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의 역사,제주-11](10)고상영이 증언한 표해록
1부. 제주바다를 건넌 사람들
베트남 사람도 몰랐던 17세기 제주인 안남 표류기
입력날짜 : 2009. 05.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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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베트남어로 사건 경위 소개돼 생활상 자료 활용 기대
표류는 두 나라의 문화가 충돌하는 사건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낯선 땅에 '내던져지는' 표류인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이국의 진기한 풍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돌아와 그것을 직접 기록으로 남기거나 증언한다. 김대황을 주인공으로 한 '지영록(知瀛錄)'속의 '김대황표해일록'이든, 인터뷰를 통해 기술한 정운경의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에 실린 고상영 표류기든, 아니면 정동유의 '주영편(晝永編)'처럼 재인용한 자료를 담은 고상영 표류기든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엔 조선인이 몰랐던 안남(베트남)이 있다.
▶입 가리키며 배 두드리니 음식 제공
이중 고상영이 등장하는 표류기를 각각 써넣은 '탐라문견록'과 '주영편'은 인터뷰 시기에 차이를 보인다. '주영편'은 1727년(영조 3년) 고상영을 만난 기록(본보 5월 15일자 9면)이다. '탐라문견록'은 그보다 5년뒤에 쓰여졌다. 고상영은 안남 표류 사건을 겪은 지 40년 안팎의 시간이 흐른 뒤 각각의 인터뷰에 응했지만 생생하게 그 때의 정황을 전한다.
"파초는 매우 크다. 잎의 길이가 십여장(丈)이나 되고 밑동의 크기는 기둥과 같은데 도처에 무척 많다. 코끼리가 파초를 잘 뜯어먹는다. 마치 말이 볏짚을 먹듯 한다. 종려의 잎 사이에는 실이 있어서 그것으로 우의를 짠다. 그 열매는 크기가 사발 같고, 밖에 살이 있고 가운데에 씨가 있으며 껍질은 매우 단단하다."(남만성 역 '주영편'중에서)
"촌가에 가서 입을 가리키며 배를 두드렸다. 그러자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맞아들이고 의자에 앉히더니 차와 술을 권했다. 이어 탁자 하나에 밥과 반찬을 내오는데 푸짐하고 깔끔했다. 다 먹고 나자 쌀 서 말과 동전 60문, 망어(芒漁)· 흰새우· 멸치 등을 절인 것 세 단지, 화문석 여섯장,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그릇 열두 개를 꺼내와서 우리 앞에 놓았다."(정민 역 '탐라문견록')
두 기록은 더러 다르다. '주영편'에는 파초, 종려 등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나오지만 '탐라문견록'엔 그같은 내용이 빠져있다. 반면 '탐라문견록'에는 제주 표류인들이 베트남 민가를 돌며 먹을 거리를 구할 때 현지인들이 지원해준 물품 내역이 일일이 소개됐다.
▶"작은 섬 이송된 것 격리 방역조치"
'탐라문견록'을 접한 대만 국립성공대 진익원(陳益源) 교수는 이 기록에서 몇가지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 하나는 안남에 표류한 제주사람 24명이 구조된 후 작은 섬에 이송되었다가 10여일이 지난후 회안(會安·호이안)에 돌아온 점이다. 그는 이를 일종의 격리방역조치로 해석했다. 또하나는 베트남인들이 표류인에게 적극적으로 나서 식량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제주사람들이 집을 찾아가 배가 고프다는 뜻으로 배를 두드렸을 때에는 두말 않고 이들을 맞아들였다는 게다. 진익원 교수는 이와 관련 "누구나 할 것 없이 난민들을 따뜻하게 대접하고 쌀, 동전 등과 같은 구조 물품을 내놓는 것을 보면 구조작업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풀이했다.
제주 사람의 안남 표류는 한국·베트남 관계에서 흔치 않은 교류사중 하나였다. 중국문화권에 속했던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 문화, 사회 등 여러 면에서 유사했지만 베트남전쟁 이전까지 두 나라의 교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양국간 교류는 15세기 조선 사신 조신이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 베트남 사신과 시를 주고 받은 일, 16세기 이수광 역시 연경에서 베트남 사신과 시와 필담을 주고 받은 일, 진주 출신의 조선 선비 조완벽이 정유재란때 일본에 잡혀가 일본 상인의 서기로 일하던중 1605년부터 세 차례 베트남을 왕래하던 일 등이 있다. 이런 중에 17세기 후반 큰 바람에 떠밀려 베트남까지 갔던 제주사람들이 호이안의 지배자였던 응우옌 푹 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근래 고상영 일행의 안남 표류기가 현대 베트남어로 현지에 소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백년전 베트남의 중부 항구도시에 표착했던 제주 사람이 남긴 기록은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또하나의 귀중한 자료다. 표류 연구를 통해 한국과 베트남 교류사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진선희·백금탁기자
표류로 시작된 제주·베트남 인연
6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앞둬 관심
2009년 4월 현재 제주에 사는 베트남인은 588명에 이른다. 제주 거주 외국인중 전체의 10%가 넘는다. 결혼으로 제주에 정착한 '베트남 신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제주가 이들을 따뜻이 맞아줘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300여년전엔 거꾸로 베트남 사람들이 제주인을 조건없이 품었다. 국교 관계가 없던 안남국이 인도적 견지에서 중국 상선에 부탁해 고상영 등 제주 표류인들을 돌려보냈고 교류를 원하는 공문까지 보냈다. 1688년 7월 안남국의 명덕후(明德侯)가 조선에 보낸 글 중 일부다.
"정묘년(1687년) 10월 사이에 바람에 표류하며 작은 배 한 척이 안남국에 도착했습니다. 24인이 모두 조선인이라 하는데, 무역을 위해 바다로 나왔다가 뜻하지 않게 풍파가 크게 일어 배가 부서지고 화물을 잃었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 귀국의 상민(商民)이었습니다. 동체(同體)임을 굽어 아끼고, 본국 왕의 호생(好生)의 은덕으로 격외의 은혜를 베풀어, 회안 지방에 안착시키고 돈과 쌀을 주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미 병이 든 세 사람은 죽고, 현재 남은 21인은 남풍을 기다려 배에 실어보내려 합니다."('탐라문견록')
한국과 베트남간에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된 해는 1956년이다. 그해 사이공에 공사관을 설치했다. 베트남 통일로 한때 외교가 끊기긴 했지만 1992년 양국은 정식 수교를 맺는다. 두 나라는 경제를 중심으로 정치, 국방, 문화, 스포츠 등으로 협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은 특히 한국의 중요한 경제협력 파트너다. 우리의 10대 수출국중 하나가 바로 베트남이다.
6월 제주에서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린다. 아세안은 동남아시아 지역 10개 국가로 결성된 정치·경제 연합체를 일컫는다. 베트남은 1995년 아세안 국가로 합류했다. 국제무대에서 긴밀히 협력하는 동반자임을 확인하게 될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앞두고 표류가 낳은 제주와 베트남의 인연을 새겨봄직 하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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