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사(曷思)국 과 다파나(多婆那)국
갈사(曷思)국
고구려 3대 대무신왕 5년(서기19년) 2월에 부여와 싸워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베어버리자 4월에 대소의 아우 한 사람이 부여를 떠나 갈사 물 가(曷思水濱)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갈사국입니다.
갈사왕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부여 금와왕의 일곱 아들(금와왕에게는 아들이 7형제가 있었습니다) 중 하나이며 주몽을 괴롭혀서 주몽이 부여를 떠나게 만든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 그는 고구려가 갈 수록 강성해지며 부여의 국세가 자꾸 쇠약해지는 가운데 왕이 죽음을 당하자 부여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부여를 버린 모양입니다.
그는 맏형이며 왕인 대소가 죽자 부하 백여 사람을 데리고 압록곡으로 갑니다.
거기에는 이미 해두국(海頭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해두국왕이 사냥하는 것을 보고는 왕을 죽이고 자신이 해두국을 빼앗아 나라를 갈사국으로 하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갈사왕은 그러고도 이웃한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손녀를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바칩니다.
대무신왕과 갈사왕의 손녀 사이에서 난 아들이 낙랑공주를 속여 낙랑을 무너뜨린 호동왕자입니다.
49년 뒤 고구려 6대 대조대왕(대조왕은 국조왕이라고도 합니다) 16년(서기68년) 8월 갈사국왕 도두(都頭)가 나라를 고구려에 바치고 항복함으로서 갈사국은 없어집니다.
단재 신채호는 이 갈사국이 바로 가섭원부여라고 주장합니다
(조선상고사 제4편 제2장). 이 주장은 신빙성이 별로 없습니다.
다파나(多婆那)국
다파나국(또는 용성국(龍城國)은 신라의 4대 탈해왕의 고국이라 합니다.
다파나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데 그나라의 함달파왕이 여국(女國)왕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 7년만에 낳은 알을 불길하다 하여 바다에 버렸더니 서기 21년에 신라까지 흘러와서 나온 것이 탈해라 합니다.
왜(큐슈섬)의 동북쪽 1천 리에는 뭐 별 거 없는데, 동북쪽을 반대로 서남쪽으로 보아서 다파나국은 인도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래 참조만 하세요. 그저 주장입니다
http://zine.media.daum.net/mega/newsmaker/200608/11/newsmaker/v13661659.html
고구려의 협보는 오이, 마리와 함께 주몽을 따라 고구려를 건국한 개국공신입니다.
주몽의 아들 유리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는데, 고구려사를 읽어보면 유리명왕은 성미가 옹졸하고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창업자의 아들이다.
유리왕 22년 10월에 서울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11월에 왕이 멀리 사냥을 나가서 5일이나 돌아가지 않자 협보가 왕에게 간언합니다.
<수도를 옮긴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백성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도 못하고 불안해하는데, 임금께서는 마땅히 정치에 신경을 써서 백성을 안심시키고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지 않고 사냥에 빠져 오랫동안 수도를 비우니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이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왕은 이 말에 화가 났습니다.
대보 벼슬에 있던 협보를 왕실의 정원지기를 맡게 하니 협보가 화가 나서 '한(韓)의 남쪽(南韓)'으로 가버립니다. 한의 남쪽이라면 남해안 지역이군요. 이후 협보에 대한 기록은 더 나오지 않습니다.
협보와 다파나국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도 없고요.
고구려의 건국은 서기전 37년이니 그때에 협보의 나이를 20으로 하면 협보가 고구려를 떠난 때인 서기 3년에는 협보가 50대의 아직 팔팔한 나이라 한의 남쪽에 가서 새 나라를 세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전혀 없으니 역사를 무턱대고 추측만 해서는 안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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