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역사 - 나라, 헤이안시대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3:25

3. 나라 시대 (奈良 時代)

 

710년에, 조정은 중국의 당왕조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을 모델로 삼아, 나라에 헤에죠오교오(平城京)라는 도읍을 건설했다. 가로 세로로 넓은 도로를 만들고, 천황의 궁전, 귀족들의 저택, 절 등이 늘어서 있었다. 푸른 기와지붕에 빨간 기둥, 흰 벽의 당나라풍의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나라의 도읍지는 마치 아름다운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고 노래 불려졌다.

 

平城京은 약 70년간 수도로서 번창했는데, 이 동안을 나라시대라고한다. 나라시대는 大寶율령에 근거하여 천황에 의한 정치(율령정치)가 행해지고, 도읍지는 번창하고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다. 시장이 생겨나고, 708년에는 화폐도 사용되어졌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역, 병역때문에 가난에 허덕여야만 했다. 그중에는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리는 자도 생겨났다. 그래서 조정은 새로이 초지를 간척하는 자에게는 그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게 해 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유력한 귀족이나, 신사나 절, 지방호족 등이 앞을 다투어 대규모적인 간척사업을 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긴 사유지(=장원)는 그 후에도 점점 확장되어가서, 율령정치의 근본인 公地公民제도가 붕괴되어 버린다. 조정의 정치도 부패하여 넓은 토지를 가진 귀족이나 승려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다.

 

나라시대 중반, 흉작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귀족과 승려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심이 깊었던 쇼오무 천황(聖武天皇)은 부처의 힘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라에다 토오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고, 그 안에 본존으로 높이가 16m나 되는 금동대불을 만들었다. 토오다이지 바로 옆에 쇼오소오잉(正倉院)이 있는데, 이것은 쇼오무 천황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지금도 수많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인도, 페르샤등으로 부터 수입된 진귀한 공예품도 섞여 있다. 그 유물들이 1200년 뒤인 오늘날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쇼오소오잉이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막는 일본풍토에 적합한 목조 건축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천황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 수가 없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조정은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십수차례나 견당사를 파견, 당왕조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텐표오 문화(天平文化)라고 불려지는 이 시대의 문화는, 정치가 불교에 의한 진호국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문화가 고도의 발전을 보이고, 또한 문화전반에 걸쳐 당문화의 영향이 농후하다. 국가에 의한 당문화의 적극적인 섭취를 반영하여, 현란한 문화의 추진자는 귀족계급이었으며, 중앙편중의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万葉集』와 같이 각계 각층 사람들의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생겨났으며, 천황 가문의 유서 깊음과 그 권력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사편찬이 국가적 사업으로 거행된 것은 당나라에 대한 일본의 국가 의식의 발전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平城京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한 것이지만, 규모는 그보다 작은 동서 4.2km 남북 4.7km의 크기였다. 북쪽 중앙에 천황의 궁궐이 있고, 주작대로를 경계로 左京, 右京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동서남북으로 뻗어진 도로에 의해 구획되어지고 남북은 條, 동서는 坊으로 위치를 표시했기 때문에 이런 도시형태를 조방제라고 한다.

 

견당사 : 630년 제 1회 견당사가 파견된 이래 894년 스가와라노 미찌자네(管原道眞)의 건의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13회 파견되었다. 8세기에는 그 조직도 대규모이었으며, 견당사 이외에도 유학생, 유학승등이 동행하여, 국제적으로도 앞선 당나라의 정치제도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일본문화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다대하다고 할 수 있다.

 

 

4. 헤이안 시대 (平安 時代)

 

칸무(桓武)천황은 혼란한 정계의 기풍을 일신하고 율령정치를 쇄신하기 위해서 794년 헤이안쿄오(平安京=오늘날의 교오토)로 옮겼다. 이후 1192년 카마쿠라 막부가 성립되기까지 약 400년간을 헤이안시대라고 부른다.

 

헤이안 초기의 율령정치 쇄신과정에서 후지와라(藤原)씨가 정치적으로 대두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중추부를 장악하고 다른 유력씨족들을 제거하는 한편, 천황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셋쇼오(攝政), 칸빠쿠(閔白)직을 독점했다. 그 결과 천황을 대신하여 후지와라씨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고 소위 셋칸정치(攝閔政治)를 전개했다. 셋쇼오·칸빠쿠 둘 다 천황을 대신하여 정치를 집행하는 직무로서, 천황이 어릴 때는 셋쇼오, 천황이 성인이 되고 나면 간빠쿠가 정무를 담당했다.

 

후지와라씨들이 이 지위를 독점·세습화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는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독재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攝閔政治)의 전성기는 10세기말에서부터 11세기 초반에 걸친 후지와라 미찌나가(藤原道長)·요리미찌(賴通)시대였다. 중앙에서 후지와라씨들에 의한 셋칸정치가 확립되어간 반면, 지방에서는 정치나 치안의 기강이 흐려지고, 그러한 와중에 즈료오(受領)로 불리는 지방관리들이 사재를 축적, 경제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치가 천황중심의 율령정치에서 후지와라씨 중심의 귀족정치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공지공민제가 붕괴되고 토지의 사유화를 의미하는 장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그런 장원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은 물론 후지와라씨들이었다. 그 장원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은 셋칸정치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9·10세기에는 고대국가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앞시대와 마찬가지로 귀족문화이긴 하지만 종래의 唐風文化와는 달리, 당풍문화를 토대로 한 문화의 일본화가 진척되어 國風文化가 꽃을 피우게 된다. 국풍문화는 당풍문화를 일본적으로 소화시켜 생겨난 귀족문화로서, 그 특색은 수도인 쿄오토에 사는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하여 우미·화려하긴 하지만, 시야가 좁고 매우 감각적인 것이었다.

 

국풍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일본문학이었으며, 그 기초가 된 것은 바로 카나문자의 발명이었다. 카타카나는 한자의 획에서 생겨난 것으로, 주로 승려들 사이에서 발달했으며, 히라가나는 한자의 초서에서 발달한 것으로 처음에는 여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女手라고도 불렸다). 카나는 8세기말경부터 구체화되었지만, 이것에 의해 일본인들의 생활감정을 자유롭게, 또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궁중에 출사한 교양있는 여자들이 이 카나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모노가타리(物語=일종의 소설), 수필 등에서 걸작을 남기고 있고, 또 만요오슈(万葉集)이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던 와까(和歌)가 복권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문학 항목 참조)

 

헤이안 중기 이후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계급들이 쿄오토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새로운 계급층인 무사들이 세력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나 부농들이 자기의 토지를 지키고, 자기 영지내의 농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생겨난 계층이다. 이들 무사들은 유력한 호족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되어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였다.

 

11세기 중엽, 후지와라씨들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시라까와(白河)천황은 상황이 되어 원정정치를 펴면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 후 12세기 중엽 상황과 천황의 대립이 생기자 겐지는 상황측에서, 헤이지는 천황측에서 싸웠다.(호오겐·헤이지의 난) 무사들은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는 정치의 실권을 잡고, 1167년에 태정대신에까지 올라 平氏들의 권력은 극에 달했다. 平氏들의 권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까와법황(後白河法皇)은 겐지세력과 결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平氏들을 전멸시키고, 源氏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 참고 사이트: http://guidejap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