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일정 제 6, 7일 : 청성산
도교와 청성산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 먹으면 늙거나 죽지 않는다는 불로초와 불사약,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옥황상제…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이런 이야기들은 중국의 도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교, 유교와 함께 중국 3대 종교의 하나로 꼽히는 도교는 중국 문명권의 여러 나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많은 민중 반란에 도교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었을 정도로 보통 사람에게는 유교나 불교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녔다.
* 사진설명 : 도교의 창시자인 장릉이 도를 닦던 '천사동'. 청성산의 중심으로 수많은 현판과 기념물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그러나 도교는 불교, 유교에 비해 훨씬 정리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불교나 유교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분파가 발생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석가모니나 공자가 세워놓은 기본 틀 속에서의 분화였다. 이에 비해 도교는 노자와 장자 숭배, 신선사상, 내면 수련법 등 다양한 흐름과 요소들이 그 안에 포함돼 있다. 그래서 많은 종교학자들은 “도교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 전통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도교는 서기 2세기 무렵 중국 서부 사천성 일대에서 시작됐다. 후한 시대 장릉(?~156)이란 사람이 이 지역에서 최초의 도교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신도들이 교단에 들어올 때 다섯 말의 쌀을 바치도록 했기 때문에 ‘오두미도’ 라고 불렸다. 장릉은 원래 ‘오경’에 통달한 유학자였는데 그것이 ‘장생불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도를 닦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릉은 ‘도’를 얻은 후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장릉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그 후 오두미도는 그의 아들 장형과 손자 장로에 계승되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두미도에서 이들 장씨 3대는 각각 천사, 사사, 계사라고 불린다. 이중 특히 장로(?~216)는 ‘노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교리를 체계화했으며 후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사천성 일대에 독자적인 종교 정권을 세워 30년 가까이 통치했다. 또 위의 조조에게 투항하여 오두미도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게 함으로써 오두미도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발판을 만들었다.
이처럼 도교의 발상지이기에 오늘날 사천성 일대는 도교의 영향력이 강하고 도교와 관련되는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도교의 성지로 꼽히는 곳은 사천성의 중심 성도 서북쪽에 있는 청성산이다. 이곳은 장릉이 도를 얻은 곳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따르는 도사들의 순례지였으며 지금도 도교의 의식과 의학, 무술이 그대로 행해지는, 살아있는 도교의 현장이다.
성도에서 청성산으로 가는 데는 두 시간 남짓 걸렸다. 거리는 약 50km 밖에 안되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청성산 입구에 도착하자 멋들어진 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지붕 위에 도교의 이상인 신선들의 조각이 달려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높이 1260m의 청성산에는 한때 70개에 이르는 도교 사원들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30여 개가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상청궁과 장릉이 도를 닦은 곳에 세워진 천사동이다. 이밖에도 옥청궁, 조양동, 건복궁, 원명궁 등 유명한 도교 사원들이 즐비하다.
먼저 케이블카를 타고 상청궁으로 올라갔다. 상청궁 입구에는 앞뒷면에 ‘道’ ‘大道無爲’(큰 도는 인위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쓴 커다란 돌이 놓여 있었다. ‘상청궁’이란 현판은 장개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도가 의학을 소개하는 곳과 도교 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파는 물건 중에는 ‘불로초’도 들어 있어 도교의 고향을 실감케 했다. 불로와 장수에 대한 도교의 관심은 자연히 의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중국 의학의 토대가 됐다고 한다.
상청궁에서 청성산 중턱에 있는 천사동까지는 걸어서 약 40분이 걸린다. 천사동은 수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세워진 수십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청성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교 사원이다. 또 당 현종, 청 강희제의 친필 등 이곳을 찾은 수많은 고관과 문인, 지식인들이 남긴 각종 글씨와 자취가 풍부하다.
장릉이 도를 닦았다는 곳은 천사동 건물들의 뒤쪽 천연 동굴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는 그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 천사동에는 또 장릉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그가 팠다는 연못, 붓을 씻었다는 나무통 등이 남아 있다.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천사동에서 50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항마석’이다. 동굴에서 도를 닦던 장릉은 하늘에서 엄청나게 큰 돌이 자기에게 날라오는 것을 보았다. 마귀의 장난인 것을 알아차린 장릉은 칼을 들어 돌을 내리쳤다. 땅에 떨어진 돌은 가운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금 그 돌에는 청나라 말기에 61대 천사였던 장인정이 썼다는 ‘항마'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천사동을 나오는데 정문 바로 뒤의 ‘재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도교 사원들이 대부분 돈을 주관하는 신을 좋은 자리에 모시고 있다는 점은 도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성도의 가장 큰 도교사원 청양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수’ ‘복’이라고 쓴 글씨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종교가 이승보다는 저승을 중시하는 데 비해 도교는 현세에 절대적 비중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학자들은 보통 도가철학과 도교를 구분한다. 전자가 ‘노자' ‘장자’'열자'와 같은 중국 고대의 사상서에 나타난 철학체계인데 비해, 후자는 중국 역사 속에서 다양한 교단과 파벌을 통해 발전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도가철학이 민간 신앙 전통과 만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도교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하는 도가철학을 어떻게 ’장생불사‘를 기본 목표로 하는 도교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는지, 중국인들의 위대한 현실주의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 답사일정 제 8 일 : 아미산
아미산(蛾眉山)
아미산은 사천성 아미현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형당산계의 공래산맥에 속해 있으며, 대아미·2아미·3아미의 세부분으로 나뉜다. 대아미의 주봉은 만불정으로 해발 3,099m로 <아미군지>중에 "구름의 아름다움이 비취와 같고, 검푸른 귀밑머리와 같으니 진정 미인의 이마와도 같아 가늘고 길며, 아름답고 아득하여 "아미산"이라 칭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미산을 불교에서는 "광명산", 도교에서는 "허령동천"이라고 한다. 당대시인 이백은 시로써 아미를 칭송한 바 있으니, "촉국에 선산이 많으나, 아미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또 "아미는 천하에 수려하다."와 "아미를 유람하지 않고서는 사천성을 유람했다 말할 수 없다."가 그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아미산에는 일찍이 동한후기(기원2세기)부터 도교의 사원이 있었으며, 당·송이래 불교가 날로 흥성해 연이어 불사가 건조되었고, 명·청대에는 온 산이 절과 도교사원으로 뒤 덮혀, 크고 작은 사원이 약 백 여개에 달했다. 전설에 따르면 <보현보살>이 현령하신 법사라고도 한다. 산서성 오대산, 안휘성 구화산, 절강성 보타산과 함께 <중국 불교 4대명산>으로 불린다. 아미산은 보살행을 실천한 보현보살의 도량이다. 아미산의 대찰인 만년사(萬年寺) 무량전(無量殿)에는 동으로 주조한 보현 보살상이 있다.
특히 아미산의 절은 거의 천 오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원래 아미산은 도교의 보금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외래 종교인 불교가 중국 토속신앙격인 도교를 밀어내고 아미산을 차지했다. 일례로 복호사(伏虎寺)라는 절을 보면 이 절의 이름은 다분히 도교적이다. 복호사 터엔 원래 도교 사원인 도관이 있었는데, 도교의 명인 순양자(純陽子)가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법력으로 굴복시키고 그 터에 도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불교가 유입된 후 도교 사원은 헐어버리고 불교 사원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의 복호사다.
한편 청대 이래 불교가 점차 쇄락하게 되는데, 더구나 아미산은 산세가 높고 험하며, 비가 많고 습윤하여 대다수의 불사가 몰락하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보국사, 만년사, 화엄사, 세상사, 복호사, 뇌음사, 대아사, 광복사, 우선사, 연화사, 중봉사, 관음사, 신개사, 선봉사, 백운사, 오룡사, 대평사, 백룡사, 용문동, 금정사, 천불정, 만불정 등 불교 흥성 시기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불사만이 남아 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비교적 큰 규모의 보수공사를 거쳐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되었으며, 사천성의 중점 관광 풍경구이다. 현존하는 사찰중 관람 가능한 사찰로는 보국사, 만년사, 홍춘평, 산봉사, 복호사, 세상사, 무선사, 금정, 뇌음사, 백룡사 등 십여 곳이 있다.
보국사
아미현 남아미 산기슭에 위치해 있고, 현성에서 약7km 떨어져 있는 아미산 유람의 필수 코스이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복호사, 청음각을 지나 아미의 최고봉인 금정에 이르는 길로 약 60km이고, 우측으로 만년사, 세상사를 졍유해도 금정에 닿을 수 있는데, 약45km에 이른다. <아미산지> <아미가란기> 등에 기재 되 바에 따르면, 보국사는 명나라 만왕 시기(기원1573~1620년)에 세워졌으며, 원래는 복호사 좌측에 있었으나, 청나라 순왕 시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지어졌다가 강희(기원1730년)에 재건해 '보국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축 규모는 웅장하고, 기세가 드높고, 배치가 좋으며, 성축선은 대칭으로 분포되어 있고, 중축선상의 건물로는 산문·미륵전·대웅전·칠불전·장경루 등이 산세를 타고 지어져 점차 높아지고, 산문은 정자식으로 되어 있고, 문 위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하사한 '보국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경내 신당의 문과 창에는 조각이 정교하고 도안이 생동적이고 소박하며 웅장하고 아름답다.
만년사
아미산 주봉의 동쪽 산자락, 해발1,000여m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기온이 매우 온난하고 기세가 탁 트이고, 수목이 울창하며,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아미십경"중의 하나인 "백수추풍"이 바로 이곳이며, 아미산상의 큰 절 중의 하나이다. 전설에 따르면 한 대의 약초캐는 노인이었던 포공이 부처를 모셨던 곳이라고 하며, 진대에 이르러 불사를 짓기 시작해 "보현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당대에 "백수사"'라 개명했고, 송대에는 "백수보현사"라 불리어졌다가, 명 만력 기간(기원1573~1620년)에 "성수 만력사"로 명명되었다.
절은 원래 7개의 건축물로 규모가 웅장했으나, 후에 몇 차례의 흥망 성쇠를 거치다가 민국35년 (기원1635년) 일대 화제로 목조 건축물이 모두 불타 없어져 겨우 무념전만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것은 두 동으로 1953년 중건한 것이다. 무념전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로 명만력 기간에 건조되었다. 높이16m 정방형 건물로 매변이 16.5m, 꼭대기 부분은 첨탑형이어서 흡사 몽고족의 파오와도 같다. 전(殿)의 꼭대기 부분에는 다섯 개의 백탑 (정중앙과 네 모퉁이에 하나씩)과 네 개의 길한 동물상이 세워져 있다.
전내의 중앙에는 북송 태평천국 5년 (기원980년)에 주조된 보현보살이 6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탄 동불상 한 점이 모셔져 있는데, 총높이 7.3m (불신과 흰 코끼리가 각각 반씩을 차지한다.) 무게는 약62톤이며, 현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전내 사방벽의 아랫 부분에는 24개의 작은 불단이 있는데, 각각 철불 한 존씩을 받치고 있다. 윗부분에는 가로로 여섯단으로 작은 동불상 307개가 배열되어 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조각이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홍춘평
아미산 천지봉 아래 해발 약1,100m에 위치해 있다. 옛 이름은 천불암, 명초에 선승이 건축했다가(송대라는 일설도 있다), 청 건륭 55년(기원1790년)에 아운선사가 중건한 후에 지명으로 절 이름을 대신했다. 사원 부근에 원래 세 그루의 늙은 홍춘 나무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그루는 절 앞쪽에 있었으나 이미 불타 소실되어 겨우 뼈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다른 한 그루는 절벽가에 위치해 있었으나, 산사태가 났을때에는 강희제가 내리신 편액 "망천근려" 및 대련이 현재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으며, 건물 내에는 또 건륭제가 내리신 대련 한폭이 걸려 있다. 현존하는 사원 건축은 모두 건륭47년 (기원1782년)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복호사
보국사 서쪽 약1km에 있으며, 당대에 짓기 시작했고 송대에는 "신롱당"이라 불리었으며 후에 절 주위에 호랑이로 인한 우환이 있어, 승려들이 "존생보장"을 지어 이로써 진압했다하여 "복호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또 일설에는 절 뒷산이 마치 호랑이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절은 아미산의 대사 중의 하나로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흥망성쇄를 겪었고 청 시기 1651년에 중건되었는데, 전당은 넓고 기세가 험준하며 사방의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빽빽한 산림이 하늘을 가릴 듯하다. 절은 비록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위치해 있지만, 지붕 위에는 절대로 낙엽이 떨어지지 않는다. 청나라 강희 황제가 내리신 "화구원"이란 현판이 있으나, 지금은 희미한 묵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해방 초기에 증건한 동사방은 관광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데 쓰이고 있다. 최근 또 한차례 전체 불전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고, 가운데 절 앞으로 지나는 길이 닦여졌다.
백룡사
백룡동이라고도 하며 아미산 하단에 자리잡고 있다. 명대에 지어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은 청대에 지어진 것이다. 민간 전설에 "백사전(白蛇傳)" 중의 백낭자가 도를 닦던 곳이라고 하는데, 백사는 일반적으로 "백룡"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름이 백룡사가 된 것이다. 굴은 오래 전에 무너져 막혔으나, 절은 아직 존재하는데, 절 외부에는 원해 양쪽으로 수풀이 무성한 좁은 길이 있고, 고목이 하늘을 찌를만큼 빽빽하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명 융경 시기에 별전 박사가 심은 것으로 심을 때 "법화경"을 읽는데 한글자 읽을때마다 한 그루씩 심어 총 69,777그루로 당시에는 이를 가리켜 "공덕림"이라 했는데, 제원을 거치면서 퇴폐해져 현재는 몇 그루 남아 있지 않다.
후선사
선봉사와 세상사 사이, 해발 1,700여m에 위치하고 있다. 청 동치원년(기원1862년) 성희 법사가 흥건시켰다.
선봉사
선봉사의 옛 이름은 "자연사" 또는 선봉산원이라 한다. 명마력 40년 (기원1612년)에 본동선사가 창건했다. 예전에는 4동의 건축이 주석판 기와로 덮여 있다. 현존하는 절은 청대에 중건한 것이다. 불사 뒷편으로는 위험한 바위로 둘러쳐져 있고, 화엄봉과 마주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깊은 골짜기에는 고요함만이 흐른다. 불사의 뒤쪽으로는 500m에 이르는 구로동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굴에는 아홉 분의 신선이 있어 황제가 이곳을 찾아 불도를 했다는 설이 있다. 아미십경의 하나인 "구로선부가" 바로 이곳이다. 굴의 좌측에는 삼협대가 있어, 이곳에 오르면 백리까지 내다보이며 수려한 봉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절 주위는 원숭이떼가 서식하는 곳이 있어, 때때로 유람객의 음식을 빼앗아가기도 해 유람의 즐거움을 증가시켜 준다.
세상지
화엄정과 백운사 사이에 위치해있다. 명대에는 '초희암'이라 불리웠으며 규모는 매우 작다. 청강희 38년 (기원1699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었다. 절앞에 육각형의 연못이 있어, 보현보살이 얼굴을 씻었다는 전설이 있어, 세상진란 이름이 붙었다. 전내에는 관음, 지장, 대세 등 세 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자태가 단정하고 장중하며 옷의 무늬도 매우 뛰어나다. 불사는 해발2,100m의 높은 산봉우리 삼나무들이 우거진 속에 위치해 있다.
뇌음사
복호사에서 약2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명대에는 "관음당"이라 불렀고, 청대초에는 "해탈암"이라 불리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이 곳에 입산해 중생을 해탈시키고, 이곳에서 출산해 장애를 극복했다고 한다. 광서10년(기원1884년) 개축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한 동으로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고 절벽과 마주해 있고,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며, 고요한 정취가 흐른다.
금정
아미산 최고봉의 명칭이다. 만불정과 가까우며 해발3,077m에 위치한다. 불사는 동한대에 건축되었고, 당시에는 "보광전"이라 불렸으며, 아미산 고찰중의 하나이다. 산이 우거지고 천둥이 자주쳐서 여러차례 수리를 했으나, 여전히 새로 짓고 다시 허물어지는 상황이다. 정전은 영명화엄사라고 불리우며, 청 광서12년 (기원1886년)에 중건되었다가, 민국 25년(기원1936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전 뒤 가장 높은 곳에는 원래 동전(銅殿)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금전>이라 부르며 폭은 20여m 앞 뒤 길이는 수m이며 정중앙에는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고, 좌우에는 만불상이 늘어서 있다. 전문에는 흑산산천이 음각되어 있다. 전내에는 명대 성화년간(기원1465~1487년)에 주조된 동비가 있는데, 정면에는 "대아산영명화엄사에 동전을 신축함을 기념하다"란 글이 씌어 있고 뒤편에는 "아미산보현금전비"라고 씌어있다. 동전의 화엄사는 이미 화재로 소실되었고, 비(碑)만이 전좌측의 와운암내에 보존되고 있다. 암자 좌측으로 수십분 떨어진 곳에 서광대가 있는데 일출·운해를 감상할 수 있는 佛光성지이다. 절 뒷편으로는 좁은 절벽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절앞은 만길 낭떠러지여서 속칭 서선암이라고도 한다.
♣ 답사일정 제 9일 : 대족석굴
대족(大足) 석굴
창주(昌州)에 속하는 대족(大足)현은 서기 758년<당 건원 원년((乾元 元年)>에 세워졌다. 서기 885년 창주(昌州)는 정남(靜南)현에서 대족으로 천도하여, 1279년(남송말기) 창주 주지사의 주재지가 되었다. 한편 대족(大足) 석각(石刻)중에서 오산(五山)의 마애조상(摩崖造像)은 이 400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현존하는 대족 석각의 작품 중에서 오산의 마애조상이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며, 그 후 200년간은 단지 성수사(聖水寺)의 마애조상 12곳이 조각되었을 뿐이다.
서기 885년 창주가 대족으로 천도한 이후 마애조상(摩崖造像)은 점차 크게 성하게 되었다. 892년(唐 경복 원년) 먼저 북산의 불상이 조각되기 시작했는데, 후에 주, 현의 관리와, 사신, 평민 등이 서로 모방하여 계승하였다. 한편 907-965년(오대십국시기, 사천지방은 촉나라에 속함)에도 불상 조각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서, 대족 석각은 일대 고조기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서기 965-1077년(북송, 건덕-희정) 사이에는 마애조상(摩崖造像)이 정체되기도 했는데, 현재 모든 현에서 당시의 감(龕, 감실)에 대한 하나의 기록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이 시기는 사찰 내에 원조조상(圓雕造像)을 공양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현재 이에 대한 유적, 혹은 자료를 찾고 있는데, 동쪽의 대중사(大鐘寺), 서쪽의 석벽사(石壁寺), 북쪽의 연은사(延恩寺) 등 여러 곳이 발견되었다.
1078-1173년(북송 후기-남송 초기) 사이에 대족석각조상(大足石刻造像)은 제 2차 고조기를 이룬다. 1082년 석전산(石篆山)에 불(釋), 도(道), 유(儒) 삼교(三敎)의 조상구(造像區)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마애조상도 연이어 생겨났는데, 불교에서 먼저 조상을 시작했으며, 도교 및 삼교의 조상이 32곳에 생겨났다. 남산(南山), 석간산(石間山)의 조상과 북산(北山) 다보탑(多寶塔)도 이 사이에 고르게 세워졌다.
892년 북산의 조상(造像)을 시초로 하여 조상구(造像區)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250년 후인 1146년(남송 소흥小興 16년)에 완성되었다. 한편 1174-1252년까지 70년간은 남송, 순희(淳熙)에서 순우(淳佑)에 이르는 시기로, 승려들이 세칭 "6대조사전밀인(六代祖師傳密印)"의 풍속을 따랐고, 당 후기에 창립된 불교 밀종 교파를 이어 보정산(寶頂山) 전교하였다. 특히 그들은 홍장불법(弘場佛法)을 주지로 삼고, 70년간 사방에 불상 조상(造像)의 보시를 구했는데, 그로 인하여 중국 불교 밀종 사상 유일한 석굴도장(石窟道場)이 건설되어, 대족석각조상은 흥성기를 이루게 된다. 그 시기에 다른 곳의 조상은 정체되었다. 사방의 도공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고, 석각의 고수들이 보정산에서 헌신적으로 예술 활동을 펼쳤으며, 보정산은 중국불교 밀종 유가파(瑜伽派)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892-1252년까지 360년간 대족에는 불교, 도교 및 3교 조상이 34곳에 건설되었으며, 이 조상의 숫자가 대족 석각 전체 숫자의 80%를 좌우한다. 그 중에서 북산의 마애조상은 892년(당 후기 경복景福 원년)에 이루어졌으며, 그 외에 1082-1252년 북송 원풍(元豊)에서 남송 순우(淳佑)까지 170년 동안 고르게 건성되었다. 13세기 남송 말기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석각조상이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5세기 명 말기에 이르러 마애조상이 점차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는데, 이 작업은 청 후기까지 이루어졌다. 15세기초에서 19세기말까지(명, 청 양대간) 약 500년간 이루어진 마애조상은 39곳이 있는데, 그 중에 아름다운 것은 많지 않고, 단지 소형 조상구(造像區)가 많고, 조각의 수도 별로 많지 않아 현재 대족 석각 조상 숫자의 약 20%를 차지할 뿐이다.
1) 북산(北山)
북산 마애조상(磨崖造像)은 대족현의 북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당말에 조각이 시작되었고, 북산불만(北山佛灣)이 중심을 이룬다. 북산불만의 마애조상은 892년-1162년 사이에 조각되기 시작했는데, 조각상의 길이는 300m, 높이는 7-10m이다. 한편 벌집같이 생긴 감굴(龕窟)은 북단과 남단으로 나뉘어 지며, 편의상 290호( )로 분류하고 있다(1-100호는 남단이며, 101-290호는 북단이다). 이 중에 조상(造像) 264개의 감굴(龕窟)이 있는데, 조상들의 제재(題材)는 주로 불교 밀종(密宗)의 것이 위주가 되어, 총 수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 3교의 조상과 정토종(淨土宗)의 조상들이 있다. 특히 이러한 조각상의 제재들은 당시 민간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이는 불교가 세속화된 산물이다.
북산의 조상들은 섬세하며, 예술적이고 정미한 특색을 지닌다. 특히 9-12세기에 중국 민간불교 신앙 및 석굴 예술은 변화, 발전하였는데, 당 후기 조상의 소재는 12 종류정도 되는데, 관음(觀音), 지장합감(地藏合龕), 아미타불(阿彌陀佛)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 조각상은 대체로 풍만하고 기질이 온후하며 문양이 세밀하여 모두 당나라 귀족풍을 띠고 있다. 제 5호 비사간천왕감(毗沙間天王龕), 제 9호 천수관음감(千手觀音龕), 석가모니불감(釋迦牟尼佛龕)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2) 보정산(寶頂산) 마애조상
보정산은 대족 우강산(尤崗山)의 동북쪽 15km에 위치하며, 해발 527. 83m 이다. 보정산 마애조상은 성수사(聖壽寺)가 중심이 되는데, 대불만(大佛灣)과 소불만(小佛灣)의 여러 조상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조상들은 1174에서 1252년 사이 70년간에 이루진 것으로 여러 가지 부처의 조상들은 대형 불교 밀종 조상의 도장을 이룬다.
대불만(大佛灣)은 성수사의 좌측 아래에 위치하며 U자 형태로 된 작은 만(小灣)이다. 길이는 500m, 높이는 8-25m로, 조상(造像)은 동, 남, 북의 세 면의 석벽 위에 새겨져 있으며, 편의상 31호로 분류하고 있다. 다음으로 소불만(小佛灣)은 성수사의 좌측 남면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그 위에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으며, 모두 9호로 분류한다. 중요한 것으로는 조사법신(祖師法身)과 경목탑(經目搭), 칠불감벽(七佛龕壁) 등이 있다.
보정산 마애조상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 보정산 마애조상은 드물게 볼 수 있는 중국 불교 밀종(密宗) 석굴의 도장이다.
· 보정산 마애조상의 표현 앙식은 석굴예술 가운데서 독자적으로 한 파를 이룬다.
· 조각상은 거듭 철리(哲理)를 전하려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불교의 기본 교의와
중국 유가의 윤리 뿐 아니라 이학(理學)적 심성과 도교적 학설이 융합되어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송대 불교 사상의 특색이다.
· 보정산 마애조상은 중국 석굴 예술을 민족화, 생활화 한 모범이다.
· 보정산 마애조상은 석굴 예술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여러 방면으로 창조 발전 시켰다.
3) 남산석각(南山石刻)
남산(南山)은 대족 우강산에서 남쪽으로 2km 있는 곳, 해발 514m에 위치한다. 이곳의 조상은 1131-1162년 남송 소흥시기에 이루어졌고, 조각의 면적은 길이 86m, 높이 3.5-10.2m로 모두 15호5 로 분류된다. 그 중에는 5개 조각상 감굴(龕窟)은 주로 삼청고통(三淸古洞), 후토성모감(后土聖母龕), 진무대제감(眞武大帝龕)등 도교 제재(題材)가 위주이다. 대족석각 중 11-13세기의 도교 마애조상은 중국 도교 석굴조상으로는 최다이며, 가장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신계(神系)가 완전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의 조상들은 보존이 잘 되어있기로 유명하다.
제 5호 삼청고통공각상 421신(三淸古洞共刻像421身)은 도교의 최고신인 삼청(三淸)이 주가되고, 이어서 사어(四御) 및 성모(聖母), 왕모(王母) 등의 여러 신이 짝하여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12세기 도교에서 이미 초기의 노군(老君)에서 유래한 삼관(三官) 숭배가 신계(神系)로 변화되었으며, 신계는 명확한 삼청(三淸)이고, "사어(四御)" 신앙이 역사적 사실임을 생동감 있게 반영하고 있다. 중국 송대 도교 석굴 중 이 석굴의 조각이 가장 아름다우며, 내용 면에서도 송대 도교 신계(神系)의 실물자료를 반영한 가장 완전한 것으로, 고대의 종교적,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4) 석간산 석각(石間山 石刻)
석간산은 대족 우강산의 동쪽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으로 해발 374.1m이다. 이곳의 조상은 1092년-1151년에 이루어졌는데, 석각상의 전면의 길이는 71.8m, 높이는 3.4-5m이며, 모두 16호 분류되고, 12 조상의 감굴(龕窟)이 있다. 그 외에도 조상기(造像記)가 20건, 돌비석, 제각(題刻)이 8건, 배수기(培修記) 8건이 있다.
석간산 마애조상은 불교, 도교의 합일 조상구(造像區로)이나 도교의 조각상이 가장 큰 특색을 이룬다. 특히 제 2호 옥황대제감(玉皇大帝龕), 제 7호 독각오통대제(獨脚五通大帝), 제 10호 삼황통현존조상35신(三皇洞現存造像35身), 제 12호 동악대제보간변상감각상98신(東岳大帝寶 變相龕刻像98身) 등은 도교적인 것이다. 한편 불교 소재의 것으로는 약사불감(葯師佛龕), 수월관음감(水月觀音龕), 석가불감(釋迦佛龕), 십성관음굴(十聖觀音窟) 등이 있는데, 이 중 제 6호 "십성관음굴"이 가장 정미하다.
5) 석전산(石篆山) 석각
석전산은 대족 우강산의 서남쪽 25km에 위치하며, 해발 444.6m이다. 불혜사(佛惠寺)의 <엄손기비(嚴遜記碑)>에 의하면 조각상은 서기 1082년에서 1096년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조각상의 길이는 130m, 높이는 3-8m, 모두 10호로 분류된다.
석적산의 마애조상은 전형적인 유, 불 도 삼교 합일 조상구로, 여러 석굴 중 드물게 발견되는 곳이다. 그 중 제 6호 공자급십철감(公子及十哲龕)의 정면 벽에는 중국 대사상가,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좌상이 있고, 측면의 벽에는 저명한 십대제자가 새겨져있다. 한편 제 7호는 심산불감(三身佛龕)이며, 제 8호는 노군감(老君龕)으로 정 중앙에 중국도교 창시자인 노자의 좌상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7존진인(七尊眞人), 법사상(法師像)이 있다.
♣ 답사일정 제 10 일 : 대족-중경
3000년 역사의 고도(古都) 중경(重慶)은 삼면이 강과 접해 있고, 인구 4백만이 넘는 남서지방 최대의 공업 도시이지만 산수가 아름답고 시내의 건축물이 언덕에 층층이 자리잡은 산성(山城)의 모습으로 형성되어 있어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사천분지의 남동부, 장강과 가릉강(嘉陵江)의 합류점에 발달한 도시이다. 예로부터 수상교통의 요충지로 번영했던 곳이다. 1937년,1945년 장개석이 국민당 임시정부를 두었고 주은래가 이끄는 중국 공산당 남방국(南方局)과 팔로군판사처도 이곳에 설치되자 항일과 혁명의 무대로 되면서 인구가 늘어났다. 그후 공업도시로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며 지금은 도시 인구가 1400만으로 중국에서 제일 많다.
도시로서의 역사는 깊고, 기원전에는 파국(巴國)이라는 나라가 존재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수당(隨唐)시대에는 위저우(유유州)라고 불렸으며, 현재도 중경의 별칭으로 쓰이는 '유'의 어언이 이미 여기에 나타나 있다. 또한 산청(山城)이라는 별명도 있다.
기후는 겨울에 극도의 추위가 없는 대신 여름에는 중국의 3대 화덕(중경. 무한. 남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이며 40℃를 넘을 만큼 혹독하게 더운 날도 있다. 또한 강의 합류점에 있는 탓으로 안개가 생기는 날이 많아 안개의 중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답사일정 제 11일 : 중경-남경
노군동(老君洞 : 로우쮠뚱)
남산풍경구 유람지중의 하나이다. 당대에 건축된 노군동은 원래 광화사(廣化寺)라 불렀다. 明萬曆9년(1581년)에 도교의 시조인 李老君이 불교사원인 광화사를 대우묘(大禹廟)도산사(塗山寺)와 교환하여 도교사원으로 고친후 "태극궁"(세칭"老君洞))이라 하였다.
명나라 말기 노군동은 병기에 의해 파손되였었다. 도사들에 의해 재건된후에도 청나라 도광, 동치, 광서년간에 여러번 수리하고 증축한것이 지금 노군동의 모습이다. 현재 노군동은 9개 궁전에 8개 동굴이 있다. 전반 건축분포는 천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궁전은 산에 의지하여 만들었고 그림은 벽을 이용하여 새겨졌다. 산문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자리잡고, 팔자형패루(牌樓)식, 벽돌구조, 절벽을 따라 건축되였다. 문위에는 태극도가 그려져있고 양측에는 부조 한폭씩 걸려져있는데 왼쪽에는 "백학이 노군을 태우고(白鶴載老君)", 오른쪽에는 "청우가 청운을 밟는다(靑牛步靑雲)"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산문에서 부터 절벽을 따라 "玄"자형으로 건축된 9개궁전은 중국원림조형을 택하였는데 매우 가관이다. 산꼭대기 바위에 "노자가 청우를 타고 함곡관을 건느다(老子騎靑牛過函谷關)"라고 새긴 석각이있고 관내에는 불교와 도교에 관한 마애(摩崖)이야기 그림이 남아있다. 그중에서 구룡비(九龍碑)와 팔난암(八難岩)이 제일 진귀하다.
남경 소개
1. 정식 명칭/약칭
1)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 한국의 도청소재지에 해당
2) 별칭 : 녕(寧) 혹은 금릉(金陵)
2. 행정 구분
市는 10개 행정구(行政區: 시 중심 구분)와 5개 현(縣:시 관할 교외지역에 대한 구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3. 면적/인구
1) 면적 : 시전체 6,516㎢, 시중심,행정구867㎢
2) 인구 : 시전체 518만명, 시중심,행정구 260만명
4. 지리적 위치
1)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의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종산(鐘山), 서쪽으로는 晥南(완남)구릉지대와 맞닿은 전략적 요충지이다. 행정적으로는 서쪽으로 안휘성(安徽省)에 인접해 있다.
2) 중국인들은 남경의 지리적 중요성에 대해 일찍이 “용이 감싸고 맹호가 마주보고 엎드린 형국(龍蟠虎踞)라고 표현했다. 이는 남경 동편에 위치한 종산(鐘山)에서 시작하는 산맥이 마치 용이 감싸듯이 동쪽에 포진해 있고, 서편의 석두산(石頭山) - 현재의 청량산(淸凉山)은 마치 호랑이가 엎드린 것과 같은 지세(청룡백호의 지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삼국지에 유비의 참모로 등장하는 제갈량이 했다고 하는 설이 유력했으나, 고증에 의하면 제갈량은 남경에 와본 적이 없으며 대신 유비가 경구(京口) - 지금의 진강(鎭江)시로 손권을 만나러 가던 중 남경에 머물러 지형을 살펴본 후, 경구(京口)에 도착하여 손권에 남경에 도읍을 정할 것을 권하면서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후에 손권은 유비의 말을 받아드려 서기229년 오(吳)나라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 남경으로 천도하게 되는 것이며, 이때 이후로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동진(東晋),송, 제(齊), 양(梁),진(陳) 그리고 당(唐)나라 이후의 5代10國시대의 남당(唐), 명(明), 근대의 태평천국(太平天國), 손문(孫文)의 중화민국(中華民國)에 이르기까지 총10개 국가가 449년에 걸쳐 도읍지를 정했던 곳으로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5. 남경의 약칭(略稱)에 대한 이야기
1) 금릉(金陵)이라는 명칭은 남경시 동쪽에 위치한 종산(鐘山)에서 유래한다. 종산은 최초에는 금릉산으로 불리웠는데, 전국시대(B.C.496년에서B.C.221년) 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월(越)나라를 대파하고 남경을 보니 제왕의 기가 서려있는 바, 금으로 만든 인형을 묻어서 그 왕기를 눌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동진(東晋)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 때, 금릉산 정상에서 자금색(紫金色)이 서린 빛을 보고서 紫金山 혹은 약칭으로 金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6. 산업
1) 전자, 화학등 HIGH TECH 산업이 발달한 곳이며, 그외에도 운수업, 관광업등이 발달하였다. 특히 최근에는 장강연안 개발계획에 따라서 해외투자산업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한국기업으로는 금호타이어공장(총투자 1.2억불규모, 연300만개 타이어 생산)이 진출해 있다. 최근에는 개혁개방의 심화정책에 따라 3차산업 발전을 통한 중진국형 산업구조 도달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7. 교통
1) 전국을 잇는 항공노선이 있으며, 특히 장강(長江)을 육로로 건널 수 있는 도로/철도 복층(復層)대교 - 장강대교 -가 있고, 장강에 인접하여 수상운송에 유리한 항구(만톤급 선박 정박가능) 및 상해로 통하는 고속도로망이 있어서 전국 화물의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다.
8. 특산물
1) 음식
남경음식의 특징은 남방의 담백한 맛과 북방의 짙은 맛이 골고루 섞인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鹽水鴨(소금물에 절인 오리고기) - 냉채”,가 있다. 특히 현재 북경요리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는 “북경오리고기”가 본래는 남경요리였으나, 명나라 成祖의 북경 천도시 음식이 전해져, 지금은 북경요리의 대명사로 불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2) 차(茶)
남경은 주변에 구릉과 산이 많아 차의 재배에 적당하다. 특산차로는“우화차(雨花茶)” - 남경의 우화대(雨花臺)에서 유래 - 가 유명하며, 모양이 소나무의 솔모양으로 생겨서 특이하다.
9. 기후
1) 남경의 여름은 예로부터 “중국의 3대 가마솥”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덥다. 남경의 여름철 최고 온도는 평균 36℃ - 37℃이며, ℃까지 올라 갈 경우도 있다. 따라서 남경의 나무숲은 여름에 생활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며, 도로 곳곳마다 수십 년된 나무들이 여름철 도시인들의 더위를 피하게 해준다.
10. 남경사람의 기질
1) 남경사람들은 북방인의 대범함과 남방인의 소박함이 섞여 독특한 기질을 이루고 있다.
2) 남경의 남성
남경의 남자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북방의 남성 우월주의’나 상해의 '공처가' 라는 구분을 하기를 싫어하며, 어떻게 보면 다 큰 아 이들같이 순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결혼 상대자로는 남경여자를 더 선호하나 남경 여자들이 콧대가 높아서 상대를 안해주면 “여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여자를 사랑하느냐”라는 묘한 자기 합리화에 빠지기도 하며 이는 맹목적으로 사랑을 추구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의 성격을 대변 하기도 한다.
3) 남경의 여성
남경의 남성들은 남경 여성들이 아름다운지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타지역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남경 여인들은 하나같이 청순하고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남경의 남성들과는 달리 남경의 여성들은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자유요 내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자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타지역 남성들과 결혼을 기피하지 않는다. 남경 여자들의 특징은 화장을 즐기지 않는 청순함에 있고, 개성에 따라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옷을 입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들의 직선적인 화법에서도 드러나며, 이러한 건강한 행동들이 남경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4) 남경인의 음주습관
남경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에 영향을 받아서 술을 서로 강요하지 않으며, 주량에 따라 알아서 마시기를 좋아한다. 또한 북방사람들처럼 술로 친구를 사귀려는 무모함(?)도 없는 편이다.
11. 남경의 방언(方言)
1) 남경의 언어는 중국 표준어인 보통어 외에 자체 방언이 있다. 그러나 상해나 광동지역과 같이 보통어와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국가의 수도가 위치했던 관계로 官方語(표준말)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경의 방언은 보통어에 강남지방의 발음이 섞여 듣기에 아주 불편하지는 않다.
남경대학
남경 대학은 중국교육부 직속 중점 종합성 대학으로 1902년에 설립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명한 대학중의 하나이다. 캠퍼스는 장강 하류에 위치한 중국 4대 고도의 하나인 남경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려한 풍경과 온화한 기후, 훌륭한 환경 그리고 편리한 교통을 자랑한다.
남경대학은 1,800여명의 교수와 전문 연구인들이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 14개 단과대학과 36개 학과에 55개 학사전공, 106개 석사전공, 55개 박사전공, 14개 박사 후 과정이 있는데, 현재 19,0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또한 남경대학은 우수한 교과과정과 연구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18개의 국가 중점학과, 11개의 강소성 중점학과, 10개의 국가중점실험실, 70여개의 연구소와 연구센터, 350여만권에 달하는 도서관 장서에 우수한 교수진과 교수법, 풍부한 교과과정, 폭넓은 연구영역을 갖추고 각국의 학생들을 맞고 있다.
명효릉
명효릉은 명나라 개국황제인 태조 주원장과 부인 마씨의 합장묘이다.
명나라 역대 황제묘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며, 당시 총 100㎢의 넓이를 자랑했다고 한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시기에 24년이 걸렸으며, 태조가 안장된 후에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3년후인 1413년에야 완성됨. 당시에는 陵園과 方城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었으며, 그 주위를 10만그루의 청솔나무, 천마리의 꽃사슴들이 노니는 웅장하고 수려한 경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건축물과 주변 경치는 명나라말 청나라 군대가 장강이남을 공격시,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과정에서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본래 명효릉의 정식 입구는 현재의 남경농업대학 정문의 맞은편이다. 여기에는 명대의 중요한 비석이 보전되어 있는데, 이것이 속칭“하마패방(下馬牌坊)으로 본래 효릉에 참배하러 온 모든 대신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 말을 내려 도보로 효릉까지 걸어가면서 명나라 개국황제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고 하다.
명효릉의 입구를 지나 소나무숲을 따라서 들어가면 주원장의 공덕을 칭송한 비전이 있는데 이는 청대 건축물로서 청나라 康熙帝(유명한康熙字典-중국의 고대글자 사전-을 제작하고 이민족으로서 중국인에게 존경받고 있는 황제)가“나라를 다스림이 唐나라와 宋나라보다 뛰어났다 - 治隆唐宋”라고 새긴 돌비석이 거북이 등위에 올려져 있다. 그 양쪽에는 역시 청나라의 賢君이었던 乾隆皇帝의 頌文(칭송하는 글)이 있다.
- 향전(享殿)
향전은 3층으로 기초를 쌓아올려 만든 장방형의 佛殿이었다. 그 규모가 당시에 길이 67.5m, 너비 25.8m 정도로 明代 전통무늬가 조각된 돌난간,용과 봉황이 새겨진 기둥이 있었고, 3층으로 된 기초석은 각층마다 네 귀퉁이에 야수모양의 석상을 돌출되게 접합했고, 둘레에도 야수모양의 조각을 놓고 야수의 입안에 배수구를 만들어 조각의 외형적 아름다움과 배수구로서의 기능적 설계에 충실했던 殿閣이었다. 그러나 600년이라는 세월과 두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모두 파손되었으며, 현재 보이는 건축물은 1992년 중산릉 문물관에서 약간이나마 형태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 신도(神道)
향전에서 方城(아래에 설명)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걸어들어가면 거대한 석상(石象)으로 이루어진 길이 있다. 이곳의 양측에는 돌로 만들어진 코끼리, 기린, 낙타, 말등 동물의 조각과 문무대신의 조각이 늘어서 있어 명효릉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 방성(方城) : 네모진 성곽이라는 뜻임
주원장 묘의 바로 앞에 위치한 건축물이다. 규모는 높이 16m, 동서 75m, 남북 31m이다. 성곽의 기초는 불상의 蓮花臺(부처님 좌상의 기초로 자주 사용되는 양식으로 연꽃 모양)를 본땄으며, 2.4m 높이로 이루어져 있다. 성곽의 중앙에 원형의 통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50여개의 계단을 통하여 성곽 뒷부분에 연결된다. 이 통로는 어둡고 음침하여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 명루(明樓)
방성의 성곽윗면에 있던 건축물로 원래는 지붕이 황색유리기와로 덮혀 있었다고 하나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현재는 벽면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 주원장과 마황후의 합장묘
방성의 뒷면에 석조로 기초를 쌓고, 寶城이라고 써 있는 山인지 건축물인지 모를 정도로 큰 규모의 무덤이 바로 주원장과 마황후의 합장묘라고 하나 내부의 어느곳에 묻혀 있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고 한다. 명효릉은 직접 보면 느끼는 것이 하나의 큰 동산으로, 묘의 내부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 민간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명태조가 사망후 당시 13개 성문을 통해 동시에 13개의 棺의 행렬이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어느 성문에서 나온 관이 주원장의 유체가 담긴 관인지는 지금까지도 비밀에 가려 있으며, 혹자는 13개의 관이 모두 가짜이며, 주원장의 유체는 남경시 明故宮의 지하에 묻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명나라 주원장의 유체는 효릉에 묻혀있는것이 정답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첫째, 주원장의 부인 마씨가 먼저 효릉에 묻혔으며, 평소에 주원장은 부인을 매우 존경했다. 둘째, 주원장의 아들인 成祖가 효릉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기까지 3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공사에 투입된 인적, 물적 자원을 볼때 검소한 주원장이 다른데 안장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등을 들 수 있겠다. 그렇지만 아직도 정확한 유체의 안장위치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명태조 황후 마씨
마씨는 安徽省 사람으로 그 사람됨이 현숙하고, 총명하여 주원장이 제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조언과 내조를 하였다. 주원장이 제위에 오른 뒤에도 근검하고 소박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며, 항상 백성들을 위해서 걱정하는 역대에 보기드문 황후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 주원장은 이런 마씨를 항상 존경하며, 그 지혜로움과 생활태도를 신하들 에게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주원장의 자녀들
주원장은 총 36명의 자녀(26명의 아들과 10명의 딸)를 두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주원장은 26명의 아들들을 모두 왕에 봉하여 각지를 통치하도록 하였다. 구러나 불행히도 太子이던 朱標가 병약하여 일찍 죽으니 주원장은 장자세습의 원칙에 따라서 태자의 자리를 주표의 아들인 손자 朱孫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나이어린 태자는 야심에 찬 주표의 아들, 즉 태자의 삼촌인 燕王 朱隸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힘이 모자랐다. 여기서 우리나라 이조시대 성종의 제위찬탈과 흡한 사건이 벌어지니, 주원장이 71세를 일기로 죽자마자 연왕은 대군을 이끌고서 남경에 쳐들어와 제위를 찬탈한다(成祖). 그렇지만 성조는 통치기간에 훌륭한 업적을 많이 세웠으며, 또한 정통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제위 19년째되는 해에 북경으로 천도를 하여 지금의 북경 자금성에서 통치를 계속하였다.
부자묘(夫子廟)
남경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송나라때에는 국립학교가 있었으나, 그후 세월이 지나면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변하였다. 현재는 2.6만평방미터의 면적에 각 토산품과 공예품, 귀금속 판매점 및 기타 소매점들이 들어서서 남경의 상해 예원(豫園)상업지구로 불리고 있다.
♣ 답사 일정 제 12 일
: 자료 부족으로 자료집에 싣지 못했습니다.
♣ 답사일정 제 13, 14 일
모산 답사
모산(茅山)과 상청파(上淸派)
북위에 신천사도가 성립하고 약 반세기 가량 지났을 때 강남지방에서는 강소성의 구용현 근처에 있는 모산(茅山)을 중심으로 하는 한 도교 교단이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상청파(上淸派)다. 상청파는 구곡산(句曲山)이라고도 부르는 모산을 본거지로 했기 때문에 모산파, 모산도 등으로도 불리고 있다. 당나라의 이발(李渤)이 편집한 {진계(眞系)}에는 상청파가 동진의 양희(楊羲)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쓰여져 있으나 {모산지(茅山志)}에는 서진의 위화존(魏華存)을 그 첫 번째 태사(太師)로 하고 있다. 위화존(魏華存)은 그러나 실제 인물이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하남성의 어떤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던 여자 무당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해 본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고 있는 위화존(魏華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상청파(上淸派)}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즉, {진계(眞系)}에 의히면 양희가 '중진(衆眞)', 즉 많은 신들로부터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한편 {진고(眞誥)} 권 19에서는 위화존이 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모산지(茅山志)}에는 그것에 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는 바와 같이 갖가지의 설이 있다. 그러나 양희를 상청파의 제2대 조사로 인정하고 있는 점만은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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