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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강문규 칼럼]숙종임금과 제주의 재해

지식창고지기 2009. 8. 7. 14:59

[강문규 칼럼]숙종임금과 제주의 재해


입력날짜 : 2009. 08.04. 00:00:00

흔히 제주를 '삼다(三多)의 섬'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수재(水災)·한재(旱災)·풍재(風災)가 많아 삼재(三災)의 섬이라 불렀다. 해마다 흉년이 들면 기근이 일어나고, 설상가상으로 천연두나 호열자 같은 전염병이 제주섬을 휩쓸었다. 기댈 곳은 오로지 관아 밖에 없었다. 의녀 김만덕의 선행이 후세에도 칭송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조선조 숙종 37년(1711)부터 39년(1713)까지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큰 비로 평지가 하천으로 변하고, 폭풍우와 해일이 한데 겹쳐 가옥이 무너지는가 하면 우마 수 백필이 폐사하고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제주의 참혹한 사정을 전해 들은 임금은 "제주는 육지와 달라서 여기서 쌀을 보내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제주 백성도 나의 백성이니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묘당에서 구제방법을 여러 모로 궁리하여 곡식을 계속 보내도록 하라"고 했다. 그 후 수천석의 곡식이 제주에 내려 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40년(1716) 봄부터 전염병이 돌아 5000명이 죽어가자 임금은 다량의 약재를, 여름에는 잡곡 1만석을 보내기도 했다. 또 어사를 보내 백성들을 위로하고 과장(科場)을 설치해 인재를 뽑기도 했다. 43년(1717)에는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음에도 구휼미를 보내지 않음을 알고 "제주에 아직도 진곡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냐. 불쌍한 섬백성이 장차 죽게 된다면 내가 해마다 진휼한 뜻이 허사로 돌아간다. 경들은 나의 아픈 생각을 깨닫지 못하는구나"며 각 도에 엄명하여 황급히 보내도록 했다.

이러한 숙종임금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을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어찌 제주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1720년 숙종임금이 돌아가시자 박계곤 등 제주사람 35명은 흉년에 구해 준 은혜를 갚겠다며 임금의 능역(陵役)에 참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 비(妃)는 "선대왕이 너희 섬 백성들을 지극히 걱정하시더니 너희들이 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과 바다를 건너와 능소에 나가 흙을 지는 일에 이르렀으니 가상하고, 또한 비통하기 그지 없다"며 피륙과 쌀 등을 하사했다. 이 일은 영조도 기억하고 있었다. 제주에 큰 흉년이 들자 신하들에게 숙종 국장 때 제주 백성들이 능역에 참여하고 자전(숙종대비)께서 이들에게 쌀과 찬을 하사하는 것을 여막(廬幕)에서 지켜 보았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범인도 은혜를 입으면 감동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거늘 임금된 자가 받았으니 어찌하겠느냐"며 "제주 백성들에게 빨리 진곡을 보내 구휼하도록 하라"고 했다.(북제주군지; 2003)

이처럼 제주는 재해가 많은 땅이다. 이번에도 서귀포시 남원읍과 표선면지역에 돌풍이 불며 수십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태풍 '나리'에서 보듯이 재해의 발생빈도는 더 잦고, 위력은 더 욱 커질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태풍의 길목 또는 지구온난화의 첨단지역인 제주가 재난과 재해보상에 있어 타지역과 동일한 규정의 적용을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조선시대에도 간파했던 제주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이유다. 특별법에 의한 제도개선 역시 마찬가지다. 민생의 안전과 안정을 위한 '재해특별보상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먼저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제주도민들의 안정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길이다. 재난을 만났을 때 정부와 도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선현들은 우환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논 설 실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