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誕生)과 일화(逸話)
목조대왕은 전주에서 탄강하였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이르기를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의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목조대왕은 <완산지(完山誌)>에 의하면 전주에 살던 유년 시절,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인 장군수(將軍樹)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과 진법(陣法)을 익혔다. 전주향교 뒤에 있는 은행나무터가 바로 그것이다.
목조대왕은 또 어렸을 때에 발리산 아래에서 폭풍을 만나 바위 밑으로 피하자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목조대왕은 거기에 모인 여러 아이들에게 이르기를 “호랑이는 단 한 사람만 해칠 것이니, 모두가 자기 옷을 벗어 던져 봐서 옷을 받아 물은 아이만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러면 네가 먼져 던져 봐라.” 하였다. 목조대왕은 그 말대로 제일 먼저 옷을 벗어 던지니, 호랑이가 덥석 받아 물었다. 이 때 여러 아이들은 목조대왕더러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굴에서 나오자 호랑이는 달아나고 동시에 바위 벼랑이 갑자기 무너졌다. 그래서 여러 아이들은 화를 입게 되었으나 목조대왕만이 살아 남은 것이다. 오늘날 전주 발리산 남쪽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정자 한벽당(寒碧堂 : 梧木臺 동쪽 1㎞)에서 400m쯤 떨어진 지점에 굴러 내린 바윗돌이 강물 가운데서 완연히 보인다. 이 돌을 호운석(虎隕石)이라 한다.
목조대왕은 춘추 25세쯤에 전주의 주관(州官)의 시기심으로 어수선한 한두 해를 넘기다가 강원도 삼척으로 가기는 27세쯤이었다.
그런데 삼척으로 간 그 1년 뒤가 고려 고종 18년이라는 문헌에 따라, 목조대왕이 삼척으로 이주하기는 1230년(고려 고종 17)이요, 목조대왕의 전주 탄강 연도는 줄잡아 1204년(고려 신종 7)쯤이다.
목조대왕은 1204년(고려 신종 7) 전후에 전주에서 탄강하니, 춘추 25세쯤의 1228년(고려 고종 15) 전후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는 전성기(全盛期) 약 100년간을 넘기자 바로 상극기(相剋期)와 변태기(變態期)로 접어든다.
목조대왕이 전주에 살던 시대는 무신 정권이 한창이던 때요, 관민(官民)이 서로 반목하던 때이었다. 이 때 전주의 호족 집안인 목조대왕은 전주 주관(州官)의 시기심으로 시비가 벌어지자 고려의 무신 집권 시대 특유의 위화상(危禍相)은 마침내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 등이 한통속이 되어 목조대왕과 대결하기 위하여 병력을 동원하려 했다. 그러므로 장차 맹수와도 같은 몽고병이 쳐들어오면 목조대왕의 일족은 전주산성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실로 이것은 전주의 구래세력(舊來勢力)이 한 신흥세력(新興勢力)에게 밀려 나가야만 하는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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