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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설화

지식창고지기 2009. 7. 4. 19:01

박제상 설화

 

17대 임금 내물왕 36년(391), 왜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왔다. 왜국의 사신들은 내물왕을 보고 아뢰었다.
"저희 나라 임금님이 대왕의 신성하시옴을 들으시고서 저희들로 하여금 백제의 죄과를 대왕께 성토하라 하셨습니다. 대왕께선 왕자 한 분을 보내시어 저희 나라 임금님에게 성의를 보여주소서."
이에 내물왕은 셋째 왕자 미해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그때 미해왕자의 나이 겨우 열 살이라 언어 행동에 아직 부족한 점이 있었으므로 측근에 있는 신하 한 사람을 부사로 딸려보냈다. 왜왕은 답례차로 온 사신 미해왕자를 불모로 억류하고서 30년이 지나도록 보내주지 않았다.
내물왕의 다른 왕자 눌지는 신라 제19대 왕으로 올랐다. 그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419)에 고구려의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어 왔다.
"저희 나라 임금님이 대왕의 아우 보해의 뛰어난 지혜와 재주를 들으시고 서로 친분을 두고 지내기를 원하시어 일부러 저희들을 보내어 간청하십니다."
눌지왕은 그러잖아도 노상 국경을 침범해 오는 고구려와는 화친을 강구하고 싶었던 참이라 고구려 사신의 말을 듣고는 여간 다행하게 생각지 않았다. 왕은 곧 화친의 뜻을 알리고 그의 아우 보해를 고구려로 떠나게 했다. 측근에 있는 신하 김무알을 보좌관으로 삼아 함께 보내었으나 고구려의 장수왕 역시 보해를 억류하고서 돌려보내 주지 않았다.
어느덧 왕이 즉위한 지 10년이 지났다. 세월이 갈수록 눌지왕의 마음 한 구석은 불모로 잡혀 있는 두 아우의 일로 하여 더욱 아팠다. 생각하면 미해가 왜국에 억류된 지는 이미 서른여섯 해째로 접어들고, 보해가 고구려에서 억류된 지도 벌써 여덟 해째나 되었다.
어느날 왕은 조정의 뭇 신하들과 그리고 나라 안의 이름난 호걸이며 협객들을 궁중에 불러 모아서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술잔이 서너 차례 돌아가고 음악이 마침 연주되고 하여 연회가 무르익어 갈 참이었다. 이때 왕은 주루룩 눈물을 흘리며 만좌를 보았다.
"지난날 나의 아버님께선 진심으로 백성들의 안녕을 우려하시었소. 그리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 왜국으로 보내시고는 끝내 그 아들을 다시는 못 보신 채 돌아가셨소. 또 내가 즉위한 이래 이웃나라 군사들이 매우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더니 고구려가 유독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해왔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고서 친동생을 고구려로 보냈소. 그랬더니 고구려가 또한 억류하고서 이제토록 돌려보내주지 않고 있소. 내가 비록 부귀로운 자리에 올라 있으나 하루도 이 두 아우가 잊혀지는 날이 없고, 마음에 애통하지 않는 날이 없소. 만약 두 아우를 만나 함께 선왕의 혼령앞에 나아가 사과를 드리게 될 수만 있다면 백성들과 그리고 그대들에게 그 은혜를 꼭 갚으리다. 누가 이 일을 꾸며 수행할 만한 사람이 없겠소?"
왕의 호소를 숙연히 듣고 있던 뭇 신하들은 한결같이 아뢴다.
"이 일은 진실로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이고서야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 삽라군(지금의 경주 양산)의 태수인 제상이 가장 적임자로 여겨집니다."
왕은 제상을 불러들여 그의 의향을 물어 보았다. 제상은 왕에게 재배하고 말했다.
" 임금에게 근심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 신하가 명예롭지 못하고, 임금에게 명예롭지 못한 일이 있다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일의 어렵고 쉬움을 따진 뒤에야 행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충성이 아니요, 죽을지 살지를 헤아려 본 뒤에야 움직인다면 그것은 용기의 결여입니다. 신이 비록 못난 사람이긴 하오나 명을 받들어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눌지왕은 제상의 그 충성과 용기를 거듭 찬미했다. 잔을 들어서 술을 나누고 왕과 신하는 손을 맞잡고 작별했다.
제상은 왕에게 명을 받은 즉시 동해의 물결을 헤치고 북쪽으로 뱃길을 잡았다. 고구려의 땅에 도착하자 제상은 변장을 하고 잠입해 들어가 보해가 머물러 있는 처소를 찾아갔다. 보해를 만나 고구려 탈출의 계획을 짜고, 그리고 그 탈출의 시일을 서로 기약해 두고서 제상은 먼저 5월 보름날 고성 항만에 돌아와 배를 대어놓고 기다렸다.
제상과 기약해 둔 시일이 닥쳐오자 보해는 병을 핑계로 며칠을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밤중에 고구려 왕성을 빠져나와 고성 바닷가를 향해 내달렸다. 장수왕은 보해의 도망을 알자 수십 명의 군사들을 보내어 곧 추격케 하였다. 그러나 보해는 고구려에 억류당해 있을 때에 항상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왔으므로 그를 쫓던 고구려의 군사들은 동정하여 살려보내 주고 싶었다. 그들은 일제히 화살에 살촉을 빼던진 뒤에 보해를 겨누어 쏘아댔다. 보해는 마침내 죽음을 면하고 그리웠던 고향 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만나게 되자 바다 건너 왜족의 나라에서 오랜 세월을 망향의 슬픔에 젖어 있을 그의 다른 아우 미해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 왔다.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마음으로 왕은 눈물을 흘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마치 한 몸에 한 쪽 팔만 있는 것 같고, 한 얼굴에 한 쪽 눈만 있는 것 같구려. 비록 한 쪽은 얻었으나 다른 한 쪽이 없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소?"
제상 역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엔 또 하나의 결심이 섰다. 제상은 왕에게 하직을 고하고 곧장 말을 몰았다.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율포(밤개) 바닷가로 내달렸다.
제상의 아내는 그의 남편이 왜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대궐에서 바로 율포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역시 말을 달려 뒤쫓았다. 그녀가 율포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그때 제상이 탄 배는 이미 한 바다로 둥둥 떠가고 있었다. 제상의 아내는 목이 찢어져라 애절히 부르짖었다.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는 아물아물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사라져 가버렸다.
제상은 왜국에 상륙하자 일단 거짓말을 했다.
"나는 신라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라 왕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나의 부형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쳐 왔지요."
왜왕은 제상의 말을 곧이듣고 그에게 집을 주어 안주케 했다. 제상은 왕자 미해와 접촉하게 되자 항상 그를 모시고 바닷가를 노닐면서 고기잡이며 새 사냥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매양 잡힌 고기며 새 따위를 왜왕에게 바치니왜왕은 즐거워하며 제상에게 의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마침 새벽 안개가 자욱이 끼인 날을 만나자 제상은 미해에게 나아갔다.
"이런 날이 꼭 좋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떠나야지요."
함께 탈출해야 한다는 미해의 말에 제상은 답변했다.
"만약 저까지 가게 되면 왜인들이 알아채고 뒤쫓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 머물러 저들의 추격을 막겠습니다."
미해는 슬픈 마음이 되었다.
"지금 나는 그대를 친 부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그대를 이 적지에 버리고 나만 혼자 돌아갈 수 있겠소?"
제상은 말했다.
"저로선 이곳에서 공을 구해내어 고국에 계신 대왕의 정회를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어찌 살기까지 바라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제상은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따라 올리고, 그때 왜국에 와있던 신라 사람 강구려를 수행시켜 미해를 떠나게 했다.
미해를 도주시킨 뒤 제상은 미해가 거처하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날이 훤히 밝자 미해를 시중들던 왜인들이 미해를 살피러 왔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오려 하자 제상은 나가 그들을 제지시키면서 말했다.
"어제 사냥으로 좀 뛰어다니시더니 몹시 피곤하신가보오. 그래 아직 기침을 못 하고 계시오."
한낮이 지나 해가 기울 때가 되어도 미해가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그들 시종들은 아무래도 수상쩍어 다시 와서 제상에게 물었다. 그때서야 제상은 태연히 대답했다.
"미해공께선 떠난 지가 이미 오랠세."
시종들은 깜짝 놀라 왜왕에게 달려가 고해 바쳤다. 왜왕은 기마병들을 시켜 미해를 뒤쫓게 했다. 그러나 끝내 미해를 붙잡지 못했다. 그러자 왜왕은 제상을 가두어 놓고 물었다.
"너는 어째서 너희 나라 왕자를 빼보냈는가?"
"나는 신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는 아니다. 이제 내 나라 임금님의 뜻을 이루려 했을 뿐인데 내 구태여 그대에게 무엇을 말하랴?"
왜왕은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네 이미 나의 신하가 된 마당에 신라의 신하라고? 신라의 신하라 굳이 주장해 보라. 오형을 갖추어 다스려 주겠다. 그러나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내 반드시 후한 작록을 너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
왜왕의 말을 제상은 받아넘겼다.
"
내 차라리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너희 왜국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신라의 매질은 받을지언정 너희 왜국의 작록은 내 받고 싶지 않다."
왜왕은 서슬이 등등해졌다. 형관을 시켜 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겨내게 하고, 갈대를 베어 낸 뒤의 그 날카로운 끄트머리 위로 제상을 걷게 했다. (지금도 갈대 끝에 혈흔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그것을 제상의 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는 제상을 향해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신라의 신하다."
왜왕은 이번엔 철판을 달구어 제상으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게 하고 물어보았다.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신라의 신하다."
왜왕은 드디어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불태워 죽였다.
한편 미해는 신라 해안에 상륙하여 먼저 강구려를 보내어 자기의 환국을 궁중에 알렸다. 눌지왕은 놀랍고 기뻤다.
궁중의 모든 관리들에 명하여 굴헐역(지금의 울산 근처인 듯)에 나아가 미해를 맞게 하고, 왕 자신도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 나가 맞아들였다. 대궐로 돌아와 연회를 베풀고, 그리고 신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는 한편 제상의 아내에겐 국대부인(國大夫人)이란 작위를 내리고 그의 한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맞았다.
제상의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곧잘 옛 주가(周苛)의 일에 견주어 말한다. 주가는 한나라 유방의 신하였다. 그는 영양 땅에서 초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었다. 초왕 항우는 주가에게 말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만호를 가진 제후로 삼겠다."
주가는 오히려 항우를 꾸짖고 끝내 굽히지 않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는데, 제상의 충렬은 이 주가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들 했다.


 

● 박제상 부인은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다

치술령.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해발 765m의 산이다. 망부석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앞서 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 뒤쫓아 갔으나 끝내 그 남편 제상을 따라잡지 못한 채 망덕사 절 문 남쪽의 모랫벌에 누워 길게 울부짖었다. 그리하여 그 모랫벌을 이름하여 장사(長沙)라고 했다. 친척 두 사람이 겨우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펄썩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부인이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버린 곳,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름했다.
오랜 뒤에도 부인은 그 남편에의 그리움을 억누를 길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 고개 위에 올라가서 바다 건너 아득히 왜국을 바라보며 힘이 다하도록 통곡하다 그대로 죽어서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 부인은 치술신모가 되었다. 현재 사당이 남아 있다.

 

● 한이 맺힌 사람은 왜 죽어서 돌이 될까?
죽어서 돌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흔히 이런 류의 설화에서 돌 화소(話素)가 등장한다. 설화에서 화석(化石) 모티브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돌이란 화소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찬양받을 만한 찬양물'이란 속성이 있다. 이 기념물을 보고 부인의 정열을 찬양한 사람들은 당대 신라의 백성들일 것이다. 더구나 이 망부석의 연원 속에는 충신 박제상의 충의로운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음으로 해서 설화적 감동과 비장미를 고양시킨다. 따라서 백성들은 그 장소 그 자리에 이런 사연을 기리는 기념비에 해당하는 자연석 하나쯤에 그들의 소중한 가치를 표상시키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망부석이 설화적 화소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설화는 이처럼 자연발생적 기대와 염원이 언어적으로 형상화되는 자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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