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간계의 여걸로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측전무후(聖神皇帝)

지식창고지기 2009. 11. 6. 19:36

간계의 여걸로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측전무후(聖神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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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唐)나라 제3대 왕 고종(高宗)의 황후. 성은 무(武), 본명은 조(照). 중국의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690∼705) 동안 전국을 지배하였다. 빼어난 미모로 14살 때 제2대 태종(太宗)의 후궁이 되었고, 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고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그 후 간계를 써서 황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후가 되어 황태자 충(忠)을 폐위시켰다. 683년 고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스스로 정무를 관장,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천후(天后)라 칭하였다.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예종(叡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황족을 탄압하였으며,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적인걸(狄仁傑)·위원충(魏元忠) 등 명신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악랄한 책략과 가혹한 탄압 정치를 하였고, 요승 회의(懷義) 및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과 추문을 남기는 등 많은 비난을 받았다. 705년 정변으로 중종이 복위되고 당나라가 재흥된 얼마 뒤 병사하였다.

 

성신황제(聖神皇帝) 측천무후, 즉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이다. 무측천은 황제에 등극한 후에 이름을 '조(明 아래에 空이 있는 글자. 무측천이 새로 만든 글자임)'로 고쳤다.

 

측천무후를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칙천무후'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즉천무후'라 하기도 한다. 이는 한자의 독음으로 빚어진 문제인데, 우리 나라에서 편찬된 자전에서 '則'자의 표준음을 '칙(법칙, 본받다)'과 '즉(곧)'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 '측천무후'와 '칙천무후', '즉천무후'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일까?
 
 
먼저 '則'의 표준음이 '칙'과 '즉'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법칙, 본받다'는 뜻일 경우 본음은 '측'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어의 표준음을 정할 때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본음을 표준음으로 삼았지만, 때에 따라서 속음이 본음 보다 더 널리 사용되는 경우에는 속음을 표준음으로 삼기도 하였다. 따라서 '則'의 경우 '법칙, 본받다'는 뜻일 때 본음은 '측'이지만 속음인 '칙'이 더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표준음을 '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측천무후'와 '칙천무후'는 하나는 본음대로 읽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음대로 읽은 것이니 둘 다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즉천무후'는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다. '則天'을 '즉천'이라 읽을 경우 그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오래 전부터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측천무후'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624년(당 고조 무덕<武德> 7년) 1월 23일 무측천은 수도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적은 병주(幷州) 문수(文水: 지금의 산서성 문수)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武士확, 확=耕의 왼쪽 부수+穫의 오른쪽 방)은 수(隋) 양제(煬帝) 때 목재상이었는데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그는 목재 장사를 하면서 권문세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 하급 군관으로 들어갔다.

 

617년 당 고조 이연(李連)이 거병을 하자 무측천의 아버지는 군수관(보급물자 담당장교)의 신분으로 이연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연은 장안을 점령한 후에 그러한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임명하고 태원군공(太原郡公)에 봉했다. 이로써 그는 14명의 개국공신 행열에 들어가 당왕조의 신흥 귀족이 되었다.

 

620년 무측천의 아버지는 본처가 병으로 사망하자 수왕조 때의 권세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후 그들은 세 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 중 두번째 딸이 바로 무측천이다.

 

무측천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담이 컸다. 일찍이 무측천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무측천은 13~14세 때 이미 많은 서적을 박람하여 견식을 넓히고 시사(詩詞)의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636년(당 태종 정관<貞觀> 10년)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태종은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무측천이 황궁에 들어온 후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당시 그녀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한다.

 

그녀가 갓 황궁에 들어온 어느날 태종은 후궁들을 데리고 성질이 포악하여 '사자총(獅子骢)'이란 이름을 가진 사나운 말을 보러 갔다. 태종은 사자총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들 중에서 저 말을 제압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겠는가?"

 

후궁들은 아무도 감히 나서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지만 무측천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에게 쇠채찍과 철퇴·비수만 주시면 됩니다. 먼저 저 말이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계속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실로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이러한 거친 성격을 가진 여자를 그 누가 쉽게 좋아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무측천은 황궁에 들어간지 12년이 지나도록 태종을 위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생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인의 직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무측천이었지만 오히려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 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이치가 태자 시절에 무측천과 어느 정도 깊은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흔히 세간에 전해오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허구화 된 소설일 뿐이다.

 

649년(정관 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 이듬해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측천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무측천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와 후궁 소숙비(蕭淑妃)의 사랑 다툼이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라이벌이었던 소숙비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그러한 고종의 마음을 소숙비에게서 떼어 놓기 위하여 고종에게 무측천의 입궁을 적극 부추켰던 것이다.

 

실로 고양이를 잡기 위해 범을 데리고 온 셈이 되었다. 황후 왕씨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간 무측천은 정성을 다해 황후 왕씨를 모셨으며 고종은 그러한 무측천을 더욱 좋아했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동시에 받으면서 무측천의 품계도 정이품 소의(昭儀)까지 올라갔다. 이로써 그녀는 9명의 빈(嬪)들 중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그녀의 위에는 황후와 4명의 비(妃)밖에 없었다.

 

무측천이 다시 황궁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28세였다. 보통 그 나이의 여자라면 열 몇 살의 젊고 싱싱한 다른 후궁들에 비해 신선미가 다소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고종의 마음을 자기에게 잡아두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고종에게는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뒤의 6명(4남 2녀)이 모두 무측천의 소생인 것을 보면 당시 무칙천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던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격적으로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밑에 있지 못하였던 무측천의 최종 목표는 황후였다. 무측천은 자신의 위치가 탄탄해진 후에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갖은 방법으로 환관과 궁녀들을 구슬리면서 이용하였다. 특히 황후나 소숙비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들에게 황후와 소숙비의 행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무측천은 일차적으로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찍어냈으며, 고종이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 후에는 곧바로 황후 왕씨에게 마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무측천은 둘째 아이로 아주 귀여운 딸을 낳았다. 자녀가 없었던 황후 왕씨는 자주 찾아와서 이 딸애를 데리고 놀았는데, 고종이 올 때 쯤이면 분위기를 파악하고 먼저 나가곤 했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를 제거하는데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무측천은 황후 왕씨가 딸애를 보러 왔다가 먼저 나간 뒤에 자기의 딸애를 목졸라 죽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때 고종이 들어오자 그녀는 웃으면서 고종을 맞이하였고, 잠시 후 고종이 이불을 젖혀보니 이미 딸애는 죽어 있었다. 깜짝 놀란 고종은 조금전에 누가 이 방에 왔다 갔는지 물었다. 그러자 무측천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조금전에 이 방에 왔다 간 사람은 황후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고종은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褚遂良) 등과 같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후 왕씨를 폐위하기로 결심하였다.

 

654년 겨울(고종 영휘<永徽> 5년 10월 13일)에 고종은 마침내 무측천을 지지하던 이의부(李義府)와 허경종(許敬宗)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폐서인 시킨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부터 6일 후인 10월 19일 무측천은 공식적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이렇게 하여 황후가 된 무측천은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그 두 사람에게 각각 곤장 백대씩을 친 다음 잔인하게도 두 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항아리 속에 넣어두고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