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관/언론 기관

[한라일보][표류의 역사,제주-12](1)여송사람, 제주를 만나다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51

[표류의 역사,제주-12](1)여송사람, 제주를 만나다
2부. 외국인의 제주섬 표류기
온몸에 옻칠한 '흑인' 다섯명 불운의 표류사


입력날짜 : 2009. 06.12. 00:00:00

▲필리핀의 유명 관광지 보라카이 근처 아클란에서 매년 1월에 열리는 '아띠아띠한 페스티벌'의 한 장면. 200여년전 제주섬에 표착했던 여송인들도 이들처럼 얼굴에 옻칠을 하고 있었다. 여송인 5명은 조선이나 중국에서 그들의 국적을 파악하지 못한 탓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사진=필리핀관광청한국지사 제공
2백년전 표착한 5명 국적 몰라 한국과 중국 오가
우이도 문순득 표해록에 출신지 필리핀 밝힌 증거


200여년전, 대정현 당포(唐浦) 해안가에 큰 배가 와 닿는다. 그 배는 다섯명을 부려놓고 돌아가버렸다. 1801년(순조 1년)의 일이다. 이들을 목격한 제주사람들은 저으기 놀랐던 것 같다.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가 1806년 집필한 '주영편(晝永編)'을 보자.

"옷의 빛은 푸른 것, 붉은 것, 누른 것, 흰 것이어서 서로 같지 않았다. 옷의 제도는 매우 좁아서 팔다리를 용납할 정도이다. 목에는 모두 염주를 걸었으며, 발에는 버선이나 신발이 없고, 직접 흙을 밟고 다니는데 그 발은 짐승의 굽과 다름이 없었다. 귓바퀴에는 혹은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었다. 머리털은 깎았는데 다시 나는 것은 양털처럼 꼬불꼬불 말리었다. 그 중의 두 사람은 전신이 새까맣기가 옻칠한 것 같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글씨 써

표류는 제주바다를 건넌 제주섬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바닷길을 지나야 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은 표류를 맞닥뜨릴 운명인 것이다. 더러 표착인들은 허술한 표류인 처리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19세기 초입을 열며 제주섬에 다다른 이들은 누구일까.

정동유는 다시 기록을 이어간다. 다섯명에게 글자를 써보였지만 알지 못하였다. 붓을 주어 글씨를 쓰게 했더니 오른손으로 붓을 잡고 전자(篆字)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것을 써놓았다. 정동유의 눈에 그것은 형상이 어지러운 실처럼 보였다. 글씨를 쓰는 법도 왼편에서부터 가지런하게 오른편을 향해 나가는 것이 서양의 필법과 같았다.

제주섬에 표착한 이들의 사연은 문순득의 표해록에도 등장한다. 문순득은 1801년 12월 전남 신안군 우이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배를 타고 물길에 나섰다가 유구(오키나와)와 여송(呂宋·필리핀)에 잇달아 표류했다. 그의 표해록은 본래 1801년부터 1816년까지 14년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했던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문순득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한 바 있다. 그러다 정약전의 기거가 불안해 대흑산도로 옮기게 되고 나중에 그가 세상을 뜨자 제자였던 유암 이강회가 문순득의 증언과 스승의 소록을 참고해 표해록을 다시 쓴다.

▶"정말 부끄러워 땀이 솟는다"

신안문화원의 '국역 유암총서'에 실린 '표해시말(漂海始末)'에서 문순득은 우이도를 떠나기전 들었던 외국인 표류기를 언급하고 있다. 바로 제주섬에 다다랐던 5명의 이방인을 말한다. 문순득은 이들이 필리핀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증거를 댄다.

첫째, 여송인들이 쓰는 언어가 제주에 표착했던 사람들이 썼던 말이다. 둘째, 그 사람들의 얼굴에 칠을 한 것 같다고 했는데 여송에는 간혹 얼굴에 칠을 한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셋째, 여송의 풍속은 귀인의 머리는 모두 뒤로 늘어뜨려 동자처럼 하고 검은 비단으로 얽어 묶는데 제주에 표류한 이들도 그랬다. 넷째, 머리털은 양털 같다고 했는데 얼굴이 검은 여송인의 그것과 닮았다. 다섯째. 해를 입은 까닭에 도망했다는 이야기가 당시의 일과 맞는게 그 증거다.

선비 정동유는 5명을 직접 만나 탐문해 그들의 이름을 우리말로 옮겨적는다. 22세의 분안시, 15세의 열리난두, 23세의 안드러수, 32세의 마리안두, 33세의 꺼이단우였다. 거기다 이들이 쓰는 103가지 단어를 한글로 써놓았다. 그래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종전에 타국 사람이 표류해오면 중국 연경(베이징)에 들여보내 본국으로 송치했던 관례에 따라 제주를 떠난다. 하지만 연경에서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보내줄 길이 없다"며 표류지 제주로 도로 돌려보낸다. 정동유는 말미에 "요사이 듣고 보니 두 사람은 죽고 세 사람은 아직 생존해있다"고 적었다. 조선과 중국이 이들의 국적을 알 수 없다며 서로 떠미는 사이, 그들은 물설고 낯설은 땅에서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문순득은 말했다. "내가 유구에 표류했을 때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을 위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데 하물며 내가 나그네로 떠돌기 삼년, 여러나라의 은혜를 입어 고국으로 살아돌아왔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제주에 있으니 안남·여송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부끄러워서 땀이 솟는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백금탁기자 gtbaik@hallailbo.co.kr

풍랑 때문일까, 해코지 때문일까

필리핀인 제주 표착 궁금증


여송 사람 다섯명이 제주섬에 표착했을때 역관은 그림을 그리고 갖은 사물을 이용해가며 가까스로 소통한다. 그 결과 그들이 본래 남방의 백성으로서 같은 배에 30인이 타고 장사하러 화물을 싣고 가던 중임을 알아냈다. 이들 다섯명은 작은 배에 타고 물을 길러 육지에 내려왔다가 큰 배가 사나운 풍랑 때문에 머물 수가 없어 자신들을 버리고 간 것이라 했다. 물론 역관이 미루어 짐작한 부분이 있긴 하다.

필리핀에 표류했던 문순득은 우연찮게도 이들과 한 배에 탔던 안남인 두명을 만난다. 귀환길 중국 광동에서다. 안남인의 구술은 제주에 표류했던 여송인의 말과 다르다. 안남인의 얘기다. "오문(奧門·마카오)을 내왕하는 여송인과 짝이 되어 장사를 하는데 30명이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 조선지방의 큰 섬(제주도)에 닿았다. 이때 다섯사람이 물을 길러 육지에 올라갔는데 섬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했다. 이에 급히 닻을 올려 일본 지방으로 몸을 피했는데 이 과정에서 모두 익사하고 우리 두 사람만 살아남아 일본인의 호송에 힘입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대정현에 표착한 필리핀 사람들의 어휘를 한글로 적었다. 하나는 운안, 둘은 너슈, 셋은 드레시, 넷은 과들우, 다섯은 싱쿠, 여섯은 서이시 하는 식이다. 현재 필리핀의 공통어인 따갈로그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발음이다. 문순득이 기록해놓은 여송어와도 차이를 보인다. 필리핀은 16~19세기에 이르는 300여년간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문순득과 마찬가지로 정동유도 5명이 나라를 찾지 못한 채 조선과 중국에서 떠돌다 죽어간 일에 가슴을 쳤다. 고상영의 안남 표류기를 '주영편'에 실었던 정동유는 "안남국왕이 제주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어 돈 600냥을 내어서 중국의 상선을 세내어 가지고 매우 애써서 실어보내고, 또 우리나라에 이문(移文)하였으며 그 회답문을 반드시 받아오라고 한 것을 보면 안남의 풍속이 인후한 것을 알기에 넉넉하다. 지금 청나라와 우리나라의 처사를 가지고 말한다면 부끄러운 점이 많다."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