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 이주(德源 移住)
그런데 목조대왕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지 수년만에 다시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에 가까운 덕원(德源)으로 이주해야 했다.
왜냐 하면, 1235년(고려 고종 22)의 제3차 몽고군 침입의 행패가 가라앉을 무렵인 그 이듬해에 공교롭게도 전일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의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강릉과 삼척 사이는 해륙 교통이 편리한 가까운 지리인지라, 목조대왕은 장차 묵은 혐의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족을 이끌고 이미 마련해 둔 선단 15척으로 개척돼 있는 항로를 따라 손쉽게 동북면의 덕원부(德源府) 용주리(湧珠里 : 赤田社)로 이주하니, 때는 1236년(고려 고종 23)이었다.
이 때 전주에서 장군공과 목조대왕을 따라 삼척군으로 이동해 온 혈족과 외족 170여 호도 역시 목조대왕을 따라 이주해 왔는데, 이 사실은 또 한편으로 일족의 선단이 묵호만(墨湖灣)에서 모두 영흥만(永興灣)으로 대이동해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삼척 왕래(三陟 往來)
1239년(고려 고종 26)에 몽고군은 고려에서 철병(撤兵)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제4차의 몽고군 침입인 1254년(고려 고종 41)에 이르는 약 15년 간은 동해안에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동안에 목조대왕은 덕원에서 삼척을 자주 왕래한 것으로 살펴지는데, 그것은 이색(李穡 : 1328∼1396)의 <환조구비문(桓祖舊碑文)>에서도 수긍 가는 것이 있다.
목조대왕은 덕원에서 삼척을 왕래하며 활기리 노동(蘆洞)의 선고묘(先考墓)와 동산리의 선비묘를 성묘함 동시에 과거에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삼화사에 참례하였는데, 풍부한 학식의 목조대왕은 삼화사에 저 유명한 <금은수사경(金銀手寫經)>을 남겨 놓은 것이다.
고원 방어(高原 防禦)
목조대왕은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하여 온 지 10여 년 후인 1248년(고려 고종 35)∼1253(고려 고종 40) 사이에, 고려는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서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쌍성(雙城 : 永興 · 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이 당시 영흥 북쪽의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으로서 원나라의 개원로(開院路 : 지금의 吉林省 · 遼寧省 · 咸鏡道 등) 정부에 속해 있었다.
개원로의 산길대왕(散吉大王)은 쌍성(現 永興)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철령(鐵嶺 : 함경도와 강원도의 접경)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대왕에게 원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목조대왕의 한 수비군으로서 원나라의 대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마치 당랑거철(螳螂拒轍) 격인지라, 목조대왕은 마지 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1천여 호란 이보다 앞서 홍복원(洪福源 : 1206∼1258)의 평양 반란 때 평양 동쪽인 동양분지(東陽盆地)까지 밀려나온 평양사람들이다. 이들은 차츰 목조대왕의 위세와 명망을 듣고 동쪽으로 산맥 하나를 넘고 목조대왕의 행정 구역인 덕원으로 모여든 사람들이다.
이 때 적장 산길대왕은 목조대왕에게 심회를 털어 놓고 가까이 오면서 옥배(玉杯)를 선사하였고, 목조대왕도 혈족의 딸을 산길대왕의 아내로 삼게 한 인연으로 목조대왕과 산길대왕과는 물망지맹(勿忘之盟)을 서약한 친근한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관심 사 > 잡다한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조대왕 (0) | 2009.10.29 |
---|---|
목조대왕 - 오동 이주, 오동 이주 원인, 오동 행적 (0) | 2009.10.29 |
목조대왕 - 전주 퇴거(全州 退去)의 원인, 삼척 이주(三陟 移住) (0) | 2009.10.29 |
목조대왕 - 탄생(誕生)과 일화(逸話) (0) | 2009.10.29 |
전주 이씨 - 선원이란 (0) | 2009.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