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만의 도교의례
현재 대만에는 도관에 해당되는 것은 발견되지 않으며 그곳에서 수행생활을 하는 도사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도사들은 모두 재가 생활을 하는데 주로 홍두법(紅頭法)이라고 하는 주술의례를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초제(醮祭), 벽사( 邪), 액막이와 같은 주술 등 이른바 도생(度生)의 법을 행하는 도사를 '홍두(紅頭)도사'라고 부르고 또한 장의나 추선공양 등의 사자(死者)의례, 즉 도사(度死)의 법을 겸하는 도사를 '오두(烏頭)도사'라고 부른다. 북부와 중부에는 전자가, 남부에는 후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도사 외에 홍두법의 주술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법사(法師)'라고 부른다.
대남 시내의 동악전, 임수부인묘, 옥황궁 등에서는 법사나 도사가 매일 갖가지 법사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악전은 동악대제를 주신으로 하는 묘(廟)로서 청조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동악대제는 동악 태산의 신으로 태산은 예로부터 명부(冥府)가 있는 곳으로 믿어졌는데, 그 때문에 동악대제는 명계를 통괄하는 신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연유에서 이 묘에서는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천당으로 인도하는 의식인 초승(超昇)이 행해진다. 영혼이 지옥에서 해방되어 이 세상에 나오는 음력 7월이나 동악대제의 탄생일 말고도 이 묘에서는 항상 도사와 신자들이 무리를 지어 이 의식을 행한다.
초제(醮祭)는 몇 년에 한번씩 묘를 중심으로 치러지는 큰 규모의 지역제사인데 그 지역의 평안과 풍년을 빌기 위해 행해진다. 북부 대만에서는 묘(廟)가 창전되거나 수축이 다 끝났을 때 그 완성을 기념하는 동시에 지역의 평안을 기원하는 '기안경성초(祈安慶成醮)'라는 초가 주로 행해지고 있다. 반면 남부에서는 이런 형태의 것도 많이 행해지지만 다른 곳과 비교해 볼 때 특징적인 것은 왕야(王爺)를 맞아들이는 왕초(王醮)가 치러진다는 점이다. 기안경성초는 그 성격상 부정기적인 것이지만 왕초는 보통 3년에 한번 또는 5년, 12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왕초의 목적은 전염병이 유행하는 때에 시기를 정해 왕야(瘟神, 역병신)를 제사지낸 뒤 왕선(王船)이라고 불리는 배에 실어 강이나 바다로 흘려보내 전염병을 마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보도(普度)는 제사지내줄 사람이 없는 무연불(無緣佛)들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으로 이른바 시아귀(施餓鬼)이다. 도사는 갑마다 설치된 공물대를 일일이 돌면서 주문을 왼 뒤 도로의 한 귀퉁이에 보도를 위해 설치된 단에 올라가 의식을 행한다. 사람들에게는 이 날까지 육식이 허용되지 않다가 보도가 끝나면서 금기가 풀려 각 가정에서는 친척들과 친구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인다.
과의(科儀)는 정통적인 오두도사만이 행할 수 있는 명상을 수반하는 비의(秘儀)를 말하는데, 첫째날 저녁에 하는 숙계의(宿啓儀)로 시작하여 다음날 조조(早朝), 오조(午朝), 만조(晩朝), 즉 삼조를 계속해서 하고 셋째날의 정초(正醮)로 끝난다. 과의는 각 의식에서 만들어지는 특정한 소문(疏文)을 특정한 신들에게 보내기 위해 행해지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사자(使者)의 역할을 하게 될 신들도 정하게 되며, 의식의 효과적인 진행을 위해서 신들에게 다른 명령을 내릴 때 필요한 수인(手印)과 주문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교(秘敎)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의란 도(道)와 합일에 이르는 명상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사는 숙계-삼조-정초라는 일련의 의식에서 혼돈-삼청-오행-만물과 같은 조화의 과정을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 최종적으로는 혼돈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도와의 합일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만의 경우 도관을 중심으로 한 성립도교는 체득자들만의 비밀적인 과의(科儀)를 통해 도와의 합일을 추구하는데 비해, 거리마다 있는 사묘(寺廟)를 중심으로 한 민간도교는 기복적이고 공과(功過)를 따지는 윤리성을 띠면서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어서 상호보충적 성격을 갖는다.
또한 대만의 민간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를 살펴보면, 집안이나 상점 등의 직장에서 모시는 가신(家神)과 가신에게 드리는 일상적인 종교의례를 비롯하여, 시기에 따른 연중행사 및 집안의 흉사(凶事)와 경사(慶事) 때의 의례가 기초를 이룬다. 이 기초 위에 지역 공동체가 함께 출자하여 주최하는 초례(醮禮) 등의 공동축제가 있고, 영력(靈力)을 새롭게 하기 위한 순례가 단체로 행해진다. 민간신앙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인 점(占) 역시 대부분의 경우 사묘를 방문한 개인들이 직접 배교(杯 )를 던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특별한 경우에만 무(巫)나 도사 등 전문가의 도움을 청한다. 다시 말해서 무가 민간신앙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필요할 때 도사 등 삼교(三敎)의 전문인이 민간의례의 집전자로 초청되기는 하지만 민간신앙은 삼교와 구분되는 그 나름대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민간신앙과 도교의 신관(神觀) 전체를 살펴볼 때 사람들은 도사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도교신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도사들은 민중이 신앙하는 대부분의 신들에 대해서 역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런 실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간이 믿는 신들의 위계는 도교적인 입장에서 체계화된 것이기 때문에 민간신앙과 도교는 지속성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민간신앙의 최고신인 옥황상제는 도교의 도 혹은 원시천존이 송대(宋代) 이후로 대중화된 것이고, 대중은 도사를 민간이 주최하는 의례의 집전자로 초빙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대만의 민간신앙은 운영면에서는 독자성을 지켜오면서 사상 및 의례면에서는 자발적으로 도교에 의존해 왔다는 묘한 복합성을 띤다. 그 때문에 민간신앙을 민간도교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기도 하지만, 민간신앙 안에는 도교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영향 역시 지대하며, 무엇을 수용할 것인가가 결국은 지역 사람들의 결정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복건성의 도교의례
케네스 딘은 명대(明代)의 정통도장 시기에 반영된 복건성(福建省, Fujian)의 도교와 민간제의들(popular cults) 사이의 관계를 조사함으로써 공인된 도사들과 정부관리 사이의 거래관계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인된 도사들과 정부관리 사이에 밀접한 거래를 한 제의에는 지방신격에게 바쳐진 문서와 경전들, 사원소식지와 영매의 주문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자료가 갖추어져 있으나 정부관리와의 사이가 친밀하지 않은 경우 [도장(道藏)]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들을 갖게 된다. 바다의 여신인 마조( 祖) 제의와 같은 민간제의의 범주가 여기에 포함된다. 더구나 정부관리들과 관계가 거의 없는 경우에는 정통도장(正統道藏)에 기록조차 없다. 이러한 제의의 예로 복건의 민남( 南)지역의 보생대제(保生大帝) 제의와 광택존왕(廣澤尊王) 제의가 포함되는데 정통도장에는 언급되지 않으나 지방 도교 사제들은 이 신들을 위한 경전을 기록했다. 또한 어떤 기록도 전례문서에 남아있지 않으나 신과 여신들의 신격과 이름을 부르는 기원의 노래들이 있다. 청계교조(淸溪敎祖) 제의와 청수조사(淸水祖師) 제의와 같은 지방신들의 다양한 제의가 여기에 포함된다.
한편 앞에서 살핀 대만의 도교는 주로 복건성의 도교계통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만의 도사들도 정통파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용호산(龍虎山)으로 가서 부록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오두도사가 행하는 의식에는 [도장] 중에 있는 의례서에서 볼 수 있는 정통적인 의식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반면, 홍두도사가 행하는 의식은 민간신앙과의 혼합정도가 심해 복건성의 독특한 민간신앙적인 면도 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소(Saso)에 의하면 정통파 도사와 민간신앙에 더 가까운 도사와의 대립이 예로부터 보편적으로 있어 왔다고 강조한다.
문화혁명 동안 복건성의 경우 모든 도교 사원이 폐쇄되고, 도교도들은 잡혀갔다. 또한 많은 필사본, 그림, 의복, 의례도구들은 파괴되거나 몰수당했다. 그후 문화혁명의 금지가 풀리자 많은 해외동포들의 기부금이 마련되어 대대적인 사원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1979년 이래로 많은 도교 신자들이 지방문화와 종족 조직을 부활시키기 위해 다시 의례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도교의례는 초(醮, jiao: 공동체의 희생제의), 공덕(功德, gongde: 가족 추모식), 소법(小法, xiaofa: 개인을 위한 축귀적이고 조그만 의례)의 세 가지 형태로 구성된다. 초와 공덕은 반나절부터 7일이나 9일간까지 지속될 수 있다. 복건성에서는 중요한 열다섯 개 의례의 내용이 생략되거나 늘어날 수 있다. 반면 부수적인 의례에는 완전한 의례의 시간과 비용에 따라 서른 개 이상 추가할 수 있다. 도교의례 절차는 많은 부분에서 민주적이며 평등적인 과정을 강조한다. 점을 쳐서 공동체 대표를 무작위로 선정한다. 낮은 계층의 사회집단은 통합된 전례모임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의례에 대한 지원과 그것을 행하기 위해 상인들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도 한다.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계급적 갈등이나 친족 안의 억압은 의례를 준비하거나 그것을 행하는 과정에서 결속감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한 결속은 모든 사회집단들이 참여하는 신들의 행렬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청계교조의 행렬이다.
도교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공동체 의례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전례 구조를 제공한다. 의례의 맥락에서 사회적 지위가 또한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례(醮禮)에서는 도교만신전의 최고신들에 의해 지방의 지도자로서 지위가 부여되며, 식자층을 위한 의례가 정교화되기도 한다. 이는 광택존왕의 제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례는 지방의 식자층의 참여를 위해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민간신앙을 위한 통합적인 전례틀로서 기능하지는 않았다. 유교의 제사는 지역 유지의 권력을 중요시하며 드러내는데 반해 도교의례는 크게 다르다. 도교의례는 그것의 우주적 구조 안에 다른 모든 의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간의례 안에 유교, 불교의 정치적인 편입이 전례화됨으로써 공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다. 복건성의 보생대제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 불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케네스 딘의 연구목적은 복건성의 지방 제의의 역사와 부흥에 있어서 도교가 차지하는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역 전통의 생존투쟁을 국가의 지배구조에 대항하는 전통적 지방권력 구조의 출현으로 봐서는 안된다. 이런 시각은 전통의 연속성과 국가, 지방정부, 중국 전역에 걸친 매우 다양한 공동체의 전통 구조 가운데 성립된 복잡한 절차와 합의를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사천성의 도교의례
사천성(四川省)은 티벳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중국내륙지역으로 그 크기나 인구로 중국의 10%를 차지하여 서남지방의 중심을 이룰 뿐 아니라 고대로부터 '파촉문화'라는 고유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사천성 성도(成都)분지를 중심으로 한 파촉문화는 초(楚)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쌀을 경작하는 중국 남방문화권에 속했지만 초문화가 북방문화에 비판적이었던데 비해 파촉문화는 북방문화에 열려 있는 지리적, 문화적 교통의 요새였다. 이런 사천성의 문화지리적 성격은 사천성 도교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서 사천성은 중국도교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남방도교인 천사도(天師道)의 발생지이면서도 현재는 북중국에서 형성된 개혁도교인 전진교가 모든 도관(道觀)을 차지하고 있다. 사천성은 도교의 창설지일 뿐 아니라 계속 도교가 성행하였고, 오늘날에도 가장 활발한 신앙활동과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어서 중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관으로 간주되는 21개 주요 도관 중 3개가 성도(成都) 주위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사천성의 도관들은 도교와 도교성립 이전의 민간신앙과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는 유적과 설화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사천성에는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불리는 청성산(靑城山)에서 풍도귀성(豊都鬼城)에 이르기까지 장생과 신선의 경지를 상징하는 공간과 죽음의 세계를 대표하는 구원적 공간들인 명산(名山)들이 즐비해 있다. 이러한 민간신앙과의 습합현상뿐만 아니라 천사도, 상청파, 전진교 등의 교리가 혼재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도관의 역사 속에서 도교와 불교와의 정치적인 경쟁도 살펴볼 수 있다.
사천성 학명산(鶴鳴山) 도관에 거주하고 있는 도사들의 숫자는 1989년에 10명으로 보고되었는데 그중 건도(乾道; 남자도사)가 3명, 곤도(坤道; 여자도사)가 7명으로 문화혁명 후 새로 복귀되는 도교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1995년에는 도사가 15명으로 건도 6명, 곤도가 9명이었고, 젊은 도사들 중 전진교의 본산인 백운관(白雲觀)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북경으로 3년간 교육을 받으러 간다.
사천성의 칠곡산에는 문창궁조묘(文昌宮祖廟) 동악묘(東岳廟)가 있는데, 문창은 본래 북두칠성의 위 육성(六星)을 총칭하는 것으로 길성(吉星)으로 귀하게 여겨 민간신앙에서는 공명(功名)과 녹위(祿位)를 관장하는 천신이었다. 그런데 도교에서 이 문창신앙을 수용하여 인간의 복록을 관장하는 신으로 정착시켰다. 또한 사천성 동부에는 풍도귀성(豊都鬼城)이 있는데 음진귀제(陰眞鬼帝)가 죄인을 벌하는 곳으로 중국에서 동쪽의 태산(泰山)과 더불어 죽은 이들이 가는 세계로 알려져 있다. 위진시대에 이루어진 도서(道書) [도인경(度人經)]에 의하면 풍도에는 삼관(三官)과 구부(九府)가 설치되어 있어서 귀제(鬼帝)가 많은 귀신들을 거느리고 인간의 죄악에 따라 명(命)을 판단한다. 그런데 풍도는 원래 고대 파촉 저강족( 羌族)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귀성은 이들의 거주지를 지칭했다. 결국 풍도귀신이란 풍도의 저강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천사가 천사도를 창건하고 청성산의 귀신을 항복시킨 후에 오부(五部)의 귀신들이 스스로 나와 서약을 하고 바른 길을 따랐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것은 촉(蜀)지역에 살던 모든 귀신이 장천사에게 직접 복속되어 풍도귀국(豊都鬼國)의 관리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또한 천사동(天師洞)을 중심으로 한 청성산 도관들은 도교의 복합적인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도교 성립 이전부터 민속적 귀(鬼)신앙, 사후세계에 대한 이미지들, 풍수지리설, 양생론 등을 수용하여 도교의 체계적 교리 안에 재정립하였다. 이 안에는 천사도의 창시자인 장릉의 항마의례와 상청파의 삼청사상, 전진교의 성명쌍수적 내단실천 등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도교가 중국문화에 기여해 온 의학, 음악, 예술적 창작과 보존이 청성산 도관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
5. 사회 변화에 따른 민간의례의 위치
중국은 1949년 이후 종교에 대한 이중정책으로 일관해왔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이라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종교를 '인민'의 계급성과 혁명성을 약화시키는 아편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이 단일국가로서의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민족의 자율과 정체성을 제도적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소위 '통일전선' 정책하에 흡수할 필요성이 있었다. 즉 중국은 종교를 배척하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통치이념으로 견지해야 한다는 원칙과, 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에서 이중적인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리고 이는 제도적 인정과 현실적인 억제정책으로 표출되어 왔다.
1987년 상해사회과학원이 출판한 《중국사회주의시기의 종교문제》에서 구체적 현황보고서들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다섯 종교, 즉 불교, 도교, 이슬람교, 개신교, 천주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민간신앙은 미신(迷信)으로 제외되었다. 단지 다른 종교들의 보고서 안에 산발적으로 민간신앙이 비쳐지고 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 이념으로서 종법예교(宗法禮敎)와 윤리관념을 형성했다고 본다. 이것은 20세기 초 양계초(梁啓超)가 신앙을 정신(正信)과 미신(迷信)으로 나눈 것과 그 기본입장이 같다. 또한 신앙이란 과학문화가 완전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만 필요한 것이라는 입장에서도 같다. 한마디로 현대 중국의 종교이해는 전통적 중국인이 지녔던 천리(天理)라는 궁극적 실재나 그 천리가 인간본성에 뿌리 박혀 있다는 신앙을 상실하고, 종교의 기능에서만 그 유용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천리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비록 오늘날 종교에 대한 국가정책이 화해의 방향으로 가고는 있지만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성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관심을 소외시키고 종교의 문화윤리적 기능만을 인정하게 하는 종교이해의 한계성을 갖는다.
현대 중국은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함에 따라 기독교 등 서방종교가 새로이 전파되고 있는 한편 중국의 민간종교인 도교가 부흥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도교 연구자들의 주도하에 지방정부의 협조와 도사들의 자구노력에 의하여 문화혁명 때 부서진 도관을 복원하고, 어떤 곳은 새로 도관을 짓고 있다. 도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문화혁명 때 거의 자취를 감춘 것 같았으나 농촌지역에서는 민간신앙과 습합되어 결코 소멸되지 않았고, 내면적으로 숨어서 신앙을 계속 갖고 있었다고 한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구복신앙과 결부되어 도시에서 오히려 도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등소평이 등장한 뒤 4개 현대화 건설을 촉진하면서 당과 정부는 종교자유 정책을 다시 펼쳤다. 도교쪽에서도 신앙문제로 억울하게 굴욕을 당했던 인사들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도교계 인사들이 다시 각급 인민대표와 정치협의회 위원이 되어 정치 의정에 참여하게 됐다. 정부기관에 점령당했던 저명한 궁관(宮觀)들은 모두 도교계의 관리로 넘어가 도교활동의 장소로 회복되었고, 정부는 고건축(古建築)에 대하여 수선비를 보조하였고, 또한 문화혁명 이전을 기준으로 하여 일정한 경제적 보상을 해주었다. 그리고 도교 궁관의 관리체제도 의원과 집사가 교무를 관리하여 정상적 종교활동을 회복한 것이다.
또한 정치경제적 조건의 변화, 이를테면 농촌 개혁의 결과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사회계층 체계가 나타났으며, 과거에 비해 훨씬 사적이고 불평등한 체계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장례식이나 혼례식과 같은 의례를 통해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례의 복원을 위한 전통주의자들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문화를 비하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데올로기의 편협성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비판 위에서 의례의 복원이 또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간의례의 활성화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중국 사회주의 정권은 최근의 민간의례 활성화를 당국의 이데올로기 교육과 통제의 이완에 따른 봉건미신의 확산으로 규정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 전통문화의 일부를 훌륭한 민족적 유산으로 선전하기도 하고,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하는 등 과거에 비해 전통에 대해 훨씬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민간의례를 봉건적이고 미신적인 구시대 세계관의 반영으로 보는 정부의 관점은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의례는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의례의 활성화는 중국 농촌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문화적인 자원들을 활용하여 현실의 조건에 맞는 문화적 관행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제의의 관건은 공동체이다. 제의의 참가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하는 주체는 특정한 신격, 혹은 신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초월적 실체이다. 제의는 이들 신격에게 봉헌되는 것이다. 부름에 응한 신적 존재의 도래와 함께 공간은 하나의 성역으로, 시간은 시원의 시간으로 탈바꿈한다. 실제 중국은 하나의 나라라고는 해도 매우 다양한 지역과 문화적 차이를 포함하고 있으며, 종교행위에서도 구체적인 숭배의 대상과 의례의 내용에서 그 다양성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문화가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로 묶여질 수 있는 것은 여러 민간신앙 형태와 종교조직 안에 통합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 중국의 전통 종교의례의 복원과 활발한 종교활동 참여는 세속적 제도와 신성한 권위를 일치시켜온 중국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 남고 유지되어온 전통적 입장에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며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가는 중국인의 적극적인 태도라고 보여진다.
6. 나오는 글
"도교는 도를 최고 신앙으로 삼았으므로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일정한 수련을 거치면 장생불사하여 도를 얻고 신선이 된다. 도교는 이렇게 수도(修道)하여 신선이 되는 사상을 핵심으로 삼고, 노자 및 그의 도에 관한 학설을 신화(神化)시켰다. 노자를 높이어 교주로 삼고 신명(神明)으로 떠받든다. 아울러 노자의 [道德經]을 주요 경전으로 삼고, 경문(經文)에 대해 종교적인 해석을 하였다. 도교사상은 도교의 사상적 근원의 하나이다. 이와 동시에 도교는 유가(儒家) 및 음양가(陰陽家), 묵가, 참위학의 사상까지도 흡수하고 중국고대의 신앙 위에서 방선도(方仙道), 황노도(黃老道) 등의 사상들과 그 수지(修持)방법에 따라서 점차로 형성되었다. 도교는 동한 중엽에 생겨났으며 봉건사회의 긴 흐름에 따라서 발전하였다."(卿希泰 主編, [中國道敎史]서문)
도교의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방법상의 어려움과 문제점이 있다. 도교에는 원래 밀교와 같은 비교(秘敎)적인 성격이 있어 의례의 시행에 있어서도 그 중요부분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비전(秘傳)으로 전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비교(秘敎)적인 전통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엄하게 정해진 등급을 단계적으로 밟아 점차 핵심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요구된다. 그 때문에 의식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해하고, 그 구조와 기본적인 세계관에 대해 더 깊은 연구가 행해지기 위해서는 실제로 오의(奧義)를 통달한 도사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도교의례에서 도교경전의 역할은 주로 주문으로 나타나므로 천제(天帝) 혹은 도(道)와 인간의 합일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결국 민간신앙적인 요소와 철학적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도교의례 자체의 전통수립은 철학화된 과정을 지님과 동시에 국가종교로서의 승인 과정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순한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그쳤다면 사회주의 통제로부터 쉽게 복원되거나 부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철학적인 요소의 부각만이 남아 있다면 민간 차원에서 신앙 대상으로 유지되거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도교의례의 두 체계, 정전전통과 민간신앙이 각기 나름대로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이면서 실천적인 의례 안에서 자연스러운 통합과정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교의례를 두 체계 중 어떤 하나의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와 차이와 분석을 낳는다. 바로 이러한 점이 도교의례 안에 내포되어 있는 긴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헌적 자료와 그 시대적 상황의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도교의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례 안에는 일반 사람들의 정서가 내포된 모든 가치와 바램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된다. 문화혁명 이후, 민간의례 현상이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단지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와의 관련성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이다. 앞으로 도교의례 연구에 있어서 더 첨가해야 할 부분은 의례의 상징적, 전통적 의미 분석과 의례 참여자의 종교적, 심리적 세계에 대한 분석이 어우러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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