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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을 ‘근자감’ 시킬 ‘깜놀’ 한글

지식창고지기 2009. 12. 26. 11:22

세종대왕을 ‘근자감’ 시킬 ‘깜놀’ 한글

시사IN | 최내현 | 입력 2009.12.26 09:13 |


'찬바람 들어오니 문 꼭 닫아주세여~!' 3~4년 전, 회사 앞 분식집에 드나들 때 보던 안내문이다. 당시에는 '했어여' '주세여' 등 '요'를 '여'로 바꿔 쓰는 게 유행이었다. 자나깨나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근엄하신 분들은 한글 파괴 현상이 심각하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잘못된 표기법을 배운다, 심지어 대학생 리포트나 입사 서류 같은 문서에도 잘못된 '여' 표기법을 쓰는 사례가 속출한다며 염려하셨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지난 지금, '여' 표기법은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고 있다.

왜 그럴까? 갑자기 올바른 표기법에 대한 사회적 각성이 일어나서? 물론 그럴 리 없다. 답은 '아무나 다 써댔기 때문'이다. '요'를 '여'로 바꿔 쓰는 사람들은 표준어나 맞춤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글자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미묘한 뉘앙스, 즉 살짝 귀여우면서도 가볍게 애교를 풍기는 느낌을 표기하기 위한 나름의 자기 표현이었다. 그러나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런 표기법이 점차 널리 퍼져 30~40대 아저씨들까지 무분별하게 써대자, 어느 날부터인가 '여'는 유행에 뒤떨어지고 촌스러운 표기로 인식되어 사라져버렸다.

'안냐세요' '방가방가' '즐' 등도 마찬가지 길을 걷고 있다. 머리가 어지러운 '외계어'도 있었다. 'ㄴㄱㄴ-IIㄱr 믇흔 샹괂ØIㆅFⅲ'(번역 : 너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 같은 외계어가 세종대왕이 만드신 소중한 한글을 파괴한다며 언론에서 근심 어린 시선을 보냈던 게 겨우 몇 년 전이다. 하지만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외계어 때문에 자라나는 어린이가 한국어 습득에 문제를 보였다는 사례는 아직 듣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표준어나 맞춤법을 몰라서 저렇게 괴상망측하게 쓴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나타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행어를 커버하는 한글의 힘






'여'나 '외계어'와 달리, 이른바 '한글 파괴' 중에서 이미 제도권으로 진입했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 있다. '퓨처리즘의 필수 요소인 하이테크 컬러 콘셉트와 캐주얼한 무드로 데님 룩이 매치되는 크로스오버를 선사' '섬세한 브리티시 감각의 캐릭터 프레스티지 여성 캐주얼 브랜드' '환상적인 컬러 하모니를 통해 럭셔리하면서도 심플한 미니멀리즘을 추구'. 패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이러한 언어 사용은 우리말이 가진 단어와 어감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다. 즉 모든 사람이 '요'가 아닌 '여'를 쓰는 바람에 '여'가 표준어가 되어버린다면, 일부 사람들은 차별화를 위해 또 다른 표기법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말이다.

최근에는 이런 '맞춤법 일부러 틀리게 쓰기'보다는 줄임말이 유행한다.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고터(고속 터미널), 버카(버스 카드), 여병추(여기 병신 추가), 깜놀(깜짝 놀라다) 따위 수많은 표현이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최근 한 신문에서, 이런 '언어 파괴' 현상을 여전히 걱정하는 칼럼을 보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맞춤법 틀리는 사람과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국어의 올바른 사용을 지극히 옹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창조적 사용, 실험적 시도도 지지한다. 국어를 틀리게 쓰는 것과 다르게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언어 파괴' 때문에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통탄하실 거라고? 글쎄, 한글이 이런 표현들까지도 '커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덤에서 남몰래 뿌듯해하고 계시지 않을까?

최내현 (출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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