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14](3)정약용이 남긴 '표선문정'
2부. 외국인의 제주섬 표류기
표류선이 밀려들면 지체말고 달려 나가라
입력날짜 : 2009. 07.10. 00:00:00
|
다산 '목민심서' 통해 표류선 처리 유의점 다섯가지 기록
1693년 12월 10일, 중국 강남 사람 정건순 일행이 탄 배가 명월진 동귀덕리 연변에서 부서진다. 감, 떡 등을 싣고 산동에 장사하러 가다 큰 바람을 만나 제주까지 떠밀려왔는데, 32명중 5명이 죽고 나머지 27명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한겨울이었다.
제주 사람들이 일본으로, 중국으로, 베트남 등지로 표류했을때 그렇듯, 이들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정건순 등은 "입을 것과 덮을 것이 모두 추위를 막기에는 무난하나 불쌍하기 그지없다"고 글을 올린다. 그러면서 "날마다 술과 반찬을 주시고 양식쌀, 채소, 기름, 소금, 땔감을 밤마다 주시어 큰 집에 따뜻한 방, 돗자리를 깔아 편안히 잔다"며 은혜로운 마음을 덧붙인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솜옷, 여름옷을 하나씩 지어주고 배를 수리해 돌려보낸다. 바다를 건너는 밑천으로 삼으라며 쌀, 소금장, 미역, 백지, 담배 등도 내준다. 중국 상인들은 순풍을 기다려 표류한지 5개월 뒤인 5월11일 명월포를 떠난다.
하지만 중국 표류인들의 송환이 처음부터 매끄럽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여러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표류선 처리 규정을 다듬어갔다. 1693년 중국인 표류때만 해도 1689년 사례가 참고가 됐다. 그 당시 중국 상인들이 베트남에 표착했던 김대황 일행을 데려왔는데,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다시 돌려보낸걸 두고 말이 나왔던 터였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배를 온전히 띄울 수 있으면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이용하도록 했다.
외국배가 조선에 표착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낯선 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기꺼이 그들을 맞아들인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통해 '표선문정(漂船問情)'에 관한 조항을 따로 남긴 걸 보면 그에 얽힌 폐단이 있었다는 방증일 게다.
다산은 표류선을 문정하는 일은 기미가 급하고 행하기가 어렵다며 지체하지 말고 시각을 다투어 달려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방관이 자신의 관할 지역에 표선이 도착했을때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점을 다섯가지로 설명해놓았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다산의 '해방고'를 통해 본 중국 표선 처리문제'란 글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첫째, 이국 사람은 예로써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머리를 깎고 소매를 좁게 한 외국인을 보고 마음으로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아서다. 삼가는 마음과 신의로써 마치 큰 손님 대접하듯 해야 한다.
|
셋째, 문정은 반드시 섬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관리들은 큰 집 하나를 빌려 함께 거처하며 먹는 쌀과 소금을 관에서 돈으로 사들인다. 한 차례 표류선이 지나면 여러 섬이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정관 일행들이 접대를 빙자해 섬 주민들을 위협하고 겁탈하는 일이 있어서다.
넷째, 매번 표류선 한 척을 만날 때마다 그 배의 제도를 그림으로 설명하며 각각 상세하게 기술해야 한다. 목재는 무엇을 썼는지, 뱃전은 몇 판이나 덧댔는지, 길이와 너비, 높낮이의 정도, 추녀를 숙이고 올린 형세, 각종 노와 키의 형상, 익판으로 파도를 밀어내는 기술 등등 각종의 묘리를 상세히 물어 자세하게 기록해 본받기를 꾀하도록 했다.
다섯째, 표류인과 더불어 얘기할 때는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기색을 보여야 한다. 신선하고 깨끗한 것으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내주고 저들이 기쁘게 돌아가 좋은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다섯가지 지침은 한편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여러 지역에서 표류가 빈번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에 비례해 섬 사람들의 피해의식도 컸다. 문정에 따른 폐해탓에 표류선이 섬에 도착해도 활을 겨눠 해치려는 기색을 보여 달아나게 만들거나 침몰하도록 내버렸다.
/진선희기자·백금탁기자
표류선에서 선박기술 배우자
박제가 '북학의' 등 표류선 활용 주목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한 척의 표류선을 만날 때마다 배의 모양과 치수를 상세히 정리하자고 했다. 표류선에 대한 잦은 접촉은 외국의 선박 제도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1778년 이덕무와 더불어 중국 연경, 계주 사이의 광야를 마음껏 돌아본 초정 박제가. 그는 수개월간 그곳에 머물면서 평소에 듣지 못한 사실을 새롭게 만난다. 이 여정에서 탄생한 게 '북학의'다.
다산은 조선의 선박 제도를 두고 질박하고 보잘 것 없다고 했는데, 박제가도 그랬다. 안대회가 번역한 '북학의'를 보면 중국 배와 우리나라 배를 비교해놓은 대목이 나온다.
중국 배는 빗물이나 말오줌 등이 배 안에 전혀 고이지 않게 설계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배는 딴판이라는 것이다. 배에 들어오는 물을 막을 수도 없고 빗물을 막지도 못한다. 뱃사공은 힘이 들고, 배에 실은 말은 위태하다.
제주 배에 대한 언급도 있다. "현재 제주에서 공물로 바친 말들이 수척하게 마르다가 죽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배 안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망령되게 꼭 말을 꼭꼭 묶어 놓아 말의 성질을 거스른 결과라고 판단된다." 초정은 "유구(琉球)의 말이 중국 복건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데 배를 타고 온 말"이라며 "유구 말이 제주도에서 오는 말과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시장에서 교역할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외국의 선박을 직접 봐야 그 기술을 연구할 수 있을 터, 초정은 표류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바다에서 표류해 우리 해안에 정박하는 외국인이 있으면 연해 여러 고을에서는 반드시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제도와 기타 기술을 상세하게 질문하고, 재주가 좋은 장인을 시켜 그 방법에 의해 배를 만들게 하자고 것이다. 그는 "표류한 배를 직접 보고 모방해 배우기도 하고, 표류한 사람을 잘 접대하여 저들의 기술을 완전히 전수하게 한 다음 돌려보내는 것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여행에서 본 문물을 떠올리며 "배를 통행시키려면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다리와 뱃전에 가로놓인 가교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고 적었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언론기관 > 언론 기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6](5)조선탈출 꿈꿨던 하멜 (0) | 2009.08.07 |
---|---|
[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5](4)하멜 표착지부터 규명을 (0) | 2009.08.07 |
[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3](2)'지영록'의 중국인 표류기 (0) | 2009.08.07 |
[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2](1)여송사람, 제주를 만나다 (0) | 2009.08.07 |
[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1](10)고상영이 증언한 표해록 (0) | 2009.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