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에 나타난 사회관, 국가관
● 사회관 - 배금주의와 권모술수
<사씨남정기>는 흔히 가정소설로 분류된다.
가정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는 뜻이다. 하지만 작품 곳곳에서 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에 사회소설로 분류되는 다른 작품보다 오히려 더 구체적인 대목이 많다.
가령, 교씨에 대한 서술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 여자의 성은 교씨요 이름은 채란이라 하며 하간부에서 생장한 사람이라. 본디 벼슬하는 집 딸로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그 형의 집에 의탁해 있는데, 지금 나이 16세라. 제 스스로 말하기를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되느니보다 공후 부귀가의 첩이 되는 것이 좋다 하오며 그 자색의 아름다움은 한 고을에 으뜸이요, 여공(女工-여자들이 하는 길쌈질)의 일도 모를 것이 없사오니 부인이 만일 상공을 위하여 첩을 구하실진대 이보다 나은 이가 없을까 하나이다.
가난한 선비의 처가 되느니 부귀공명을 누리는 집안의 첩이 되는 편이 낫다는 발언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사씨 역시 유배갔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곤궁하게 살았지만 더욱더 깨끗하게 사는 길을 택했다면, 교씨는 반대로 자신의 곤궁함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부귀공명을 택했다. 물론 '깨끗한' '부귀공명'은 사람마다 바라는 것이나 그 둘이 양립할 수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작가는 그 중 '깨끗한' 쪽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러면서도 '부귀공명'을 택하는 쪽의 그럴 법한 이유를 설명해 주어 현실에서 아주 벗어나지 않도록 배려했다. 윤리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의 한편에는 이미 물질을 숭배하는 풍토가 널리 퍼져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 배금주의는 단순히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만 진행되지 않고 모든 권세를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얻어보려는 방향으로 확대된다. 교씨와 공모하고, 때로는 교씨를 이끄는 동청과 냉진의 경우가 그 단적인 예이다. 이들은 실질적으로는 별다른 능력이 없으면서도 간교한 술수와 동물적인 감각에 의지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거기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인간형이다. 다른 고소설들이 '원래 약한' 인간임을 강조했던 데 비해서, 여기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이익'을 좇느라 그렇게 된다. 급기야 교씨의 큰아들 장주를 죽여서 사씨에게 누명을 씌우기까지 하는 등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다.
이런 추악함은 작품 어디에서나 흔하다. 동청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엄승상에 빌붙어서 유연수를 귀양 보내게 하는 데 성공하지만, 끝내는 자신이 끌어들인 냉진이라는 사람의 배신으로 파멸에 이른다. 그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교씨는 동청, 냉진과 차례로 간통하며, 결국 창기(몸을 파는 천한 기생)가 되고 만다. 이것은 사사로운 이익만을 좇아 행동할 때 끝내 벌을 받는다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한 인물군이 이미 사회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 국가관 - 어리석은 임금과 탐관오리
이 작품이 국가적인 문제를 다루게 되는 계기는 주인공의 가문이 남다른 데 있다. 주인공 유연수는 개국 공신의 후예인데다 청덕(淸德-맑은 덕행)으로 이름 높은 충신 집안 출신이다.
공(유연수의 아버지)이 공명에 뜻이 없는데다 더욱 그 때 소인이 조정에서 권세를 쓰므로 병들었다 일컫고 벼슬을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세월을 보낼 새 비록 나라일에 참예치 아니하나 당세의 명사들이 그 청덕을 사모하고 우러러 하지 아니할 이 없더라.
소인 권력배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한지 명망 있는 사람조차 끼여들 틈이 없을 정도이다. 악인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한 선인은 주변부를 맴돌거나 아예 멀리 떨어져 있을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정도의 내용이라면 여느 고소설에도 아주 흔한 것어어서 특별할 게 없다. 막연하게 선악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국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데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유연수가 귀양 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동청은 유연수의 글귀를 몰래 훔쳐다가 엄승상에게 바치고 엄승상은 그 글귀를 빌미로 유연수를 제거하는데, 어떤 일이든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 언로(신하가 임금에게 망을 올릴 수 있는 길)가 막혔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천자가 기도하기를 일삼으니 뜻있는 선비들이 충간하고 나섰으나 천자는 도리어 '이후 만일 기도함을 막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고 엄한 명을 내린다. 이 기회에 유연수는 한림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동청이 유연수의 글귀 중 임금의 그런 행실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고 모함하여 일이 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임금이 어리석은데다 언로까지 막히고 나면 자연히 탐관오리가 횡행하게 된다. 이 작품에는 돈을 주고 관직을 사고 팔며, 또 일단 벼슬에 오르고 나면 가혹한 세금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고 그냥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엄승상, 동청, 냉진 등 등장인물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 사건으로 표현하여 사실감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 이강엽, 고교 독서평설(통권 108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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