건투쟁을 통하여 신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는 것이란 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개의 마르크스주의의 차별성이 들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정에서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공존해 왔던 두개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은 당지도부의 노선투쟁과정에서 그들의 차별성을 극명하게 표출하게 되었다.

 

3.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 두개의 마르크스주의

 

중국혁명과정에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두개의 마르크스주의는 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그리고 신민주주의혁명의 완결이 선언되고, 중국에서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에 당면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대한 두 개의 대립되는 노선과 정책정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모택동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난’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 내부에서는 모택동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동시에 어떤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는 좌파와 실용주의파간의 노선투쟁이 심화, 확대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처음부터 중국혁명의 독특한 경험을 강조하는 ‘중국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면서 당과 국가의 중심을 농촌에서 도시에로 집중할 것을 명령하였고,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 본격적인 국가건설과 산업화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다. 특히 한국전쟁직후에는 소련의 지원과 소련의 경험을 그대로 도입하여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수립, 추진함으로써 부강한 사회주의 신중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적인 첫 시도를 감행하였다. 이와같은 급진적인 산업화정책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경제와 사회는 크게 변모되었고, 중국의 근대공업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간부와 기술, 그리고 도시의 중공업 발전을 강조하는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에 입각한 사회주의사회 건설모델은 중국사회에서 농업과 공업의 괴리, 도시와 농촌의 괴리, 간부와 대중의 괴리를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혁명이 추구했던 혁명적 이상주의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산출함으로써 그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심각한 ‘인민내부의 모순’으로 발전될 우려도 있었다. 게다가 스탈린식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현실적으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택동은 중국적 방식에 입각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대약진운동은 스탈린의 사회주의 건설방식 대신에 중국공산당의 농촌혁명 경험, 특히, ‘연안(延安)경험’에 의거하여 중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고 한 모택동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1958년 2월 3일자 「모두가 떨쳐 일어나 힘을 다하여 위를 향해 전진하자(鼓起幹勁,力爭上遊)」는 㰡”인민일보㰡• 사설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대약진운동의 정신은 집체경제의 우수성과 대중들의 거대한 힘을 동원하여 일거에 공업과 농업의 ‘대약진’을 달성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농업과 공업,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택동은 인민대중의 잠재력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관료와 간부들의 ‘우경 보수사상’을 비판하면서, 대중들의 사상을 해방시키고 대중들로 하여금 집체경제의 우수성을 인식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모택동은 중국의 경제적 문화적 낙후성을 이유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기 전에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견해에 대하여 ‘일궁이백론 (一窮二白論)’을 제창하였다. 즉, 인민대중은 빈곤하고 낙후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들은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았고, 따라서 중국의 인민대중들은 더욱 혁명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논리에서 모택동은 인민대중의 주관적 능동성과 혁명성을 억압하는 낡은 제도와 사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제도와 가치를 수립하기 위한 사상혁명, 정치혁명,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주장하였다.

 

또한 모택동은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적극성을 고취하고 집체주의의 우월성을 발휘하기 위한 정책적, 제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를테면, 분배상의 불평등을 감소하기 위한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도시와 농촌, 농업과 공업,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도시 청년지식인들의 하방(下放)이나 간부들의 육체노동 참가, 그리고 소규모 농촌 공업의 발전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대규모적이고 공농상학병(工農商學兵)이 상호결합되어 있으며,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인민공사”를 수립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로의 이행을 주도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와같은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제도의 실시로 중국사회에서는 머지않은 장래에 공산주의 단계에로 진입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기대감이 팽배했지만, 팽덕회(彭德懷)와 같은 일부 지도자들은 대약진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좌익 모험주의’와 ‘쁘띠 부르조아적 열광’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특히, 현실적 여건을 무시한 경제정책과 평등주의적 분배정책, 그리고 인민공사와 같은 급진적인 제도적 개혁이 대중들의 생산의욕을 감퇴시키고 경제활동의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대약진운동이 실패하고 건국이래 최대의 심각한 경제적인 위기가 초래되자, 대약진운동을 추진한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비판운동이 공공연히 표출되었다. 따라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하여 초래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택동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유소기와 등소평, 진운 등으로 대표되는 당관료와 경제전문가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이른바 ‘신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들은 ‘경제법칙’과 ‘객관적 조건,’ 그리고 ‘경제적 효율성과 수익성’을 강조하면서 대약진운동 당시 추진되었던 평등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정책과 제도를 폐지하거나 축소 조정하였다. 또한 이들은 경제에 대한 정치, 사상운동의 간섭을 배제하고, 홍(紅)에 대한 전(專)의 역활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당의 지도부내부에서조차 대약진운동에서 나타난 모택동의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경향성에 대한 비판운동이 제기되면서, 문화계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계급투쟁보다는 계급적 화해와 단결을 강조하는 ‘수정주의적 경향’이 더욱 풍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은 1962년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0중전회에서 「계급, 정세, 모순에 관하여」란 연설을 통하여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계급혁명론’을 다시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모택동은 이 연설에서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은 존재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고, “국제적으로 부르조아 세력이 존재하고 국내적으로도 부르조아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소시민계급이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부르조아계급을 산출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장기간 계급이 존재하며...계급투쟁이 계속되고 반동계급의 부활 가능성이”이 상존하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하고, 자본주의의 부활 위험성이 상존한다는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은 그 후 중소논쟁시기에 보다 정연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이를테면, 1964년 7월 14일자 㰡”인민일보㰡•에 발표한 「후루시초프의 사이비 공산주의와 세계에 준 그 역사적 교훈」이란 장문의 논문에서 모택동은 후루시초프의 수정주의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소련사회에서 신자본가계급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당과 국가기관에까지 침투하여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의 주자파(走資派)를 형성, 마침내 소련을 변질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모택동의 계급투쟁론이 발표되면서 모택동의 지지세력들은 중국사회에서도 주자파의 등장과 자본주의의 부활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자본주의와 수정주의에 대한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대대적인 모택동사상 학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좌파들의 공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1966년 모택동은 「올바른 사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인간의 사상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발전에 매우 능동적이고, 심지어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고 전제하면서, “대중들이 선진적 사상을 가지게 되기만 하면, 그것은 사회발전을 추진하는 강력한 물질적인 힘”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낡은 사상과 제도를 크게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과 제도를 크게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모택동사상에 입각하여 ‘중국의 후루시초프’인 유소기, 등소평과 같은 당내의 주자파에 대한 대대적인 ‘혁명적 대비판’운동을 전개하였고, ‘무한한 힘을 가진 정신적 원자폭탄’인 모택동사상에 입각하여 공동부유(共同富裕)의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였다.

 

이와같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과정에서 나타난 모택동사상의 특징은 첫째, 중국혁명이 추구하는 목표를, 기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사회의 이상에 근거하여 중국에서 도시와 농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성이 소멸되고 공동부유가 실현되는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사회의 건설과정에서 이러한 평등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목표를 등한시하고 물질적인 발전만을 추구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모택동은 사회주의사회를 기본적으로 ‘과도기 사회’라고 규정하면서, 과도기적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공산주의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 넘어가는 사회주의의 전시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견지하면서, 한편으로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을 계속함으로써 자본주의 부활 위험성을 억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맹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모택동과 좌파들에 의하면, 소유제도의 혁명적 변화, 즉 국유화와 집산화로 전통적인 지배계급이 소멸되거나 약화되었만,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여전히 불평등한 임금제도와 노동에 따른 분배정책, 그리고 화폐교환의 경제등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자본가계급과 특권계급이 탄생할 수 있는 물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부활 위험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역설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며, ‘공산주의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신생사물(新生事物)’을 지속적으로 발전, 확산시켜 나가아 한다는 것이다.

 

셋째, 모택동과 좌파이론가들은 역사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추동한다는 것은 부동의 진리라고 인정하면서도,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의 변화가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대중의 사상을 해방하여...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상혁명과 정치우선주의의 원칙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모택동에 의하면 스탈린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적극성을 고양하려고 하지 않고,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에만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사회주의의 왜곡 발전을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대중들의 자발성을 동원하여 경제발전을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과 좌파의 중국적 사회주의론에 대한 비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약진운동이 실패한 이후 신경제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문화혁명의 대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을 중심으로 형성된 실용주의파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러나 1976년 모택동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의 몰락, 1977년 등소평의 복권, 그리고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의 ‘역사적 노선전환’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모택동사상과 모택동시대를 비판하고, 모택동시대의 중국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려는 ‘제2의 혁명’ 과정에서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론’이 구체화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강조하는 모택동사상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혁명보다는 발전을 강조하는 중국 특유의 근대화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등소평과 개혁파는 무엇보다도 문화혁명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을 부정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은 중국의 ‘실제,’ ‘계급정세,’ ‘정치상황’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평가’에서 출발한 것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요한 관점이나 이론을 왜곡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사회에서 대규모의 계급투쟁은 실질적으로 1956년에 종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확립되었고, 집단화와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개조 사업이 완결된 1956년 이후 실질적으로 계급투쟁을 계속해야 할 객관적인 근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회주의혁명이 기본적으로 완결된 중국사회에서 주요모순은 계급간의 모순과 갈등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향상을 바라는 대중들의 요구와, 그에 부응할 수 없는 중국의 경제적 낙후성에서 파생되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사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업은 당연히 모든 계급과 계층이 협력, 단결하여 4대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하여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개혁파들은 모든 사회관계와 상층구조의 변화는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력의 증가만이 중국사회의 진보적 발전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또한, 개혁파들은 대중들의 혁명적 열의를 동원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모택동의 사회주의 이행론을 ‘궁과도(窮過度)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에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심론적 관점에 불과한 것라는 것이다. 개혁파들에 의하면, 중국은 중국공산당으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고, 사회주의개조로 기본적인 사회주의적 소유관계가 수립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인 것은 틀림없지만,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있는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가 이룩한 생산력의 발전을 중국은 사회주의단계에서 실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당과 국가의 모든 정치적 공작이나 정책, 제도들도 생산력의 증가에 얼마나 기여하는냐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생산력 중심론적 관점에서 개혁파들은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한, 생산력의 증가를 촉진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또한 아무리 사회주의적 이상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도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는 정책과 제도는 과감히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개혁파들은 농촌사회의 경제발전을 속박하는 인민공사제도를 철폐하였고,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개체경제를 허용했는가 하면,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을 비판하였고, 1984년에는 경제체제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상품경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대폭적으로 축소 조정하였다. 특히, 최근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제창하면서 개혁파들은 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자본주의적 경제를 더욱 대담하게 수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중국특유의 사회주의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는 사실상 자본주의적 경제로 대치되고 있으며,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중국공산당의 영도원칙이 아직도 관철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가 과연 사회주의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4. 중국의 마르크스주의는 일탈인가, 창조적 적용인가

 

모택동사상과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일탈인가, 아니면 중국의 실제에 마르크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중국 내외에서 심심치않게 제기되었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개혁파들은 인간의 의지와 혁명정신의 역활을 강조하는 모택동사상의 주의주의,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평등주의적인 관점, 그리고 물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사회에로의 이행을 강조하는 모택동의 유토피안이즘은 모두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와 모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부 서구 학자들도 모택동의 주의주의, 평등주의, 유토피안이즘은 마르크스나 레닌주의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이나, 또는 중국 농촌사회에서 전승되고 있는 민중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패퍼(Richard Peffer)와 같은 학자들은 모택동의 주의주의와 평등주의, 그리고 유토피안이즘이 마르크스의 기본정신을 계승, 발전한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모택동사상을 옹호하였다. 패퍼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기계적 유물론자도 아니며, 더구나 경제결정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화 사회의 변혁과정에서 인간의 역활을 강조했으며, 의식화된 인간의 행동이 물질적인 변화의 추동력이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택동사상은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의 전통안에서 마르크스가 제기한 공산주의사회의 목표를 중국이란 사회에서 실현하려 했던 혁명사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등소평의 경제발전 제일주의와 개혁, 개방정책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일탈이며, 기본적으로 수정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생산력의 발전을 중시하는 개혁파의 논리는 베른스타인, 카우츠키, 부하린, 후루시초프등으로 이어지는 수정주의적 논리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지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적 정책과 제도를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가 과연 사회주의인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중국의 개혁파들 중에서도 이른바 ‘신권위주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견지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명목하에서 실질적으로 국가자본주의의 길을 모색하는 일종의 ‘개발독재론’을 제기함으로써, 그들의 개혁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일탈이라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파들은 공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포기를 선언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은 중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사회주의와 같은 고매한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국은 앞으로 100년동안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완전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개혁파들의 논리는 5-4운동직후 1920년대에 벌어졌던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장동손(張東蓀)과 같은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장동손이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인 러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중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중국의 당면 문제에 대한 강연을 가진 후 발표한 「내지 여행의 또 하나의 교훈」으로 촉발됐던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은 중국사회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실성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거의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장동손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오늘날의 개혁파와 같이 사회주의를 고매한 이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중국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과 산업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자본주의적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진독수와 이대교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빈곤의 타파와 경제발전이 절박한 과제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주의만이 중국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논쟁에서 다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중국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그것 자체를 독자적인 가치와 문명체계로 인식했다기 보다는 신중국의 건설을 위한 도구이며 방편으로 수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모택동사상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와 사회주의의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의 실제에 맞추어 재해석한 것이라고 한다면,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는 모택동사상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여 근대중국이 추구했던 또 다른 목표였던 ‘부강한 신중국’의 건설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중국의 현실적 필요에 따라 재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와 등소평의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도구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