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이동 분포와 특점

지식창고지기 2009. 7. 9. 07:37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이동 분포와 특점

 

 

동북아개발현장

조선민족은 동북아지역의 주요한 토착민의 하나로서 조선반도에서 발원했다. 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의 조선인들은 륙속 중국, 구쏘련, 일본 등 주변나라로 대량으로 이동하여 점차 온 동북아에 널린 위대한 민족으로 되였다. 초보적 집계에 따르면 목전 동북아지역에 있는 조선족은 약 6,780만인으로서 동북아 총인구의 24%좌우를 차지한다. 그중 조선인구가 2,250만이고 한국인구가 4,310만(조선과 한국은 모두 단일 민족국가이다)이고 중국조선족이 192만이며 일본경내의 조선족이 67만, 구쏘련의 조선족이 약 40만이다.


동북아정세가 완화되고 각 나라지간의 관계가 완벽화됨에 따라 동북아 조선족사이의 래왕이 날로 밀접해지고 있다. 이는 동북아지역 경제협력발전에 추진역할을 놀고있다. 본문은 조선족의 이동과정을 회고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의 분포 및 그특점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려 한다.
    
1. 조선족의 이동


목전 동북아지역 조선족의 분포는 력사적으로 형성된것이며 19세기중엽부터 시작된 몇차례 조선족 대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조선족이 언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는가, 어떤 시대배경과 사회원인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연구하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

동북아 조선족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족의 이동은 대체적으로 3개 단계를 거쳤다. 제1단계는 19세기중엽으로부터 1910년 《일한합병》까지로서 조선족은 주로 중국 동북으로 이사왔다. 제2단계는 《일한합병》으로부터 1931년의 《9.18》사변전야까지이고 제3단계는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제2차대전종말까지로서 동북아지역의 조선족분포가 거의 형성되였다.

제1단계 조선족의 이동과 우리나라 동북에 분포된 상황을 보면 1906년까지 조선족은 서쪽의 안동, 흥경(興京), 류하로부터 돈화 일선의 남부지역에 국한되여 있어 서북쪽으로는 휘발하(煇發河), 동쪽으로는 녕고탑(寧古塔)과 목릉하(穆稜河) 일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에는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로야령(勞爺岺)을 넘어 목단강연안과 삼성(三姓)지방 즉 동북경내지로 점차 이주해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북에 이주해온 조선족인수가 부쩍 늘어났다. 1894년까지만 해도 도합 7만 8,000인이던 조선족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9,000인으로 늘어났다.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1904년의 5만여으로부터 1909년의 18만 4,867인으로 늘어나 당지의 만족, 한족을 초과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에 조선정부를 강압하여 《한일보호협의》를 체결한 뒤를 이어 1910년에 또 조선매국노 리완용 등 사람과 결탁하여 비밀리에 《한일합병조약》을 맺어 조선을 완전히 먹어버렸다. 망국노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의 조선인민들이 다투어 동북아 여러 나라로 이주해갔다. 이는 조선족이 동북아 여러나라로 이주해간 제2단계이다. 이시기는 주로 정치원인으로 하여 이주해갔다. 조선족은 그냥 우리나라 동북으로 이주해오는 동시에 다른 나라로 이주해가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이태사이에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6,354인 된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압록강북쪽에 이주해간 조선족이 9만 8,657인 된다. 도문강북쪽에 이주해간 9만 3,883인까지 합하면 도합 19만 2,540인이다. 특히는 1919년 《3.1》운동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과 반일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1920년의 45만 9,400여인으로부터 1930년의 63만 982인으로 늘어났다. 그중 연변 4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약 40만 9,402인으로서 64.9%를 차지하고 안동과 통화 지역에 5만 545인으로서 8% 차지하고 봉천과 철령 지역에 9만 7,169인으로서 15.4% 차지하고 길림과 장춘지역에 2만 4,157인으로서 3.8% 차지하고 북만(흑룡강에 속함)에 4만 4,463인으로서 7% 차지하고 려순, 대련 지역에 1,747인으로서 0.27% 차지하고 기타 지역이 약 1,000인좌우였다. 우의 수자에서 볼수 있다싶이 길림성 연변지역은 이미 우리나라 조선족의 주요한 집거구로 되였으며 료녕성도 조선족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흑룡강은 장성세를 이루었다.
    
조선에서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15년간(1910-1925) 조선측에서 해외로 이주해간 난민이 30만호를 초과했다. 1919년까지 약 10여만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 토목건축과 석탄채굴 등 로동에 종사하였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자료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25년까지 만족, 몽골족 지역과 씨비리아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족이 5만 6,000인이며 22만 5,000여인이 연변지역에 이주해갔고 1926녀부터 1930년 사이에 또 10여만인이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갔다. 1922년 12월 구쏘련 극동지역의 외국무장간섭이 철저히 분쇄되고 쏘베트공화국이 창건됨에 따라 구쏘련에 이주해간 조선족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구쏘련측에서 통계한데 따르면 1926년 구쏘련 씨비리아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이미 8만 7,000여인에 달했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은 점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을 침화전쟁의 공고한 후방과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1936년 4월 20년사이 100만호 500만인 일본이민을 이민하려는 이민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파산된 농민을 강압하여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 《만족조선족개척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민사업을 관리, 사후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가 희소한 흑룡강성북부는 일본이 강제이민을 실행한 주요지역의 하나이다. 1940년 한번에 눈강, 룡진 등지에 이주해간 조선족만도 2,810호나 된다. 1941년이후 일본식민당국은 강북지역의 신이민자들을 《이민개척단》으로 만들어 북만과 내몽골지역에로 내몰아 논을 풀게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동북으로 강제이민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이 3만 856호에 14만 7,744인 된다.
    
일본의 강제이민으로 하여 중국 동북의 조선족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 3,015인으로 껑충 올라 1932년의 67만 2,649인에 비해 2.2배 늘어났다. 이 시기 일본의 강제이민 때문외에도 자발적으로 중국에 온 사람도 있다. 례를 들면 1937년 《7.7》사변전야에 우리나라 관내로 들어온 약 3만여명 조선족들은 다수가 반일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단체의 책임자이다. 또 장사군도 있고 다은 원인으로 하여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들은 화북, 화중, 화남 등 지역에 분포되여있었다. 몇년간 급격히 늘어나 1945년까지 우리나라 관내 조선족이 10여만인에 달하였는데 그중 화북지구에 좀 많았다.


재일 조선족은 대부분 제2차세계대전기간 일본에 《강제징용》되여간 로력자들이다. 일본식민당국이 공포한 수자에 따르면 침화전쟁발동이래 일본식민당국에 끌려 참군한 조선인은 36만 4,000여인으로서 그중 태평양전쟁시기(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참군한 사람만 해도 11만 6,294인이다.또 600만 조선인이 로력자로 끌려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전쟁가운데서 목숨을 잃었거나 제명에 죽지 못했다. 적지 않은 《행운자》들은 또 일본으로 강압적으로 끌려갔다. 1945년 일본투항때 재일조선족은 약 200만인좌우였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르면 1939년 구쏘련경내에 거주한 조선족인구는 18만 2,300여인으로서 1926년에 비해 1.1배 늘어났다. 《9.18》사변후 쏘련에 이주한 조선족들은 일본식민주의통치와 일본의 강제이민에 못이겨 구쏘련에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다. 해당 서적, 기록에 따르면 1945년 8월 조선광복까지 세계 각국에로 이주해간 조선족은 무려 당시 조선반도 총인구의 15%좌우 차지하는 400만인이나 된다. 그중 중국동북에 정착한 사람이 대략 160만, 중국내지에 대략 10만, 구쏘련 씨비리아와 극동 지역에 대략 20만, 일본에 대략 210만, 기타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략 3만인 이주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종말후 조선족의 대량적 이주는 거의 끝났다.
    
2.조선족의 분포 및 그 특점


조선족의 이주과정은 곧 조선족의 분포과정이다. 동북아지역의 조선족은 이주, 재이주, 분포, 재분포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일본투항이후 미군이 일본한국을 점령하였다. 그때 미군점령군당국은 주로 재한국일본교민과 재일본한국교민 문제를 처리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전후 재한일본교민은 거의 귀국하였다. 그때 상당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조선반도로 되돌아갈것을 요구했었다. 1945년 10월부터 1947년 9월까지 이태사이에 미국은 조선남부로 재일교포 110여만인을 되돌려보냈다. 그외 약 70~80만인은 그냥 일본에 남아 있었다. 이부분 사람들의 《법률지위》문제에 대하여 한국일본은 장기간 단판하여 왔으나 1965년 쌍방이 《관계정상화》를 실현해서야 해결은 받았다. 재일조선족들은 일본경내에 쫙 널려 있는데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가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이를테면 돗또리, 오까야마, 야마구찌, 후꾸오가, 나가사끼, 가나자와, 후꾸이, 이시까와, 도야마, 니이가다, 아끼다 등지이다.
    
구쏘련 인구통계에 따른면 전후 구쏘련의 조선족인구는 1959년에 31만 3,000여인; 1970년에 35만 7,000여인; 1979년에 38만 9,000여인이다. 구쏘련과학원 민족연구소의 쓰 이 쁘로끄의 저작《세계인구》에 따르면 1983년 재구쏘련 조선족인구는 40만인에 달한다. 1970년의 통계에 따르면 쏘련의 조선족이 로씨야에 10만 3,100여인, 까자흐스딴에 8만 5,000여인, 우즈베끼스딴에 14만 7,500여인, 끼르끼쯔끼스딴에 9,400여인, 따쥐끼스딴에 8,400여인, 뚜르메니끼스딴에 3,500여인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민족압박을 제거하고 민족평등을 실현하고 또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했기에 조선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적극 뛰여들었었다.1953년(제1차인구조사) 중국족선족의 인구는 112만 569인이고 1982년(제3차인구조사)에는 176만 5,204인이였다. 1982년은 1953년에 비해 57.5% 장성했다.
    
우리나라 조선족인구는 주로 동북3성과 내몰골자치구에 분포되여있다. 1982년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도합 173만 3,970인(료녕성 19만 8,252인, 길림성 110만 4,074인, 흑룡강성 43만 1,644인)으로서 전국 조선족총수의 98.2%를 차지했다. 그중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인구는 75만 4,567인으로서 전국조선족인구의 42.77%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1만 7,580인, 기타 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1만 3,367인이다.
    
1990년 제4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국 조선족인구는 192만 597인으로서 전국 총인구의 0.169%를 차지, 그 절대치는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17위를 차지했다. 제1차인구조사때부터 제4차인구조사때까지 37년간 조선족인구의 평균성장률은 1.5%로서 전국 평균장성속도인 1.8%보다 낮았다.
    
동북3성의 조선족인구는 186만 4,760인(그중 료녕 23만 378인, 길림 118만 1,964인, 흑룡강 45만 398인)으로서 전국조선족총인구의 97.09%를 차지했다. 내몽골자치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하고 기타성, 구의 조선족인구는 2만 2,641인으로서 전국의 1.178%를 차지했다. 동북3성에 조선족이 1만인이상인 시, 지구(인구에 따라 배렬)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길림성 길림시, 흑룡강성 목단강시, 길림성 통화지구, 흑룡강성 송화강지구, 료녕심양시, 흑룡가성 가목사시, 료녕성 무순지구, 흑룡강성 계서시, 길림성 백산시, 료녕성 철령지구, 흑룡강성 이춘시, 료녕성 본계시 등 19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1990년 전 주 조선족인구는 82만 1,479인으로서 전 주 인구의 39.5% 차지, 전국 조선족총인구의 42.77%이다. 전 주 8개 시, 현의 조선족인구분포(인구에 따라 배열)를 보면 룡정시 18만 3,994인, 연길시 17만 7,547인, 화룡시 13만 6,894인, 훈춘시 9만 2,100인, 왕청현 8만 5,049인, 도문시 6만 9,166인, 안도시 2만 4,745인이다. 다른 한 조선족자치지방인 장백조선족자치현의 1990년 조선족인구는 1만 4,508인으로서 전 현 총 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이상 분석으로부터 볼수 있다싶이 동북아지역 조선족 인구분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점이 있다.
    
1.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였다.


중국조선족은 98%이상의 인구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집중되여있고 구쏘련의 조선족은 99.5%의 인구가 로씨아와 중아세아 4개 나라에 분포되여있다. 재일조선인은 주로 서해안지역과 혹까이도에 분포되여있다. 조선족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여 있는것은 조선족의 벼농사를 짓는것과 밀접한 련관이 있다. 조선인들은 이주해들어 온후 논 관개와 개발에 유리한 대소하천류역과 평원지역을 찾아 자리를 잡았던것이다. 비교적 집중하여 거주했기에 조선족들은 민족 향심력과 응집력이 매우 강하다.
    
2.대부분이 변계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된 지구, 시, 현은 대다수가 중, 로, 조 3국변계에 위치했다. 이를테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 로, 조 3국변계에,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집안현, 료녕성의 단동시는 중조변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 가목사시, 계서시와 내몽골자치구, 만주리시는 중로변계에 위치해있다. 상술한 지역의 조선족인구는 동북조선족총인구의 62%좌우 차지한다. 조선족은 또 다수가 철도연선과 철도와 가까운 주위에 거주, 인구는 변계로부터 내지로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구쏘련의 조선족은 당초 구쏘련의 극동지역에 분포되여있었는데 후에 우리나라와 린접한 지역과 중아시아지역에로 확장되였다. 그것은 10월혁명후와 제2차세계대전전야에 국제국내형세의 핍박에 못이겨 대량의 조선족들이 구쏘련의 내지로 재차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 로, 조 3국 조선족들이 이웃하여 가까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또 바다를 사이두고 일본과 마주하고있기에 변계 민간사이의 상호래왕은 100여년 력사를 갖고있다. 구역경제협력이 발전됨에 따라 각국 조선족지간의 련계는 더한층 발전하게 될것이다.
    
3.특수한 인적관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아직도 교포, 교포가족, 친족들이 5,000여인 있다. 조선족가운데는 조선, 구쏘련, 일본 등 나라인들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중, 로, 조 3국 교접점에 있는 훈춘시에는 조선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만 5,000여인, 일본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이 1,000여인, 로씨야교포가 5,000여인 된다.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이런 특수한 인적 관계는 구역 경제협력발전을 추진하는 홀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4.전문가 학자 사회명인과 갑부들이 적지 않다.


구쏘련의 조선족학자가운데는 학술계에서 명망이 높은 원사(院士)와 통신원사들이 있다. 이를테면 막씸 빠블로위치 김은 구쏘련문화를 전공한 력사학자로서 1979년 구쏘련과학원 원사칭호를 수여받았다. 끄오끼 빼뜨로위티 김은 력사학자이자 교수로서 1976년 통신원사 칭호를 받았다. 그는 구쏘련과학원 동방학연구소 소장대리이며 《구쏘련대백과전서》(1980년 로어판)에 수록되였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 가운데서 각종 전문가인재가 도합 5만 3,528명 되는데 그중 고급직함을 갖고있는 분만도 2,281명 된다. 어떤분들은 과학연구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어 국내외의 공인을 받고있다. 길림성에는 박문일, 정판룡, 조봉빈 등 조선족박사생도사와 같은 저명한 전문가, 학자들이 나타났다.


목하 동북아 각국 조선족지간의 과학기술, 문화 교류의 발전은 구역경제협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길림성 민족연구소 차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