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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대왕 - 전주 퇴거(全州 退去)의 원인, 삼척 이주(三陟 移住)

지식창고지기 2009. 10. 29. 12:01

전주 퇴거(全州 退去)의 원인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게 된 목조대왕은 예기치 않던 하나의 시련에 봉착하였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당시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주관과 안렴사는 목조대왕에게 관의 명을 거절했다는 혐의를 씌워, 목조대왕 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보내기로 책동하였다. 이것이 목조대왕 일족 전주 퇴거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시조 사공공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전주의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에서 살다가, 17세손 장군공과 18세손 목조대왕의 세대에 이르러 일족은 전주를 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척 이주(三陟 移住)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리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려는 목조대왕은 장군공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 · 괴산(槐山) · 제천(堤川) · 정선(旌善) 등의 직선 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이 때 장군공과 목조대왕에 따르기를 원하는 혈족과 외족은 170여 호나 되었다. 대이동한 일족은 삼척군 내의 삼화사(三和寺 : 정선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계곡을 지나면 있으며, 삼척군 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동쪽 25리에 북평이 있고, 북쪽 30리에 묵호가, 서남쪽 10리에 頭陀山城이 있다)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대이동이 있자,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1231년(고려 고종 18)에 제1차 몽고병의 침입이 있었고, 같은 해에 목조대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장군공 묘는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1232년(고려 고종 19)엔 제2차 몽고병 침입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목조대왕은 삼화사에 열심히 참례(參禮)하였으며, 또 일족의 일부는 묵호만(墨湖灣)으로 이동해 가서 선박 15척을 만들었다.

 진실로 성품이 호방하고 사방을 경영할 뜻이 있는 목조대왕은 과연 선견지명이 적중한 것이다. 전주에서 목조대왕의 일족이 무리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던들 일족의 화(禍)는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3년 후인 1235년(고려 고종 22)에 제3차로 몽고병이 침입하였는데, 이 때의 몽고병은 실로 전국 8도를 샅샅이 누비며 야만적인 행패를 다하였다.

 몽고병이 동해안에서 행패를 부릴 때 목조대왕은 일족을 이끌고 삼화사의 서남쪽 골짜기 깊은 곳인 두타산(頭陀山)의 중턱인 두타산성으로 이동하여 피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