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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도교 유적지 답사 일정 (1)

지식창고지기 2009. 7. 22. 08:58

중국의 도교 유적지 답사 일정

 

 

♣ 답사일정 제 1일 : 북경

 

 북경(北京)은 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생활 속에 그 흔적이 어려 있다.


 북경을 종종 '천년의 왕성'이라고 하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북경이 처음으로 중앙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미 10세기 때이다. 즉 거란족이 세운 요(遙)가 사실상의 수도를 이곳에 정했던 것이 처음이다. 그 이전 연(燕)이라고 불릴 무렵에는 진의 시황제에게 자객을 보내거나, 당 말에 안록산이 현종과 양귀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장소로서 단펴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의 중심은 역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燕)은 이른바 변경지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요(遙)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칭하고 수도를 정했을 때, 중원지방에서 강한 세력을 펴고있던 것이 송(宋)이다. 요는 이 송과 연합한 유목민 출신인 금(金)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후에 세력을 키운 금은 지금의 개봉(開封)에 있었던 송의 도읍을 함락하고 남쪽의 임안(臨安)으로 추격해 온다. 이때 개봉(開封)에서 가져온 전리품의 일부가 지금도 북해공원(北海公園)의 단성에 남겨져 있다. 그 후 이곳은 금(金)의 중도(中都)로써 동아시아를 2분하는 세력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드물게 아름다운 다리'라는 찬사를 받는 노구교(蘆溝橋)가 창건된 것도 이 무렵인 것 같다.


 그러나, 1231년 중도(中都)는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고군에 의해 멸망된다. 여세를 몰아 몽고는 남송(南宋)도 침략해서 천하를 통일한다. 이후 중도는 천하의 중심지 대도(大都)가 되었다. 3대 쿠빌라이 시대는 건축의 시대로 유명하다. 금(金), 요(遙)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그때까지 있던 건물규모의 몇배가 되는 대도성(大都省)이 건설됐다. 경산공원(景山公園)을 세운 것도 이때로 성은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마르코폴로에 의하면 당시의 대도(大都)는 멀리 로마 교황의 명을 받은 선교사나 유럽, 이슬람 상인들도 붐볐으며 무역이 성행했다.


 원을 멸망시킨 명은 영락제 치세 때 대도를 크게 개조했다. 성벽을 개량해서 북쪽을 성 밖으로 내보내 지금의 내성부(內城部)를 정비하고 나중에 남쪽 성벽을 둘러싸 외성부(外城部)로 했으며, 황제의 주거지도 벽을 쌓고 도랑을 파 주위를 둘러쌌다.


 명이 망한 것을 숭정제 때. 농민군 이자성에 쫒긴 황제는 시가가 내려다 보이는 경산(景山)에서 목을 맸다. 이자성에게서 대도(大都)를 빼앗은 청은 명대의 도읍은 그대로 쓰고 원명원(圓明園)을 비롯한 정원공사를 시작했다. 만주족인 청은 한민족의 땅, 중국에서의 지배를 확보하기 위해 한족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주민도 내성(內城)에는 관료인 만주족, 외성(外城)에는 서민인 한족들의 거리로 뚜렷이 구분했다. 이렇게 해서 산기슭에는 내성(內城), 산 아래에는 외성(外城)이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은 중국 현대사의 상징이다. 신해혁명 후 1919년 5월 4일 일본의 21개 요구사항에 반발한 학생들이 모여 5·4운동을 시작했던 곳도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이었으며 이 운동을 발판으로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기 시작해, 1949년 10월 1일 긴 혼란 후 모택동(毛擇東)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성립을 선언할 곳도 이곳이다. 1960-70년대의 문화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전국의 홍위병(紅衛兵)이 모여들고 나중에는 문혁(文革)지도자에 대한 항의의 단서가 되었던 천안문 사건 등이 있었다.

 
천단(天壇)
 
  천단은 명,청 시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교외에 나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은 주나라 때에는 이미 대전으로 되고 한나라, 당나라(618~907년)때에는 제도롤 되었다.15세기 초 명나라 때 천지단을 건조하여 하늘과 땅에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중엽에는 사방 교외에서  각각 하늘, 땅, 해, 달에 제사 지내는 제도를 실행하였다. 이곳은 전문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제공되었으므로 천단이라 명하였다. 청나라 때 확장하여 현재 중국에서 보존되고 있는 최대 규모의 제단 건축군이다. 천단은 부지 272헥타르, 건축 배치가 "回"자형을 이루며 2개 단벽에 의해 내단, 외단 두부분으로 구성된다. 외단벽은 총길이가 6,416m, 내단벽은  총길이가  3,292m이다.


  내외단벽의 북부는 반원형을 이루며 북부가 높고 남부가 낮은데, 이는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음을 표시하며 또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을 표시한다. 천단의 주요 건축물은 내단 중축선의 남북 양단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사이를 넓은 단계교로 연결하고 있다. 남으로부터 북으로 원구단, 황궁우, 기년전, 환건전 등과 그 밖의 신주축, 재성정, 재궁 등 건물과 고적이 늘어서 있다.

 

황궁우 (皇窮宇)


  전문 신주를 모셔놓는 사당으로서 속칭 침궁이라고 한다. 높이 19.5m, 밑부분의 직경 15.6m, 목조구조이며, 지붕은 8개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대들보가 없이 두공을 쌓아올렸으며, 천장판이 층층이 축소되어 아름다운 궁륭식 천정을 형성하였다. 
 
회음벽 (回音壁)

  황궁우의 담으로 원형이며, 둘레가 193.2m, 높이가 0.9m 이다. 이는 벽돌을 다듬어 가며 빈틈없이 이어 쌓은 담으로 두 사람이 각각 동서 벽밑에 서서 벽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하여도 음파가 담벽을 따라 계속 반사 전진하며 서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다. 

 

삼음석(三音石)


  황궁우전 앞 어로 위의 세번째 석판이다.전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석판 위에 올라서서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세번째 석판이 둥근담의 중심에 위치하여 여기서 소리를 치면 음파가 거의 동시에 원형 엔담에 부딪쳐 도울려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왕시대에는 이것은 신비한 색채를 씌워  "인간세상에서 속삭이는 말도 하늘은 우뢰소리 듣듯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환구단


  한백옥석 난간으로 둘러싼 3층 석조 원대로서 높이 5m,옥처럼 희여서 그야말로 장관이다. 명청 시기 매년 동지날 황제가 친히 이 곳에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하늘, 상재가 하사한 풍년과 태평에 감사를 드리고 또 내년의 국태 민안을 기원하였다. 원구단 상층 단면의 중심석을 천심석이라고 한다. 중심석에서  밖으로 층마다 9환의 부채형 석판을 깔았는데 환마다 9개씩 더 가하여 도합 3402개이다. 이 석판은 크기가 같고 모양이 같으며 빈틈없이 밀접시켜 수백년 비바람에  침식되었어도 여전히 평평하다. 사람들이 천심석 위에 서서 낮은 소리로 불러도 즉시 우렁찬 메아리를 들을수 있다. 
 
구룡백


  회음벽 밖에 위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명나라 영락  연간에 재배, 거금 5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나무줄기가 비비 꼬이고  뒤엉켜 흡사  9마리 룡이 서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구룡백이라고 이름지었다.
 
기년전(祈年殿)


  기곡전이라고도 하며, 명, 청시기 맹춘에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던 곳이다. 그 구조 형식은 위는 집이고 아래는 단이며 3층 처마는 층층이 작아지면서 우산 형태를 이루었다. 기년전 높이는 32m, 밑부분 직경은24.2m,  6m 높이의 둥근 한백옥석대 위에 우뚝솟아 있는데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기세가 비범하고 웅장 화려하다. 기년전은  "경천예신(敬天禮神)"의 사상으로 설계, 전내의 기둥은 모두 특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안층의 4개 용정 기둥 간의 공간은 춘하추동 4계절을 상징하고, 중간층의 12대 붉은 기둥에 의해 분할된 공간은 1년 12달 '월'을 상징하고, 외층의 12개 처마기둥은 하루의 12개 시간을 상징하며, 보정 아래의 뇌공주는 황제의 "천하통일"을 상징한다. 

 

♣ 답사일정 제 2일 : 북경 - 성도

 

백운관

 

 백운관의 구조와 백운관에 모셔진 신들에 대해서는 을 요약·발췌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도교의 총본산인 북경의 白雲觀에 모셔진 신들을 중심으로, 실제로 도관에서 어떠한 신들을 섬기고 신앙해 왔는지를 살펴보려 하고 있다. 북경의 백운관은 당의 玄宗의 명령으로 지어진 天長觀 중에서 幽州 땅에 건립된 것에 그 기원을 둔다. 당이나 遼, 金대에는 천장관이라 불렸고, 금대 말기에 元나라 초기에는 全眞敎의 근본도량이 되어 백운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백운관의 상황은 명백하지 않지만 십방총림의 도관으로 번영했을 때의 백운관은 다음과 같은 규모를 하고 있다.


  백운관의 중심에는 구조전(그림 44)이 있는데 이곳은 구장춘 진인을 모시는 곳으로서 開山堂이나 祖師堂과 비슷한 곳이다. 구조전의 앞에 있는 노진당(그림33)에는 전진교의 교조 왕중양의 제자인 일곱 진인이 모셔져 있다. 노진당 전방에 있는 옥황전(그림27)에는 옥황대제가 모셔져 있다. 구조전 뒤에 있는 건물(그림63)에는 그 윗부분을 三淸閣이라 부르고 누각의 아래 부분을 四御殿이라고 부른다. 백운관의 중심에는 이상의 구조전, 노진당, 옥황전, 사어전, 삼청각 등이 위치하고 있다.


  그 밖에 대표적인 전당으로는 제일 앞에 있는 영관전(그림14)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불교 사찰의 二王이나 四天王殿에 상응하는 것이다. 또한 張三 眞人을 모신 봉진지전(그림17)과 그 맞은편에 유선지전(그림18)이 있다. 노진당의 양편에 있는 동서종사무(그림26)에는 동서쪽에 각각 九宗師, 즉 18종사가 모셔져 있다. 이 18종사는 구장춘이 멀리 雪山에서 원의 태조를 알현했을 때 함께 갔던 사람들이다. 東華帝君이나 八仙을 모시고 있는 동화전(그림58)과 呂純陽을 모신 여조전(그림59), 여조전 앞에 있는 팔선전(그림47), 郎郞神을 모신 원군전(子孫堂, 그림 46), 불의 신을 모신 火神殿(火祖殿, 그림 41), 華陀를 모신 화조전(그림 39), 眞武大帝를 모신 진무전(그림 56)등도 대표적인 곳이다. 또한 남극전(그림 61)은 南極壽老人을 모시는 곳인데, 이것은 누각 아래의 명칭이고 누각 위는 斗 閣이라 하여 斗母를 모시고 있다. 오조전의 뒤에 있는 후토전(그림 66)에는 후토, 즉 토지의 신의 상이 놓여 있다.


  백운관의 중심에 있는 구조전은 개산당, 또는 조사당과 같은 곳으로서 이곳에서는 長春眞君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조전에 대한 신앙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즉 전진도사에 대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이 민중들이 장춘조사를 어떻게 신앙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신으로 섬겨지는 그의 정식 명칭이 '長春全德神化明應主敎眞君'이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구장춘(1148-1227)의 성은 丘이며, 이름은 處機, 자는 通密이다. 道號는 長春子이다. 산동에서 19세 때 출가하여 곤륜산에서 수행하던 중 왕중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인 왕중양이 죽은 후 磻溪(섬서성)에서 6년, 龍門에서 7년 동안 수행을 쌓고 득도했다. 산동에 돌아온 후에는 화북 사람들에게 신선, 또는 살아있는 신으로 존경을 받았다.

  옥황전에 모셔져 있는 옥황대제는 중국 민간신앙의 여러 신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이지만 옥황이 이처럼 높이 받들어진 것은 송의 眞宗(998-1022) 이후의 일이다. 진종은 유명한 도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가 즉위한 998년에 軒轅(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황제의 이름)을 聖祖로 삼아 皇天玉皇大帝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후 1116년에 이르러서는 옥황의 지위는 여러 신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옥황이라는 신은 그의 활동과 관계된 속성 때문에 민중에게 크게 인기가 있다. 옥황의 활동이란 1년 동안 인간의 행위의 선악을 살펴보고 연말에 총결산하여 그 다음 해의 화복을 결정하기 위한 보고를 조신에게서 듣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즉 옥황은 인간계의 공과격을 판결하는 최고의 존재인 것이다.

  삼청각에 모셔져 있는 것은 도교의 최고신인 삼청존의 모습이다. 삼청존이란 玉淸聖境元始天尊, 上淸眞境靈寶天尊, 太淸仙境道德天尊 등의 세 신격을 말한다. 도관에 삼청전이 건립되고 그 안에 삼청상이 안치된 것은 당대 중기의 일이지만 금대에 와서 전진교가 흥기하고 성행하게 되자 삼청전은 전진교계 도관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천사도계 도관에서는 원칙적으로 삼청존을 섬기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진교가 종래의 잡다한 도교교리를 삼청교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모산계의 도통(道通)을 계승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백운관의 여조전(呂祖殿) 여순양(呂純陽)을 모시고 있다. 여순양은 여조, 여동빈, 순양진인(純陽眞人), 부우제군, 회도인(回道人)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 중에서 '여조'라는 이름이 가장 통용되고 있다.


 도교나 불교는 출가교단으로서 국가의 통제 속에 정착됨에 따라 민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지만 민중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지녀오던 종교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러한 민중적 종교신앙사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삼교일치의 입장을 고수하게 되는데 민중도교라고 불리게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민중도교의 대표적인 문헌자료로는 {선서(善書)}와 {보권(寶卷)}가 있다. {선서(善書)}는 {권선서(勸善書)}라는 이름의 약칭으로 민중의 윤리를 민중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보권(寶卷)}은 '보배롭고 귀한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선서(善書)}가 만들어지고 {보권(寶卷)}이 출현했지만, 이와 같은 민중도교의 중심신격 즉 교조를 말하자면 여조의 이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조의 전기는 전설적이라 그 실재를 의심할 수도 있는데, 전설에서는 그의 스승인 종리권(鐘離權)으로부터 화산(華山)에서 금단과 검법을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11세기 경부터 점차 신선의 대표자로서 지위를 획득하였으며, 전진교의 시조인 왕중양에게 비도(秘道)를 전해준 선인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전진교의 교조로 받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영험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에 대한 민중의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또한 미륵보살의 도교적 전생자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의 모습은 반드시 검을 등에 지고 있는데 이 검은 탐진, 애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진검(眞劍), 혹은 심검(心劍)이라고 한다.


 여조가 민중들의 두터운 신앙대상이 된 최대의 이유는 민중들 속에 살면서 그들이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주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진심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유구필응(有求必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종리권이 그의 수행의 정도를 시험해 봤다는 전설이 '운방십시동빈(雲房十試洞賓)'이라는 고사로서 전해지고 있다. 이 고사에 따르면 여조는 모든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운방은 안심하고 승천하여 천선(天仙)이 되었으며 뒷일은 모두 여조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래서 여조는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할 때까지 승선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스스로 지선(地仙)이 되었다고 한다.


 여조는 108번 변신하여 중생제도에 변화자재하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관음보살이 33회 변신하는 것에 비해 여조는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숫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와 연관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민중의 종교의식 속에서는 도교나 불교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단지 민중의 기원을 들어주는가가 문제될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원을 가장 많이 들어주는 존재가 바로 여조인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여조는 가장 인기있는 신선이다.


 장삼봉진인(張三 眞人)은 통미현화진인(通微顯化眞人)이라는 존칭으로도 불리우는데, 이름은 전일(全一)이며 삼봉은 그의 호이다. 이곳 백운관의 봉진전에 안치되어 있는 장삼봉진인으 상은 그 체구가 크고 훤칠하다.


 그는 본래 무당산(武當山)의 도사로 무당산의 특징인 충효사상을 전파했던 것 같고 삼교조화사상의 창도자로서도 유명하다. 일찍이 백운관에도 있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 백운관에서 그를 모시고 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무당도를 신봉하는 백운관에 그가 거주하였기 때문에 삼봉진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운관의 원군전(元君殿)은 낭랑신(娘娘神)을 모셔둔 낭랑전이다. 단의 가운데에는 천선성모벽하원군(天仙聖母碧霞元君)이, 그 좌우에는 자손낭랑(子孫娘娘), 안광낭랑(眼光娘娘)이 모셔져 있다.


 '낭랑'이란 도교 여신의 총칭이다. 여성들의 일반적인 일을 담당하는 낭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계통적으로 구별하면 대체로 세 종류가 된다. 즉 서왕모(西王母)의 왕모낭랑(王母娘娘), 벽하원군의 태산낭랑(太山娘娘), 천비(天妃)의 천후낭낭(天后娘娘)이다.


  낭랑신앙의 출현은 명확하지 않으나 그 내용에 관음신앙이 상당히 혼입되어 있어, 관음과 낭랑의 신앙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백운관의 진무전(眞武殿)에는 진무대제를 중심으로 좌우로 장도릉과 문창제군이 모셔져 있다. 진무는 현무(玄武)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북극 및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이다. 문창대군은 문필의 신이다. 예로부터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는 반드시 이 신을 신봉했다.


  원진전은 후토전(后土殿)이라고도 불리우며 백운관에서는 여조전, 낭랑전과 마찬가지로 민간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후토황지기'는 {삼교원류수신대전}의 1권에 '서령왕모'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토(土)라는 것은 천지가 처음으로 갈라진 곳의 황토를 말하고 그것을 토모(土母)라고 했다.


 백운관에서는 2월 2일에 토지신의 성탄제를 채소밭에서 행한다. 이 토지신은 성곽이 있는 마을의 성황신과 함께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토지신은 본래 오곡풍요를 주관하는 신이었으나 후에는 사람들의 행복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이 신은 성황신처럼 일정한 사람이 아니고 그 지방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 사후에 임명된다고 한다.

 

♣ 답사일정 제 3, 4 일 : 성도

【사천성(四川省)】
 
  중국 남서부 양자강(양쯔강; 揚子江) 상류에 있는 사천성(四川省)에는 이족(彛族), 장족(藏族), 묘족(苗族), 회족(回族), 강족(羌族) 외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1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고 양자강, 민강(岷江), 가릉강(嘉陵江), 퉈강의 사대강이 성내를 흐르기 때문에 ‘사천(四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천성은 전국 제 일의 식량생산지이고 그 고장의 매운 사천요리는 북경, 상해, 광동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요리의 하나이다.


  사천성은 따뜻한 겨울과 극심한 찜통 더위의 동부 분지와 대부분 해발고도 3000m이상의 서부 고원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 분지는 대부분 붉은색의 흙으로 덥혀 있고 비가 많고 안개가 심해 ‘촉(蜀)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며 서부 고원은 서늘하고 건조하며 화려한 풍경의 장강삼협(長江三峽), 구채구(九寨溝)와 해라구(海螺溝)의 빙천(?川) 등 높고 기묘한 산과 골짜기의 강물이 만들어 내는 절경들이 있다.


  이 지방은 중국에서 가장 고립된 산지를 갖고 있는 반면 강수량이 많아 식량과 쌀 생산량이 전국 1위이고, 성도(成都)와 중경(重慶) 같은 역사적이고 인구가 가장 밀집된 산업 도시들을 갖고 있기도 한다.


  사천성의 수도 성도(成都)는 기후가 온난하고 강우량이 풍부하며 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산물이 풍부하며, 그 매운 사천요리는 중국 4대 요리의 하나로 유명하다. 전통적으로 양잠, 비단 직조가 발달하여 ‘금관성(金官城)’ 혹은 ‘금성(金城)’이라고도 불렸다.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문화의 고성으로 삼국시대에는 촉나라의 도읍지였고 당시대의 유명한 시인 두보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사천성은 전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성이지만, 서북쪽 고원의 자연보호구는 오히려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절색의 경치구역이다. 운이 좋다면 야생 팬더곰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 <하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일컬어 지는 사천성(四川省)은 사람들이 좋아 하는 팬더의 고향이기도 하고, 중국의 개혁 창도자 등소평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사천성의 수도인 성도는 청아하고 수려한 죽림(竹林), 험준한 산, 얼얼하도록 맵고 맛있는 사천 요리, 음미하기에 족한 사천 음악, 부지런한 지역주민, 삼국지의 오래된 유적, 안개 많은 기후 등의 특징이 있다.


  중국의 허다한 도시에 비해 성도는 조용하고 우아한 멋이 있으며 시민들이 생활을 향유할 줄 알고 도시의 현대화 작업은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 비록 상업적인 분위기가 날로 짙어 가고 있지만 고아하고 순박한 전통생활 방식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공원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산보를 하고 있고, 태극권과 볼륨댄스, 운동, 고전극 연습도 한다. 시내의 크고 작은 찻집과 금강(錦江) 강가의 노천 찻집에서는 시사를 소리 높여 논하거나 장기 등을 두는 시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사천 지방의 수도로 걸맞게도 예전의 성도는 이러한 특혜지역을 지켜주는 높이 솟은 성곽이 자랑거리였다. 지금은 이 도시의 중심 이정표인 모택동의 동상으로부터 사방으로 가로수 길이 뻗어 있다. 12월 26일 모택동의 생일에 맞추어 12.26미터의 높이로 서 있는 이 동상은 인민로(人民路)를 따라 걷고 있는 군중들을 내려보고 있다.


  역사의 고성(古城)은 삼국시대에는 촉한의 도읍지였고 5대 10국 때는 전촉, 후촉이 독립왕국을 세웠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후 성도라는 이름은 2천 여년 동안 바뀌지않고 지금까지 내려 왔으며 이 도시는 지난 2천 여년간 사천 또는 서남지구의 행정 중심도시로 존재해 왔다.

 

청양궁(靑羊宮)

 

  청양궁은 문화공원 내의 성도 최대의 유명한 도교 사원으로 영조전(靈祖殿), 팔과정(八卦亭) 등이 있는 노자(老子)를 기리는 건축물이다. 매년 1월에는 여러가지 등롱(燈籠)이 걸리는 등회(燈會)가 열리고 음력 2월 15일을 전후로 약 한달 동안 노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화회(花會)가 열린다.


  입구 근처에는 청동으로 주조된 동양(銅羊)이 있는데 좋은 운을 가져다 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한 마리는 청나라 옹정 원년에 만든 것으로 구조가 대단히 기괴한데 12지상 즉 쥐의 귀, 소의 코, 범의 발, 토끼의 등, 용의 뿌리, 뱀의 꼬리, 말의 입, 양의 수염, 원숭이의 목, 닭의 눈, 개의 배, 돼지의 엉덩이를 한 몸에 모아 놨단다. 많은 현지인들이 이곳에 와서 점을 치고 향을 태우면서 행운을 기린다.
 
♣ 답사일정 제 5일 : 성도

 

학명산


* 참고 논문 : 衛復華, 중국도교(오두미도) 발원지 鶴鳴山


1. 학명산에 대하여

 

鶴鳴山(鵠鳴山이라고도 함)은 지금의 四川省 成都市 大邑縣에서 西北쪽으로 25리에 있는 鶴鳴鄕 三 村 경내에 있으며, 成都에서는 145리이다. 岷山 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雲山으로부터 鎣華山을 지나 大邑縣에 이르기까지 紅岩... 등등의 산들과 한 산맥이다. 淸代 齊 의 『鶴鳴山記』에 따르면, 위로 ' 宿'에 상응한다고 하는데,  宿은 28宿의 하나이다. 또 '天根'이라고도 하는데, 靑龍 7宿의 세 번째 별이다. "큰 동굴 24개가 있는데, 이는 24氣에 상응하며, 작은 동굴 72개는 72候에 상응한다." 해발 약 900미터이며, 고대 劍南 4대 명산의 하나이다. (중략) 明代 楊愼 등은 이를 두고 "仙人의 집"이라고 한다. 문화부 문물국의 『중국명승사전』에는 "저명한 풍경은 여행과 피서의 명승지이다."라고 하며, 淸代 『大邑縣志』에는 다시 "학명산 두 계곡은 龍泉을 지나간다."고 한다. 대읍현 八景 중의 하나이다.

 

2. 학명산의 유래 세 가지

 

첫째, 산의 형상이 鶴을 닮았다는 것. 明代 장경람은 『修鶴鳴觀醮台公署記』에서, 학명산은 모양이 仙鶴과 비슷하여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 한다. 『大邑縣志』에 실린 장신오 등의 문장에도 역시 학명산은 "그 형세가 나는 학과 같으므로 이름하였다."라고 한다. 실제로 조사해보면 志에 실린 것과 같다.


둘째, 산에 숨겨진 돌로 된 학. 淸代 『四川通志』에는 "산의 형세는 항아리 두 개가 겹쳐진 것과 같고, 학과 비슷한 돌이 있어서 그렇게 이름하였다."라고 한다. 明代 『廣輿記』에는 "학명산에 있는 동굴 중에 돌로 된 학이 있는데, 천년에 한 번 울고, 그게 울면 仙人이 나타난다. 주나라 때 馬成子가 여기에서 수련했는데, 그때 돌 학이 한 번 울었다. 한나라 때 張道陵이 여기서 登仙했는데, 이때 돌 학이 다시 울었다. 명나라 때 張三 이 여기서 득도했는데, 돌 학이 또 울었다."라고 한다. 明代 ... 등도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다.


셋째, 산에 仙鶴이 살기 때문이라는 것. 梁代 李膺의 『益州記』에는 학명산에 "항상 기린이 놀고 백학이 날아다녔다."고 한다. 明代 ... 『鶴鳴山懷古』에서 "수목이 오래되고 일찍이 학이 살았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친히 이 학을 보았는데... (후략)
앞서 형상 때문이라고 한 것,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전설적인 이야기 어느 것이 옳든지 간에, 산 이름을 "鶴鳴"이라고 한 것은 漢代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었다. 明代 左...의 『학명산기』 그리고 현재 복단대학 교수인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도 모두 기록한 바 있다.

 

3. (장도릉에 대한 내용 생략) /

 

4. (대표적인 사료들 생략)

 

5. 학명산 도관의 역사

 

학명산에서, 최초로 건축된 것은 上淸宮 즉 老君殿이다. 明代 邑痒左翹의 『鶴鳴化記』에 따르면, 상청궁은 漢 順帝 때 오두미도 창시자인 "漢安征士 장도릉이 창건했다"고 하며... 宮 내부에는 "원래부터 수백 묘(토지의 단위)가 있었고,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왕래했다."고 한다. 隋唐을 거쳐, 越宋 開  3년(970년)에 이르러, 다시 碑를 세웠다. 朱明 永樂 11년(1413년)에 이르면, 遣龍虎山道士吳伯理前來迎請張三 (?), 迎仙閣을 건립했다. 嘉靖 25년에서 33년(1546-1554년)에 이르는 8년 동안에, 世宗은 또 李永, 李云靜, 張博士, 李讚 등에게 명하여 醮壇을 두 개 건립했고, 沈 황후는 彭端衡 진인을 보내어 약물과 경서를 厚賜했다. 그후 흥성해져서, 江西의 새로운 도량은 德으로써 손실을 복원하고 자산이 불어나 옛 도관의 좌우전각과 天師殿에서 수행하였다(?). 이에 이르러 "畵棟雕梁, 玉宮 宇(궁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임-역자 주)"를 이루었다. 太淸, 天師, 紫陽(혹은 紫虛), 迎仙, 三官, 文昌 등 百間이 넘는 전각을 보유하고, 또 亭, 台, 樓, 閣을 비롯해 그에 딸린 정원과 숲과 꽃과 나무들은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 문화대혁명의 전야에 이르러, 漢唐 시기 舊 도관과 越宋 시기 전각 등은 비록 역사가 되었지만(사라졌지만), 明淸 양대의 건축과 웅장한 비각, 그리고 그 밖의 도교 문물, 예를 들어 簡書와 탑들은 상존하여 사람들이 추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중에 훼손되었다.


당의 十一屆三中全會(?) 이래, 당의 문물정책과 종교정책의 관철이 구체화되어, 학명산도 새로 날 수 있게 되었다. 1985년, (학명산은) 成都市 인민정부에 의해 '중점문물보호단위'로 비준되었다. 1987년 5월, 역시 성도시 인민정부의 동의를 거쳐, 대읍현 인민정부는 '도교개방점'으로 (학명산을) 비준하는 문서를 발행하였다. 현재 성립된 학명산 도관의 관리팀은, 한편으로는 遺留問題 해결을 청구하고, 한편으로는 道院의 중건을 계획하여, 학명산을 도교의 발원지로서 특색을 갖춘 새로운 도관으로 건립하려고 한다.

6. 학명산의 진기한 것들

 

학명산의 진기한 것들도 상당히 사람들을 매혹시키는데, 그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鶴鳴石. 淸代 『대읍현지』에는 "돌 위에 학이 있어서, 그것을 문지르면 볼 수 있는데,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획득할 수 있으니, 역시 기이한 돌이다." 과학분석에 의거하면, 이 돌은 화산암이 풍화작용을 거친 돌이다. 이는 일정 조건하에서 규산염 작용을 거쳐 찐득찐득한 자갈돌이 되고, 다시 유수의 작용으로 운반되어 이루어진 특수한 돌이다. 陳文 의 『학명석기』에는 "그 높고 낮음은, 桃 , 血痕... 天蘭 십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돌의 성질상) 조각하는 데 이상적인 재료이다.


2) 鶴鳴茶. 『大邑鄕土志』: 노군전 주위의 산간에서 생산되는데, 明淸연간에 어전에 드리던 차이다. "잎사귀가 학 모양이다, 혹은 증기에 쬐면 학 모양이 된다." 색깔, 향기, 맛이 겸비되어 아주 이름난 귀한 것이다.


3) 鶴鳴 澗(계곡). 학명산 동쪽과 서쪽에 금강산에서 발원한 지류가 흘러와서 학명산 앞에 이르러 휘돌아 합쳐져 구불구불한 강을 이루어 흐른다. 상반되는 전승이 있는데, 이 물은 龍泉古井을 통과하여, 동쪽 계곡은 물이 넘치고, 서쪽 계곡은 스스로 닫혀져, 동쪽 계곡물은 탁하고, 서쪽 계곡물은 맑다. 반대로, 서쪽 계곡은 물이 넘치고 동쪽 계곡은 닫혀서 서쪽 계곡물이 탁하고 동쪽 계곡물이 맑다고도 한다. 대읍 지방의 저명한 八景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실려있다.


4) 鶴鳴古柏(측백나무, 잣나무). 迎仙閣 뒤 바위에 있다. 淸代 『 州志』에 기재됨: 이 나무는 明代 張 "三 仙人이 손수 심었다."고 한다. 前年에, 사천성 임업청의 古樹 전문가가 학명에서 고찰해보니, 나무 높이가 31미터, 가슴높이 직경이 1.51미터이며, (수명의) 하한선으로 明代(1662년 멸망)까지 끊을 수 있는데, 이는 『 州志』에 기재된 것과 부합된다. 지금도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며, 과실이 쌓이고 生機('機'로 나와있는데, 오타일까?)가 왕성하다. 전하는 바로는, 當年에 千年玄鶴이 일찍이 古柏 꼭대기 제4층 가지 위에 서식한 바 있는데, 종일 고개를 들고 서서, 스스로 즐거워했다고 한다. 해방초기 이 지역 농민들이 擊斃했다(왜?).


5) 鶴鳴石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학명산 중에 돌로 된 학이 있는데, 이는 天地의 精陽을 받아서 불어나고 자라나 이루어졌고, 천년에 한번 우는데, 이 학이 울면 한 仙人이 이로부터 날아오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周代의 마성자, 東漢의 장도릉, 明代의 장삼봉 모두 石鶴이 길게 울 때 학을 타고 날아오른 것이다. 『사천통지』,『공주지』,『대읍현지』에도 모두 기재되어 있다.

 

7. 학명산을 거쳐간 학자와 문인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학명산은 이미 國史에 기재된 도교의 발원지이며, 또한 명성이 자자한 풍경여행지구이다. 千百年來 적잖은 학자와 명사가 살고 머물도록 끌어들여서, 鶴鳴仙山의 화려한 색채를 더하였다.


唐末五代의 저명한 도사 두광정은 난을 피하여 蜀에 들어와 (事王建父子, 官諫議大夫?) 廣成先生이라는 호를 주어 참된 天師라 전해졌으며 詩文에 능해 저작으로 『廣成集』등이 있어 세간에서 유행했다. 그가 만년에 청성산에 은거할 때, 일찍이 학명산에 와서 살면서, 天師를 조배하고 『題鶴鳴山詩』를 지었다.


(그 밖의 많은 문인들과 학명산에 관한 그들의 詩는 생략했다. 다만 장삼봉에 관한 내용 중에서 그가 만년에 "峨眉山"에 머문 적이 있다는 것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저자는 1988년에 구보 노리따다(窪德忠)를 비롯한 동경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사람들이 학명산에 왔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건립한 "日本國海外學術硏究團登訪大邑鶴鳴山之碑"의 한 구절도 소개하고 있다. 이들 동경대학 팀의 답사보고서는 蜂屋邦夫 편, 『中國道敎の現況』(汲古書院, 1989)라는 두 권의 큰 책으로 출판되었다. - 이상 역자 주)

 

8. 학명도관의 현황 (1989년 당시임)

 

학명도관에는 현재 도사 10명이 있는데, 그중 乾道(남자 도사)가 3명, 坤道(여자 도사)가 7명이다. 50세에서 92세까지가 5명이고, 20세 좌우가 5명이다. 84세 고령의 老 도사는, 성도시 道協(아마도 도교협회) 위원이며, 대읍현 政協 위원인 張至益 주지가 모든 사무를 보고 있다. 올해 4명의 坤道가 북경 중국도협에 가서, 사천성 도교 및 성도시 기공치료 등 培訓班學習(?), 관내에 針灸(침과 뜸) 의료실 같은 데는 없어서 시술하지는 못하고, 展을 열러 도교 무술을 전수하고, 일정한 규모의 도교 의식을 거행하는 등 활동했다.


작년에 개방한 이래로, 군중으로부터 자본을 모아 전각을 수복했다. 현재 구체적인 종교정책을 호소하여, 학명산의 모든 道場을 회수하였고, 교단 내외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어 학명산 도관을 중수하였다. 그들은 『恢復鶴鳴山道觀的設想』에서 강조하기를 "충분히 고찰할 것으로 첫째, 학명산은 우리나라 도교(오두미도)의 발원지이다; 둘째, 교단 내외의 군중들이 도교를 확장하고자 하는 바람; 셋째, 학명산 현재의 경제 조건"이다.


단기적으로는, 먼저 집중적으로 迎仙閣을 회복하고 있으며, 첫 번째 전각을 준공한 후에 玉皇樓, 三淸殿, 山門, 八卦台와 도사들의 숙소 및 담장과 도로 등의 건설에 착수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곧 학명산 주요 道場 정책이 구체화된다는 전제하에, 鶴鳴 古觀을 회복할 것이다. 上淸宮(老君殿), 文昌宮을 수복하고, 三官廟 등 도교 신령을 받들었던 특징적인 건축물을 중수하는 이외에 다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획하고 있다. 즉 待鶴樓와 招鶴亭 등 학명산을 대표하는 특색있는 樓, 台, 亭, 閣의 회복; 園林 식의 초대소와 도교 진료소의 신축; 收藏(아마도 도장을 보관하는 곳-역자 주), 도교(오두미도) 발전사를 반영한 문헌과 실물을 전시하는 전람실의 신축; 현대 전국의 저명한 書畵家 丹靑墨寶(?)를 모은 도교 碑林을 신축하는 것이다. 여기에 학명산의 도교 문물을 더하여, 迎仙閣과 학명산을 하나로 연결하고, 학명산을 일반 도관과는 다른 것을 갖춘 것으로 건립하며, 도교역사를 반영함으로써 특징을 삼아서, 기세가 과거와 비교하여 웅장함이 더해진 발원지 古觀은 국내외 혹은 교단 내외의 인사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도교연구자들이 참관하고 탐색하게 될 것이다.


* 참고 논문 : 曾傳輝, "成都市 靑羊宮 道敎信徒 基本情況 調査報告"

 

작자는 1988년 12월 상순에서 1989년 1월 상순까지, 성도시 청양궁에서 도교신도의 기본정황에 대해 초보적인 조사를 했다. 지금 그 기본정황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분석을 하겠다.

 

Ⅰ. 도교신도의 성별과 연령 구성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관찰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해를 진행했는데, 12월 4일과 11일(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우리는 그냥 향을 피우는 사람들과 제대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모두 도교신도로 계산하였다. 이렇게 보니 신도수가 96명에 이르렀다. 그 중 남자가 42(44%)명, 여자가 54명(50%→저자의 착오임. 56%가 맞음.)이었다. 이는 도교신도 중 여자가 남자보다 많다는 것을 나타낸다.


연령구조에서 우리는 외모에 근거하여, 14세 이하를 소년으로, 14세에서 30세를 청년으로, 30세에서 50세를 중년으로, 50세 이상을 노년으로 구분하였다. 우리가 관찰한 사람들 중에서 소년이 4명, 청년이 9명으로 전체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중년은 27명으로 전체의 28%였는데, 이는 중년의 사람들이 도교신도의 중요한 부분을 조성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노년은 54명으로 전체의 56%여서, 노년인 사람들이 도교신도 중 절대다수임을 설명한다. 연령구성 중에서, 중청년과 노년의 비율은 4:6 정도이다.


신도 중에서 노년 여성은 45명으로 전체의 47%, 여성 전체에 대해서는 83%, 노년신도에 대해서도 83%로, 노년 여성이 도교신도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리는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답안을 찾았다.


1. 초년 가정교육과 사회환경의 영향. 우리가 방문한 노년의 부녀들 중에서, 여자들의 부모는 100% 모두 신도였고, (그중) 50%의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도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는 이 부녀들이 어려서부터 상당히 부모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노년 부녀가 모두 해방 이전에 출생하여, 옛날 식 가정교육은 여자아이의 三從四德을 강조했고, 부모들은 그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남자아이들에 견주어 매우 엄격했다는 것이다. 도교를 믿는 부모들은 스스로 알게 모르게 그 자녀들에 대해 종교교육을 진행한 것이며, 이러한 교육 중에서 여자아들이 받은 영향은 매우 컸던 것이다.


해방 전, 여자 청년들이 받은 문화교육은 남자 청년에 비해 적었으며, 대부분(우리가 조사한 여성 중에서 75%, 그러나 노년 남성에서는 단지 50%) 문맹이었다. 여자 청년은 대개 가정 중에 국한되었고, 사회와 접촉이 적었고, 인생 사회에 대해 전면적인 깊은 이해를 갖기엔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가정의 영향과 문화수준이 낮다는 것은 현재 노년 여성신도가 많다는 것의 중요한 원인이다.

2. 한가한 시간이 많고, 그리고 문화생활이 결핍된 것은 노년 부녀 신앙(인)이 많은 것의 중요한 원인이다. 노년 부녀는 은퇴한 후에, 집안 일을 부분적으로 하는 것 외에, 많은 여가 시간을 가지지만, 우리나라 모든 도시의 노년인, 더욱이 노년부녀가 제공받는 사교와 문화생활의 기회는 실로 유한하다. 그녀들은 집안에 갇혀있는 생활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되어, 노년 사람들은 종교장소를 선택하게 된다.


3. 노년 부녀자들은 병이 많아, 희망 神力을 빌려 고통을 경감시키기를 바란다. 우리가 방문한 노년 여성 중의 75%(노년 남성의 50%)는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들 환자 중에 100%의 사람이 모두 신앙이 병에 대해 치료작용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神을 구하고 부처를 예배하며 바라는 것, 紙錢을 태움으로써 병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것은 여성들의 신앙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Ⅱ. 도교신도의 종교 신앙과 활동

 

1. 도교를 믿게 된 기간. 우리가 조사한 도교신도 중에서, 도교를 믿게 된 시간의 길고 짧음은 둘로 나누어진다: 50% 안팎의 사람들은 거의 10년 가까이 믿어왔고, 나머지 50% 안팎은 30년 전부터 신앙을 가져왔다. 어떻게 이 현상을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는 우리나라 해방 이후 정치형세의 발전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우리 당의 종교정책은 심각한 파괴에 이르러, 종교가 훼손되었고, 도사들은 환속해야 했고, 신도들은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현재의 도교신도들 중에 주요한 이들은 10년(?) 동란 이전 사람들과 그 이후 새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2. 도교를 믿게 된 과정. 도교신도의 절대 다수는 모두 정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도교를 믿기 시작했다. 우리가 조사한 대상 중에, 傳敎, 師承, 禮拜布道 등 정식 과정을 통해 귀의한 사람은 없었다. 100% 모두 敎友(주로 가족들)지간의 상호이해와 상호영향으로 도교를 믿게 된 것이다. 이는 도교조직의 인원이 보충되는 것이 주로 자발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3. 도교를 믿게 된 것과 좌절. 우리가 조사한 사람들 중에, 75%의 사람은 스스로 결코 좌절로 인해 도교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며, 단지 25%의 사람들만이 스스로 좌절을 겪어 도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도교가 대부분의 신도들에 대해 결코 정신상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좌절 때문에 도교를 믿게 되었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연령은 모두 50세 이하였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만나게 된 좌절이 주로 인간관계의 긴장과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등이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1, 2년 전에 도교를 믿기 시작한 이들이며, 그 중 가장 오래 된 사람이 9년에 불과했다. 이상의 정황에 근거해볼 때, 우리는 중/청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분투와 진취의 단계에서, 그들은 가장 쉽게 좌절을 당하며, 또한 가장 쉽게 좌절로 인해 종교로 전향하고, 종교에 의해 잠시의 정신적 해탈을 찾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도교를 믿게 된 목적. "당신은 도교를 믿는 것에 어떤 좋은 점(이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안은 주로 이하의 몇 가지이다. 1)神은 우리를 보호하고 災禍를 없애준다. 2)心靈의 平靜을 지켜준다. 3)治病 4)좋은 점 없다. 이와 같이 답한 사람들은 6 : 3 : 2 : 2 비율이다. 이는 도교 신도들 중에는 앞날에 대한 운명이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 때문에, 신령에게 기구함을 통해 좋은 것을 얻으려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을 설명한다. 당연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도교를 믿는 것은 어떤 좋은 점(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혹은 심령의 평정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즉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신도들은 모두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은 사람들로서, 이러한 회답을 한 사람 중에 60%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초중등 이상의 문화정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5. 여러 가지의 종교를 신봉하는 것. 우리가 조사한 사람들 중에, 100%가 불교와 도교 두 종교를 겸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신도들은 부처를 예배하는 것과 신선을 구하는 것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보았고, 그들은 모두 사람에게 보호하는 神으로써 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장기간 생장, 발전한 儒釋道 삼교는 서로 융합하여, 이미 중국 일반 信敎群衆에게 승인되었다. 또 한편으론, 우리가 조사한 대상 중에 기독교와 이슬람 등 기타종교를 함께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는 도교와 이러한 종교의 융합이 많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며, 또한 반대로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나 이슬람 등은 다른 종교를 함께 믿는 사람들에 대해 배척적이라는 것이다. (기준이 다르니까 그렇지..)


6. 公衆과 私人의 종교활동. 우리가 조사한 도교신도 중에, 58%의 사람들이 부정기적으로 종교장소에 왔고, 33%의 사람들이 보름에 한번 종교장소에 왔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종교장소에 거의 오지 않았다. 몇몇 도교신도들이 우리에게 말하길, 그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명절, 노인의 생일, 제삿날, 혹은 집안에 어떤 중요한 사정이 있을 때 종교장소에 와서 燒香(향에 불을 붙여 타는 동안 절하며 기도하는 것-역자 주)이나 化紙(지전을 태우는 것? 혹은 말아서 매다는 것?)하면서 神을 찾고 부처님께 예배드린다고 했다. 이는 도교신도가 가지고 있는 공중(?) 종교활동의 不定期性과 응급성을 설명한다.


우리가 조사한 사람들 중에 60%의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들은 집안에서 종교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들이 집안에서 하는 종교활동이란 주로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1)燒香, 化紙錢 2)吃齋 3)집안에 神牌를 가지고 있는 것 4)念經 등이다. 집안에서 이상의 활동을 하는 사람은 8 : 4 : 3 : 1이다. 이는 절대 다수의 도교신도 개인의 종교활동이 소향, 화지전 이런 종류의 간단하고 쉽게 행할 수 있으며, 분명하게 볼 수 있는 행위임을 설명하고 있다. 집안에 집안에서 神位를 받드는 것은 또한 당연히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이는 현대 도시 세속생활 중에 어느 정도 협조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 같고, 따라서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역시 많지 않다. 吃齋에 이르면, 이는 곧 참는 인내심과 의지 그리고 가정기분의 지지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이러한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 또한 매우 적다. 우리가 보게 된 吃齋 습관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노년 부녀였다. 念經은 일정한 문화소질과 비교적 많은 여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일반군중에 대해 말할 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몇 분의 항상 독경을 한다고 했는데, 念經하는 사람은 모두 대학이나 중학(아마도 중국에서는 중고등학교 모두 일컬을 것..) 교사였다.


6. 종교지식의 결핍. 우리는 꿇어앉아 拜禮를 드리는 도교신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道를 압니까? 당신이 절하는 것이 어떤 神인지 압니까?" 60%의 사람이 道를 모른다고 했다. 이는 도교신앙의 자발성, 혹은 도교귀의의 비정식성과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교 궁관은 이미 거기에 속한 일반 신도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傳敎布道 할 수 있는 어떤 조직이란 것이 없다. 이것이 도교신도들의 지식결핍의 원인이다.

 

Ⅲ. 도교와 사회[社團]의 관계

 

1. 도교신도의 가정환경. 가정은 사회의 세포이며, 가정 안의 종교배경이 그 구성원에 대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먼저, 우리가 조사한 대상의 가정은 절대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이었다. 성인 신도 중에 기혼인 경우가 60%(이하의 수치들이 기혼자 60% 안에서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따로따로 한 것인지 잘 모르겠음..), 이혼은 단지 8.3%,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가 17%, 미혼은 단지 8%였다. 허다한 신도들이 자기 가정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고 답했다. 이는 도교 신도들의 가정관계가 안정되고 화목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도교신도의 가정에 모두 일종의 농후한 종교 기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조사한 대상 중에서 75%의 사람들이 부모가 도교를 믿었고, 58%의 사람들은 형제 자매 혹은 자녀들이 도교를 믿고 있었다. 가족 중에 도교를 믿는 사람이 있는 신도 중에서 92%가 말하기를, 자기와 자기 가족들은 동일한 종교를 믿고 있다고 했다. 90% 이상의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으로 인해 집안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일이 없다고 했다. 이상의 정황은 중국에서 가정은 종교신앙을 전파하고 공고히 하는 기본 조직임을 드러낸다. 동시에 종교에 대한 신앙은 자유롭다는 사상이 사람들 마음에 깊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2. 信徒와 信徒, 信徒와 道士들의 관계. "당신과 당신의 敎友 사이에는 항상 왕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물어봤을 때 75%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이는 가족성원이 아닌 도교신도들 사이에 연계가 매우 적다는 것을 설명하며, 또한 도교조직이 그 신도들에게 제공하는 상호 학습과 교류의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다시 "당신이 도사들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을 때, 도사들 역시 주동적으로 당신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던가요?"라고 물었을 때, 75%의 사람이 대답했다. "아뇨." 이는 도교 神職 인원(도사를 말하겠죠?)과 그 신도 사이의 관계가 매우 소원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들은 傳敎, 布道, 講經 등을 공적으로 열지 않았으며, 종교 단체들 중에서 일으킨 작용이란 주로 종교장소와 문물에 대한 간호와 보존이었다. 이는 곧 중국도교의 현상 가운데 일종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寫照]이다!


이상의 조사는 어떤 면에 대해서도 결코 대표성이나 전형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리의 인력과 시간이 모두 매우 적었기 때문에, 조사한 면과 양이 모두 클 수 없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분석 중으로부터 거듭 어떤 추세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또한) 우리는 진일보한 조사공작 중에 다시 많은 수확이 있기를 희망한다.

 

* 참고 자료 : 학명산 도사 왕명월


  왕명월은 전진용문파 제 20대 도사로 속호는 청봉이다.  사천남부현 사람으로 가정은 중류계층이었다.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무(武)를 좋아하며, 의술에 능하였다.  사천군사시험에 응시하였는데 2등을 하였다. 밭을 팔아 총을 사고 병사를 모집하여 연대장을 맡았는데 그의 나이 30세 정도였다. 군대조직을 정리개편하기 위해 남경으로 출동하였을 때 병력과 총이 공제되니 이에 분개하여 퇴역하게 된다.  사천에 돌아가 보령현성 현극전에 출가하여 진원지의 제자가 되었다.  원지의 무공은 고강하여 청조말년 누명을 쓰고 붙잡혀 주릿대를 채울 때 그는 단숨에 형구를 절단내었다.  또한 합천뢰도사로부터 무공을 배웠다. 뢰는 악지현사람으로 체격은 앙상하게 말랐으나 합천사찰을 주관하였다.  문앞에는 황경깃발이 200여근이 되는 주춧돌에 꽂아있다. 항상 진서룡 군사가 이 사찰에 주둔하였다. 문을 지키는 군사 소문뢰는 자신의 고강한 무술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어느날 뢰도사가 사찰에 돌아왔을 때 문을 지키는 군사가 못들어 가게 하였는데 뢰는 그 뜻을 알고 이에 옷을 벗고 양손으로 돌 디딤돌을 안아올려 앞으로 던졌다.  양손으로 침착하게 길을 넓히고 걸어가니 그때 나이 30여세였다.

 

 

  왕명월은 일찍이 중경으로 가서, 실업청의 도학을 공부하길 좋아하는 류축장과 그 해 정월 초하루에 노군산굴 정상에서 자오(子午)향을 피웠다.  도중 산허리에 이르러 한 노인이 옆에서 말하길 "당신의 마음이 진실해 보이니 여내공을 전수해주고 싶군요." 라고 하니 왕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해하였다.  노인은 화공법을 전수하고 나풀거리며 떠나갔다.  왕은 더욱 깨닫는 바가 있었다.  청정한 고산 거주지를 찾기 위해 류에게 부탁하니 류는 이에 사천동량 파육사를 소개하였다.  파육사에는 다섯 개(혹은 5층)의 전당이 있고 산수가 모두 아름다워 명대 유명한 도사 장삼풍 선생이 일찍이 여기서 거하였다.  왕은 인우(仁宇)를 스승으로 삼고 파육사 제 3전당에 기거하였다.  실내에는 침대를 놓지 않고 단지 나무걸상과 종려털깔개만 있을 뿐이었다.  항상 동량지역은 지독한 모기와 벼룩이 많았는데 고산(高山)은 더욱 심하였다.  명월은 한번 거하면 수개월 동안 거하였고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매일 묘고가 죽을 가져왔는데 묘고 역시 뜻이 있는 사람으로 약 30세 때 집을 떠나 일찍이 현부비서를 맡았었다.  몸이 약해 병이 많아 벼슬에도 뜻이 없었기에 파육사에 출가하였다.  묘고는 명월을 남들과 다르게 보아 죽을 가져가는 기회를 타서 암암리에 몰래 훔쳐보았다.  명월은 매일밤 몇시간동안 문을 열고 전당의 처마 창포 담요 위에 좌선하여 모기가 물고 벼룩이 어지럽힘에도 아랑곳 없이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야 비로서 방에 가서 쉬었다.  몇주가 지나 묘고는 단방으로 가서 명월을 방문하였다. 왕은 물었다. "사형, 왜 그러시는 지요?" 묘고는 다시 말하길 "이 몸이 허약하여 아마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사제께서 좀 지도하여 주길 청하는 바입니다." 명월은 흔쾌히 습내공지법을 전수하여 주고 갔다.

 

 

  명월은 파육사를 떠나 다시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 진수사가 있었는데 이름은 주희였다.  그는 명월이 정신병 치료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 계책을 꾸며  정신병원을 세우고 사회를 위해 덕을 행하려 하였다.  이에 명월은 "이 일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허나 제가 지금 부족한 점이 많으니 더욱 단련하여 공을 쌓은 후 다시 도와 그 일을 완성시키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서로 삼년의 기간을 약속하였다. 


  명월은 헤어지고 사천으로 돌아와 방방곡곡 명산을 찾아 단련하였다. 어느 날 묘고친형제 증관지는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많은 명산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대읍 학명산이 산수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계속 스님이 배출되는 수련하기 좋은 곳이지요.  일찍이 사제 장지익을 따라 거한 적이 있는데 정말로 명실상부합니다. "  장지익은 왕명월의 제자로 마침 남부에 있으며, 명월은 두명을 청하여 함께 1931년 춘하에 이르러 학명산에 온 것이다. 


  왕명월은 학명산에 도착한 후 노군전에 거하면서, 마음을 집중하여 도교경전을 공부하였다.  동시에 전당을 튼튼하게 수리하고 환경을 녹화하고, 한관(漢觀)을 발양시켰다.  연이어 황석자(원래 28군 군단장 등석후의 사촌), 류상(사천성 정부 주석)과 열성적인 지방공익인사가 사재를 내어 수십백 대양(옛날의 일원짜리 은화의 이름)을 기부하였다.  명월은 인부를 모아 나무를 베어 상청궁 산문, 수상가옥을 건설하고, 영선각을 튼튼하게 수리하였으며, 문창궁화원을 새로 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도관은 더욱 넓혀졌고 매년 6,7월 2개월에는 현중문인학사가 서로 약속하여 더위를 피하러 와 시를 짓고 사를 지으며 여름을 보내는 것이 일시에 크게 유행하였다. 

 

 

  왕명월은 의술에 정통하여 장룡의 오두미도(후한의 장도룡이 사천지방에서 일으킨 도교의 일파, 요병의 보수로 쌀 닷말을 받았다고 해서 일컬어진 이름) "위인치병"의 도교전통을 계승하여 널리 공덕을 행하니 지방에서 호평을 받았다.  여러 가지 치료하기 힘든 이상한 병에 특히 효과가 뛰어났다.  예를 들면 소장 안상성은 사천 24군 중대부로 아안에서 정신병을 앓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의 문,창문,벽을 많이 때려 부셔버리니 감히 가까이 가는 자가 없었다.  그 부인이 왕도사 제자 소장 홍경풍에 부탁하여 스승에게 치료해주길 청하였다.  왕명월이 안가네 집에 가서 사정을 물어 알고 난 후 두명의 청년들에게 환자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당기게 하였다. 처방대로 약을 쓰고 나서 그에게 무릎을 꿇으라 명하니 이상한 일이지만 환자가 과연 양무릎을 꿇었다.  왕월이 물었다. : "또 물건을 부술겁니까? " 상성은 " 부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였다.  일어나서 차려자세를 하라고 하니 환자는 또한 명을 받들어 차려자세를 취하였다.  명월이 또 물었다.  " 학명산에 가고 싶습니까?" 환자는 "가고 싶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왕명월은 곧 안상성을 학명산에 데리고 가 살게 하였는데 매일 담뱃대를 닦고 청소를 시켰다.  약 2개월을 거하였는데 완치되어 돌아갔다.  또 예를 들면 학명산 근처 사천성 감찰청 청장 전선주가 용중풍에서 전신불수가 되었다.  성도시의 일류의원이 치료를 해도 효과가 없었기에 집에 돌아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이 와서 왕스승에게 치료해 주길 청하였다.  명월은 온사람에게 병세를 묻고 나서 전씨네에게 환자를 사찰로 데려가 조치하도록 시키니 2개월 후에 환자 전청장은 가족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전청장은 명월도장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감동하여 녹나무 병풍 한 벌(사폭), 연(聯) 한 벌로 길이가 약 5척이 되고 폭은 척여남짓한 것을 증정하였는데 문창궁 응접실 벽에 걸었다.  이 기간에 남경 주희는 항상 편지로 약속된 장소로 갈 것을 재촉하였으나 명월도장은 학오를 돌보는 일로 인해 가지못함을 사실대로 알리니 결국 갈 수가 없었다. 

 

 

  왕명월은 명대 장삼풍 선생의 내가권술(內家拳術)도 승계하여 학오에서 무술을 전수하였다.  왕도장은 동시에 경중공(輕重功)에도 뛰어나서 석판을 밟아 부서뜨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을 학처럼 가볍게 하여 나무걸상, 탁자를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  더욱 훌륭한 것은 매번 가는 곳마다 현지의 명가(名家)에게서 배웠으므로 그 무공은 각가(各家)의 장을 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가 막 대읍에 가면 성동석보헌을 스승으로 삼아 항시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던 것이다.  전에 온 구학자에 대해서 오두미도 규칙과 같이 한사람 학비는 대양5원이었다.  이후에 홍경풍, 엄정방 등 20여명이 왔다.  그 중 홍경풍은 지선에 능하였고 엄정방은 무관도에 재능이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매우 엄격하여 매일 저녁 후 노군전(즉 상청궁) 뒤의 뢰조전에 모여 문을 닫고 연습하게 하였다.  뢰조전은 겨우 30평방미터정도 되었으며 중앙에 청유등 하나가 놓여 있다.  제자들이 각자 나무 막대로 서로 마구 때리고 아무리 난잡하게 때려도 모두 무술동작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부상자도 없었으니 범상치 않은 무공이었다. 왕도장은 특히 교인을 중시하였는데 항상 "마음을 가라 앉히고 쉬며 담담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라고 말하며 제자들을 격려하였다. 


  왕명월은 무술계 사람과 넓게 교제하였는데 예를 들면, 진천상 등으로 대부분 유명한 도계인사였다.  듣건대 진천상은 합천백운관 주지 뢰도사에게 배웠다 한다.  뢰의 손은 공력이 매우 깊어 몇 개의 대나무 젓가락을 손으로 집어 부러뜨릴 수 있다.  진은 그 법술에 매우 뛰어나 동문사제 중에서 제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명산은 당시 성동자룡묘와 왕사전 암자 등 딸린 집이 있고 교무를 통일하여 관리하고 살림살이를 각각 계산하였다.  자룡묘(子龍廟)는 일명 장군묘로 한순평후 조운을 제사지내는 사묘정우(祠墓庭宇)로 중국도교 다신교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매년 3월 춘대에 이르면 사당 안에 천막을 치고 노점을 벌려 차려놓고 노래와 악기 소리가 수리(數里)까지 들리도록 하고 찻집, 주점 등 없는 것이 없도록 벌려 놓는다.  그 때 왕명월 도장은 사당 안에 시합을 열어 각지에서 온 무술가를 환영하였다. 또한 무예시합에서 기예를 보이고 서로 무술을 연구토론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온 인파들로 들끓으니 매우 시끌벅적하였다. 


 

  학명산은 예로부터 청정한 묘우(사당)으로 참배인은 일반적으로 소찬만을 먹고 선향을 피운다.  한쌍의 초는 종이돈(제사때 태우는 돈)  몇 장을 태우는데  다른 향초와는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사찰에 거하는 도사는 농사짓는 것으로 살아가고, 대부분 미음과 옥수수풀 같은 것을 먹는다.  사찰에는 원래 논과 밭 120여 묘가 있어 년 차잎 2섬을 생산해냈었는데 이후 현 행정당국이 사찰의 재산을 로군전 조정의 논 4묘와 사찰에 실제로 있는 도사 한명에 근거하여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3묘 이외에 그 나머지 전부를 관악묘와 학교 재산으로 제공하였다.  이런 이유로 당시 왕명월과 전관도사는 매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밥먹는 것 이외에 모든 의약과 의복 등 비용은 항상 교외인사가 발심하여 재물로 도와주는 것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도교 "청정무위(淸靜無爲)"의 도풍은 더욱 나타내어 졌는데 이에 출가하여는 사람이 가장 많을 때는 10명이 되기도 하였다.  : 관현 류지당, 온강 온지신, 면죽 조벽성, 금창구임지본,  성도 장지익과 증지원등이 있다.


  왕명월도장이 제정한 사찰규범은 매우 엄격하여 매일 아침 6시, 오후 5시에 향을 피우고 독경하였는데 이름을 조만과라고 불렀다.  오후 5시에 사찰문을 닫고 학도들은 외출하여 돌아다니지 못했다.  사찰의 제자는 돌아가면서 물을 긷고, 밥을 하고, 경작하고, 청소와 기타 잡일을 하였는데 게으름 피우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사찰에 와서 출가하려면 남의 소개와 본인의 자원,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삼년의 심사를 거쳐 비로서 두건을 두르고 정식 학명산 도사가 되었다.  예를 들면, 온지신은 사천대학학생으로 일찍이 국민당 군대 부연대장을 맡았었고 퇴역 후 관구 오성지와 학명산에서 교유하였는데 산수가 매우 아름답고 환경이 그윽하고 수려한 것을 보고 이곳에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오에게 추천을 부탁하였다.  명월은 그의 입안이 온통 금니인 것을 보고 이내 물었다. " 당신은 이미 관리였는데 출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찰의 생활은 매우 청빈하여 쓸 돈이 없습니다. 당신은 속세의 생활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 온은 답하였다. "아깝지 않습니다. " 명월을 웃으며 말했다. " 당신의 입안은 온통 금니인데 어찌 아깝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즉시 칼을 꺼내 금니를 빼서 암석에 던져버리고는 "이러면 됐지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명월은 그를 새로운 학명산 도사로 받아들였다.  명월은 또한 사찰규칙을 어긴 자에 대해 사건 경위의 경중과 뉘우침에 따라서 각각 비판하여 교육하는 것과 곤장치기, 머리를 깎고 옷을 찢은 후 글쪽지를 붙이고 산문(山門)에서 내쫓게 하는 것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러했기 때문에 학명산은 매우 좋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948년 왕명월은 천대 고향이 같은 교수와 집에 돌아가 친척을 방문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80여세였다.

 

편집후기

 

  도사 겸 무사 왕명월의 사적은 위복화 선생이 91, 92년 두 번에 걸쳐 왕의 제자 장지익 도사를 방문하여 구술에 근거하여 기록 정리한 것으로 현대 도교 인물의 연구 참고 자료로 제공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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