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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의 난과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하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1. 10:59

선덕여왕이 성립되기까지를 우선 간략하게 정리하여보면 진평왕은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용수전군은 이를 거부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억지로 용수를 천명공주의 남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명은 원래 용춘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한편 선덕이 성장하게 되자 진평왕은 선덕에게 마음이 더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명에게 동생인 선덕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 천명은 그 지위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출궁했다고 합니다.

 

용수가 먼저 죽게 되었는데 용수는 부인 천명과 아들 춘추를 용춘에게 맡겼습니다. 이 용춘은 한 때 선덕의 지아비가 된 적도 있었지만 아이가 없어 물러났다고 합니다. 그 후 용춘은 천명을 처로 삼아 살았다고 하는데요.

형사취수인 셈인데 천명으로서는 원래 좋아했던 사람과 결국엔 살게 된 것입니다.

 

비담의 난은 647년(선덕여왕 16년) 신라의 상대등 비담(毘曇)이 일으킨 반란이다.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경쟁했다. 그러다가 점차 세력이 밀리게 되자,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쳤으나 김유신이 10여 일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 반란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중고기(中古期:법흥왕~진덕여왕)에 들어가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사회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손자인 김춘추가야 멸망 이후 새로이 포섭된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없었는데,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비담의 난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갔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이 실시되었다. 이후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신라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신라 중대(中代)가 시작되었으며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라고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하여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편에 보면

 

선덕여왕 16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난을 일으키고 그해 정월 8일에 선덕여왕이 죽어 낭산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진덕여왕 원년(647년) 정월 17일에 진덕여왕이 반란의 무리 비담과 30인을 처형 했다는 기록이 진덕여왕 편에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죽음에 관한 더 이상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기록으로 보면 선덕여왕이 반란군에 의해 피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천광공편에 보면 선덕여왕이 몹시 아플 때 비담과 염장이 모반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도와 반란군을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은 선덕여왕이 반란군에 의한 피살이 아니라 숙환(와병)으로 죽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과정의 급박함과 비담의 난이 선덕여왕의 죽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등의 상황을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많은 학자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결정적 단서가 되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대체로 언급하지 않고 피해가는 대목이다. 그래서 반란시작과 선덕여왕의 죽음 그리고 진덕여왕의 왕위계승, 그리고 반란종결까지의 시간적 순서와 상황을 재현해 보면

 

선덕여왕이 왕의 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환이 위독하자 후계문제가 대두되었고 화백회의에서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이에 여성왕의 취임을 반대하던 상대등 비담과 그의 무리 염장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과 정부군이 명활성과 월성에서 10여일 대치한 상황에 선덕여왕이 병으로 결국 사망하자 진덕여왕은 왕으로서 유신과 천광공 알찬공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제압하고 비담과 그 무리들을 17일에 처형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에 보면

월성에 별이 떨어지니 “별이 떨어진 자리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됨으로 여왕이 지게 될 것이다“ 라고 비담이 신하에게 말하면서 반란군의 사기를 높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실상은 월성에 떨어진 별이 유성(流星)일 수도 있지만 선덕여왕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반란의 우두머리 비담은 상대등(지금의 총리)으로 반란의 명분을 "여성왕이 정치를 잘 못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왕위계승권을 놓고 벌인 권력 싸움에서 미실파가 왕당파와 가야파의 연합에 패하여 진덕여왕이 선출되자 미실파가 위기를 느끼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 비담의 난 실패이후 미실파는 권력에서 축출되고 신라의 권력은 가야파에게로 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죽음은 비담의 난에 의한 피살 보다는 숙환으로 병사(病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라고 다음 지식에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