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가 찢은 자명고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 이야기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자명고’다. 이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북이 스스로 울려 위험을 알려주는 비상경보시스템이다. 사료에는 자명고각(自鳴鼓角)으로 나와 있어 정확히는 ‘북과 뿔피리’다. 종래에는 이를 비현실적 설화로 보는 입장이 많았다.
또는 이것이 무기창고에 있었고 중국이 예속세력에게 고취기악인(鼓吹伎樂人)을 파견했다는 점에 주목해 중국의 정치, 군사적 후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북은 고대사회에서 신에게 제사지내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부여의 ‘영고(迎鼓)’라는 제천의례는 ‘북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북이 하늘의 신과 동격으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는 비류국의 국가위엄을 상징하는 의기(儀器)로 북이 등장한다. 주몽이 이를 몰래 훔쳐 자신의 북인 것처럼 자랑하는 사건에서 보듯이 북은 국가적 위엄과 관계가 있었다. 낙랑의 자명고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용 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위험을 감지한 신관(神官)들이 이를 통해 경계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 수산리 벽화에 나타난 해 모양의 북도 북이 하늘의 소리를 전해주는 종교적 신성물이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따라서 자명고는 낙랑국이 우리 민족문화권에 속했음을 알려준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낙랑공주는 사랑하는 남편 호동왕자를 위해, 아버지와 나라를 배신한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줄거리다. 그렇다면 그 후 호동왕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호동왕자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사국왕(葛思國王)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호동왕자는 얼굴이 수려하여 부왕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그래서 이름을 ‘호동’이라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당시 고구려는 남과 북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서기 32년 4월 왕자 호동은 옥저로 놀이를 나갔다가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를 만나, 함께 낙랑으로 가서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 오면 스스로 울어 위기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하기 어려웠다. 이에 호동은 최리의 딸로 하여금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고 고구려 군대를 끌고 가 낙랑을 정복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호동이 전략적으로 낙랑공주에게 접근하였다는 것이 학계에서 보는 주된 시각이다. 어쨌든 낙랑을 정복한 공으로 인해 호동은 부왕의 총애를 더욱 굳히게 되었고, 정치적 위신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반대세력도 많아지는 법이며, 때로은 이로 인해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왕자 호동이 바로 이같은 사례를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는 (호동왕자가)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요.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호동은)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라는 여인을 이용하여 출세하였지만, 결국은 같은 여자인 자신의 계모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였다.
당시 고구려는 남과 북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서기 32년 4월 왕자 호동은 옥저로 놀이를 나갔다가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를 만나, 함께 낙랑으로 가서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침입해 오면 스스로 울어 위기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하기 어려웠다. 이에 호동은 최리의 딸로 하여금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고 고구려 군대를 끌고 가 낙랑을 정복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호동이 전략적으로 낙랑공주에게 접근하였다는 것이 학계에서 보는 주된 시각이다. 어쨌든 낙랑을 정복한 공으로 인해 호동은 부왕의 총애를 더욱 굳히게 되었고, 정치적 위신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반대세력도 많아지는 법이며, 때로은 이로 인해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왕자 호동이 바로 이같은 사례를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는 (호동왕자가)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요.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호동은)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라는 여인을 이용하여 출세하였지만, 결국은 같은 여자인 자신의 계모로 인해 죽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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