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민간신앙과 도교
1. 들어가는 글
중국의 종교전통을 통시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면 역사적인 변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기본적 구조와 특성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전통종교라 할 수 있는 유교, 불교, 도교에는 그러한 지속적인 기본 구조와 특성이 나타나며, 민간신앙 역시 중국의 유, 불, 도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지속적인 전통과 기본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을 전통종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민간신앙이란 어느 한 사회의 일반 대중이 실천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와 그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믿음체계 전체를 지칭한다. 이러한 민간신앙의 특성이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들과 끊임없이 상관관계를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민간신앙은 중국의 유, 불, 도와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체계로 봐야한다. 또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민간신앙의 실천들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가정,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굳이 마스페로의 의견을 따르지 않더라도 중국의 종교적 특징을 크게 유, 불, 도로 대표할 수 있는 '전통종교'와 민간차원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민간신앙'의 두 가지 체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체계의 고유성을 나눌 수 있는 근거를 대등한 선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민간신앙의 다양하고 총체적인 모습을 일괄적으로 서술하기에는 분명 무리한 점이 있으리라고 여겨지지만, 근래에 들어 인류학과 민속학의 성과로 나타나는 민간신앙의 모습을 통해 전통종교와의 관계를 고찰할 필요성이 더욱 요구된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중국의 민간신앙과 현재 전통종교로 자리잡고 있는 중국의 종교 중 그 뿌리가 민간신앙적 성격에 닿아 있고, 현재까지 민간신앙적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게 엿보이는 도교를 통해 그 두 전통의 외면적 관계와 도교가 가지고 있는 자체적 성격을 통해 두 가지 체계의 종교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두 가지 고유한 체계를 종교의례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서 중국의 민간신앙과 도교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글을 전개시킬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중국의 민간신앙과 도교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 두 전통의 상호관련성을 고찰함과 동시에 도교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전통을 긴장과 통합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봄으로써 그러한 특징이 어떻게 현대 도교의례에 반영되어 나타나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또한 민간신앙과 정전전통 사이의 관계가 도교의례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그 역사적 사건과 현대 도교의례 안에서 살펴볼 것이다. 도교의례 연구가인 케네스 딘(Kenneth Dean) 역시 자신의 연구에서 중심문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아직 규명되지 않은 민중제의(popular cults)와 도교전례(Taoist liturgy)의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도 있을 듯 싶다.
2. 중국의 민간신앙
중국의 민간신앙은 다신숭배로써 도교, 불교, 등의 종교신, 천신, 사직신, 자연신, 조상신, 민간신 등을 포함한다. 형식으로 보면 점복(占卜), 제혼(祭魂), 명상(命相), 풍수, 택길, 소지(燒紙), 분향, 공봉(供奉), 금기, 구살(驅煞), 통경, 부주(符呪) 등이며 각양각색의 신령을 숭배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내용으로 한다. 민간신앙은 일종의 매우 복잡한 사회문화현상이다.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복신앙에서부터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사회적 장치이기도 하다.
상왕조 때(殷代)의 점복 행사는 오로지 임금의 의식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실시되었으므로 대개 궁전에서 거행되었고, 왕이 직접 감독하였으며 무당을 포함한 모든 신하들이 참석하였다. 먼저 갑골을 다듬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동물의 뼈는 외지로부터 수입한 소의 견갑골이었고, 거북의 껍질은 화남에서 생산되는 거북의 배 부분이었다. 그러한 재료는 모두가 진귀한 것들로서 아마도 천지를 교통하는 수단으로 삼아 그 가치를 높이고자 했던 듯 싶다. 갑골은 사용 전에 세밀히 다듬는데, 먼저 평평하게 깎고 잘 문지른 다음 물에 담가놓았다가 정성껏 바람에 말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잘 다듬어진 갑골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 점복할 때에 불로 그 구멍낸 부분에 열을 가하면 하늘거리는 실 모양의 균열이 생겨나게 된다. 그 균열에 대한 해석이 당시의 물음에 대한 조상의 회답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복관(卜官)이 하는 경우도 있으나 임금이 직접 해석하기도 한다. 점복이 끝난 뒤 어떤 때는 균열 옆에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들을 새겨놓기도 하고, 때로는 점복을 통해 얻어낸 회답을 새겨 놓는다. 그렇게 새겨놓은 복사를 통해 상왕조의 왕들은 축성(築城)할 때나 정벌, 사냥, 순시 등을 나갈 때, 또는 특별한 제전(祭典)을 거행하기 전에 모두 조상에게 점을 쳐 허락과 찬성을 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왕 자신의 그날 밤이나 다음날의 길흉을 묻기도 하고, 해몽을 구하기도 했으며, 왕비의 생육을 알리기도 했고, 병이 걸리거나, 이가 아프지 않을 것인가 등을 묻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복사를 연구분석하는 학자들은 상왕조 왕들의 여러 가지 종교와 의식생활의 비밀, 그리고 당시 문화와 사회의 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초사(楚辭)]는 중국종교 전통 내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민간신앙의 요소를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원가(袁珂: 1940- )는 가장 먼저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시경]을 꼽고 있으며, 그 이후에 나타난 중요한 작품으로 [초사]를 들고 있다. [초사]는 고대 중국 남방문학에 속하는 작품이다. 즉 초나라의 민간신앙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그중 <초혼(招魂)>은 인간의 혼과 관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초혼>은 전국시대에 중국 남방에 위치해 있던 초나라에서 거행되었던 사령제의 일종인 초혼의례의 내용을 보여주는 가사(歌辭)이다. <초혼>에는 "魂兮歸來(혼이여 돌아오라)"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편안히 자연스러운 죽음을 겪지 못하고 불운하게 죽어간 자들의 혼백을 위한 의례과정에서 초나라 사람들이 생각했던 영혼관과 우주관을 살필 수 있다.
중국종교 전통에서 영혼에 해당되는 용어인 혼(魂)과 백(魄)은 문자상으로 귀(鬼)에서 발달된 글자이며, 혼백사상은 음양설의 영향으로 양(陽)의 특성을 띠는 혼, 음(陰)의 특성을 띠는 백의 두 요소로서 영혼을 구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이란 이러한 혼과 백이 분리되는 현상을 의미하였고, 죽은 후 인간의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상이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혼백사상의 확립과 더불어 인간이 죽은 후 신체에서 떠나가 버린다고 생각되어진 혼을 부르는 관습이 전국시대에 이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초나라의 무(巫)신앙이 가장 성행하고 유명하였다.
중국에서 세속조직과 종교조직의 기본 요소는 모두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처럼 영지였다. 세속 사회는 가족 집단과 영지의 소유라는 두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조상 숭배와 토지신 숭배를 토대로 삼았다. 이 두 숭배는 사회의 두 가지 근본 사태를 종교적으로 전환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토지신이 신격화된 영지이듯이, 조상도 신격화된 가족이다. 이러한 두 숭배는 모든 계층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인의 경우 중류(中 )가 집의 토지신이었는데, 중류는 집의 여러 장소에 있는 신들과 조상신의 도움을 받았다. 영지에는 사(社)라는 토지신이 있었다. 이 사는 수확의 신과 산, 강, 호수, 제후국의 여러 장소에 있는 신들과 제후의 조상신의 도움을 받았다. 제국에는 대사(大社) 또는 왕사(王社)가 있었다. 대사는 수확의 신, 오악(五嶽)의 신, 사해(四海)의 신, 제국의 유명한 장소의 신 그리고 왕실의 조상신의 도움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사와 대사 숭배는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 도립번(陶立 )은 중국의 민간신앙의 표현 형식으로 자연숭배, 토템숭배, 조상숭배로 나누고 있다. 자연숭배는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대한 숭배를 말하는 것으로 일월(日月)과 성신(星辰), 풍우(風雨)와 뇌전(雷電), 산림(山林)과 수목(樹木), 강하(江河)와 호해(湖海), 동식물 등에 대한 숭배와 신앙이다. 일월에 대한 숭배는 세계 각 민족에게 보편화된 신앙이고, 대지에 대한 숭배는 가장 많이 경배하는 사신(社神) 즉, 토지신에 대한 숭배로 표현된다. 또한 토템숭배는 중국의 많은 민족 가운데서 매우 보편적인 민간신앙이다. 토템숭배 대상은 각각의 씨족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동식물숭배와 토템숭배는 구분해야 한다. 토템숭배는 동식물숭배를 포괄했으나, 동식물숭배가 꼭 토템숭배인 것은 아니다. 조상숭배는 귀신관념의 기초 위에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토템숭배와 다른 점이라면 조상숭배는 조상의 영혼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토템숭배는 이미 조상숭배의 요인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도립번은 중국 민간신앙의 특징으로 자발성, 공리성, 신비성, 민족 지역성, 산만성, 복잡성을 들고 있다.
중국종교사는 고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것이 중국의 종교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거나 오늘날의 신앙이 옛날 것과 같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정치적 혁명과 사회적 변동이 종교 관념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관념은 언제나 옛 관념의 틀을 깨지 않고 서서히 소개됨으로써 옛 관념과 신앙에 충분히 동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도교의 특징
왜 도교에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체계의 전통을 살필 수가 있는가? 그것은 도교가 유교와 대응하는 비중원(非中原)적 문화양식의 총결집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원(中原)에서는 일찍부터 합리주의적, 인문주의적 관념이 발전하여 유교라는 가장 중국적인 사상체계 혹은 의식체계가 출현, 발전하였다. 이에 반해 중원과 이웃한 다른 지역, 예컨대 장강유역과 강남지역이나 발해(渤海) 연안지역 혹은 파촉(巴蜀)지역 등에서는 신비주의적, 초월적 관념과 무속이 계속 유지되거나 발전하였다. 특히 장강유역과 강남지역, 즉 초(楚)지역에서는 도가(道家)라 하는 형이상학적 우주론과 초세간적 인생철학이 발전하고, 중원의 동방 혹은 동북 즉 발해연안에서는 신선사상이 발전하였으며, 비'한족'계 종족들의 집거지역인 파촉 등 장강유역에서는 무술(巫術)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의식과 관념 혹은 사상들이 이들 지역에서 발생, 발전한 것은 광활한 황토평원인 중원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지리적 자연환경의 특수성에 주로 기인하였기 때문이다. 심산대택(深山大澤)과 밀림으로 뒤덮여 있던 남방에서는 대자연의 웅후하고 예측불가능한 힘이 인간에게 신비적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풍요로운 물산과 온후한 기온은 여유 있고 자유로운 정신을 키워주었다. 큰 바닷가에 사는 동방인들은 불로장생이라는 인간의 본능적 희구를 수평선 너머에 있는 미지의, 확인 불가능한 세계에 심을 수 있었다. 이처럼 특수한 자연환경에서 성장한 신선사상과 도가사상, 그리고 무격(巫覡)신앙 등은 중원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음양오행사상 등과 더불어 신비주의라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제 지역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중원에서 발생, 성장한 유교문화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후한시대부터 중원의 음양오행사상과 초(楚) 지역에서 발생한 도가사상, 해안 지역에서 발전한 신선사상, 그리고 파촉 등 장강 유역에서 유지되어온 무격신앙 등 신비주의적 제 요소들이 하나의 문화체계로 통합되는 상황이 전개되었으니, 그것이 곧 도교인 것이다. 어쨌든 중국인의 사상과 신앙의 역사 속에서 중국인 고유의 사상과 신앙을 체계화시킨 것은 유교와 도교이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 전통문화의 양대 지주라 할 수 있으며, 모두 중국문화의 여러 복합적 요소가 담겨있는 체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유교와 도교는 중국 고유의 문화복합체라 할 수 있다.
중국문화의 양대 지주인 유교와 도교를 대비시켜 보면, 전자는 국가나 왕조라는 관료, 지성인의 입장에서 나온 교학이고, 후자는 '민(民)' 즉 농민과 일반 민중의 신앙으로서, 신(神)신앙에 따라 세워진 농민, 민중의 집단결사나 왕조에 의해 인정된 교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와 도교의 관계가 아닌, 도교 자체 내에서도 조직과 체계, 내용을 가진 도교를 일반적으로 '성립(成立)도교' 혹은 '교단(敎團)도교'라 부르고 있으며, 이것에 비해 통합적인 조직이나 체계는 갖고 있지 않으나 민중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모든 도교적 신앙과 행위를 '민중도교' 혹은 '민간도교'라 지칭한다.
도교의 이러한 두 가지 체계의 특징 때문에 도교의례 속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여타 소수민족 지역에서 행해지는 종교의례(주로 샤머니즘)와 두드러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도교의례 자체 내에는 체계적인 정전(正典)전통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 어느 지역이나 그 지역의 문화와 특성에 맞는 의례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의례에 대해 전통종교 혹은 국가종교로 자리잡은 경우가 아닌 이상 기록으로 체계화시킨 경우는 그리 흔치않다. 그렇다면 도교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 것인가? 도교에는 분명 민간신앙적인 요소와 제도권적인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이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주변적이냐? 제도권적이냐?의 구분과 일치할 수도 있을 것이며 민중의례적인 도교냐? 철학화된 도교냐?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교 안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특징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 정전전통
기원후 수세기 동안 중국은 후한(後漢) 시대, 내부분열과 이민족의 침입이 있었던 삼국(三國) 시대와 육조(六朝) 시대였는데 종교적으로 두드러진 대변혁기였다. 경전의 본문이 결정적으로 확립되고 위대한 주석이 이루어져 유교가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띠게 된 것도 이 시대였다. 그리고 불교라는 외국 종교가 전래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도 이 시대였다. 또한 도교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절정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것도 이 시대였다. 도교에는 시간을 뛰어넘어 지속되어 온 기본적인 교설의 체계가 후한 시대 이전에는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설의 창시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교가 단순히 민간신앙의 집성이라거나 자연종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도교의 초기 단계에서는 도교 전체로서의 일체감이나, 일체감을 하나로 묶은 대립의식이 명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어느 정도의 일체감을 부여한 것은 실은 외래종교인 '불교'였다. 그런 점에서 도교와 불교는 닮은 점이 많다. 불교에는 사원이 있고 승니(僧尼)가 있다. 사원에 해당되는 건물을 도교에서는 도관(道觀) 또는 궁관(宮觀)이라고 한다. 이것은 '--궁', '--관'이라고 명명한다. 궁과 관 사이에 상하관계나 규모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구조는 사찰과 대개 비슷하고 대도관에는 반지(泮池; 연못), 종루(鐘樓), 고루(鼓樓)도 만들어져 있다.
중국 역사에서 중국인 스스로가 '교의(敎義)'를 갖고 그것에 기초하여 특수한 '교단'을 조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최초의 예는 후한(A.D.25-220) 말 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와 삼장(三張; 장릉, 장형, 장노)의 '오두미도(五斗米道)'이다. 태평도란 이름 그대로 왕과 제후, 지주와 호족, 관료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대중들이 마침내 자기방어를 위해서, 즉 평화로운 생활을 되찾기 위해 결연히 일으킨 종교적, 정치적 단체이다. 그 지도자는 장각이고, 중심경전은 [태평경(太平經)]이다. [태평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가 중심으로 '도'의 현현 혹은 '도'의 전개에 의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도'를 일단 근본적, 보편적 원리로서 존중하고, 직접적으로 '도'의 체득자인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침을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편 태평도와 거의 같은 무렵 같은 목적으로 중국 대륙 서쪽의 파(巴), 촉(蜀), 한중(漢中) 등 사천(四川)으로부터 섬서성(陝西省) 남부 일대에 걸쳐 오두미도라는 종교결사운동이 일어났다. 제창자는 장릉(張陵)으로 아들인 형(衡), 손자인 로(魯)와 함께 3대에 걸쳐 그 지방 일대에 큰 종교왕국을 건설했다. 그 교단의 중심경전은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이다. 내용적으로는 [태평경]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특히 '도계(道誡)'를 지킬 것을 강조하고 세상의 사악한 설이나 주의에 미혹되는 일이 없이 '진도(眞道)'에 충실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이 태평도와 오두미도의 출현이 그대로 도교 성립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두 교단은 그 성립시기부터 경전을 갖고 출발했다. 이는 도교가 전통종교로서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후한 말에 이르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일정한 교의와 그에 기초해 특수 교단을 정비한 최초로 주목할 만한 교법이 성립하였던 것이다.
도교에는 민중의 신앙이 주체가 되는 측면 말고도 또 다른 면이 있다. 바로 [포박자(抱朴子)]로 대표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린 것이기는 하지만 방법론적으로는 통치계급 혹은 상층지식인들의 신앙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선(仙)을 도교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포박자 갈홍(葛洪; 283-343)이다. 즉 고대로부터 있었던 신선사상이 갈홍에 의해서 도교학의 중심으로 위치를 확립한 것이다. 여기서 '선(仙)'은 특정한 계층의 특권적이거나 사상적인 산물로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선도(仙道)로서 개방된 것이다.
[포박자] 이후, 새로운 경전의 작성에 있어서 무당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상청파(上淸派)를 들 수 있다. 이 교파는 진, 흥녕 3년(365)에 남악위부인이라는 영무(靈巫)를 중심으로 여러 진령들이 모산의 영매인 양희에게 강하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상청파의 중심경전인 [상청경(上淸經)] 31권과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살필 수 있는 것은 [도장(道藏)]이다. [도장]이란 도교의 모든 경을 말하며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명대(明代)의 판본으로 5,485권이다. 그것은 '삼동사보(三洞四輔)'에 의해 구성, 분류된다. 이 가운데 삼동은 12류로 나눠지는 것이 예로부터 전통으로, [도장]의 기본적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삼동이란 동진(洞眞), 동현(洞玄), 동신(洞神)으로, 그 중심 경전은 원래 [상청경(上淸經)], [영보경(靈寶經)], [삼황경(三皇經)]이다. 사보란 태현(太玄), 태평(太平), 태청(太淸), 정일(正一)의 4부(部)이다. 오두미도나 천사도 관계의 경전은 삼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부가적인 부분이라고 해야 할 사보 중 정일부에 들어있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 삼동사보가 구상될 당시, 오두미도의 교세가 이미 쇠퇴하였음을 말해준다. 동시에 도교의 일체 경전을 편성할 정도의 내실을 갖고 있던 교단이 오두미도와는 별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민간신앙
중국의 민간신앙은 논어에서 말한 '귀신을 섬기는' 방법과 '나(儺: 귀신을 쫓는 의식)'의 방술을 통해서, 그리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문제되던 시대부터 이미 논의되어 온 것으로서, 역사를 통해 농민, 민중의 사회기반 위에서 형성된 무축(巫祝)과 상층의 호족계급 및 지식층에 의해 유지된 신선, 방사, 도사 관계의 주술, 방술 신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민간신앙이 기초가 되어 행해진 방술과 도술은 후한시대가 되면 귀신을 섬기고 귀신을 부리는 무축도(巫祝道)에 도가, 신선(양생, 행기, 금단), 그리고 유교, 불교와 같은 복잡한 요소들의 영향이 가미되면서 그러한 방술과 도술을 행하는 농민, 민중집단인 '도(원시적인 민중도교)'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나중에 도교의 기초가 된다. 도교의 근본은 노자나 장자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정신적 초월에 있지 않고, 오히려 현실세계에 살면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욕망과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 이유가 없었다면 도교는 결코 그처럼 광범위한 계층을 망라하면서 거의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중국 주(周)의 종교를 살펴보면 제사를 집행하는 제후, 그 제후를 따라서 제사에 참여하는 신하 등, 각 개인이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신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에만 따르는 특정한 사회집단의 종교생활로 표현되고 있다. 평민 곧 농민들의 제례의식은 들에서 하는 농사의 리듬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봄이 시작될 무렵, 농사는 각 마을에서 밭을 가는 의식으로 시작되었다. 토지신이 영토의 신성한 지배자로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싶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소식을 토지신에게 고했다. 그러나 농사를 실제로 시작하기 전에 사악한 기(氣), 곧 겨울의 흔적을 몰아내야만 했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처럼 고대 중국에서도 토지의 생산력과 가문의 생식력이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겨울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의식은 농사철의 시작과 함께 혼인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역마다 축제가 열렸다. 이런 축제 가운데는 땅에 묶인 금령을 깨기 위해서 땅을 가는 제의, 토지신에게 봄가을에 지내는 제의, 여름에 비를 기원하는 제의 등 여러 내용을 갖춘 제의를 행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축제는 상제에게 지내는 제의와 함께 봄에 시작되어 가을에 끝났다.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모두 개인이 개별적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가문과 영지와 같은 구성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수장(首長)이 공식적으로 거행하는 제사이고 기도였다. 자기 개인을 위해서 신에게 요청하고 싶은 사람들은 영매, 주의(呪醫), 비를 기원하는 사람, 귀신을 쫓는 방상(方相) 등 다양한 계층의 무당, 곧 특별한 매개자를 찾아갔다. 왜냐하면 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매개자들만이 부탁한 사람의 요청을 신에게 대신 전하러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 왕조 말(末),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전문가인 무당의 체험 속에서 인격적이고 의식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경험적 증거를 개인의 종교문제에서 사람들은 찾아냈다. 그들에게 종교란 더 이상 사회 전체의 물질적 행복을 얻기 위해서 백성을 대신해 몇몇 제후가 사제가 되어 거행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는 모든 사람 각자의 일로 여겨졌다. 각 개인은 우선은 이승에서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저승에서 개인적이고 영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신과 접촉하여 효과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공식종교가 거의 무시해버린, 사후(死後) 인간의 운명에 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신령체계이다. 도교의 만신전(萬神殿)은 수없이 많은 갖가지 종류의 신과 영혼들로 뒤섞인 집단이다. 이는 전적으로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된 민간신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옥황(玉皇)을 들 수 있다. 옥황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 대중적으로는 노천야(老天爺)라고 불리는 최고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이 옥황상제라는 칭호는 민간신앙의 혼합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 까닭은 옥황은 도교로부터 빌려온 것이고, 상제는 국가 종교로부터 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옥황전에 모셔져 있는 옥황상제는 중국 민간신앙의 여러 신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이지만, 옥황이 이처럼 높이 받들어진 것은 송의 진종(眞宗; 998-1022)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옥황이라는 용어 자체가 송대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도교에 있어서 옥황사상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며, 송대에 이르러서 옥황대제로서 최고신의 지위를 확실하게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민간신앙의 신령체계로서 자연의 여러 신들을 살펴볼 수 있다. 자주 숭배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와 달에 대한 숭배가 남아 있고, 하늘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노파인 소청랑(掃晴娘), 우레의 신인 뇌공(雷公), 비의 신 우사(雨師), 바람의 신 풍백(風伯), 그리고 기우제의 대상이 되는 용왕이 있다. 용의 춤과 행진은 비가 오게 하려는 아주 오래된 의식이다.
또한 지상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옥황은 온갖 관리신들을 임명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지상의 관리들이 완벽한 계급조직을 이루듯이 신들도 완전한 위계를 가지고 있다. 즉 관리신과 이들의 행정구역이 있는 것이다. 옥황에 의해서 다양한 지위에 임명된 인물들은 해마다 옥황에게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 보고하고, 그 업적에 따라서 상이나 벌을 받고, 승진하거나 강등된다. 그 예로 오악(五嶽; 태산, 형산, 화산, 항산, 숭산)의 신이 있고, 따로 동악대제(東嶽大帝)가 있다. 그리고 성황신과 토지신이 있으며, 집과 그곳에 사는 가족을 담당하는 재신(財神)이 있고, 침대의 신, 뒷간의 신, 조왕신( 王神)이 있으며, 그리고 집안의 조상신이 있고, 불교에 영향받은 신도 있다. 또한 직업의 신과 상업의 신과 조합의 신도 있으며, 개인을 보호하는 관제(關帝)와 같은 신도 있다. 또한 수많은 신선들과 서왕모(西王母)도 빠뜨릴 수 없다.
4. 도교 의례의 연행구조
실제 도교에 대해 중국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많은 중국 사람이 도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있지만 도교의례를 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의례의 특징은 정형성과 주기적인 반복성에 있다. 일정한 형식적 행위를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 수행함으로써 그 형식에 담겨진 성스러움의 의미를 밝혀주고, 나아가 일상성 속에 숨어 있는 근원적 성스러움을 재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례가 지닌 기능이다. 또한 의례는 초월적인 신과의 만남을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일정한 형식적 행위를 반복 수행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신과 만날 수 있게 하는 통로를 마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례의 참여자와 참여하지 않는 자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의례연구에 있어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밝히고 있듯이 기능적 접근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능적 접근이 가장 취약한 영역은 사회변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능주의적 이론이 변화를 다루지 못한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논리-의미적인(logico-meaningful)' 문화적 측면과 '인과-기능적인(causal-functional)' 사회구조적 측면을 동등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의 특징인 논리-의미적 통합(integration)은 양식의 통일, 논리적 함의의 통일, 의미와 가치의 통일이고, 사회체계의 특징인 인과-기능적 통합은 모든 부분들이 단일한 원인 및 결과의 그물에 결합되어 있는 유기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이러한 두 통합의 유형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중 하나가 취하는 특별한 형태가 다른 것이 취할 형태를 직접적으로 내포하지는 않기 때문에, 둘 사이 그리고 그것들과 세 번째 요소(우리가 흔히 인성구조라고 부르는 각 개인 안의 동기부여적 통합의 유형) 사이에는 '내재적 불일치'와 '긴장'이 존재한다. 따라서 도교의례에 있어서도 역사적 상황에 따라 문화적 측면과 사회구조적 측면이 정전전통과 민간신앙이라는 두 요소로 '내재적 불일치'와 '긴장'을 유지하며 현재까지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그러한 긴장이 형성되었는지 단정지어 말할 수 없을뿐더러 의례의 참여자 입장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별로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교의례의 두 체계를 고찰하려는 이유는 두 체계가 각기 나름대로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도교 안에서 자연스럽게 역사적 통합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교의례를 두 체계 중 어떤 하나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의례분석의 흐름을 논의하면서 캐더린 벨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문제로 제기한다. 즉 대부분의 의례분석들은 시종일관 사상(thought)과 행위(action)의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이루어져 있고, 실상 의례분석들은 사상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한 쪽에 강조점을 두고 논의하거나, 아니면 양자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수행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왜 이런 이항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반면 중국철학에 대한 로저 에임즈(Roger T Ames)의 분석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중국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을 병립론(polarism)과 이원론(dualism)에서 분석한다. 서구철학의 이원론은 무(無)로부터의 창조와 무(無)로의 파괴라는 우주론에서 근거한다. 즉 세계의 본질적인 의미와 질서를 주관하는 비결정적이고 무조건적인 힘, 혹은 창조주와 그에 복종하고 의존적인 피조물과의 이원적인 관계에서 서구철학사의 다양한 이원론들은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철학의 병립론은 두 개의 상호보완적인 항들로 구성된다. 두 항들은 상호 존재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들로서, 자동 발생적(auto-generative)이고, 자기 결정적인(self-determinate) 성격을 지닌다.
도교의 의례면은 크게 신선술적인 것과 무축(巫祝)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신선술적인 것은 신선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행법을 가리키는데 금단의 제조와 복용, 도의 체득을 목적으로 신들과의 교감을 행하는 수일(守一), 존사(存思) 등과 같은 각종 명상법, 자신의 몸을 단정(丹鼎)으로 삼고 정(精), 신(神), 기(氣)를 세 가지 약으로 삼아 단을 수련하는 내단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무축적인 것은 이른바 부록재초(符 齋醮)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데 재초와 같은 대규모의 의식이나 제사를 포함해서 치병, 구사(驅邪), 기우, 액막이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세계 각지의 샤먼이 행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주술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의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의례들을 성립시키는 배경이 되는 세계관에는 도교의 독자적인 특성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전자의 의례는 스스로의 수행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후자와 같은 주술의례, 제사 등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행하는 것으로 그 행사를 통해 도사들이 갖고 있는 사제, 주술사, 샤먼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이 드러나게 된다. 아울러 이것은 도사들이 무당과 같은 민간종교가들과 경합을 벌이는 현장이었으며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신이나 신령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를 둘러싸고 도교적 세계관이 민간신앙의 세계관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관계해 온 장(場)이기도 하다. 특히 후자의 의례를 둘러싸고 도교의 사회적 역할과 민간신앙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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