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뿌리」 망각한 민족은 몰락한다

지식창고지기 2009. 7. 28. 09:30

 

「뿌리」 망각한 민족은 몰락한다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은 한 민족에게 두가지 능력이 있다는 징표가 된다. 첫째는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이, 둘째는 문화를 보존할 능력이 있다는 것의 역사적 징표이다. 창조에는 재능이 필요하고, 보존에는 관리가 필요하다. 창조가 인간의 재능에 의해서 이뤄진 소산이라면, 보존은 민족의 애정에 의해서 이뤄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천재는 있어도 유산이 없을 수가 있다. 모든 천재적 창조가 반드시 후세에 남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에겐 기록만 있고 그를 증명할 물증이 없는 지난 날의 찬란한 문화가 숱하게 있다.

  그와는 반대로 천재는 없어도 문화유산이 있을 수 있다. 인류의 보편적인 자산이 되는 천재적 창조란 세계가 「세계화」되기 이전부터 이미 국경을 넘나들고 있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이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작품들은 그 태반이 다른 고장의 천재적 재능이 창조한 문화유산들이다.

  고유의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은 한 민족에게 「뿌리」가 있다는 것의 가시적 징표이다. 그러나 뿌리가 긴 문화라 해서 반드시 그 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되고 길이길이 계승, 발전되는 것만도 아니다. 이 지구위엔 외부의 폭력에 의해서 문화의 뿌리가 꺾인 민족, 혹은 내부의 타성에 의해서 스스로 문화의 뿌리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민족도 숱하게 있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훌륭한 문화를 창조해왔으며 그 문화를 잘도 보존해왔다. 우리는 뿌리가 긴 문화를 꽃 피워왔으며 그 문화의 뿌리를 소중히 간직해 온 민족이었다. 물론 오른쪽에는 흥망성쇠가 무상한, 막강한 대륙세력이 이웃하고 있고, 그리고 왼쪽에는 침략, 약탈을 일삼는 호전적인 해양세력이 이웃하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때로는 우리들의 문화창조와 특히 그 유산의 보존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강요하는 곤경에 처하게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그 역경속에서도 문화유산을 보존해 왔다는 것은 무위자연의 소산도 아니요, 단순자명한 이치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빈번한 국난을 겪으면서 민족의 자아를 보존하려는 비상한 의지의 결과요, 소실과 소멸의 위협으로부터 민족문화를 보존하려한 피눈물나는 의지의 승리라 해야 마땅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여러 고장에 설치한 사례라든지, 서울의 규장각 이외에 강화도에 따로 외규장각을 세운 사례등이 국가적 차원에서 문화유산의 보존에 힘을 기울인 보기라 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하에서 전형필 선생이 전재산을 투척하여 왜인의 손에 넘어간 민족문화의 소중한 유산들을 되찾아 모은 사례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보기라 할 수 있다.

  올해 1997년을 정부가 문화유산의 해로 정했다는 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가지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날이 갈수록 문화의 국경이 사라져가고 세계의 어디에 가도 무국적의 획일적인 대도시풍 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세기말의 세계속에서 다시 우리 민족과 문화의 자아를 일깨워 주는 뿌리를 되돌아보자는 뜻이겠다. 한국의 세계화가 세계속으로 민족적 주체의 함몰이나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주체의 자기표현과 자기주장의 기회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드시 갖춰야 할 전제가 될 것이다. 둘째로 문화유산의 해를 새삼 따로 정하고 나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하나의 「위기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만 한다면 무엇때문에 할 일 없이 문화유산의 해를 새삼 정한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는 「개발의 연대」라 일컫던 지난 연간에 문화유산에 대한 파렴치하고도 무지막지한 「폭행」을 자행해 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고, 그를 망각해서도 아니될 것이다. 이른바 「불도저식 행정」을 기능주의, 효율주의의 미명으로 감싸면서 신작로를 내기 위해 고궁의 뜰을 밀어붙여 아스팔트를 깔고 심지어 덕수궁의 대한문을 한때 자동차도로의 한복판에 고도처럼 담장없이 고립시켜놓은 폭거를 거리낌없이 자행하기도 했다.

  반드시 군부정권의 「개발독재」 시대에 국한된 얘기만도 아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90년대에 들어와서도 신라 천년의 옛 서울이 묻힌 경주에 고속철도 노선을 끌어들여 땅을 파헤치는 역사를 벌이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거리낌없이 논의하고도 있는 요즈음이다. 서양에는 「역사의 배은망덕」이란 말이 있다. 개발제일주의에 밀려 민족문화에 뿌리를 스스로 잃어가고 있는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는지….

  우리에겐 어버이를 닮지 못하고, 어버이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낮춰 부르는 「불초」란 말이 있다. 불초-그것은 민족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 전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박물관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세계 제11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오늘의 현실을 겸양도 에누리도 없이 표현한 자기호칭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곧잘 일본문화의 뿌리는 한국이고, 일본이 내세우는 문화적 자랑은 대부분이 우리가 전수한 것이라는 해식은 얘기를 늘어놓고도 있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실일수록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일 뿐이다. 우리가 제지술을 전수한 것이 사실이라해도 일본에서는 지금도 각종의 세련된 화지가 생산유통되고 있으나, 우리에겐 한지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앞으로 이 난에서도 우리에게 어떠한 문화유산이 있는지 되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그리고 나아가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최정호,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