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역사 총괄 (3)

지식창고지기 2009. 5. 20. 22:04

시대구분

일본 역사에 있어서 시대구분에는 다양하여 정설이라고 딱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면서도 (원시),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라는 시대구분법이 역사연구에서 널리 받아 들려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각 시대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고대의 시작에 관해서는 고대국가의 형성시기를 둘러싼 견해차가 있어 3세기 설, 5세기 설, 7세기 설로 갈려있다. 연구자 사이에서는 칠오삼논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세에 관해서는 중세시대의 대표되는 사회경제체제인 장원·공령제가 시대의 지표로 되어, 중세의 시작은 장원·공령제 형성기인 11세기후반 ~ 12세기로 보았으며, 그 끝은 장원·공령제가 소멸한 16세기후반으로 태합검지가 시행되기까지로 보았다. 근세에 관해서는 태합검지를 전후로 시작되어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끝이난다. 근대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에도 시대 말기 ~ 메이지 유신기로 보았지만, 18세기 전반의 가내수공업의 발흥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더욱이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을 근대와 현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시대구분론은 발전단계사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 역사의 중층성·연속성에는 주의를 두지 않는데 그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시대를 구분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행하는 것에 초점을 둔〈시대이행론〉를 제기하는 연구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반에 잘 알려져 있는 시대구분은 주로 정치섹터에 초점을 두어 시대구분을 하였다. 이 시대구분은 명확한 구분기준을 가질 턱이 없고, 역사연구상 시대구분으로써는 적당치 않다. 단순히 편의상 사용되고 있는 것이 불과하다. 문헌사료 없이 고고학적 사료가 남아 있는 시대는 고고학상의 시대구분에 따라 구석기 시대,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고훈 시대로 구분되며, 문헌사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시대는 정치섹터에 초점을 두어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기 때문에 남북조 시대, 센고쿠 시대라는 구분을 더하였고, 이는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차용한 것이다. 에도 시대 다음은 본래〈도쿄 시대〉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되지만, 천황의 재위에 따라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라고 불리고 있다. 또, 홋카이도, 도호쿠 북부, 류큐 제도 등은 다른 시대구분으로 구분한다.

또, 문화면에 초점을 두어, 조몬 문화, 야요이 문화, 고훈 문화, 아스카 문화, 하쿠호 문화, 덴표 문화, 고닌·조간 문화, 국풍문화, 인세이키 문화, 가마쿠라 문화, 기타야마 문화, 히가시야마 문화, 모모야마 문화, 겐로쿠 문화, 가세이 문화, 메이지 문화, 대중문화 ~ 등으로 하는 구분도 있다.

역사인식·역사서술

일본에 있어서 근대적 역사사상의 도입은 19세기 후반의 메이지 유신이후의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역사인식 및 역사서술이 있었다.

고대

야마토 정권이 통일국가를 형성한 6세기에는 왜왕가의 계보를 기록한《제기》, 왜국의 신화를 기록한《구사》가 편찬되었어며, 7세기 전반에는 쇼토쿠 태자에 의한《천황기》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역사서술의 전통을 계승해 율령통일국가가 성립한 8세기 전반에는 일본 첫 정사(正史)인《일본서기》가 완성되었다.《일본서기》는 중국의 정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천황지배의 전통성을 강하게 피력했으며, 황위계승의 경위에 관한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집고가야 할 점은 중국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천황의 정통성〉,〈일본의 독자성〉주장은《일본서기》를 포함한 그 후의 정사《속일본기》,《일본후기》,《속일본후기》,《일본문덕천황실록》,《일본삼대실록》, 소위 육국사의 주요 주제가 되어 이후 에도 시대 말기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정사인 육국사 편찬은 찬국사소(撰国史所) 등으로 불린 기관을 중심으로 편찬사업을 하였다. 하지만,《일본삼대신록》에 이어 《신국사》편찬 중 사업이 중지되어 더 이상 정사의 편찬을 하지 못했고, 헤이안 중기이후 관인들이 전례를 참조하여 정무를 보다 신속히 처리하기위해 만든《유취국사》,《일본기략》,《백동초》와 그 밖의 각종 연대기를 편찬하였다. 이상의 역사서술은 모두 한문체로 편찬된 것이지만, 헤이안 후기가 되면 국풍의 영향으로 역사물, 군기물, 설화집이 한문체 보다 표현력이 풍부한 가나로 간행되었고, 종전의 정사적 역사관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더해 역사를 해석하였다. 대표적인 역사물로는《에이가 이야기》,《대경》,《증경》등이 있으며, 군기물로는《헤이케 이야기》,《태평기》등이 있고, 설화집으로《금석물어집》등이 있다. 이러한 서적들은 무사와 서민들에게도 역사인식을 심어주었다.

중세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가의 대두에 위기감을 느낀 공가계층은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를 대표하는 역사서가 지엔의《우관초》이다. 지엔은 말법사상과〈도리〉를 주제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무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자 이를 도리관념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 역사서가 처음으로 역사인식을 명확히 나타냈다는 견해도 있다. 중세에는 불교적 역사인식이 널려 퍼져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신관(神官)들 사이에서는《일본서기》의 신화를 강독하는 것이 성행했고, 신사를 중심으로 신화와 역사를 결합시키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중세 중기에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을 주제로 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신황정통기》가 간행되었다. 또, 중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연중행사유직고실[4] 등의 의례를 통해 역사를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기와 각종기록문서가 많이 작성되어왔다. 이 같은 영향으로 가마쿠라 막부정사인《오처경》은 일기체로 적혀있다.

근세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쇼군 가문과 다이묘 가문은 권력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교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역사의 편찬을 통해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대표적 역사서로는《무덕대성기》,《본조통감》,《대일본사》등이 있다. 유교는 본래 합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유교사상이 융성할 무렵에는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무렵 역사서로는 아라이 하쿠세키의《독사서론》,《고사통》등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실증적 역사연구는 18세기오규 소라이이토 도가이에 의한 정치제도사 연구로 이어졌고, 아울러 국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세의 합리적, 실증적 역사인식이 하나의 정점에 도달하는 데 이를 논한 인물이 도미나가 나가모토였다. 도미나가 나가모토는 불교, 유교, 신토라는 종교, 사상도 역사적으로 변화해 오고있고, 이를 절대시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관점에서 봐야 된다고 설파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일본의 역사연구가 근대역사학을 수용하기에 충분한 기반을 쌓았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에도 시대 후기에는 막번체제의 모순과 대외긴장의 고조 속에 서민들 사이에서도 역사의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고,《일본외사》,《황조사략》등 통속적인 역사서가 많이 출판되었다.

근대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기를 걸쳐 문명사 등 서구의 근대역사학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그 중 진보사관, 진화사관이 일본에 급속히 퍼졌다. 이는 종래의 일본에는 없는 새로운 역사관으로 역사 안에서 보편적 법칙성을 발견해내는 역사관이다. 이를 토대로 다구치 우키치의《일본개화소사》와 후쿠자와 유키치의《문명론의 개략》등이 저술되었다. 이는 일본사와 서양사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탈아론과 연결되었다.

한편, 메이지 정부의 입장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국가주의적 역사서술이 구축하였다. 대정봉환왕정복고를 정당화하는 역사관으로 다이카 개신, 겐무 신정, 메이지 유신이 가장 중요한 개혁으로 위치했으며, 이러한 국가주의적 역사관은 특히 역사교육현장에 적극 도입되었다. 이는 전시대의 국학과 존왕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그 뿌리 밑바닥에는《일본서기》로부터 이어온 일본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와 같이 메이지 시대 이후 역사인식·역사서술에는 두 조류가 있었다. 그 하나는 역사의 보편성을 찾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일본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888년 실정주의 사학의 시조 랑케의 제자에 해당하는 루드비히 리즈가 제국대학에 초빙되었다. 리즈는 엄격히 실증사학을 지도하였고, 소위 관학 아카데미가 형성되었지만, 사료고증을 너무 중시해 유감을 샀다. 메이지 말기에는 독일 역사학파의 영향으로 발전단계설이 대두되었고, 막스주의유물사관이 소개되었다.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면, 역사법칙성을 강하게 부정하는 역사이론이 소개되어, 역사철학으로의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는 사회경제사, 문화사, 사상사 등 폭넓은 분야로 관심이 퍼졌다. 이러한 역사학의 발전속에서 한편으로는 역사학과 국가주의적 역사관과의 충돌이 생겨났다. 역사학이 실증주의를 너무 중시하고 역사인식과 사학방법론을 경시한 것도 국가주의적 역사관의 대두를 허용한 한 원인이 되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 국수주의로 회기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관인 황국사관과 권선징악사관이 융성하게 된다.

현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역사의 독자성 주장은 크게 후퇴하였고, 역사의 보편성에 중점을 둔 사회과학적 입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실증주의사학과 유물사관사학이 대세를 이루었다. 국가주의적 역사관의 멍에로부터 벗어난 전후 사학은 중요한 실적을 많이 남겼지만, 실증주의에는 역사철학을 경시한다는 약점과 유물사관에는 교조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약점이 있다.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그런 한계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전후역사학에 대한 반성과 자기성찰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에는 점차 속도를 내어 종래에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민속학문화인류학 등의 성과를 역사학에 반영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연구의 결과, 인구에 회자되었던 많은 역사상을 크게 뒤엎는 성과가 다수 발표되었다. 아미노 요시히코 등이 대표로 거론된다. 반면, 일반인들 사이의 역사상과 근년의 연구 성과에는 큰 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있다.

다른 방면에서는 역사의 대중화가 진행되어 가이온지 조고로시바 료타로 등의 역사소설이 유행하였고, 사마대국 논쟁을 통해 역사 붐이 일어났다. 사마대국에 관해서는 학술적 신뢰성이 없는 설도 일정부분 널리 퍼졌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도 있다. 더욱이 전후 크게 퇴보한 일본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헤이세이 초기부터 자유주의사관으로 불리며 그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이를 역사학의 수준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역사에 대한 관심의 반영으로 인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