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1659 ~ 1701)는 누구인가?
이름은 옥정이며,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때 그녀가 장렬왕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머니와 조사석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론 소론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9년 정월에 균을 세자에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후 숙종은 민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작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날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완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왕비로 복위되었던 민씨가 병으로 죽은 뒤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되었다. 숙종은 이 일에 관련된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였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고 한다.
이로써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 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버리기까지 했다. 희빈 장씨가 죽자 그녀를 지지하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이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는 경종과 옹주 하나가 있다.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에 있다.
희빈 장씨의 행동을 풍자한 소설에 김만중이 쓴 <사씨남정기>가 있다.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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