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고구려인 숨결 느껴지는 '바람의 나라'

지식창고지기 2009. 7. 31. 09:32

[경남일보]

고구려인 숨결 느껴지는 '바람의 나라'

세계 명산 트레킹 백두산과 고구려 답사기 <1>

강동욱 기자  

 경남일보는 지난 9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세계 명산 트레킹으로 고구려 유적지 그리고 백두산을 답사했다. 이번 답사에 강동욱 문화 전문기자가 동행을 했다. 이에 본보는 답사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주>
 
 ▲‘바람의 나라’ 무대 ‘국내성’


 이번 답사의 화두는 역시 ‘주몽’과 ‘바람의 나라’였다.
 4박 6일간의 강행군 속에 가슴 깊이 박힌 것은 드넓은 만주 벌판을 거침없이 말 달리던 주몽과 그 후예들의 모습이었다.


 20일 오전 7시 30분 단동에서 압록강을 따라 고구려 국내성으로 들어갔다. 단동과 맞닿은 곳에 위화도(威化島)가 있었다. 역사 속에서만 들어왔던 위화도.


 조선 건국의 출발점이었다. 이성계의 회군을 한번도 부정하지 않았던 우리들은 순간, “이성계가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으로 말을 달렸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공유했다. 이때 고려 군사의 말머리가 요동으로 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423년간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을 찾아가는 우리들 마음 뿐이었겠는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만주를 무대로 일제와 맞섰던 독립투사들도 다같은 염원을 가졌으리라고 생각을 해본다.


 단동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국내성에 도착했다.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을 중국사람들은 집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집안은 길림성(吉林省) 남부의 압록강 변에 위치한 도시이며, 바로 강 건너에 북녘 땅 만포가 바라 보이는 곳이다. 고구려 도읍지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427년)까지 약 420여년 동안 고구려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며, 국내성 환도산성 광개토왕비 장군총 대왕릉(광개토왕릉)등이 있다.


 압록강을 경계로 지금은 두 나라가 되었지만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했을 땐 모두 한나라 한 백성이었다. 압록강 건너 만포진을 바라보며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우리들 모습을 고구려 사람들이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환도산성(丸都山城)을 오르면서 옛 고구려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남문으로 올랐는데, 어김없이 고구려 성의 특징인 옹성 형태였으며, 유사시 수도 근처로 도읍지를 옮겨 적군과 장기전을 펼칠 수 있는 수비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준 최선생(기자는 그를 가이드라 부르지 않고 최 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동북 사범대학을 나온 고구려 연구회 강사였다)은 병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였던 음마지(飮馬池)를 소개했다. 지금은 늪지대인 것처럼 보이는 음마지(飮馬池)는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의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다.


 대무신왕이 누구인가. 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바람의 나라’주인공이 아닌가.  ‘바람의 나라’이야기에 일행들은 귀를 세우며 설명을 들었다.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를 비롯해 병영터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환도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고구려 무덤군을 답사했다. 무덤들은 거의 도굴이 된 상태였다. 경주 왕릉만 보아온 일행들에게는 색다른 느낌을 전해 주었다. 최선생의 제지에도 무릅쓰고 우리는 관리인 몰래 단체촬영을 해 흔적을 남겼다.


 장수왕릉으로 향했다. 장군총으로 알려진 석총으로 우리들 눈에 익은 왕릉이었다.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수왕릉을 오르면서 잠자는 장수왕의 영혼을 깨우지 않을까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곧이어 광개토대왕비를 보는 순간 탄성이 먼저 나왔다. 고구려사에 비교적 해박한 최선생은 열심히 설명을 하지만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비석을 위 아래로 훑어보고, 둘러보고 그리고 느낄 뿐이었다. 광개토대왕 릉까지 둘러보고 이날 목적지인 통화(通化)로 향했다. 비교적 짧은 거리인 2시간을 달리니 해는 이미 저물고 어둠이 고구려를 감추고 말았다.
 
 ▲ 졸본성에서 주몽 숨결을 느끼다


 22일 오전 7시 30분 이번에는 주몽이 고구려를 창업한 졸본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몽과 송양왕이 나라를 걸고 활쏘기를 하였다는 비류국을 보고 곧장 졸본성으로 향했다. 요녕성 환인현 오녀산성이 바로 졸본성이다. 먼발치서 바라본 졸본성은 천연의 요새로 기원전 37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역사적인 현장이다. 졸본성에는 고구려 유적이 아직도 산재해 있었다. 특히 고구려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집터에는 온돌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고구려 성터 흔적을 손으로 어루만지니 고구려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아니 졸본성에서 멀리 비류수를 바라보고 있는 동명성왕의 늠름한 모습이 눈 앞에 먼저 떠올랐다. 말을 탄 동명성왕은 멀리 비류수를 바라보면서 웅대한 꿈을 펼치고자 했을 것이다. 환인댐으로 옛날 비류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지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역사의 강 비류수를 바라보며 우리 민족의 기상을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비사성에서 연개소문을 생각하다.


 23일 오후 2시 30분 비사성에 올랐다. 대련시에 위치한 비사성은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발점이며 해안 방어의 요지였다. 성루에 올라 발해만과 황해만을 굽어보니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던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이 귓가를 스쳐간다. 연속극 ‘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의 여동생이 지키던 바로 그 성이었다.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는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산동 반도에서 해로로 평양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으므로, 중국과 여러 차례 격전이 있었던 전장터였다. 


 이번 답사에서 우리 일행들은 대련서 집안까지 무려 8시간 이상을 달려 간 길이 옛날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광활한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을 몸소 느낀 우리 일행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와 봐야 할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아들 손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유난히 많은 여행이었다며, 우리 조상들의 웅혼한 기상을 후세에 길이 전해야 할 사명감을 아울러 느낄 수 있었다는말을 남기고 역사의 땅 고구려 답사를 마무리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