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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의 가상 인터뷰

지식창고지기 2009. 7. 31. 10:51

허균과의 가상 인터뷰


혁명을 꿈꿨던 유교사회의 이단자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이 일개 도깨비 같은 자를 용납하여 제멋대로 야유하며 변환하게 내버려두기를 이렇게까지 한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허균이 일생 동안 해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광해군일기 10년 4월 29일)

이 글은 광해군 10년 허균이 남대문에 흉서를 붙여 놓고 모반을 획책했다며 수사를 요청하는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상소 중 일부 내용이다. 괴물, 도깨비 등 조선 양반사회 최고의 욕이 동원되고 있다.
도대체 허균이 어떤 인물이길래 이런 평가를 받아야 했을까. 우리에게는 그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 허균. 그러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양반의 나라 조선에서는 괴물이었던 허균, 그를 만났다.
허균을 만난 것은 감옥 안이었다.
남대문에 '인민을 구하고 포악한 임금을 치기 위해 하남대장군이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걸린 것을 허균의 측근인 하인준이 관가에 알렸다 오히려 의심을 받으면서 시작된 그의 역모사건은 수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상황은 거의 종료된 듯싶었다. 그를 옹호해 주는 변변한 정치세력 하나 없었다. 그의 정치적 행로를 같이 했던 이이첨은 오히려 그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었다. 광해군을 만나 변론할 기회도 사라졌다. 이이첨 등이 재판도 없이, 당연히 판결문도 없이 수사기록만 가지고 그를 극형에 처하고자 할 때였다.
허균
한국사 최고의 괴물?
-대감의 전력을 볼 때 혁명은 좀 뜻밖입니다. 어떤 경위로 혁명의 뜻을 품게 되었습니까?
" 내 소설 <홍길동전>을 읽어보지 않았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세상, 재주가 있어도 신분이 미천하면 제 뜻을 펼칠 수 없는 세상이 어찌 제대로 된 세상이겠소? 미친 세상이지. 더구나 임진란을 겪으면서 이 조정에 희망을 가질 수 없었소. 환멸만 있었소이다. 전쟁이 터졌는데 임금은 제 살 길만 찾아 중국으로 망명해 목숨이나 부지하려 했소. 백성들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굶어죽고, 찔려 죽고, 얼어 죽는 마당에 말이오. 내 처자식 역시 전쟁통에 다 죽지 않았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심했소. 내가 형님처럼 대했던 사명당 같은 승병장이나 곽재우 선생 같은 의병장에게 조정은 어떻게 했소. 행여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경계하지 않았소? 김덕령 같은 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소. 곽재우 선생도 그게 더러워 도술을 닦으며 산 속에 은거하지 않았습니까. 망해야 할 나라였소. 암, 진작에 망했어야지."

유교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홍길동전>
-그래도 광해군은 전쟁 때 분조를 이끌고 백성들과 함께 분전했던 임금 아닙니까? 즉위한 뒤에는 선혜청을 열어 방납의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도 했고, 나라 재건을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까. 명과 여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며 백성을 전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노력도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광해군과 함께 나라를 재건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안돼요, 안돼. 뿌리부터 썩어있는데 군왕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아요. 신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당파의 앞길부터 챙기는 사람들 아니오? 임금은 임금이고, 자신들의 주자학에 맞으면 다 아닙니까. 더구나 광해군이 누구 덕에 임금에 올랐어요? 이이첨 같은 소수 대북파 신료들 아니오. 이 사람들 발목에 잡히지 않을 수 없어요. 서인들은 이를 갈고 때를 노리고 있지 않아요. 광해군이 총명하기는 하나 지금에 와서는 전란을 피할 방안으로 대북정책에 열심이지만 조정의 일은 거의 손을 놓고 있어요. 임금도 진저리나는 거지요. 그 싸움에, 권력놀음과 허황된 명분싸움에요. 이런 사람들이 양반이고, 조선을 손안에 놓고 좌지우지하고 있어요. 이걸 갈아엎지 않으면 될 일이 없어요."

이상하다. 그 희망없는 조정에 허균은 20년간 들락거리지 않았나. 말년의 5년간은 권간(權奸)이라는 이이첨의 수하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강경 대북파의 행동대장역을 맡기도 하지 않았던가.

-대감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도 아예 세상을 피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이이첨 같은 사람 밑에서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습니까. 후세 사람들은 대감이 '칠서의 옥' 사건이 있은 뒤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이첨 밑으로 들어갔다며 소인의 처세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허, 그래요? 이이첨 밑으로 간 뒤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도 있었고, 세상 사람들의 욕하는 소리가 위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소. 사실 나야 너무 편하게 자랐소. 6남매의 막내로 자라 귀여움만 받고 크지 않았소? 선친께서는 내 나이 열두살 때 돌아가셨으니 부친의 엄한 꾸지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그저 명문사족 집안의 자식들이 가는 길을 무던히 가려 했을 따름이었소. 그런데 내 천성이 성리학의 유일체계에는 안 맞았던 것 같소. 천지호활한 도가의 세계도 좋았고, 불가의 심오함과 탈속도 내 마음에 딱 들었소. 중국에서 접했던 천주의 세계도 흥미로웠소. 내 좋은 공부하고, 그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게 더없이 좋았소. 그 세계에서 살다 임금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했을 따름이오. 그러다 15년을 재야와 조정을 오갔던 것 같소. 벼슬길에 욕심은 없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외직만 돌았겠소. 세 차례 과거에 급제했고, 신료끼리 보는 시험에서도 3번 연속 장원한 나였소만 미관말직인 하급 무관 행사과로 좌천되지 않았소? 좌천된 벼슬마저 사간원의 파직 계청으로 그나마 물러나야 했소. 내 나이 마흔둘에 그랬소.'칠서의 옥'이 있고 나서 나도 좀 변하기는 했소. 불우한 처지의 서얼 친구들을 좋아하며 그들이 꿈꾸는 평등 세상에 공감했지만 적극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지는 못했소. 칠서의 옥이 있기 바로 전해(1612년) 부안에서 칩거하며 <홍길동전>을 썼던 것은 그들의 거사를 글로나마 지원해 주려던 것이었소.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소? 그 귀신 이이첨이가 박응서를 윽박지르고 구슬러 '영창대군 반란 모의설'을 조작해 옥사를 일으키지 않았소? 일곱명의 친구를 잃은 것도 그렇지만 죄없는 사람들이 피바람 속에 죽어갔소. 그 죽음의 굿판 속에서 결심했소. 개가 되자. 개가 되어 살아남아 칼을 갈자. 그것이었소. 심장 안에 들어가 심장을 뒤집어놓자. 그나마 물거품이 되었소. 미혹했던 탓도 있고, 운이 따르지 않았으니 어찌 하오."

-대감의 '관론(官論) 같은 글을 보면 조선의 관료제에도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점이 가장 큰 병폐였습니까?
"우선 중복되는 관청이 너무 많아요. 종척 관리도 종친 하나면 족한데 종친, 의빈, 종부 같은 관사가 있고, 궁중의 술과 음식을 맡는 관은 광록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도 내자, 내섬, 예빈, 사도, 사재감, 사온 따위의 관사로 나뉘어 있소. 이러니 관원이 넘치고, 관사가 번거롭게 널려있지 않겠소. 게다가 그 안의 관료들은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소. 실무는 전부 구실아치들이 보지 않소? 이 많은 낭비, 번거로움이 뭐요? 그러니 관리들 녹봉이 형편없이 적을 수밖에 없소. 구실아치는 아예 봉록도 없어요. 권세는 있되 녹봉이 적은 관리들이 어떻게 살겠소? 백성들한테 승냥이가 되어 갈취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소? 그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원천이 뇌물을 받고, 백성의 이권을 뜯어먹는 데 있는 것에는 이런 근원이 있어요. 그런데... 안돼요. 붕당들이 모이는 게 벼슬 나눠주는 데 있는데, 감히 줄이려 들겠소? 슬픈 일이요."

불필요한 관의 대폭적인 폐지를 통한 효율적인 행정, 그리고 관원에 대한 현실적인 임금 지급,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요청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 역시 구조 조정이란 것이 만만한 실무부서를 줄이고, 상층부의 자리는 그대로 존속시켜 오히려 행정마비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거기에 공무원의 임금은 여전히 박봉이다.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지 않을 수 없다. 허균의 구조 조정을 통한 '작은정부론'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후세 사람 중에 평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대감이 <홍길동전>에서 양반 집안의 적서 차별만 문제시했지, 당시의 전반적인 신분 차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다는 말도 합니다. 또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면서 여성들의 혹독한 처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참,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해요. 내가 <홍길동전>을 쓸 때만 해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몰라요. 내가 왜 연산군 때 사람인 홍길동을 세종 때 인물로 바꿨고, 효와 충 이야기를 넣었겠소. 소설 한편으로 목숨이 오가기 때문이오. 적서차별 얘기만 해도 불온하게 보는 양반들이 널려 있고, 천민은 아예 사람 취급도 안하는 이들이오. 그리고 소설에서 너무 앞서가는 얘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한테 거부감만 줄 수 있어요. 내 나름으로는 수위 조절을 한 거지요. 그렇지만 내가 '유재론(遺才論)'에서는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천하고 귀한 집안을 따지지 않고 고루 내었고, 이를 마땅히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양반이 아닌 평민 서자 출신인 이징과도 따뜻한 정을 나누었고, 천인인 유희경과도 시와 술을 나누었어요. 이번에 체포된 동지들 중 천인 출신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인네도 마찬가지예요. 당장 내 누이 허난설헌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 답답한 양반 집안에서 자형에게 치이고, 시부모에게 재주가 있다고 오히려 구박받다 마음의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했어요. 내 누이도 시에서 여인의 사랑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다 하여 세상의 비난을 사기도 했지요. 이 얼마나 답답한 나라요? 무릇 사람의 정이란 하늘이 낸 것인데, 그걸 표출하는 게 죄가 됩니까? '유재론'에서도 그랬지요. '원망을 품은 사내와 홀어미가 나라의 반을 차지하고도 화락한 사회 분위기를 이루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그래요. 개가도 허용하지 않고, 생과부로 사람 들들 볶은 뒤 잘했다고 열녀문이나 세우는 나라, 그거 이상하지 않소?"

허균의 이런 생각은 정말 당시 사대부층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고루한 성리학자들이 득실대던 상황에서 그의 이런 인간 해방의 생각과 말은 '경박자의 말'로 치부되었다. 허균은 남존여비를 당연시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천한 기생인 계생과 무옥에게 늘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특히 부안의 명기인 계생(이매창)과는 남녀간의 정분 관계를 떠나 문우(文友)로 지냈다.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데 도움을 줄 거라며 계생에게 참선을 권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열 번이나 관직에서 밀려나셨는데, 그 이유 중 여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일 처음 파직됐던 황해도사 시절 창기를 들여 별실을 지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데, 여자를 지나치게 가까이 하신 것 아닙니까?
"허허, 사관을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으로 봤는데, 어찌 그런 고루한 소리를 하시오. 내가 창기를 가까이 한다며 사간원이나 사헌부가 탄핵해 파직당했지만 내가 잘못 됐다는 생각은 없소.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오. 예법은 성인이 말하는 거요. 그런데 성인은 누가 내었소. 하늘이 낸 거요. 내가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은 어기더라도 하늘이 내린 품성에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겠소. 남녀가 정분을 나누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말이오. 황해도사 시절의 일은 비난하는 것도 그렇소. 첩이 있으니 관사에 들이는 것이 뭐가 나쁘오? 지금도 벼슬아치들은 첩을 서너 명씩 두고 있고, 집안의 계집종과도 관계하지 않소. 그 사람들은 그걸 내놓고 하지 않고, 나는 표나게 하니 그 점잖은 사람들 눈에는 싫었던 모양인 게지. 나는 그런 사람들이 무슨 소리 하든 관심도 없소."

파직과 복직의 연속
-<수호지> 같은 소설을 탐독한다 해서 선비들에게 괴담이나 즐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어떤 소설을 읽었고 느낌은 어땠는지요.
"하여튼 선비란 자들은 다양하게 읽지 못해요. 소설은 권태를 잊게 하기도 하고, 생각의 여유로움을 주는 것인데 뭐가 그리 나쁘다고. <수호전>이 도둑이 좋아하는 소설이라 작가 3대 귀머거리, 벙어리가 됐다는 얼빠진 말이나 하고 말입니다. 내가 일전에 중국에 갔다 오면서 책을 4,000권쯤 사왔는데 소설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태평광기>도 포함됐소. 이 중 <수호지>는 재미는 있어도 간사함과 기교를 부려 교훈될 만한 것이 없었소. 그래도 <서유기>는 비록 생각 바른 말은 아니어도 가끔 신선, 불교 또는 신비스러운 내용을 전하고 있어 없애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소."

-끝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은?
"내가 재주가 용렬해 끝내 거사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그저 스러져 안타까울 따름이오. 동지들에게도 미안하고... 또 얼마나 옥사의 피바람이 불려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세상을 등지고 좋은 벗들과 거친 안주에 탁주나 마시며 사는 것이 좋았을 성싶소. 그래도 거칠 것 없이 산 것만은 후회하지 않소. 여인과의 사랑도, 좋아하는 시도, 공부도 마음껏 하지 않았소? 용렬한 선비들은 지레 겁먹고 다가서지 못한 부처의 세계도 보고, 천주의 세계도 접했으니 다행이지 않소? 내가 부처를 섬긴다 하여 파직당했을 때도 나는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라.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고 했소. 그러니 후회는 적소이다. 그러나 내 성질이 사람을 보듬어 안지 못해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소. 그게 거사를 흩뜨린 원인이 된 것 같소. 그렇지만 남이 틀린 짓을 하면 참고 보지 못하였고 시속 선비들의 허튼 짓을 보면 비위가 틀려 견딜 수 없었소. 팔자려니 해야 하지 않겠소? 내 죽고 얼마나 지나야 새 세상이 올지 모르겠소. 그 세상에 허균이란 자가 조그마한 뜻을 남겼다는 자취나 몇 자락 있으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소."

말을 마치고 허균은 세상을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 월간 중앙, 2000년 12월호, 최용범, <역사인물 가상인터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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