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비장전> 본문 읽기 1
1. 배비장의 부임과 정비장의 이별
천지간의 인생이란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의 씨는 같겠지만 그러나 사람마다 우열이 판이하여 남자에 현인·군자와 우부·천맹이 있고, 여자에 정부·열녀와 음녀·간희가 아주 없어지는 일이 없이 대를 이어오니, 예나 이제나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은 형형색색의 사람의 성질이라 할 것이다.
사람의 성질이란 것은 살고 있는 고장의 산천이 지니는 풍치와 경치를 많이 닮게 되는 것이니,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의 사람은 성질이 순후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악한 기질이 별로 없고, 산천이 험준한 지방에서는 그대로 사람의 성질이 어리석고 둔하며 간사하고 교활하게 나는 법이다.
호남 좌도 제주군 한라산은 옛적 탐라국 주산이요, 남녘땅의 제일 명산이다. 그 험준하고 아름다운 정기가 서려서 기생 애랑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애랑이 비록 천기로 태어났을망정 그 맵시와 지혜가 누구보다 빼어났고 간교한 꾀는 구미호가 환생을 한 것인지 호색하는 사나이가 걸려들면 상투 끝까지 빠져들어 허덕이게 하는 것이었다.
한양에 김경이라는 양반이 있었다. 문필과 재능이 비범하여 십오세에 생원·진사에, 이십 전에 장원에 급제하여 제주목사를 제수받았다.
김경이 도임길에 오르고자 이·호·예·공·병·형등 육방을 선택할 때 서강 사는 배선달을 장막 안으로 불러 예방의 소임을 맡기니, 그를 높여 비장이라 하였다.
배비장은 팔도 강산 좋은 경치 안 본 데가 없으나 제주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 아직 구경을 못 하고 있던 터라 자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좋아하는 모양을 보고 아내가 주의하였다.
"제주라는 곳이 비록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긴 하나 색향이라 합니다. 그 곳에 계시다가 만약 주색에 몸이 빠져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부모님께 불효되고 첩의 신세를 망칠 것입니다."
그러자 배비장은 펄쩍 뛰었다.
"그건 염려 마오. 명심하고 절대로 계집은 가까이하지 않겠소."
배비장은 전령패를 차고 김경을 따라 떠나게 되었다. 이 때는 바로 꽃이 한창인 봄철이라. 오얏꽃, 복사꽃, 살구꽃이 만발하고 풀과 버들은 푸르고 맑은 물은 잔잔하며 사방의 풍광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배비장이 이런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사방을 두루 둘러보며 해남 땅에다다르니 새로 도임되어 오는 목사를 맞이하려고 하인들이 등대해 있었다.
사또가 하인들의 인사를 받은 후에 사공을 불러 분부하였다.
"예서 배를 타면 제주까지 며칠이나 걸리는고?"
사공이 공손히 여쭈었다.
"일기가 청명하고 서풍이 살살 불어 꽁무니바람에 양 돛을 갈라 붙여 아디에서 핑핑 소리나고, 뱃머리에서 물결 갈라지는 소리가 팔구월 열바가지 삶은 것같이 절벅절벅 소리나면 하루에 천리길도 갈 수 있고 반쯤 가다 왜풍 만나 표류하면 영국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만일 일이 틀리면 바닷물도 먹고 숭어와 입도 맞추게 됩니다."
사또가 분부하였다.
"제주에 당일로 닿는다면 상을 많이 줄 테니 착실히 거행하라."
사공이 분부를 받고 순풍을 기다리는데 마침 날씨가 청명하여 서풍이 솔솔 불어왔다. 그러자 사공이 소리를 높여 아뢴다.
"사또 배에 오르시오."
사또 일행이 배에 오르자, 도사공이 키를 들고 역군은 아디 틀며 돛을 달아 바람에 맞추어 배를 내어 망망대해로 나갔다. 그리고 배 위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마다 봄술에 취하여 상하가 같이 즐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가 이윽고 추자도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난데없이 태풍이 일어나고 사면이 침침해지더니 물결은 찰랑거리고, 태산 같은 물굽이가 덮치면서 우러렁 콸콸 뒹굴어 펄펄 뱃전을 때리고, 바람에 배 위의 띳집도 조각조각 흩어지고, 키는 꺾이고, 용총줄 마룻대가 동강나고, 고물이 번쩍 들리면 이물이 수그러지고, 이물이 번쩍 들리면 고물이 수그러져서 덤벙 뒤뚱 조리질치니, 사또는 어리둥절하고 비장과 하인은 분주하게 서둘렀다. 사또가 그런 중에도 노하여 사공을 꾸짖었다.
"이놈, 양반은 물길에 익숙지 못해서 떨지만, 물길에 익은 놈이 그렇게 떠느냐?"
사공이 송구스럽게 말하였다.
"어려서부터 허다한 바다를 다 다녔지만 이런 고생은 처음이오. 사해 용왕이 외삼촌이라도 살아나기는 아주 어렵겠소. 살아나려면 이 물을 다 마셔야 하겠으니 뉘 배로 이 물을 다 먹겠소?"
모든 사람이 다 울고 비장들도 울었다. 그러나 사또의 명으로 고사를 지내고 나자 이윽고 달이 오르며 물결이 자니 배는 순조롭게 제주성에 다다르게 되었다.
환풍정에서 배를 내려 사면을 둘러보니 제주에서 제일 경치 좋은 망월루이다.
망월루를 살펴보니 어떤 청춘 남녀 한 쌍이 서로 잡고 이별이 안타까워 한숨쉬고 눈물짓는 것이었다. 이는 구관 사또가 신임하던 정비장과 수청 기생 애랑의 애타는 이별 장면이었다.
정비장이 애랑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서울 태생 소년으로 제주 물색 좋단 말에 마음이 쏠려 이 곳에 와 아리따운 연분을 너와 맺고 세월을 보낼 적에 맵시 있는 너의 태도, 목청 맑은 네 노래에 고향 생각 잊었건만 애닯구나 이별이야! 푸른 강 맑은 물에 원앙새가 짝을 잃은 격이로구나. 사람 없는 높은 산 깊은 골에서 둘이 만나 희롱하다 이별하는 것이로구나. 이별이야, 이별이야, 애닯고나 이별이야! 애랑아, 부디 잘 있거라!"
다음은 애랑의 거동이다. 없는 슬픔을 짜내어 고운 얼굴에 웃는 듯 찡그리는 듯 길게 한숨지며 하는 말이,
"여보 들어 보시오. 나으리가 이 곳에 계시는 동안은 먹고 입고 살기에 걱정 없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구에게 의탁하라고 하루 아침에 떠나가십니까?"
"그대는 염려 마라. 내 올라가더라도 한동안 먹고 쓰기에 넉넉할 만큼 볏섬을 풀어 주고 갈 테니."
그리고는 정비장은 창고지기에게 분부하여 볏섬을 풀어 애랑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 밖에도 애랑에게 준 갖가지 재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에 애랑은 눈물을 이리저리 씻으면서 흐느끼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주신 기물은 천금이라도 귀하지 않습니다. 백년을 맺은 기약이 한판의 부질없는 꿈이 되니 그것만이 애닯을 뿐입니다. 나리가 소녀를 버리고 가시면 백발 부모 위로하고 아름답고 귀여운 처자 만나 그리고 그리던 정회를 풀 때 소녀 같은 보잘것없는 첩이야 다시 생각이나 하시겠습니까? 애고 애고 슬퍼라."
정비장은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네 말을 들으니 정이 간절하구나. 내 몸에 지닌 노리개를 네 마음대로 다 달라고 해라."
그렇지 않아도 정비장을 몰오른 송기 벗기듯 하려는 참인데, 가지고 싶은 대로 주마고 하니 애랑이년은 불한당 같은 마음에 피나무 껍질 벗기듯 아주 홀랑 벗겨 버리려고 하였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갓두루마기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면 나으리님 가신 후에 그 갓두루마기 한 자락은 펴서 깔고 또 한 자락은 흠썩 덮고 두 소매는 착착 접어 베개삼아 베고 자면 나으리 품에 누운 듯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은 양피 갓두루마기를 훨훨 벗어 애랑에게 주었다.
"이 옷을 깔고 덮고 베고 잘 때 부디 나를 잊지 마라."
애랑이 또 말하기를,
"나으리님 들으시오. 나으리 가신 후 겨울이 와서 추운 바람이 불 때 귀시려 어떻게 살겠습니까? 나으리 쓰신 돼지껍질 휘양을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면 두 귀에 덥석 눌러 쓰고 땀을 흘릴 테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비장은 휘양을 벗어 애랑에게 주었다.
"손으로 겉을 만지며 입으로 털을 불며 쓰게 되면 엄동설한 추위라도 네 귀 시리지 않을 것이다. 이 휘양 쓸 때마다 부디 나를 잊지 마라."
애랑이 또 말한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나으리 차신 칼을 소녀에게 풀어 주시오."
정비장은 그러나 칼을 만지며 이것만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애랑이 말하였다.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내가 임을 위하여 수절할 때 외간 남자가 달려들면 어쩌란 말이오? 소녀는 나으리가 주고 가신 칼을 빼어 키 큰 놈은 배를 찌르고, 키 작은 놈은 멱을 찔러 물리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그 칼을 풀어 주시오."
정비장은 껄껄 웃으며 기분이 좋아 칼을 풀어 주었다.
"수절 공방 범하는 놈 네 수단껏 잘 찌르면 만인은 못 당해도 한 사람은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애랑이 칼을 받아놓고 앉아 울면서 또 하는 말이,
"여보 나으리 들으시오. 나으리 입으신 숙주창의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가시오."
그러자 정비장이 말하였다.
"여복을 달란다면 괴이할 게 없겠지만 남복이야 네게 쓸 데가 없지 않느냐?"
"에그, 남의 슬픈 사정 그리도 모르신단 말이오? 나으리의 상하 의복 입고 밖에 나가 이리저리 거닐다 한없이 슬픈 정회 임 생각 절로 날 때 들어와 빈 방에 홀로 앉아 이 옷 매만지면 이별 낭군은 가고 없어도 일천 시름 일만 근심 풀어질 것이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이 크게 현혹되어 옷을 모두 활활 벗어 주니 애랑은 그 옷을 받아 놓고 또 말하였다.
"여보시오, 나으리 들어 보시오. 나으리와의 이별 후에 때로 나으리 생각나면 그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그 슬픔을 풀 길이 없을 겁니다. 무얼 가지고 슬픔을 풀면 좋겠습니까? 나으리 입고 계신 고의 적삼을 소녀에게 벗어 주시면 제 손으로 착착 접어 두었다가 임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누웠을 때, 나으리의 고의적삼을 나으리와 둘이 자는 듯이 담쏙 안고 옷가슴을 열어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향기로운 임의 땀내 폴싹폴싹 코를 건드리면 그 냄새로 슬픔을 풀 것이니 그 아니 다정하겠소?"
그까짓 고의 적삼쯤이 문제랴. 통가죽이라도 벗어 줄 판이었다. 정비장은 고의 적삼마저 벗어 애랑에게 주고 정비장이 아니라 알비장이 되었다. 그러니 밑천을 가릴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방자를 불렀다.
"가는 새끼 두 발만 들여오너라."
그것으로 개짐을 만들어 가지고 제마 입에 쇠재갈 먹이듯이 샅에 차고서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어허 극한이로구나. 바다의 섬 속이라서 매우 차구나."
그러나 애랑이 또 청하였다.
"나으리 들어 보시오. 옷은 그만 벗어 주고, 나으리 상투를 좀 베어 주신다면 소녀의 머리와 함께 땋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아니 다정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정비장은 말하였다.
"정리는 비록 그렇다만 너는 나더러 바로 정텃절 몽구리 아들이 되란 말이냐?"
"나으리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나리가 아무리 다정하다 하나 소녀의 뜻만 못하니 애닯고 그 어찌 원통치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거니와 창가에 마주 앉아 나를 보고 당싯당싯 웃으시던 앞니 하나 빼 주시오."
애랑이 이러고 통곡을 하니 이런 애랑의 모양을 보고 정비장은 어이가 없어 묻는 것이었다.
"이젠 부모의 유체까지 헐라고 하니 그건 어디다 쓰려고 그러느냐?"
애랑이 대답하였다.
"앞니 하나 빼어 주시면 손수건에 싸고 싸서 백옥함에 넣어 두고 눈에 암암한 임의 얼굴 보고 싶고, 귀에 쟁쟁한 임의 목소리 듣고 싶은 생각이 날 때면 종종 꺼내어 보고 슬픔을 풀고, 소녀 죽은 후에라도 관 구석에 지니고 가면 한 몸 합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아니 다정하겠소!"
정비장은 크게 현혹되어 공방의 창고지기를 부르는 것이었다.
"장도리와 집게를 대령해라."
"예, 대령했습니다."
"너는 이를 얼마나 빼어 보았느냐?"
"예, 많이는 못 빼어 보았으나 서너 말은 빼어 보았습니다."
"이 놈, 제주 이는 죄다 망친 놈이로구나. 다른 이는 상하지 않게 앞니 한 개만 쑥 빼어라."
"소인이 이 빼기에는 이골이 났으니 어련하겠습니까?"
그러더니 작은 집게로 빼면 쑥 빠질 것을 커다란 집게로 잡고서는 좌로 치고 우로 치는 창과 칼격으로, 차·포 접은 장기 면상 차린 격으로 한없이 어르다가 느닷없이 코를 탁 치는 것이었다. 정비장은 코를 잔뜩 움켜쥐고 소리를 쳤다.
"어허 봉변이로군. 이 놈, 너더러 이를 빼랬지 코 빼라고 하더냐?"
공방 창고지기가 대답하였다.
"울려 쑥 빠지게 하느라고 코를 좀 쳤소."
정비장이 탄식하였다.
"이 빼라고 한 게 내 잘못이다."
이러고 있을 즈음이다. 방자가 바삐 뛰어 들어왔다.
"사또 등선하시니 어서 등선하십시오."
정비장은 할 수 없이 일어섰다.
"노젓는 소리 한 마디에 배 떠난다 재촉을 하니 이제 그만 떠날 수밖에 없구나."
애랑은 정비장의 손을 잡고 발을 구르며 탄식하였다.
"나를 두고 어디로 가시오. 하루 천리 가는 저 배에 임은 나를 싣고 가시오. 살아서 다시 못 볼 임 죽어서 환생하여 다시 볼까? 낭군은 죽어 학이 되고 첩은 죽어 구름 되어 첩첩한 흰 구름 속 가는 곳마다 정답게 놀아 볼까."
이에 정비장은 말하였다.
"너는 죽어 높은 집에 거울 되고 나는 죽어 동방에 해가 되어 서로 얼굴을 비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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