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사/잡다한 것

김수근 - 주요작품 2

지식창고지기 2009. 8. 3. 06:54

▶ 초기작품

1. 워커힐계획(1961)

워커힐계획은 김수근이 한국에 귀국하여 실현시킨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역동적인 조형감각과 대지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는 평이다. 이 계획은 서울시 성동구 광장동 소재 18만평을 수용하여 총규모 60억환의 사단법인 워커힐관광사업시설로 1961년 12에 공사에 착수하였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건축주로 건축가 나상진이 대표로서 본관을 맡고 엄덕문(한국관), 이희태(방갈로숙소), 김수근, 김희춘(본관), 강명구(방갈로숙소) 등이 설계에 착수하였다.

2. 힐탑바(1961)

“대지는 어떤 건물을 원하는가?“

힐탑바는 야산의 정상에 역삼각형으로 놓여 있으며 한강넘어에서 이곳을 바라다보면, 건물이 대지에서 힘차게 약동하는 느낌이 든다. 마치 산종턱에 지어진 정자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힐탑바는 김수근이 건물이 놓일 대지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설계에 임했다고 평하여 진다. 그러나 기능적인 해결과 내부의 공간에서는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게 된다. 가용면적이 매우 작고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볼 경우 시선이 완전히 개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초기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과도한 조형의지에서 발생한 것이나 당시의 김수근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디자인 어프로치 방법이 어떤 장소에 어울리는 형태를 찾아낸 다음 여기에 기능을 끼어 맞추는 방식이었고, 따라서 기능과 내부 공간은 주어진 형태 내에서 해결되어질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형태를 잡아내는 이는 김수근이었고, 이 형태를 기능적으로 풀이하는 이는 윤승중이었다.

후에 김수근은 이 건물을 Jorn Utzon의 ‘오페라하우스’에 비교하였다. 그는 Utzon이 이 건물을 통해서 기능주의와 합리주의의 균형을 잃어 버렸던 건축詩를 다시 찾았다고 평가하였다.

시적 상상력은 이후 남산음악당계획에서도 나타나는데 거대한 원형강당을 셀구조로 덮은 것은 건축시를 위해서 기술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3. 더글라스호텔(1961)

“자연을 밀지 말고 그대로 두자”

산중턱에 지어진 더글라스 호텔을 지형을 따라 돌아가면서 얕으막하게 삽입된다. 자연에 순응되어 멀리서 보면 산의 일부인 듯이 보인다. 윤승중과 함께 정지작업이 진행중인 대지를 찾은 김수근은 “자연을 밀지 말고 그대로 두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김석철이‘건축사’지 1987.7월호의 『삶의 빛나는 한때』를 통하여 언급한 김수근에 대한 평-“건축가가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재능인 주제에 대한 본원적인 이해와 부지의 가능성에 대한 뛰어난 직감력을 가지 사람이다.”―과 상통한다.

4. 자유센터

「타 예술분야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건축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대변해 왔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부는 한국을 아시아의 반공 종주국으로 만든다는 의도를 가지고 대규모 국제회의장과 분부 그리고 숙소를 가진 complex를 남산에 짓게 하였다.
자유센터의 건물은 한국에서 전후 최초로 지어진 국가차원의 기념건축이었으며, 김수근은 이 건물을 통하여 초기적 형태의 공간적 특징을 나타내었다는 평을 듣게 된다.  

현대에서 건축에 국가의 이념을 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가능할 수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능과는 상관없이 매우 과장된 스케일로 설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건물에 다가셨을 때에 엄청나게 압도하는 건물의 크기와 스케일로 이데올로기 혹은 지배권력에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높이 솟은 곡면의 지붕아래에 서면 압도하는 건물의 스케일에 눌려 왜소해지는 자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김수근은 건물의 주요 입면과 주 접근방향이 서로 다른 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건물의 주출입구는 산쪽을 향한 남쪽면에서 이루어지게 하고 넓은 운동장을 향한 면, 즉 긴 곡선의 켄틸레버로 된 지붕이 있는 면은 접근과는 상관없이 강한 기념성을 가지도록 한 것이다. 이런 해결은 건물의 기념성과 경사에 따른 접근성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또한 건물의 중앙에 놓인 긴 계단도 권위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모티브이다. 이것은 계단 위의 공간이 특별한 장소임을 나타내 줌과 동시에, 마치 무대와 같이 상승된 바닥면에서 연출될 상황의 특수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 후 김수근이 계속 추구하게 될 공간적인 개념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양쪽의 사무실을 매개시켜주는 커다란 중심공간을 설치하고, 이것이 운동장 쪽으로 뚫려 있도록 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하도록 하였다. 이 중심공간에는 또한 입구부분의 낮고 길게 난 캐노피와 넓고 높이 트인 중심공간이 공간적인 contrast를 일으키도록 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고, 독립되어 서있는 계단을 설치하여 한 공간 내에 다양한 공간들이 공존하도록 하였다. 한 공간 내에 다양한 공간요소를 삽입하여 공간적 흐름을 연출하려는 수법은 이후 김수근 건축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 주택

1. 원서동 구씨댁(현 LG 상남도서관)

2. 우촌장

- 대지위치 : 서울 삼선동
- 대지면적 : 990㎡
- 건축면적 : 220㎡
- 연 면 적 : 495㎡
- 구    조 : 벽돌조
- 규    모 : 지하 1층, 지상 2층
- 외 장 재 : 회색전벽돌, 아크릴계 페인트
- 공사기간 : 1971.3-12
- 시공 : 한국단청사

3. 창암장

- 대지위치 : 서울
- 건축면적 : 90㎡
- 연 면 적 : 155㎡
- 구    조 : 철근콘크리트조 및 연와조

▶ 업무시설

1. KIST 본관

- 대지위치 : 서울
- 건축면적 : 3180㎡
- 연 면 적 : 8674㎡
- 구    조 : 철근콘크리트조
- 규    모 : 지하 1층, 지상 4층

2. 원서동 공간사옥(1977)

- 대지위치 : 서울시 원서동
- 대지면적 : 660㎡
- 연 면 적 : 1350㎡
- 구    조 : 철근콘크리트조 및 조적조, 일부 목조
- 규    모 : 지하 1층, 지상 5층
- 외부마감재 : 전 벽돌
- 설    계 : 1971년
- 준    공 : 1977년

「둘러 싸여 있으나 결코 막히지 않은 공간(enclosed but endless space)」

「사람들이 멀리서 건물을 보고 출입구를 찾지 못하면 실패한 건물니다.」

공간사옥은 자신의 강한 의욕과 더불어 자신의 의도를 아무런 장애없이 풀어 갈 수 있는 계획이었다. 7-8년에 이르는 동안 두 차례나 나누어져 설계되었으며,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도 실제로 지어진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부수고 다시 지을 정도의 열정이 담겨 있는 작품이었다.

초기 스케치에서 이 건물의 공간을 특징짓는 것은 건물 중앙에 반층높이로 계속 반복되어 설치되어 있는 수직 동선처리였다. 김수근이 처음 이런 스킴을 생각한 것은 순전히 지형적인 조건때문이었다. 이 후의 작품에서도 특징적으로 나오지만 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그의 건축관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데, 여기서도 경사진 대지를 적절하게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의 키를 척도로 하여 한 층의 높이(2340mm)를 최대한으로 압축하되, 수직동선은 스킵플로어로 계획하였다. 이 경우 하나의 층으로 구획된 공간은 없어지거나 모호해지고 공간은 유동적으로 된다. 한층의 높이를 이렇게 낮춘 것은 김수근 자신의 취향과 더불어 법적으로 건물의 높이가 9m로 한정되어 있는 가운데 4층 높이로 건물을 설계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공간개념을 비슷한 시기에 설계되어진 우촌장과 창암장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대지의 성격이나 기능에 따라 변형된 형태로서 말이다.

구관 전체를 스킵 플로어로 처리하려는 생각은 2층 높이 까지만 적용되고 그 이후에는 다른 개념들이 적용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두 가지의 원형이 모티브가 되는데, 원통형 구조를 중앙에 집어넣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 상부를 연결하는 원형계단을 설치한 것이다. 여기서 원형계단은 건물에 미로적인 성격을 강하게 부여하고 있다. 물론 김수근 자신이 개인적으로 상용했기 때문에 처음 이렇게 설계되어도 상관없었지만, 반경이 1m도 되지 않는 좁은 계단실과 계단실 앞에 설치된 문 떄문에 처음 이 건물을 찾아온 사람들은 건물의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지 못 한다.  또한 좁은 이 계단을 오를 때 매우 묘한 느낌이 든다. 위의 층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감 잡지 못하도록 하면서 상당히 밀폐되고 억눌린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소들을 공간사옥에 삽입한 것은 그가 초기에 의도한 여러 가지 공간개념들, 즉 계단을 통한 공간개념의 열림과 다양한 공간의 상호관입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라서 주목할 된다. 이들의 계획의도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스킵 플로어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별로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건물면척 자체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바닥면적 29평)보다 넓은 단일 평면이 현실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계단 면적을 최소화하여 평면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기능의 분절을 꾀한 것이다.

반층높이의 계단으로 연결된 1.2층은 응접실, 회의실, 작업실 등과 같이 직접 설계작업과 관련이 없는 실들로 구성되어 있고 원형계단으로 연결된 3. 4층의 경우 설계실, 소장실, 자료실과 같이 설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실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들의 분리를 고려한 것 같다.(요즘도 실계실로는 3, 4층밖에 사용하지 않고 나머지는 화랑이나 편집실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스케치에서 보이는 반복되는 평면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기 위한 의도로 보여진다. 초기 스켓치대로 지어질 경우 내부 공간은 반층 높이로 계속 반복되어 연결되어 있어서 공간의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스킵 플로의 개방된 공간과 원형계단의 폐쇄된 공간 사이의 공간적인 contrast는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여기에 원통구조물을 참가시켜서 이런 변화의 폭을 더욱 확대시켰다. 원통구조물을 삼층에 배치한 이유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직각의 평면에 원형의 요소를 삽입하여 공간적인 미묘함을 이끌어내려고 한 것 같다. 즉 둥근 벽이 좁은 면적 안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그가 제시한 ‘모태공간’이라는 것을 구체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모태공간의 개념이 척도라는 개념이 아니고 구조적인 가변성이나 유연성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부적절해 보인다. 김수근의 모태공간이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아늑한 공간이면서 그 속에서 항상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는 가변적인 공간을 의미했다.” 최정호 김수근의대담. ‘모태적 공간’, 건축가 김수근, 공간, 1981.4, 43쪽

공간사옥의 증축은 1976.6~1977.4월 사이에 이루어 졌으며 여기서 김수근은 한국의 공간개념을 어떤 방식으로든 삽입하려 했다. 최순우선생의 안내로 부석사와 연경당을 자주 찾으며 많은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경당의 경우 남성의 사랑방과 여성의 안채로 구분되어 지는데 이는 공간 사옥의 구관과 신관(증축부분)도 이와 유사한 기능으로 해석되어 진다. 후에 지어지는 문예회관 전시장고 샘터사옥에서도 이런 기능의 분리가 보여지고 있다. 사무실과 전시실, 식당과 전시공간이 서로 다른 영역으로 한 건물에 공존하는 것이다.

3. 한국해외개발공사 사옥(1977 ~ 1979)

삼각형의 변화 형태를 적용하여 설계되어진 해외개발공사(현 국제교류단)는 삼각형의 덩어리가 대각선으로 어긋나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두 개의 어긋난 삼각형덩어리 둥간에 띠 모양의 통로가 설치되었다. 이런 처리는 기본적으로 도시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만, 여러 가지 계획상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다. 먼저 이것은 새로 지어질 건물의 뒤쪽에 있는 기존 건물과 상호연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설계조건을 적절히 충족시키고 있다. 처음 계획안을 마련하면서 고심했던 부분이 바로 적절한 주차 공간을 확보하면서 기존의 건물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는데 대지가 협소하여 이것의 해결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 출입구와 기존 건물과 후정의 주차장으로 통하는 부출입구를 기능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중정 겸 통로를 건물 중앙에 삽입하여 이런 고민을 해결하려 했다. 중간의 대각선에 의해 분리된 앞측의 삼각형 덩어리를 9m 후퇴시켜서 뒤쪽에 있는 삼각형 덩어리가 자연스럽게 동선을 잡아 줄 수 있는 벽체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두 개의 삼각형 덩어리에서 튀어나온 탑모양의 덩어리도 건물입구를 분명히 인식시키는 역할을 하게된다. 또한 여기서 삼각덩어리의 후퇴로 기존 대지내의 수목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4. 샘터사옥(1977 ~ )

셈터사옥은 기능의 분리적 측면에서(지하는 소극장, 1층은 서점.카페, 3.4층은 사무실) 본다면 공간사옥과 같은 공간 개념으로 풀이된다.

▶ 박물관

1. 부여박물관(1965 ~ 1968)

2. 국립청주박물관

대지가 넓고 경사가 있기에 김수근은 처음부터 여러 개의 저층건물을 대지경사에 따라 배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박물관의 기본개념을 ‘만남’이라고 정의하고 이는 관람객과 소장품, 학예원, 그리고 자연이 박물관이라는 건축물을 통해서 만난다는 것이다. 자연을 단순히 있는 것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건물 내로 끌어들여 박물관에 온 사람들이 유물과 건축뿐만 아니라 자연마저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평가되어진다.

김수근은 이스라엘의 한 박물관에서 동선의 체계에 큰 감명을 받고 건물의 동체체계가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청주박물관에서의 동선은 우선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서 관람을 하게되는 체계이다. 이런 동선의 체계가 수립되면서 모든 박물관의 주요 전시실들은 이 동선체계에 따라 전시실 건물이 배치되고 그 사이 사이에 중정이 배치되게 된다. 이 때 각 전시실을 옮겨 다니며 느끼게되는 공간적 느낌은 공간 사옥에서 수직적으로 연속되어 있는 단위공간들이 주는 실존성과 장소성이 유사하다. 10여 년의 간격을 두고 지어진 청주박물관과 부여박물관은 그 동안 김수근의 조형의식이 명확히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부여 박물관은 1965년에 설계에 착수되었고, 청주박물관은 1978년에 착수되었다.

충청도 지방의 문화를 담는 두 박물관이지만, 부여 박물관의 경우는 곡선부재를 가지고 한옥이 갖는 수직적인 상승감을 표현하였고, 청주박물관은 지붕의 선적인 특징이 강조되지만, 결과적으로 나온 조형적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부여 박물관은 건물의 조형적인 특징에 집착한 것이고 청주 박물관의 경우는 여러 건물이 중첩되는 군집의 이미지를 설계의도로 잡았기 때문이라고 평하여 진다.

3. 국립진주박물관(1980 ~ 1984)

청주박물관의 승효상이 ‘만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계에 임하여 졌다면 진주박물관의 장세양은 ‘역사의 현재적 체험’이라는 주제를 가지게 된다.

▶ 종교건물

1. 양덕성당

- 대지위치 : 경남 마산시 양덕동
- 대지면적 : 1785㎡
- 건축면적 : 892㎡
- 연 면 적 : 1702㎡
- 구    조 : 철근콘크리트조 및 일부 조적조
- 외부마감재 : 붉은 벽돌
- 설    계 : 1976년

2. 경동성당

3. 불광동성당

다 복잡하고 길게 설계되어 진다. 성당에 가기 위해서는 S자 모양의 긴 진입로를 거쳐야 만 한다. 측 성당의 측면에서 시작해서 성당 회중석 아래를 지나 다시 경사진 통로를 올라가는 긴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스퀜시들이 삽입된다. 성물판매소가 있는 비교적 넓은 내부 진입공간이 있고, 축이 꺽이는 곳에는 성모상이 있으며, 그 곳을 지나면 세속과는 분리된 벽돌로 된 경사로가 있어서 신자들의 마음을 가다듬도록 계획되어졌다.

종교건축에 있어서 김수근은 한국 사찰건축의 독특한 전이공간을 성당에 적용하여 새로운 건축언어를 만들어 내고자 노력하였다고 평가되어지고 있다.

▶ 학교건물

1. 서울대 예술대학 및 환경대학원

- 대지위치 : 서울 관악구 신림동
- 건축면적 : 6497㎡
- 연 면 적 : 1579㎡
- 구    조 : 철근 콘크리트조, 지하 1층, 지상 4층
- 외부마감재 : 외장타일
- 설    계 : 1974년
- 준    공 : 1975년

공간사옥에서 한국건축의 공간적 특징을 내부화 시켰다면 대학 캠퍼스계획에서는 건물을 클러스터화하여 외부공간에 적용하였다. 이 계획에서도 주어진 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건물 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적용된 기준이었다. 대지의 경사가 심했기 때문에 각 기능들을 높이에 따라 분리하였다. 대학본부에서 파워플랜트쪽으로 향하여 경사선을 중심으로 두 개의 건물군으로 분리하는데 위쪽은 음악대학을 배치하고 아래쪽은 미술대학과 환겨대학원이 들어서도록 하였다.  그래서 학교 정문을 따라 이 건물을 향해 올라올 경우, 건물들이 관악산의 지형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처음의 배치는 전체 마스터플랜과 같은 배치구성으로 시작되었다. 음대쪽은 ㅁ자형의 강의 및 실기실과 ㄷ자형의 연주실로 구성되도록 하였고, 미대와 환경대학원은 두 개의 ㅁ자형 건물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음대와 미대사이에는 공동마당을 삽입하였다. 여기까지는 프로그램을 아주 논리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 보여진다. 이런 논리적인 해법을 바탕으로 김수근은 프로젝트에 자신의 독특한 디자인감각과 개념을 불어넣었다.  이때부터 디자인은 두 가지 개념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변행되어 간다. 하나는 건물로 둘러싸인 외부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부여하느냐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각 단과 대학의 개성을 살려주기 위해 주어진 기능을 해치지 않으면서 건물들을 어떻게 하면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유롭게 구성하느냐는 것이었다.

김수근은 이 프로젝트를 외부공간의 해석에 있어서 전통마당의 개념을 참고하였다. 각종 건물과 이들 주위를 둘러싼 담장 또 채와 채를 가로막는 담장 등으로 구분된 여러 개의 마당을 가지고 있고 이들 각각에는 서로 다른 기능이 할당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또 이러한 여러 개로 기능이 분활된 만큼 각 마당 사이에는 일정한 위계가 존해했다. 그리고 이 마당들은 매우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내부공간에서 이루지 못한 주거기능을 발휘하는, 반내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술대학동 전체의 중정에는 공동의 정원과 연못 그리고 정자가 계획되어졌으나 예산의 문제로 정자가 지어지지 않아 현재의 중정은 황량한 마당의 형태로 전락하였다고 한다.

2. 덕성여대 약학관, 가정관

- 대지위치 :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 건축면적 : 3561㎡
- 연 면 적 : 10371㎡
- 규    모 : 지하 1층 지상 3층
- 조경설계 : 內蕂恒方(Tsunekata Natioh)
- 준    공 : 1979년

덕성여대 약 16.5ha의대지 위에 설립 될 덕성여대 쌍문동 캠퍼스는 서울 북단의 주거지에 위치해 있으며 백운대 인수봉 및 도봉산과 같은 서울의 아름다운 산악스카이라인이 서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펼져있어 수려한 주위경관을 갖추고 있다. 이 곳 대지의 일부는 벗나무와 단풍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대지 조건은 자연히 건물 설계의 주요기준이 되었다. 서울대학예술대학설계에서 적용한 캠퍼스 플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문제점의 보안을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수근은 ㅁ자형 중정의 설계적 접근 과정에서 나름대로 중정에 대한 몇 개의 건축개념을 접목시켰는데, 우선 중정을 휴먼 스케일로 한 것이다. 건물의 층수를3층으로 제한하고 건물배치도 불규칙하게 하였으며 건물의 덩어리들도분절시켜 사용자들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였다. 건물의 계단실 등이 분절되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중정이 버려진 공간이 아닌 학생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한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다음은 건물을 짓기 전에 이미 이곳에 단풍나무 숲이 있었으므로 이 숲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현재의 배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정 내부에서 밖을 내다보았을 때 멀리서 캠퍼스를 감싸고있는 산들이 조망될 수 있도록 디자인에 고려한 것이다. 건물의 전면을 필로티로 처리하고 이것의 높이도 시야가 확보될 수 있도록 정확하게 계산되어 계획에 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