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역사 총괄 (2)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2:03

가마쿠라 시대

 

겐페이 전쟁을 그린 병풍

 

12세기 무렵부터 14세기 무렵까지를 가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가마쿠라라는 명칭은 간토 가마쿠라막부를 두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공가정권과 간토의 무가정권이 병립된 시기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주축으로한 가마쿠라 막부는 겐페이 전쟁으로 잘 알려진 지쇼·조에이의 난에서 승리하여 헤이씨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 과정에서 슈고, 지토 임명권을 가지게 되어 중앙의 조정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후 조큐의 난에서 천황가가 가마쿠라 막부에 패배한 후 공가 정권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미나모토 가문의 쇼군은 3대에서 단절되었고, 이후 쇼군은 천황가에서 취임하지만, 명목상일뿐 실권은 싯켄인 호조 가문이 장악하였다. 이를 싯켄 정치라고 한다.

13세기 중기부터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유통이 발달, 촌락의 형성, 지토들에 의한 장원·공령의 관리 등 사회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사회체제에 반발하는 무사와 농민집단인 악당과 자치권을 가진 총촌(惣村)이 생겨났다. 이 움직임은 13세기 후반 일어난 두 번의 원나라의 침략으로 더욱 가속화되고, 지지기반이었던 무사들이 막부를 이탈하게 되어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막부는 대응책으로 덕정령을 반포하였고, 막부의 실권은 싯켄 호조 가문내의 도쿠소의 무사들의 장악하였다. 또, 조큐의 난이후 황위계승문제에 본의 아니게 막부가 개입하였고, 불만을 품은 고다이고 천황도막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는 공가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동조하여 막부를 멸하였다.

문화에서는 운케이가이케이의 금강력사상 등 사실적 미술이 전개되었다. 또, 종교면에서도 가마쿠라 신불교가 성립되어 민간에 불교가 보급되었다.

 

남북조 시대

 

남조가 있었던 요시노 산

 

14세기경을 남북조 시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새로이 천황을 옹립하여 기존의 천황과 대립한 1336년부터 남조와 북조가 통합한 1392년까지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의 내란이다.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를 멸하고, 친정을 펼치지만, 이에 무신인 무사의 불만이 증폭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이반하였다. 그리고, 고다이고 천황을 요시노로 추방했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은 북조와 남조를 지지하는 파로 갈려 대립이 심화되었고, 그 뒤 남조는 북조에 통합되었다.

문화면에서는 신분질서를 경시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바사라가 유행하였다. 또, 렌카가 유행하였고 격문니조가와라 낙서 등에서 볼 수 있듯 문화의 서민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무로마치 시대

 

로쿠온지의 금각

 

14세기 무렵에서 16세기 무렵까지를 무로마치 시대라고 한다. 무로마치라고 불린 연유는 교토의 무로마치에 막부를 두었기 때문이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대항에 새로이 천황을 옹립해 북조를 열었으며 교토 무로마치에 막부를 열었다. 각 구니에 두었던 슈고에게 경제적 특권을 주어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또, 구니의 행정과 사법권 담당했던 고쿠가의 기능도 점차 슈고의 권한으로 흡수되었고, 슈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이를 슈고 영국제라고 부른다. 이렇게 구축된 지배체제를 무로마치 막부-슈고체제라고 한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북조를 통일하였고, 명나라와의 무역을 하여 명황제로부터 일본국왕에 책봉되었다. 또, 슈고 다이묘의 세력을 억제하는데 노력하였다. 하지만, 슈고 다이묘의 반발도 있어 막부와 슈고의 다툼이 많이 발생하였다. 15세기 중엽에 와서 쇼군의 후계문제로 촉발된 오닌의 난이 발생하여 막부의 힘은 약해져 갔고, 메이오 정변을 계기로 막부-슈고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전국의 하극상의 기조가 팽배해졌으며 슈고를 밀어내고 슈고다이 또는 지역호족인 고쿠진 등이 지역을 지배하는 센고쿠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 시대의 사회원칙은 자력구제였으며, 각계층 안에서 연대를 해 행동하였다. 즉 잇키가 발생하였고, 촌락에 있어서도 자치권을 가진 총촌(惣村)이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서일본에서는 교역이 활발하였고,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는 왜구가 출몰하였다. 문화면에서도 렌카사루가쿠, 다도무로마치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 문화는 선종의 영향을 받아 간소한 것이 특징이다.

 

센고쿠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무로마치 시대 중 15세기후기부터 16세기후기까지의 시기를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는 슈고슈고다이, 지역호족인 고쿠진 등의 출신들이 센고쿠 다이묘 거듭나 이 시대를 호령하게 된다. 센고쿠 다이묘는 중세적 지배체계를 점차 붕괴시키고, 분국법 등을 제정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들 다이묘는 영국 일원을 통일하여 자신의 영국을 지역국가로 발전시켰다. 이를 다이묘 영국제라고 한다. 이들 지역국가는 일본 각지에 병립하였고, 지역국가간에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무력으로 해결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 16세기 중반 등장한 오다 노부나가병농분리 등에 의한 부국강병책으로 급속히 지배지역을 넓혀갔다.

이 시대에 농업생산력은 향상되었으며, 지역국가내의 유통이 발달하였고, 각지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또, 유럽과의 교역이 시작되었고, 화승총그리스도 교 등이 전래되어 기존의 전술과 종교관념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점차 세력을 신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위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반목해온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하였다. 사실상 무로마치 시대는 끝이 나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거처를 기후 성에서 아즈치 성으로 옮겼으며 본격적인 천하통일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전일본 통일 사업은 오다 가문의 실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추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도호쿠규슈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였고, 천하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중세적 지배체계·지배세력을 배제·억제하는 데 노력하였고, 태합검지를 통하여 기존의 토지제도인 장원·공령제를 없앴다. 또, 전국이 통일되면서 정치와 경제는 안정되었고, 다이묘와 무사가 중심이 된 모모야마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러한 중 도요토미 히에요시는 영토확장에 꿈을 두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만, 전쟁기간 중 생을 마감하였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퇴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내의 실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악하였고,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한 반이에야스 세력과 이에야스 세력간의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승리하였고, 도요토미 가문의 점차 쇠퇴하였다.

 

에도 시대

 

요코하마의 미함대와 미군

 

1603년부터 1867년까지의 시기를 에도 시대라고 한다. 정이대장군직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막부를 열어 정권을 잡았다. 두 번의 오사카 전투에서 정적 도요토이 가문을 멸문한 이에야스는 금중병공가제법도무가제법도로 조정과 다이묘를 통제하였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때에 막부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참근교대란 제도를 통해 지방 다이묘세력을 약화시켰다. 시마바라의 난이후 막부는 그리스도 교의 탄압과 쇄국정책을 펴면서도 네델란드청나라와는 나가사키데지마에서 무역을 하였다. 또, 조선과는 조선통신사의 왕래 및 쓰시마 번을 통하여 무역을 하였으며, 류큐왕국에조치에서는 사쓰마 번마쓰마에 번을 통하여 무역을 하였다.

에도 중기에 일어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에도를 수복하기 위해 막부는 과다한 지출을 하였고, 재정이 악화되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때에는 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 상업의 발달과 사회의 안정을 배경으로 겐로쿠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또, 번교서당과 같은 데라코야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교호의 개혁으로 막부의 재정을 근실히 하였지만, 다시금 재정은 악화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간세이의 개혁, 미즈노 다다쿠니덴보의 개혁을 하여보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고, 점차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겐로쿠 문화와 같이 상공인이 중심이 된 가세이 문화가 꽃을 피웠고, 가부키, 하이카이, 우키요에 등이 유행하였다.

화폐상품 경제가 발달하자, 예부터 쌀을 기반으로 연공수입을 가졌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막부와 같이 번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슈 번사쓰마 번은 이 개혁이 성공하였고, 막부 말기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에도 말기 구미제국은 일본에 문호개방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유럽 여러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채결하게 된다. 이에 존왕양이 사상이 고추되어 갔고, 막부의 고위관료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단행하였고, 정권은 조정에 이양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부터 700년 가까이 이어온 무가 정권 시대는 막을 내렸다.

 

메이지 시대

 

일본 역사에서는 메이지 시대 이후부터 연호로 그 시대를 구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천황의 재위기간이 시대구분 기준이다.

 

 

메이지 연간(1868년 ~ 1912년)을 메이지 시대라고 한다. 대정봉환후 조정과 도막파의 여러 번들이 왕정복고보신 전쟁 등을 통해 구 막부세력을 축출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신정부에서는 천황이 대권을 가지며, 구미제국의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다. 폐번치현메이지 유신이라고 불리는 여러 개혁도 이 때 행해졌으며, 오키나와, 홋카이도, 쿠릴열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편입하여 일본국 영토를 확정했다. 그리고 1871년 일본 정부는 특명 전권대신인 이와쿠라 토모미를 단장으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성하여 정부의 젊은 고관들을 구미에 파견해 발전된 서구 사회를 배워오게 하였다.

문화면에서는 구미제국의 새로운 학문·기술·음식 등이 전래되었고, 서양의 문학 사조를 받아들여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개인주의적 소설과 문학이 등장하였다. 식생활에서도 일식뿐만 아니라 양식이 널리 퍼졌으며, 기존의 문화와 다른 이색문화가 전개되었다. 이를 문명개화라고 한다. 종교면에서는 종래의 신사불교가 혼재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켰으며, 이로 인해 불교탄압 등의 과격한 움직임도 일어났다.

신정부는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국회 설치, 헌법제정 등, 국가체제정비에 힘쓰는 한편, 산업화와 군사력강화를 국책으로 추진하여 근대국가로의 초석을 쌓았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을 통해 세계열강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국제적 지위 확보와 조약개정에 성공하였다. 또,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여 구미제국과 같은 식민지정책을 폈다.

 

다이쇼 시대

 

 

다이쇼 연간(1912년 ~ 1926년)을 다이쇼 시대라고 한다. 다이쇼 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대다. 이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데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다이쇼 시대 초기 비교적 개방적인 제2차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이 사퇴하고 번벌[3]세력에 기반을 둔 제3차 가쓰라 다로 내각이 들어서자, 이에 반발하여 오자키 유키오이누카이 쓰요시를 중심으로 한 제1차 호헌운동이 일어나 이를 저지하였다. 이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국제 사회에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전후 불황으로 도야마 현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고,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도 활발히 일어나 농촌에서는 소작쟁의가 일어났으며, 전국수평사가 조직되어 차별철폐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 소동의 영향으로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졌으며, 수평사운동의 영향으로 형평운동이 일어났다. 또, 정치에서는 정당내각이 본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제2차 호헌운동으로 국민에게는 보통선거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 무렵 러시아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사회운동을 경계하여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에 더해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 더더욱 일본 사회를 궁지로 몰았다.

문화에서는 인도주의 문학이 대두하였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종합잡지, 문학전집등이 대량 출판되었으며, 더욱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어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쇼와 시대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투하 후 히로시마 시
고도성장의 상징인 신간선

 

쇼와 연간(1926년 ~ 1989년)은 쇼와 시대라 한다. 쇼와 시대 초기 불경기에서 회복되지 않은 채로 금융공황을 맞이하였고, 더욱이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 사회는 더욱 불안해졌다. 구미제국들은 식민지를 포함한 블록경제를 구축하여 난황을 타계하였지만, 식민지가 열악한 일본은 할 수 없었다. 이에 파시즘이 대두되었고, 일본은 만주로 눈을 돌렸다. 일본군부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국제사회에서는 비난이 일어났다. 정치계일각에선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묵인되었다. 이후 군부와 마찰을 빚어온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이 해군장교에 암살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총리암살사건 이후에도 젊은 장교가 주축이 된 2·26 사건이 일어났고, 더 이상 정당내각을 유지 할 수 없었다. 이로써 정계는 군부가 장악하였고, 사회 전반에 걸쳐 군국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만주국 수립이후 전역은 확대되었고,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중국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미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삼국동맹을 맺게 된다. 이후 미국은 일본에 석유금수조치를 내렸고, 이에 대항하여 일본은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점차 전세는 일본에 불리하였고, 본토마져 위협받게 된다. 이후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 투하되었고, 쇼와 천황옥음방송을 통해 대내외에 항복을 알렸다. 패전 후에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점령하에, 일본 헌법이 제정되었고, 천황은 나라의 상징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적 존재이며, 국정관여가 금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하였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동서냉전하에 서방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정치에서는 자민당사회당의 양당 체제가 지속되었고, 경제에서는 고도성장을 통해 경제대국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석유파동 이후 일본의 경제는 안정성장기로 들어섰고, 일본의 산업은 중화학공업에서 자동차, 전기기기, 반도체로 산업구조가 전환되었으며, 서비스업을 비롯한 제3차산업이 크게 성장하였다. 쇼와 말기에는 엔고와 무역흑자를 배경으로 투기열이 과열되었고, 이로 인한 거품경제로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헤이세이 시대

 

자위대 해외파병에 사용된 수송기 C-130H
도쿄의 야경

 

헤이세이 연간(1989년 ~ )는 헤이세이 시대라고 한다. 쇼와 말기의 거품경제 붕괴로 인해 장기간 불경기에 고통 받았으며, 많은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시작하였다. 정치에서는 구조개혁 노선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걸프 전쟁 후 제정된 국제평화협력법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금기시 되었던 자위대의 해외파견이 실행되었다. 또, 2001년 일어난 미국9·11 테러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일본은 이를 지지하여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하였다.

정치적면에서는 일본국 헌법교육기본법의 개정을 논의하는 것 이외에도 우정민영화 등 구조개혁을 본격화 하였다. 하지만, 2007년 정권여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구조개혁 현안들에서의 여당의 입김은 힘을 잃게 되었다.

경제면에서는 거품경제의 붕괴이후 기업들의 자구책이 결실을 보아 2006년 호경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2007년부터 표면화된 세계금융위기 등으로 경기는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2008년 주가의 하락과 상장기업의 도산이 증가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취직을 하지 못한 청년층이 증가하였고, 불법체류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증가하였다. 일명 묻지마 범죄와 같은 흉악범죄가 다수 발생하는 등 사회불안이 가증되고 있다.

문화면에서는 축구야구 등에서 일본인 프로선수의 해외 이적이 두드러졌다. 또, 일본의 애니메이션만화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되었으며《오타쿠 문화》로 불리는 문화가 일본의 서브컬처로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